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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 해방정국
☞ 2009. 6월 26일은 김구 선생 60주기(週忌)이며, 7월11일은 선생의 탄생일이다
제헌국회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 박사
◉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덮힌 광야를 지날 때에는/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 발자국은/ 마침내 뒷사람들의 길이 되리니) 서산대사의 이 禪詩를 백범은 즐겨 썼다. "38선을 베고 죽을 지언정 단독 정부 수립은 반대한다"고 외치며 남북 협상을 추진했다. 남북한이 공동으로 추도할 인물이 있다는 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다행한 일이다.
1. 왕족과 서민 의식
이승만 박사*1)는 조선 태종 장남 양녕대군 18대손으로 왕족의 후예, 6대 독자, 증조부때 황해도 평산군으로 낙향했다. 호는 우남(雩南).
김구 선생은 황해도 해주 출신이고, 방조(傍祖 : 곁가지 조상)인 인조반정 공신 김자점이 역모로 처단된 뒤 멸문이 되어, 김구의 11대조가 숨어서 서민이 되었다. 1945년 환국 당시 이승만은 70세, 김구는 69세였다.
* 1) 이승만 : -1904.12. 30세에 도미 조지워싱턴대에 문학과 졸(1907). 하버드대 문학석사(1908) 프린스턴대 철학박사 학위(1910, 미국영향 하의 영세중립론)를 획득하고, 귀국하여 경성기독교 청년회 총무(1910.10), 저서 <<독립정신>> 미국에서 간행. -1912. 도미하여, 하와이에 국민군단(독립군 기지) 건설(1914), 박용만의 도움을 많이 받음. 박용만이 창설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재무부정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이 실권을 장악함(1915), 한인기독교회를 설립(1918)하여, 정치활동의 기반으로 삼음. 상해도착(1921) 5개월 정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대통령 재임. -임정요인들과 갈등끝에, 하와이로 돌아가서는 자금을 보내지 않았고,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광복후 제헌국회 의장과 초대․2대․3대․4대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장기집권을 위해 수차례 무리수를 두었고, 제4대 정부통령선거에서 집권당 자유당의 부정선거로 4.․19학생의거가 일어나자, 자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65 7월 19일 하와에서 서거하였다. 유해는 고국에 돌아와 1965년 7월 27일 가족장으로 치러지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영어 교사가 되었으며, 김구는 과거에 떨어진 후 아버지 권유로 관상학서적 『麻衣相書』등을 독학했다. 자신이 천격(賤格) 빈격(貧格) 흉격(凶格)뿐이고 貴格 富格이 없음을 알았으나, 「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라는 구절을 발견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를 결심하였다. 병서도 공부하였다.
두 분은 모두 크리스트교인이 되었다. 이승만은 1912년 옥중동지요 후일 정적인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가서 교회일을 보고 신앙이 독실하였다. 김구는 종교 편력이 다양하다. 동학에 입교하였고, 국모시해 원수를 갚고자 일본장교 하나를 살해하고 복역중 2년 만에 탈옥하여 1898년 마곡사의 승려가 되었으나 탈옥수의 임시방편책이었고, 약혼녀의 죽음을 계기로 1903년 기독교 신도가 되었다. 1911년 기독교인 지도자 검거로 다시 투옥되어, 전후 6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2. 독립운동 방략의 차이-외교와 무장투쟁
이승만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등 독립협회 활동으로 7년간 옥고를 치렀다.(독립협회 활동을 중요하게 다루면서, 독립협회 활동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으며 7년간 옥중생활을 한 이승만의 공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않는 우리 역사교과에서는 이승만을 지나치게 폄하하고 있는 점은 고쳐져야 한다. )독립정신이라는 방대한 책을 저술하였다. 미국 언론인들과 40여 년간 접촉을 시도하며, 독립운동의 외교적 노력을 하였으나, 그들은 한국과 이승만에 대해서 냉담하였다. 이승만의 독립운동 기본방향은 열강, 미국의 여론에 호소함으로써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는 청원외교는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은 일본의 속박을 벗어날 자유를 바라고 있는데, 한국이 완전한 정부를 설립하여 정치와 외교의 권리를 행사할 때까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어 보호해 달라" 는 청원서를 보내었는데, 이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동료들의 비난받았다. 김구, 신채호 등 과격파들은 오직 무장투쟁만을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삼는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김구의 방법은 테러리즘적 성격을 띠었다. ‘김창수(김구 본명)는 을미사변(명성황후 국모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울분과 의협심에서 일본장교 한사람을 살해하고 투옥되었다. 고종 황제는 '강도가 아니라 국모의 원수를 갚은 사람이다’ 하고 특사령을 내렸으나, 일본의 압박으로 석방되지 못하다가 탈옥을 하였다. 호 白凡은 가장 천하다는 白丁과 무식한 凡夫에 이르기까지,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희망을 상징하여 지어진 것이다.
3. 초대 대통령과 국무령
1919년 4월 13일,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김구는 내무총장인 안창호를 찾아가서 임시정부의 문지기라도 시켜달라고 부탁하였다. 김구는 서대문 감옥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으면서 하던 기도-'우리 정부 청사의 뜰을 쓸게 해달라'-와 소망을 설명하였다. 안창호의 주선으로 김구는 경무국장이 되었다.
일제는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 박사의 목에 30만 달러 현상금을 걸었다. 이승만은 중국인 시체수송선에 숨어 상해로 잠입했다. 그러나 그의 집무는 순탄하지 않았다. 형식적으로는 임시정부 대통령 재임기간이 6년이었으나, 실제로 상해에서 집무한 것은 단 6개월 뿐이었다.
이승만과 임시정부 요원들 간에 대립이 심해지자, 이승만은 하와이로 되돌아갔고, 미국 하와이 교포성금에 크게 의지하던 임시정부에 대해 재정을 차단하였다. 그 갈등은 이승만이 대외적으로는 청원과 호소라는 독립운동 방략에 반발한 것이다. 대내적으로 비타협적이고 독선적이어서, 결국 초대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탄핵으로 물러났다. 임시정부의 최고 지도자는 이승만→ 박은식 →이상룡→홍진→김구로 이어졌다. 김구는 1926년 12월 이후 내각책임제 국무령, 주석 등의 직책으로, 환국할 때까지 20 년 간 임시정부를 가장 오래 이끌었다.
4. 환국, 임정요인과 한민당, 이승만
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 33년 만에 환국하고, 김구는 11월 23일 황해를 건너 미군 수송기편으로 환국하였다. 그는 비행기로 3시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27년 만에 돌아왔다.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은 정부요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인 자격으로만 귀국이 허용되어 쓸쓸한 귀국이었다. 귀국의 제일성은 "혼이 왔는지 육신이 왔는지 분간할 수 없는 심정… " 이라고 감격해 하였다.
김구의 임시정부 요인들은 각자 이질적인 정치색채를 띠고 이었으며, 환국에 앞서 김구의 제의에 따라, 입국해서 정부가 서기까지는 각자 정치적 색채의 보따리를 풀지 않기로 했으나, 환국과 더불어 저마다 외부 인사와 연결하여 각자의 정치적 입지를 확대해 나가는데 조급해져서 가뜩이나 미군정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던 임시정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해방정국에서 대소 정당이 무려 200 여 개나 되었다. *2) 임정요인들은 이승만이 자기들 보다 먼저 들어와서 國父연하는 것이 못마땅하였고, 이승만은 임정요인들에 대하여, 경력과 업적이 자기보다 훨씬 뒤떨어지고 사상적으로도 경계되는 인물이 많이 섞여있다고 보았다. 이승만과 임정요인들 사이에서 양측의 협동을 위해 노력한 것은 한민당(한국민주당) *3) 이었다.
한민당은 공산세력과의 대결에서 임시정부나 이승만 박사에게서 정통성을 필요로 하였고, 이승만으로서는 국내에 정치적 기반을 갖추고 미군정에도 대거 참가하여 현실적으로 집권층이다시피 한 한민당 세력의 뒷받침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점차로 한민당과 임정 요인들 간에는 간격이 생겼다.*4)
2) 맥아더장군은 “나는 지금까지 한국인들처럼 정치 지향적인 민족은 보지 못했다. 한국인에게는 하나의 행동, 한마디의 말도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평가된다.”
3) 한민당 : 해방 후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을 목표로 결성한 당.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를 반대하며,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하고, 미군정의 실시에 적극 협력했다. 이승만과 더불어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중심세력이 되었다. 송진우 등이 암살당해 시련을 겪으면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미군정 최고자문기관격인 ‘민주의원’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부터는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수립운동을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도 뜻하지 않은 갈등이 생겨 1948년 5.10선거 결과 제헌국회의 198석 중 29석을 차지하는 데 불과하게 되어, 이후 정계주도권을 상실하고 한국민주당으로 개편되어 대한민국 제1의 야당이 되었다.
4) 임정 봉대(임시정부 요인을 존중하여 받든다)가 지론인 한민당 수석 총무 송진우는 김구와 임정 요인 전원을 관수동 국일관에 초청하여 위로연을 열었는데, 그 저리에서 임정 요인 신익희가 실언을 했다.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취중발언을 했다. 한민당은 불쾌하게 생각했다. 또 그 뒤 송진우가 9백만 원을 모금하여 김구에게 전달하였으나, 임정 요인들은 한민당에 친일파가 많다는 이유로 되돌려주었다. 이런 연유들로 임정과 한민당은 점차 소원해졌다.
김구가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내의 친일 세력 제거 문제를 거론하자 이승만은 김구에게 “아우님 지금은 모두 합동 단합할 때요, 친일 세력 제거는 차차 합시다.” 하고 의견 차이를 드러냈다. 혁명적 전환기에 김구의 정치적 중도 노선은 좌우 양편에 다 환영을 받지 못하고 위험하였다.
임시정부 첫 국무회의가 열린 자리에서 논공 행상 논의로 회의 분위기가 어수선해 지자, 이승만은 윤치호와 도중에 나오면서 “저 사람들 지금 공로나 따지고 있을 때인가, 한심한 일이군.” 하고 다시는 참석하지 않았다.
5. 이승만의 방미외교
이승만은 미군정 책임자 하지 장군과 반목하며 미군정으로부터 소외당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독자외교를 추진하고자 도미하였다. 하지는 이승만의 도미여행을 방해하였다. 돌아오기도 순조롭지 않아 지연되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이승만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그 사이 '트루먼독트린'이 선언된 것이다. '앞으로 3년간 6억 달러의 대한원조를 검토중' 이라고 보도했고 단독정부를 수립할 계획이라는 해설이 나왔던 것이다. 이승만의 방미가 트루먼 독트린의 선언이라는 획기적인 사실과 타이밍이 맞아, 그의 여행의 정치적 평가는 대성공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신탁통치논의)가 재개되자, 이승만은 신탁통치는 미소의 대국주의의 야합이며, 소련의 적화공작에 이용될 뿐이라고 간주하고 김구와 공동보조를 맞추어, 신탁통치를 추진하려는 미소공동위원회 활동을 반대하였다. 한민당이 미소공동위원회 참가를 결의하자, 이승만은 실망하고 이후 한민당을 멀리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정체상태에 빠지자, 이승만과 김구의 유대도 차츰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조속히 총선거를 실시하여 남한만이라도 자주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이승만과,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은 민족 분단을 영구화할 것이므로 반대한다는 김구는 완전히 결별하였다. 이승만은 현실주의적 감각이 뛰어났고, 김구는 이상주의에 치우쳤다. 김구는 김규식 등 중간파와 합작하였다.
6. 古下 송진우(宋鎭禹)와 夢陽 여운형(呂運亨)의 시국관
일제가 패망 직전 전후 항복처리에 관하여 협상을 시도하자 송진우*5) 는 거절하고, 여운형*6) 은 쾌히 승낙하였다. 여운형계는 이미 경무총감 엔도와 약속한 대로 8월 16일 서대문 형무소와 마포 형무소에 가서 모든 사상범의 석방에 입회하였다.
고하(송진우)와 몽양(여운형)의 시국관은 해방을 맞아 정면충돌하였다. 몽양은 둘이 힘을 합쳐 정권을 맡자고 제의하였고, 고하는 해외 인사를 외면하는 것은 안 될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여운형이 고하에게 항의하였다.
5) 송진우(宋鎭禹 ;1889~1945) : 전남 담양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과 명치대학 법과를 나옴. 3.1운동시 옥고를 치르고 1921년 동아일보 3대 사장에 취임, 민족 내부 역량을 도모, 비전투적 노선임. 해방 정국에서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민족진영의 단결과 정부수립을 위해 힘쓰며, 임정 봉대로 주로 민족 법통을 존중하였다. 1945년 자택에서 한현우에게 암살당하였다. 6) 여운형 ; 호는 몽양(夢陽),경기 양평(楊平) 출생이다.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남경 금릉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 상하이(上海)로 가서 1918년 신한청년당을 발기하여 김규식(金奎植)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다. 1920년 고려공산당에 가입, 1929년 3년간 복역하고, 1933년 출옥,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을 지냄. 43년 44년 재차 투옥됨. 1944년 혼자서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핵심부서는 공산당이 차지. 1945년 8․15광복을 맞아 안재홍(安在鴻) 등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스스로 참여했던 임정에 냉담하였고 해방 정국에 선두 주자로 뛰었다.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실패하였다.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였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중도좌파 한지근(韓智根)에 의하여 1947년 암살되었다. 7) 페탱(1856~1951) : 프랑스 군인, 정치가, 제1차 대전에 대령으로 참전하여 베르됭 요새를 사수 하여 국민적 영웅이되고 총사령관, 원수가 되었다. 제2차대전시 비시정권을 장악, 히틀러에 협조한 죄로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드골이 종신금고형으로 감형, 뒤섬에서 복역중 죽었다.
"고하는 나를 페탱*7) 이라고 했다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한 말이었소.” “몽양을 가리켜 한 말은 아니오. 이런 시기에 정권을 물려받으면, 페탱이 되기 쉽다는 뜻이오. 정권은 국내에 있던 우리가 받을 것이 아니라, 연합군이 들어와 일본군이 물러나고 해외에 있던 선배들과 손을 잡은 뒤에 절차를 밟아서 받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오. 그때가 되어 몽양이 생각이 있다면 내가 극력 몽양을 추대할 것이니, 지금은 정권 수립을 보류했으면 싶소”
“어째서 꼭 해외에 있는 사람들과 정권을 논의하야 하오? 고하와 내가 둘이 손만 잡는다면, 그만한 세력은 없을 것이고, 해외에서 들어오는 세력도 우리들 속에 흡수될 것이요” “몽양, 나는 독립운동 동지들에 대한 의리상 그렇게 못하겠소”
“그렇다면 그동안은 국내를 진공 상태로 둘 생각이란 말이오.” “몽양은 내가 보기에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오. 그러나 자칫하면 그들에게 휘감겨 공산주의자도 못되면서, 공산주의자 노릇을 하게 될 위험성이 없지 않소. 내말 잘 들으시오.” 이렇게 두사람은 생각이 달랐다.
해방후 민족 진영과 좌익은 각각 세력을 조직화하는 방법이 판이했다. 좌익은 민첩했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반대로 민족진영의 움직임은 굼뜨고, 산만했다.
여운형과 박헌영 *8) 은 한때 함께 좌익 세력의 중심을 이루었으나, 극렬한 방법과 집요한 지하공작을 펴온 박헌영에 의해 여운형의 위치는 흔들렸다.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건준, 인공 등도 공산세력의 이용물이 되었다.
8) 朴憲永(1900~1955) : 충남 예산 출신, 해방될 무렵 전라도 광주의 벽돌공장 노동자로 위장, 지하운동을 하다가 광복을 맞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여운형의 건국 준비위원회에 침투하여 70%를 박헌영 계가 차지해 좌경화시켰다. 1946년 9월 미군정이 체포령을 내리자 월북하였으며, 배후에서 남한의 각종 공산주의 폭동을 조종하였다. 북한의 부수상 겸 외무상을 지내다가 1953년 김일성 일파에 의하여, 6.25 패전의 속죄양 1955년 12월 사형 숙청당하였다.
7.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 암살사건
해방정국에서 각 정파간의 대립은 결국 요인 암살이라는 희생이 속출했다.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 등 거물들이 차례로 희생되었다.
1) 고하 송진우 암살사건 송진우와 장덕수 암살은 우익진영내의 주도권 문제로 빚어진 정치테러 이다. 피살된 두 사람은 한민당의 핵심간부였고, 범인들은 김구를 추종 숭배하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한민당과 김구의 한독당의 대립관계를 엿볼 수 있다. 송진우 암살은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송진우와 김구의 견해차이로 일어났다. 김구는 반탁운동을 계기로 하여 미군정을 접수하고 주권을 선언하자는 강경론이었고, 송진우는 미군정을 부인하고 충돌하는 것은 공산당에게만 어부지리를 주므로 반탁운동 방법을 신중하게 하자는 입장을 보였는데, 항간에는 송진우가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것처럼 오해되어, 김구를 추종하던 사람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1945년 12월 30일 새벽 자택에서 김구 추종자 한현우에게 암살되어 첫 희생자가 되었다. 이승만은 그가 가장 의지했던 인물이었으므로 큰 충격을 받고 통곡하였다.
2) 몽양 여운형 암살사건 여운형은 온건 좌파로, 좌우익 어느 쪽으로부터도 설 땅을 찾지 못하였다. 수차례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왔다. 여운형의 암살은 이데올리기적인 성격을 지닌다. 여운형은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합작에 노력하고, 박헌영이 주도하는 좌익진영의 합동에 반대, 사회노동당을 창당하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자 정계를 은퇴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될 무렵 백남운 등과 근로인민당을 결성 중간세력을 규합하는 한편, 미소공동위원회를 성공시키려고 노력했다. 우익진영은 미소공동위원회를 결렬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이를 성사시키려는 여운형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1947 7월 19일 수도경찰청장으로부터 서울을 떠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울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 시골에 내려갈 채비를 하고 있던 중, 혜화동 교차로에서 19세의 우익청년 한지근에 암살되었다. 당시에 여운형은 근로인민당 당수 직함이었고, 북한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내려던 편지를 갖고 있었다. 박헌영의 독주에 반감을 가지고 박헌영을 견제하고자 북한에 영향력 행사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3) 설산 장덕수 암살사건 송진우 암살을 계기로 김구의 임시정부요인들과 한민당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고 이승만과 한민당과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져 갔다. 장덕수 암살의 내막은 이렇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자 장덕수는 미소공위원회에 참가하도록 한민당의 당론을 결정하였는데, 이승만과 김구는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는 신탁통치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반대하고 있었다.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장덕수는 이번에는 이승만의 단정노선(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하자)을 추종하였다. 1947년 12월 2일 경관복장을 한 김구 추종자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사정당국은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컬럼비아대학 경제학박사)의 암살사건 배후 인물로 김구를 지목하였으나, 김구는 재판정에서 "나는 왜놈 이외에는 내가 죽일 놈이라고 말한 일이 없다" 고 혐의사실을 부인했다.
8. 김구의 남북협상, 암살
김구의 임시정부 요인들은 국내에 실질적인 정치기반이 없었으며, 미군정으로부터 정통성 있는 정치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김구의 정치적 역량 발휘는 한계가 있었다.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제2의 독립운동으로 전개하겠다는 방침 하에 대대적인 반탁운동을 주도했다. 반탁운동의 전개와 동시에 김구는 한민당의 송진우, 장덕수와 마찰을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국내의 정치현실과 연합국들의 세계전략을 명확히 파악하지 않은 채, 민족감정을 앞세운 반탁논리나, 남북협상을 추진하였다. 미소양군이 동시에 철수하고, 유엔이 치안을 담당하며,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하자고 유엔위원단에 제시하였다.
김구 김규식 등은 북한에 가서 김일성 김두봉을 만났지만, 북한에서도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제반 준비가 완료되고, 명분만 찾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남북협상은 성과를 거둘 수 없었고, 북한에 또 다른 정부의 수립이라는 명분을 주고 말았다.
소련과 북한공산주의자들의 방해로 남북한 자유총선거로 정부수립을 하려는 유엔의 결의가 무위로 돌아가자, 미소냉전의 현실을 바탕으로, 미국과 국내 정치지도자들은 단독정부라도 수립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자, 김구는 뒤늦게 공산주의 세력과의 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을 해봤지만,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에 그쳤다.
김구의 통일정책들은 정적들에 의해 공산당으로 인식되어 소련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에 스스로 불참하고, 은둔생활을 하던중 1949년 6월 26일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저격되어, 74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일생을 마쳤다. 효창원에 안치되었다.*9) ●
9) 효창원은 백범자신이 당시 돈 8만원을 주고 사용권을 얻어 백범이 환국할 때 운구해 온 항일열사 유해를 효창원에 안치하면서 자신도 나중에 그 곳에 묻히고 싶다는 뜻을 밝혔던 곳이다. 이승만 정부는 효창원 일대의 나무 15만 그루를 베어내고 그곳에 축구장을 세우기도 했다.
안두희는 단독범임을 주장하였고, 군수사기관에서는 그를 특별히 처우 했다. 1949년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으나 그해 가을 15년으로 감형되고, 6.25가 일어나자 특사되어 육군 중령까지 승진하고, 예편후 군납업자로 변신하였으나 끝없이 쫓겨다녔다. 1992. 4월 안두희의 진술로는 “김창룡, 장택상(당시 수도청장) 친일경찰 노덕술(수도청 수사과장)등으로부터 암시가 있었다. 미 정보기관 개입설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 고 진술한 바가 있다. 결국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버스운전사 박기서의 정의봉에 맞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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