중부광역신문 시 당선작 / 이끼의 날들
이승애
흩어진 뼈를 일으키는 건 습기입니다 수억 년 전 물에서 태어나
기댈 곳 찾아 뭍으로 온 우리는 태초의 냄새를 기억합니다
음지는 우리의 몫이지요
음습한 골목길, 물에 젖은 하루가 절뚝이며 지나갑니다
언젠가 불렀던 곡조는 밟히고 또 밟혀도 살아납니다 노래가 아닌
그 한 소절을 흘리며 골목 끄트머리로 사라질 때 멀리서 바라본
혼자만의 은밀한 기억을 녹이면 어둡고 축축한 그늘 맛이 납니다
막막함에도 내성이 생기는 걸까요
빛은 어차피 우리의 핏줄이 아니기에
더는 숨길 수 없는 조짐이 파랗게 피어오르면 하나가 됩니다
눅눅하고 미끄러운 예감으로 같은 종족을 알아봅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분노는, 짓밟는 발목을 뿌리치거나 썩은 나무나
그늘진 바위를 덮기도 하지요 이때 우리의 피는 온통 뜨거운 녹색입니다
한 사내가 끊어진 노래를 기타 하나에 담아두고 뒷것이 되었지요
잎과 줄기 구분 없이 바닥이나 틈을 붙잡고 납작한 숨을 쉽니다 피가
마르면, 끝내 사라질지라도
당선 소감 / 이승애
해변으로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보았습니다.
물결의 등을 잇대어 밀어붙이는 물결로 바다는 쉬지 않고 출렁이고 한사코 달려온 파도는 하얗게 물거품을 쏟아내며 모래톱에 엎어졌습니다.
거대한 바다를 움직이는 저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작은 물결이 바람을 타고 진폭을 증가시켜 큰 파도를 만들며 바다를 끊임없이 가동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물의 표면을 스치는 바람의 동력으로 바다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저 하나의 큰 호흡이 물고기를 키우고 지구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을.
바다의 힘은 꾸준함이었습니다. 시가 보이지 않을 때 그만 멈추고 싶었습니다.
이 지루한 게임에서 지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파도를 생각했습니다. 끝까지 가보는 것 도착지점이 어디인지 나를 밀고 가보는 것. 그 터무니없는 결심이 앞장섰습니다.
뜻밖의 당선 소식에 한동안 가라앉았던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기회를 주신 중부광역신문사와 설렘을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응원을 보내준 선생님과 문우들, 소중한 가족들, 그리고 여러분께 꾸준함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심사평
‘시는 고백에서 시작한다’는 말이 있듯이, 시를 쓰는 것은 개인적인 체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신변잡기적 고백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물과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인 현상을 주시하며 확장해야 한다. 따라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 나서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탈출구를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시인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독자들을 위로하며 삶의 빛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시인으로서의 사명과 책무 중 하나다.
원고 뭉치를 받으면서 올해는 어느 해 보다 예사롭지 않을 것 같다는 감이 들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작품 수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한 편 기대감과 반가움이 수반되었다. 역시 첫 대면한 응모작부터 침을 몇 번인가 삼켜야 했다. 그만큼 수작도 많았다. 대체적으로 선이 굵은 형상화와 이미지가 날카롭게 살아있는 시들이 많았다. 반면 압축의 미가 사라진, 마치 집을 나간 시가 숲을 헤매는 듯한 시들도 상당수 보여 이것이 요즈음의 트렌드인가 싶은 정도로 의구심을 품게 했다. 그러나 아직은 이러한 시적 형식은 시기상조가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삼고초려를 하듯 되 읽고 반복된 심사를 하며 고민 끝에 권서연의 ‘지브라 크로싱’, 이희경의 ‘해바라기’, 이승애의 ‘이끼의 날들’이 최종심에 올랐다.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도 흠이 없을 수작들이나 ‘지브라 크로싱’은 높은 문장력에도 너무 강한 디테일이 오히려 본연의 맛을 반감시키고 말았다. 또한 출품한 그 외의 작품들과의 큰 편차를 보여 아쉬움이 남았다. ‘해바라기’란 시 역시 이미지 디테일은 좋았으나 아직은 물이 끓기 전의 온도 같은 맛을 보여주었다. 다만 일정 수준에 오른 시적 표현은 추후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반면 ‘이끼의 날들’은 시의 주제를 향해가는 언어적 의지의 구사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현실에 반향하는 내면의 울림과 어찌 보면 세상이 무심히 흘려버릴 사소한 기미조차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그러쥐고 나온 자연스러운 언어 감각과 섬세한 묘사는 시의 완성도를 이루는데 성공하였다. ‘이끼’라는 작은 소재에서 세상의 음지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아픔을 읽어내는 예리한 통찰력이 돋보였다. ‘태초의 냄새’ ‘축축한 그늘 맛’ ‘미끄러운 예감’ ‘ 뜨거운 녹색’ ‘납작한 숨’으로 이어지는 감각적인 표현도 오랜 숙련 기간을 방증하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에 띄지 않는 세계에 살고 있을지라도, 본성의 힘은 약한 것이 오히려 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역설의 세상도 그려낸 마치 푹 고아 낸 사골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이끼의 날들’, ‘해바라기’ 두 작품은 뛰어난 형상화로 현대시의 든든한 시의 기틀을 이룬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되지만 깊이 들어가 시의 내면을 보면 비중의 차이를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당선 시 이승애 시인의 ‘이끼의 날들’은 몸성으로 이룬 형상화로 생생한 시의 맛을 느낄 수 있어 시선을 끌었다. 이끼라는 평범한 소재로 자신의 특별한 감정을 놓치지 않아 글을 끌고 나기는 힘이 있는 시다. 소외되고 짓밟히기 쉬운 서민의 애환의 삶이 잘 반영된 면도 눈에 띄었다. 당선시 ‘이끼의 날들’에서 2연 한 연을 다 차지한 ‘음지는 우리의 몫이지요’란 간결한 시구가 압권이었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올렸다. 당선자에게 건필을 기대하며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전한다.
결선에서 눈에 들어 오는 시가 몇 편 더 있다. 이미경의 ‘벚나무가 보이는 중환자실’, 최인걸의 ‘그날 밤’, 민은숙의 ‘성인여드름’, 서상규의 ‘감자에게, 감사로’, 김창식의 ‘가을을 깁는다’가 여운을 남기는 시였다. 당선된 이승애 시인과 우수상 수상자인 이희경시인 등외로 밀린 모든 분들의 강건과 문운을 기대한다.
《본심심사위원》 도종환 시인, 성낙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