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균관
서울도보관광 예약 홈페이지의 글에서
코스 소개 : 성균관 유생들의 삶은 어땠을까? - 성균관 공간과 인물들
조선시대 국립대학이자 공자에게 제사를 드리는 사당인 성균관.
인기 TV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로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으며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과 이들이 생활한 공간,
그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를 알아보는 코스이다.
도보코스 :
탕평비 하마비 반수 - 동삼문 - 대성전 영역 - 명륜당 영역 - 비천당 -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 존경각 - 육일각 - 향관청 - 정록청 - 장면가옥
소요시간 : 2시간
만남 장소 : 성균관 대학교 정문
코스내 주요 관광 명소
육일각
육일각은 대사례에 사용하던 궁술 도구를 보관하는 곳이다. 대사례란 나라에 행사가 있을때 임금이 신하들을 모아 함께 활쏘기를 하는 의식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성균관에서 거행되었다.
비천당
국왕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과거를 거행할 때 머무르던 건물이다. 1661년. 왕실에서 폐출된 후궁이나 내인들이 거처하던 자수원(자수궁)을 헐고 그 자리에 교육기관인
대성전 영역
대성전 인근은 공자와 성현들의 위패를 둔 문묘, 제사기구와 제물준비 제사진행 인원의 거처가 있는 제례 공간이다. 고려와 중국에서는 위패이외에 조각상을 두었으나, 조선시대는 위패만을 모셨다.
은행나무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는 공자가 강학했던 곳에 은행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후대에 유학을 가르치는 곳에는 은행나무를 심어 학문의 장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행단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에서는 행단의 행자가 살구나무 행을 가리켜서 실제는 은행나무가 아닐 수 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현재는 북경과 동경의 대학에 여전히 은행나무가 많이 있고 서울에도 예전 서울대학교가 있었던 이 근처인 대하로에 은행나무가 많이 있다.
명륜당 영역
성균관 유생들의 학문 및 생활공간으로 명륜당은 공부하는 강당.
동재와 서재는 기숙사이다.
-------------관람 순서순으로 -------------------
1. 성대 광장에서
성균관 연혁
사적 제143호 : 서울문묘와 성균관
보물 제141호 : 서울문묘와 성균관<대성전 동무 서무 삼문 명륜당>
성균관의 별칭 : 태학, 반궁, 현관, 근궁, 수선지지, 경학원
최고교육기관의 역사
주나라 수도 벽옹
주나라 제후 반궁
고구려 태학(372년)
신라 국학(682년)
고려 국자감(국가감)
'성균'이라는 이름이 처음 쓰인 1298년 성균감
성균관(1308년)
조선 성균관(1398년) : 1395년부터 약 3년 공사로 완공
성균관 대학교
1911년 경학원
1946년 성균관 대학교 발족 - 초대 총장 심산 김창숙 선생
1953년 성균관과 성균관 대학교 통합
1963년 분리
학교법인 성균관 대학교
재단법인 성균관
삼성의 대학재단 지원
1965~1979년 이병철 회장, 재단이사장 역임
1996년이후 삼성이 학교 재단에 참여
심산 김창숙(1879~1962)
안내문에서 :
경북 성주의 유가 출신으로 일제로부터 독립과 통일 민주국가의 건설이라는 민족적 대의를 실천하고 성균관 대학을 재건한 분이다.
중국 망명중에도 국내에 잠입하여 유림들로부터 독립운동과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2차 유림단 사건), 나석주 의거도 주도하였다.
해방후에 성균관과 유도회를 개혁..
성균관대학의 역사를 회복하여 초대 총장을 역임하였으나, 분단 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여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두 아들도 독립운동에 바치고 집 한 칸 없이 작고하여 온 국민이 애도하여 사회장으로 모셨다. 80평생 불굴의 선비정신으로 진보적 유학사상과 민족주의를 일치시킨, 선생의 숭고한 조국애와 교육정신을 기리고자 이 동상을 세웠다.
성균관 건설공사일지
1398년 성균관 완공
1478년 추가 건설. 존경각 건립, 반수 공사
연산군대의 수난
임진왜란으로 소실
인조대의 중건공사
1601~1606년 : 주요건물
1626년 : 존경각 정록청 식당 양현고 등
북한의 성균관 : 개성성균관
2013년 개성 역사유적지구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성균의 의미
성 인재지미취, 균 풍속지부제
: 인재로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풍속으로서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한다.
미디어 속의 성균관
소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정은궐 저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2010년
핵심건물의 원리
전묘후학
성균관의 기능
성리학 이념의 수호, 신진관료 양성, 국제적 교육문화 교류, 공론형성의중심, 사회교화의 정점
외교사신들의 알성, 가교관과 가유생, 다례 음주례 문답 강론, 사신으로 차출되어 외교적 임무를 주어 파견
성균관 운영을 위한 경제적 기반
양현고에서 업무 담당
국가에서 내려준 학전에서 걷은 세금과 성균관 외거노비들의 신공으로 재원 마련
선상노비들은 성균관안에서 잡역 담당
학전의 규모 약 600만평 추정
1년 예산 현재의 약 30억 상당 수준으로 추정
한 끼 식사 비용 3~4000원 수준으로 추정
어장에서의 세금으로 반찬 경비 등을 충당하였고,
시장에서는 땔감을 공급했다.
성균관 소속 노비들의 수 - 최대 1만여 구
반촌과 반인
성대광장 (정문)
대성문
원래는 경희궁 개양문
1970년 이후 사라짐.
2014년 8월 정문을 지금의 광장모습으로 바꾸면서 흔적마저 사라짐
탕평비각과 하마비
1742년 건립.
지나친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공정하게 관리는 뽑는 탕평책을 펼쳤고 탕평비를 세워 그 의미를 널리 알렸다.
"두루 사귀어 편당을 짓지 않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고,
편을 가르고 두루 사귀지 못하는 것이 소인의 마음이다. "
2. 동삼문 앞에서
동삼문
하연고
3. 대성전 - 제향공간
서울 문묘와 석전대제
안내판 :
문묘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을 말하며,
성균관은 나라의 인재를 길러내는 조선시대의 으뜸가는 교육기관이다.
이곳은 유교의 중요한 사당인 동시에 유학을 가르치는 최고학교였다.
서울문묘와 성균관은 1398년(태조 7)에 처음 세워졌으나 화재와 전쟁으로 여러 번 고쳐 지었고, 1869년(고종 6)에 크게 수리되어 현재에 이른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와 서무를 포함하는 영역이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제사 공간이며,
명륜당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는 영역이 교육공간이다.
명륜당 동쪽으로는 학생들을 위한 식당인 진사식당을 비롯한 관리를 위한 부속 시설들이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의 관계를 바탕으로 지방 향교를 포함한 문묘에는 몇 가지 형식이 있는데, 서울 문묘는 대성전을 앞에 두고 명륜당을 뒤에 두는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 형식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Mun-myo, the National Shrine to Confucius, enshrines tablets of great Conjucian scholars of China and Korea and is a venue for ancestral rites. Senong-gyun-gwan, the National Confucian Academy, was the countrys's highest institution of education for future national leaders during the Jo-seon period. Originally built in 1398, this complex was repeatedly destroyed by fire and at times of war. It was substantially renovated in 1869 as we see it today. The complex is divided into ritual space with Dae-sung-jeon at the center and educational space with Myeong-ryun-dang at the center. Myeong-ryun-dang, a lecture hall, is flanked by Dong-jae and Seo-jae dormitories. To the east of Myeong-ryun-dang art a dining hall for strdents and other facilities.
서울문묘지역은 조선시대의 국가 통치 이념인 유교적 세계관과 관련된 곳으로,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공간과 명륜당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묘에서는 매년 2월과 8월에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에게 석전제를 드리는데, 이를 석전대제 또는 문묘대제라고 한다. 석전제는 일반적으로 고기를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제사의식이며 문묘에서 치러지는 석전대제를 위한 음악을 문묘제례악이라고 한다. 국가적인 행사로 치러지는 석전대제는 엄숙한 제례 절차와 더불어 기악과 성악 춤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의 성격을 띤다. 발상지인 중국에서도 그 원형이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 우리나라만 남아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대성전과 그 주변
안내판 :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있는 영역이 문묘, 즉 제사공간이다.
남쪽의 삼문(三門)은 제례 등의 행사에 사용되었던 정문인데,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오도록 했으며, 가운데 문은 성현들의 넋이 드나드는 상징적인 문이다.
대성전 서쪽에는
제사 음식을 차리는 전사청,
하급관원들의 관청인 수복청,
제사용 그릇을 보관하는 제기고 등 부속시설을 따로 설치했다.
대성전과 동무, 서무에는 공자를 비롯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성현 133명의 위패가 있었지만 지금은 대성전에만 39명의 위패를 모시고 동무와 서무는 비워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교 교육기관 안에 성현들을 모시는 유래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서울 문묘는 1398년(태조 7)에 처음 지었다.
앞마당의 묘정비각 비문은 문묘를 창건하고 고쳐지은 연혁을 기록한 것이다.
대성전의 현판 글씨는 석봉 한호(1543~1605)의 친필로 전해진다.
Dae-seong-jeon is the center of the ritual compound. There are three gates along the south side. When ancestral rites are performed, people enter through the gate on the right and come out through the gate on the left.
The gate in the middle is symbolic, reserved only for passage by spritits. To the west of Dae-seong-jeon ar auxiliary facilities where ritual foods were prepared, titual vessels were kept, and officers worked.
Dae-seong-jeon and the long buildings on the left and right housed 133 tablets of great scholars of Korea and China, but there are only 39 today, all housed in Dae-seoung-jeon. Confucian academies that enshrined worthies of an earlier period existed since the Silla Kingdom period, but Seoul Mun-myo was originally built in 1398.
전사청
동무와 서무
석전대제
묘정비
제기고
수복청
전사청
4. 교육공간 명륜당 영역
명륜당과 그 주변
안내판에서 :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는 영역이 성균관의 교육공간이다. 1398년에 설립되어 왕세자까지 교육한 조선시대의 최고 학부였으며, 때때로 과거 시험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명륜(明倫)'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며 현판 글씨는 1605년(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 명륜당은 주로 학문을 익히고 연구하는 공간으로, 3동을 하나로 연결해 지었다. 가운데 건물은 마루로 되어 있고, 그 양쪽 날개채에 선생들이 거처할 수 있는 온돌방이 있다.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는 20칸의 긴 건물에 앞뒤로 툇마루를 설치한 독특한 형식이다. 명륜당 뒤쪽에 있는 존경각은 도서관이고 육일각은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장소였는데,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선비들이 문무를 겸비하기 위해 수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마당에 있는 은행나무는 1519년(중종 14)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윤탁이 심을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를 따른 것이라 한다.
Myeong-ryun-dang means "hall of Luminaries". This Lecture hall is the heart of Seong-gyun-gwan. Established in 1398, Seong-gyun-gwan, the National Confucian Academy, was the country's highest institution of education of Jo-seon. Even the crown prince was educated here. A place of learning and research, Myeong-ryun-dang has a huge hall in the middle with rooms with underfloor heating on either side, where teachers stayed. Two long twenty-bay buildings on the left and on the right of Myeong-ryun-dang are dormitories for students. At the back of Myeong-ryun-dang are a library and a repository for bows and arrows, which suggests that literati scholars studied literature and practiced martial arts according to teachings of Confucius. A gingko tree in the courtyard of Myeong-ryun-dang is said to have been planted in 1519 in remembrance of Confucius having taught disciples under a gingko tree.
동재와 서재
성균관의 교육 - 목표, 방법, 시험, 규칙, 식고와 도기, 재회 등
5. 비천당
과거시험
황감제
6.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성균관의 창건과 발전 (전시 내용중에서)
성균관은 1392년 직제가 제정되고 초대 대사성에 유창이 취임하여 창건 준비가 진행되었고, 1398년 현재의 위치인 한성부 숭교방에 창건되었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국가정책이나 성균관에 대한 일에 잘못이 있으면, 권당 공관으로 시위를 하기도 하고, 유희 등을 통해 풍자하기도 했다. 권당은 식당에 비치된 도기의 기재를 거부하여 졸업자격에 해당하는 원점 취득을 포기하는 것이다. 공관은 아예 성균관을 비우고 떠남으로서 문묘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는 행위이다.
성균관은 1895년에 근대교육기관으로 탈바꿈하였다. 1905년 박사제가 실시되었고, 1908년 교과과정과 교수시수에 대한 규정이 제정되는 등 근대교육기관으로서 변모했다. 1911년 일제에 의해 경학원으로 격하되고 제사기관으로 전락했다. 1930년 경학원의 부설교육기관으로 명륜학원이 설립되고, 초대 종재로 정만조가 취임하면서, 다시 근대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1939년 명륜전문학교, 1942년 명륜전문학교 등으로 발전을 거듭하다가, 1944년 전시동원령에 의해 명륜인성소로 바뀌기도 하였다. 전쟁에 따른 수난의 시기를 거쳐 1945년 광복과 함께 다시 명륜전문학교로 회복되고, 일제에 의해 격하된 경학원도 성균관으로 복구되면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알성시 : 왕이 문묘참배후 실시하는 과거
세자입학식
성균관유생들의 활쏘기[大射禮]
석전제 : 문묘에서 춘추에 행하는 제사
유희 : 유생들의 시사풍자극
재회 : 학생총회에 해당하는 재생의 모임.
성균관을 빛낸 인물들
성립기
도약기
우암 송시열 大字
富貴易得 名節難保
뷔귀는 얻기 쉬우나, 명예와 절개는 지키기 어렵다.
7. 기타 건물들
존경각
육일각
향관청
정록청
진사식당
유림회관
8. 장면 가옥
장면
---------. 참고자료
: 유교와 조선의 성리학 - 성균관과 조선의 교육문화를 중심으로 -
작성자 : 장재천 용인대 교수
목차
0. 序
1. 성균관의 역할
2. 성균관의 교육
3. 성균관의 문화
4. 結
------본문-----
序 :
우리나라 최고 교육기관의 명칭은 고구려 태학(372년), 신라 국학(682년), 고려 국자감(992년)이었던 것이 조선에서는 시종 성균관(1398년 한양으로 이전하여 개교)이 되었다. 고려 국자감은 충렬왕 원년(1275년)에 국학으로 개칭되었고, 1298년에 성균감으로 되었다가 1308년 충선왕이 재즉위하면서 사시 성균관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공민왕 5년(1356년)에 반원정책이 추진되면서, 일시적으로 다시 국자감이 되었다가 공민왕 11년(1362년)에 다시 성균관으로 개칭되어 조선왕조 내내 사용하였다.
成字 成人材之未就, 均字 均風俗之不齋
성균관의 별칭은 國學, 太學, ..., 泮宮, 芹宮, 館學, 國子學, 관중, 泮學, 관학, 반당, 태학관, 성묘, 공묘, 묘궁, 반중, 반재, ..., 태학재, 문묘, 현관 등.
이와같은 명칭의 개편은 자주성의 부침과 관계가 깊으며, 그 자주성은 또 정치세력들의 부침과 함수관계각 깊다. 즉, 반원정책을 강력히 추구하면서 자주성을 회복하는 시기에는 중국과 대등한 명칭을 썼다가 정치적 실권기나 원명의 간섭시기에는 다른 명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균관은 역할, 교육 문화 순으로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성균관의 역할
1) 국가적 위상과 경제적 기반
성균관은 성리학 이념의 수호지이면서 신진관료를 배출하는 수선지지 최고 고등교육기관이었고 중국사신과의 외교적 공리를 취하는 국제교육문화교류장소였으며, 통문을 통해 공론을 형성하는 여론 중심지였고, 향사와 제례를 통한 사회교화의 정점이었다. 양현고가 관장하는 성균관의 경제적 기반은 학전 노비신공 어장 시장(柴場)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재학 유생들에게는 성균관의 교육재정을 담당하는 양현고에서 음식과 학용품 등의 생활필수품 일체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비용은 국가에서 성균관에 내려준 學田의 稅收와 성균관 외거노비의 身貢으로 충당되었다. 15세기 후반경 학전은 2,400여결이었으며, 성균관 노비는 400 여명이었다. 성균관 노비가운데 선상노비는 성균관내의 잡역에 종사하였고, 외거노비는 신공을 바쳤다. 전답은 최고 2천결로 약 600만평(200명 1년간 공궤), 노비는 전국에 1만구, 1년 예산은 약 30억 이상, 한끼 식사는 대략 3~4천원 정도로 추산됨.
2) 외교적 기능
문묘는 사신들의 알성(謁聖)을 통해 국제적인 교육문화 교류를 실시하며 외교적인 공리를 취하는 곳이었다.
사신영접과 문답을 위해 영접도감(迎接都監)이 관장하는 영조례(迎詔禮)에 입각해 수행관리인 관반(館伴=館伴과 接伴使)을 비롯 가관관(假 館官)인 假 교관 및 假 유생을 정하고 예행연습(=習儀)을 하였으며, 종사(從祀) 문제와 문묘시설이 정비되고, 사신들의 알성후 다례와 음주례, 문답, 강론, 과거, 은전(恩典) 등이 베풀어졌고, 실수가 있을 때는 중죄로 다스렸다.
또 교관들은 사신으로 차출되거나 외교적 임무를 위해 주요 국가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3) 최고 교육기관
종묘 옆 숭교방(崇敎坊 - 明倫洞)에 위치한 문묘 즉 성균관(정원 200명)의 전묘후학(前廟後學) 시설은 크게 향사(享祀) 시설과 교육시설로 나눌 수 있다.
향사 시설은 대성전과 동무 서무 계성사 향관청 전사청 수복청 제기고 악기고 등이며,
대성전은 공자가 하 은 주 3대 문화를 집대성했다는 뜻에서 대성이라 이름하고, 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諡號의 공자위패를 비롯하여
안자 자사는 동쪽에
증자 맹자는 서쪽에
4성 뒷렬로 동쪽에는 민손 염옹 단목사 중유 복상 주돈이 정이 장재를 앞줄에,
설총 안유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은 뒷줄에 종향하였다.
4성뒷렬 서쪽에는 염경 재여 염구 소옹 주희를 앞줄에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세채는 뒷줄에 종향하여
5성 10철 송조6현 동방18현 위판을 봉안하였다.
교육시설은 명륜당 동재 서재 존경각 양현고 비천당 정록청 육일각 등이고,
휴식시설로서는 벽송정이 있다.
그 외 지원시설로서 식당, 포주(庖廚), 서리청, 향청, 직방, 문고(門庫), 일양재, 벽입재 등이 있다.
특기할 것은 존경각은 성종 6년(1475년)에 지은 것이며,
비천당은 현종 5년(1664년)에 억불숭유 정책으로 지었고, 이때 일양재와 벽입재도 비천동 서쪽 남북 모퉁이에 동시에 지었다. 그리고 그 명칭은 주자가 절을 헐고 유궁(儒宮)을 지을 때 한 말에서 딴 것이다.
계성사는 숙종 27년(1701년)에 세운 것으로 공자 안자 증자 자사자 맹자 등의 부(父)를 제사지내는 곳이었다.
성균관은 고종 32년(1895)에 성균관 관제 칙령 제136호 반포로 인하여 문묘제사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축소되고,
교육은 경학과에서 전담하게 되었다.
1910년 한일합병이후 일제는 성균관과 향교의 재산을 분리하고 교육을 일체 중지시켜 국립대학과 민족교육의 맥을 끊었고, 명칭도 경학원으로 바꾸었으며, 민립대학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교육을 위하여 경성제국대학을 1924년에 설립하였다.
당시 전국의 유림이 주권을 지키려는 운동의 일환으로 의병과 파리장서사건 등을 일으키고, 전국적으로 통문을 돌려 성균관의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회복을 선도하자 일제는 그 회유책으로 1930년 명륜학원의 설립을 허가하였다.
1939년에는 명륜전문학원, 1942년에는 명륜전문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안타깝게도 진실한 유학교육과 문화계승 및 창달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의 변질된 황도유학(皇道儒學)을 강요받았다.
이에 따라 교과과정에 있어서도 국민도덕 일어 일본사 교련 등을 넣어서 식민교육으로 변모하게 되었으며, 그것마저 일제 국가총동원령에 의해 1943년 폐교되고 청년연성소로 바뀌게 됨으로써 정통유학의 맥은 차츰 그 명맥을 유지하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국립대학의 전통을 되살리는 운동이 815 광복과 더불어 일어났는데,
1945년 명륜전문학교로 문을 열었다가 미군정시대에 명칭을 성균관으로 변경하였고,
1946년 9월 25일에는 드디어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설립되었으며,
1953년에는 종합대학인 성균관대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초대학장 및 총장에는 정통유림으로서 일제에 대항하였고, 해방후에는 이승만 독재 반대 투쟁에 앞장섰던 심산 김창숙(1879~1962) 선생이 취임하였다.
1960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유학 동양학부 학생중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동재 서재에 기숙하게 하여 양현재생으로서 유학의 맥을 계승하게 하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문화재 보호 문제 때문에 동재 서재를 비워두게 하고 있다.
4) 석전제례(문묘제례)
성균관은 매년 춘추 2회의 석전(釋典)을 통해 예교일치의 유교이상을 실현하고 제례문화를 발달시키며 사회교화의 정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석전은 선성(先聖)과 그들의 학문 인격 덕행 사상을 숭모하고 존중하며 이를 체득하기 위해서 거행하는 길례로 국가적 대제이며 거국적인 정치적 교화행사였다.
석전은 3년마다 국왕친림 석전 혹은 왕세자석전, 그외 有司 석전으로 이루어졌고, 많게는 관리 2백여명이 동원되고 구경꾼은 수천여 명에 달하였다.
석전은 중사(中祀)로서 10품 즉 10籩 10豆였고, 예악일치인 문묘제례악과 팔일무가 동반되었다.
5) 대사례와 양로례
대사례는 육예의 하나인 활쏘기로서 국왕이하 모든 벼슬아치가 총동원되어 연례(燕禮)를 행한 후 성균관 하연대에서 실시하는 것으로 군신이 함께 덕을 함양하기 위해 예악을 익히는 것이었다.
양로례는 효와 경로사상을 함양하기 위해 80세 이상의 노인을 초청해 베푸는 예속행사였으며, 연로하고 덕행이 높은 신하를 선택해서 정사에 도움이 되는 말을 듣고 장수를 축하하며 경로효친사상을 높이는 시범행사였다.
2. 성균관의 교육
1) 인간상과 교육목적
성균관 교육을 통해 추구하는 이상적 인간상은 성인 군자였으며,
그 대표성을 띤 성인 군자는 문묘에 모신 공자와 그의 제자였다.
따라서 유생들은 유학의 학문적 도통을 잇는 훌륭한 인인(仁人)이 되는 것이며, 유덕(有德)한 치자(治者)로서의 위치에 나아가기 위해 성리학적 소양인이 되는 것이 현실적인 교육이상이었다.
이를 위해 왕세자나 대군이 입학하는 모범을 보였다(20명)
교육목적은 이상적인 인간상에 입각해서 설정되는데, 성균관의 교육목적은 성인군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자는 사회적인 면에서 봉건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중심계층이 될 군자를 길러내는데다 교육의 목적을 두었다.
이런 생각은 공자 이전이나 이후나 항시 관학교육에 있어서는 국가나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관리로서의 지식과 기능을 갖춘 자를 양성하는데 목적이 있었고, 유생들도 그 교육을 발판으로 사회에 나가 출세하는데다 목적을 두었다.
그러므로 지배이념이 내면화 된 관인의 양성과 성리학적 국가 통치이념의 수호와 인간성의 계발 및 사회교화에 교육목적을 둔 것이다.
2) 교육과정과 평가 및 논쟁
교육과정은 교육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성균관의 교육과정은 곧 성균관 교육의 목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성균관 교육의 목적은 중앙집권적인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유교이념에 입각한 관료의 양성과 사회교화였기 때문에 교육과정도 그 목적을 실현하는데 직결되는 것으로 구성하였다.
조선왕조는 필요한 관료를 대부분 과거시험제도를 통하여 확보하였기 때문에, 중심교과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4서와 예기 춘추 시경 서경 주역의 5경을 비롯하여 근사록 성리대전 통감 좌전 송원절요 경국대전 동국정운 등이었는데, 과거시험과목에 따라서 변동이 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시 부 송 책과 같은 글을 짓는 방법을 비롯하여 중국의 왕희지와 조맹부의 필법도 익히게 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에 대한 교육평가로는 학령에 명시되어 있는 학관일강과 순과를 비롯하여 예조 월강(月講)이 있었는데 그 성적은 연말에 종합되어 식년시와 천거에 참작되었다.
출석평가나 성적평가나 모두 장부에 기록하여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거나 과거 성적에 참작하였다.
성균관에서는 무엇보다도 과거업무를 담당하는 장이소(場貳所)나 정록소(正錄所)가 있었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성균관 장이소는 태조 대에 새로운 집권층 형성을 위해 대사성 이하 고위학관이 중심이 되어 문과 초장의 업무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점차 예조가 문과 업무를 주관하면서부터 오래도록 합격하지 못하는 성균관 유생을 경관(京官)으로 서용케하는 준과거 수준의 업무를 맞게 된 것이로 보인다. 아마도 시급한 일시적 목적이 달성되면서 행정업무의 일원화 내지는 시험에 대한 철저한 국가통제를 예조가 장악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성균관 정록소는 정9품관인 학정 학록과 종9품인 학유 등으로 구성되어 성균관의 사무를 전담하고 있었다. 그 기능을 보면 태조 5년(1396)부터 생원시 응시자에 대한 심사를 실시하였고, 태종 7년부터는 성균관 입학자에 대한 적격 여부 시험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교관들이 과거업무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에, 유생들의 교육평가가 과거제도와 깊은 상관관계를 갖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과(대과) 시험내용의 변화는 성균관 교육과정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유생들의 학습유형에 영향을 주었다.
4서5경에 대한 시험방법에 있어서 강경(講經)으로 하느냐 제술(製述)로 하느냐의 문제는 많은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조선시대 내내 논쟁을 거듭하였다.
조선초기에 문과 초장에 대한 강경 시험을 실시한 것은 여말부터 득세한 신진사대부들이 경학을 중시한 때문이었다.
강경은 체(體)요 제술은 용(用)인 셈인데, 도덕성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권문세가를 물리치고 왕조를 개창한 신진사대부 세력들은 자연히 체(體), 즉 실천원리의 강경을 중요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관료사회를 열었기 때문에 관료층(인재)의 선발을 강경(講經)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3) 과거제도와 특전
Max Weber는 중국의 과거시험을 교양시험으로 보아 과거제도가 갖고 있는 사회적 의미나 관료체제의 성격을 이로부터 설명해 내고 있다.
그러나 당시 동북아의 중국적 세계질서 속에서 유교적 지식과 외교문서의 작성기술, 경국대전의 이해 등은 교양 수준에서 습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세계질서속에서 볼 때, 정치적 차원의 전문성으로 보는 것이 바른 이해라고 생각된다. .
정치적 관료의 지위 위에 교양인을 관료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유자(儒者) 즉, 행도자(行道者)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군왕들이 관료에게 요구하는 것은 실무적인 능력과 동시에, 그것 이상으로 충성과 복종이었다.
따라서 관학과 과거제도는 왕권강화와 함수관계를 갖는 속성이 있었으며, 관학을 충실히 하기 위해 원점제도를 설치해 과거에 반영했던 것이다.
과정을 충실히 거친다고 하는 것은 중앙집권제를 정착시키며 유생들의 수학을 충실히 해 업적본위의 선발이념에 맞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균관유생들은 과거에 있어서 여러 가지 특전을 부여받았는데 , 관시(館試), 알성시(謁聖試), 춘추도회(春秋都會) 등이 그것이며, 그 밖에 천거의 특전을 받기도 하였다.
4) 교육규제와 절목
엄격한 규율은 학령(學令)이 기본인데
학령 : 성균관 교육절목은 권학사목, 구재학규, 경국대전, 진학절목, 경회학교절목, 학교사목, 학교모범, 학제조건, 학교절목, 제강절목, 원점절목, 문헌비고 등이다.
- 미명에 북소리가 한 번 울리면 기상한다.
- 북소리가 두 번 울리면 의관을 갖춘다
- 북소리가 세 번 울리면 식당에 간다
- 교관이 명륜당에 들면 유생들은 집례(=절)를 청한다
- 북소리가 한 번 나면 유생들은 교관에게 집례한다. 그리고 유생들은 교관 앞에 나아가 일강(日講)을 청하고 교관은 강을 행한다.
- 북소리가 두 번 나면 교관 앞에 나아가서 배운 것을 강난(講難)하여 변의(辨疑)하는 등 일과를 정하였다.
학업규율은
- 노장 불경 잡류 백가자집의 이단서를 읽지 말 것
- 수업시 졸거나 한눈을 팔지 말 것
- 글을 쓸 때는 해서로 단정히 쓸 것
- 수업을 받지 않거나 성적이 나쁘면 벌함
도덕적 사항은
- 성현을 숭상하는 마음을 가질 것
- 조정을 비방하는 말을 하지 말 것
- 주색 재물에 관한 이야기나 고담준론을 하지 말 것
- 오륜을 지킬 것
- 사장(師長)에 예를 다할 것
- 말을 타지 말고 유희 등을 하지 말 것 등이었다.
유생들의 생활은 교관들이 관찰하여 선악부에 기재하고 이는 과거시험 응시 때 참조되었다.
5)교관과 유생
교관직제는 겸관으로 정2품 지사 1명과 종2품 동지사 2명이 있으며,
실제 교수직은
정3품 대사성 1명, 종3품 사성 2명,
정4품 사예 3명, 종4품 직강 4명
정6품 전적 13명, 정7품 박사 3명,
정8품 학정 3명, 정9품 학록 3명,
종9품 학유 3명이었다.
개국초에 유생은 150인이었으나
1429년(세종 11년)에 200인으로 증원되었다.
생원 진사로 입학한 정규생은 상재생,
유학(幼學)중에서 선발된 유생은 하재생 또는 기재생이었다.
기재생은 4학생도로서 소정의 시험에 합격하여 입학한 승보기재와
부조(父祖)의 공덕으로 입학한 문음기재가 있었다.
3. 성균과의 문화
1) 자치활동과 사회참여
재회(齋會-養賢齋 모임)의 임원을 색장이라고 하였는데, 이에는 장의, 상색장, 하색장 각각 2인씩 6인으로 구성되며, 그 외에 비임원으로 조사와 당장 등이 있었다.
학생회장격인 장의는 동재 서재에서 각 1인씩 2인을 선출하는데, 현임 장의의 추천과 전임 장의들의 합의에 의해 뽑는 소위 간접 선거제였다.
전임 장의 3인이 모두 근실이라고 써주어야만 후보자 명부에 올라가는 첨격한 천거제이므로 이를 둘러싸고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즉, 서울출신 집권층 자제들에게 많이 배분되는 현상이 생겨났다.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현재도 학생들의 학업성적의 배경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 때도 마찬가지였다.
색장은 상색장과 하색장이 있는데, 동재 서재의 상재생으로 2인, 하재생으로 2인 등 모두 4인을 장의에 준해서 선출하였으며, 주 임무는 식당의 도기(到記) 검찰과 문묘의 청소장이었다.
도기 : = 반제(泮製). 성균관 유생이 식당에 들어간 횟수를 적던 일.
到記科 : 일정한 도기 점수를 딴 성균관 유생에게 실시하던 과거.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식년문과 초시에 해당하는 과거시험.
성균관과 사학에서 수학하는 유생의 출결을 파악하기 위하여 도기의 일정한 점수에 도달한 자만 과거시험(=관시(館試))에 응시하게 하여 도기과라 한다.
이는 성균관과 4학의 유생으로서 거관(居館)하지 않는 자가 많아 학교가 피폐해지고 문풍이 떨어지므로 이를 장려하기 위해 실시하였는데, 점수는 조석 두끼를 1점으로 하여 반제(泮製)에는 50점, 성균관시에는 300점이 되어야 응시할 수 있었으며, 식년문과 초시에는 원점 3백점 이상된 인물 가운데 50명을 선발하였다.
점수미달자가 많을 때에는 특별히 왕지(王旨)를 받아 50점 이상자도 시험에 응시하게 하였는데, 조선 후기에는 점수를 더 낮추어 반제에는 30점, 성균관시에는 70점 시앙이면 응시가 가능하도록하였다.
도기과의 시험방법은 초시에서 삼경 가운데 하나를 스스로 택하고 사서 가운데 둘을 추첨으로 택하여 강경(講經)한 수 제술로 전시(殿試)를 보아 선발하였다.
조선후기 당쟁의 격화로 성균관 유생들이 정치문제에 휩쓸려 권당이 잦아 출석일수 70점을 채우지 못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출처 : 한국고전용어사전, naver지식백과>
재임은 아니지만 재회시에 서기역할을 담당하는 조사(曹司)는 좌중의 최연소자로 하였다.
그리고 당장(堂長)은 일종의 최고위원으로서 재회시에, 모인 총 인원수에 따라 1명 내지 7명까지의 적정수를 선출하였다.
재회는 자치활동을 위해 구성된 학생회로서 비교적 민주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상당히 권위적인 구조를 지녔으며 성균관생간의 위계서열과 정치적인 파당색의 반영이 큰 폐해를 낳기도 하였다.
비교적 제한적인 자치였으나 때로는 상당한 힘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재회의 허용은 선비기질의 함양을 위한 유생 우대정책의 일환이었으며, 재회는 조정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또한, 자유스러운 분위기는 보장되지 않았던 것 같으나, 일단 재회에서 결정된 사항들은 공적인 것이 되어 외부의 간섭에도 굴하지 않고 지키려는 태도를 보인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정치적인 훈련의 한 과정으로서 위계질서의식이 내면화되는 모임이기도 하였다.
이는 예(禮)라고 하는 성리학적 특징의 차별적 사회화가 성균관 유생집단 내부 간에도 철저히 적용되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유소(儒疏)는 상소행위로서 여론을 조성하는 것이며, 대체로 시비를 가리는 비판적 의사표시행위였다. 세종때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고종때까지 80여회 이상 일어났던 것으로 실록에 나타나고 있다.
유생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유소에서 그치지 않고, 공관, 공재, 권당 등을 단행해 저항하였다.
권당 :
성균관 유생들이 나라일에 잘못이다 싶은 것이 있을 때에 상소를 하고, 그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일제히 성균관을 비우고 물러가는 일.
용례 -- 퇴게선생언행록 유편 의론제사 : 공관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하니, 선생 왈 "역사에 나타나는 것으로 말한다면 아마 송나라때의 권당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관은 그 행위가 임금에게 강요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출처 : 한국고전용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식당에 들어가지 않는 단식투쟁.
원점을 거부하는 의미도 있다.
공재(空齋) : 기숙사에서 나오는 것으로 숙종 영조 때 두 건만 있었다.
공관(空館) : 성균관 유생들이 관을 비우고 물러나가던 일.
성균관 유생들은 국가의 정책에 불만이 있을 경우, 먼저 일종의 집단 휴학인 '권당'을 거쳐 나중에는 각기 집으로 돌아가는 공관을 감행하여 집단의 의견을 나타내었다.
<출처 : 한국고전용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공관을 할 때는 문묘의 신삼문 밖에서 4배례를 하고 떠나는데, 이렇게 되면 대사성 이하 모든 성균관 관원들이 동재 서재에 들어가 숙직을 하면서 문묘를 수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초기(草記, 간단한 문서)로서 왕에게 보고하여 비답(批答, 왕의 하답)을 받은 후, 반교 밖에 장막을 설치하고 학부형까지 동원하여 유생들을 취관(就館)하도록 선유(宣諭, 임금이 자기의 뜻을 신하에게 알림)하였다.
쉽게 해결이 되지 않을 때에는 예조의 관원까지 동원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재임(재회의 임원)은 선유를 받기 위해 일단은 성균관 근처에 머물러야 한다.
일단 공관이 단행되면, 일이 해결되기 전에는 다시 들어오기 힘든 명분이므로 정부는 대개 유화정책을 썼으며, 일시적인 정치적 후퇴를 기하기도 하였다.
권당이 식당불입의 방법으로 불리게 된 것은 현종 대에 이르러서이며, 그 이전에는 공관과 혼용되었다. 즉 성종 때의 공관은 권당으로도 표현되었다.
권당이 발생되면 수복은 지체없이 대사성이나 동지관사에게 보고하고, 즉히 학교당국은 유생들을 명륜당에 소집하여 그 연유를 조사하고 선유를 개시하였다.
이에 응하지 않으면 서면으로 진술하게 하고 이를 토대로 초기를 작성하여 왕의 비답을 청하였다.
이래도 효과가 없으면 마침내 예조판서나 대신을 파견해 선유하였다.
그렇게 해서도 효과가 없으면 방외(方外)의 유생(=4학 유생)들을 임시 모집하여 식당 성원을 채우려고 하였다.
성균관 교육이 성리학적 지배이념의 계속적인 유지를 위해 실시되었던 것이지만, 그 질서가 바른 방향으로 가지 않을 때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이는 성균관이 지배집단의 요구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저항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위치를 정립하려고 한 것이다.
집단시위가 많이 남발될 때는 그만큼 사회문제가 많아졌다는 뜻이었으며, 집단이기주의가 팽배해진 탓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유생들의 자율성이 크게 신장되었던 현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2) 풍속과 문화
성균관 장의가 출타했다가 돌아올 때에는 수복들이 탕평비 앞의 향교(香橋)변까지 마중을 나가는 풍습이 있었다. 동재 서재 방색장(대표)들도 지팡이를 짚고 앞길을 인도하였으며, 이때 재직 7~8명이 무리지어 따랐다. 모두 용모가 아름답고 깨끗하였다.
당대에 이렇다 할 벼슬이 없는데도 전후에서 호위하는 일은 성균관에 장의가 들어올때 뿐이었으며, 이미 동재의 출입문에 들어가고 나면 성균관 유생들도 유건을 고쳐쓰고 창문을 닫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장의가 장의의 방에 도착해야 비로소 재직들의 길게 외치는 '개 창문' 소리에 맞춰 창문을 열 수가 있었다.
기숙사인 동재 서재에 면책(面責)의 풍습이 있었는데, 선배가 후배를 부르면 동재 서재의 재직들이 호출 당한 자가 있는 곳으로 몰려가서 신참을 에워싸고 함부로 성명(이름)을 불렀다. 의복을 잡아끌고 가서 선배의 면전에서 곤욕을 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군대에서 신병 군기잡는 것과 같았다.
면책은 원래 과거급제 서열, 즉 방차(榜次-급제순)의 폐습으로서 고려말기에 권문세가의 나이 어린 제자인 기환자제(綺紈子弟= 좋은 옷을 입은 나이 어린 권문세가 자제들)들이 15~6세에서 17~8세에 과거급제를 하였으므로, 이를 곤욕스럽게 하여 버릇없는 행실을 고치려고 한 것이 그 시초이며, 선조 때 금령을 내렸으나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연려실기술 권12에 의하면, 성균관 유생들은 매년 여름과 겨울에 궐희(闕戱 = 일종의 모의 조정)라고 하는 작은 축제를 열었다. 공자를 왕으로 모시고 동남중서의 4학으로 안자 자사 증자 맹자의 4성을 봉국으로 삼아 마치 제후와 천자의 관계처럼 상재 하재의 학생을 백관의 자리에 앉히는 놀이였다.
이러한 대궐 벼슬놀이에서는 현실의 정치처럼 반사(頒赦 = 반포와 사면)나 견사(遣使 = 사신 파견)의 예도 행하였으며, 모의 과거도 시행하였다.
과거는 4학의 유생으로 하여금 시제에 따라 제술토록 하였으며, 성적을 매겨서 천장급제를 뽑아 창방하고, 때로는 정초(政草 = 정치개혁안)를 크게 써서 대성전 뜰에 대자보로 붙이기도 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순당(巡堂)이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새로 급제를 하고 3일 후 알성하는 날, 알성 후에 급제자 복장으로 권반(勸飯 = 식사개시 구호)에 앞서 서쪽 식당문 출입구에서 시작해 서헌을 한 바퀴 돌고, 이어 동헌을 돈 뒤 동쪽 식당문으로 나오는 습속이었다. 남아있는 유생들에게자랑과 아울러 아마도 잘 먹고 건강해서 원점도 잘 취득했고, 그 덕분에 과거시험에도 합격했다고 하는 감사습속으로 여겨진다.
성균관 유생들에게 능행지영(陵幸祗迎)이라는 습속이 있었는데, 이는 임금이 봄과 가을에 능으로 행차할 때 성밖까지 나가서 지송(祗送 = 지극히 공경하는 자세로 환송함)하고, 또 돌아올 때에는 지영하는 것으로서, 그를 위하여 각방 부목(負木 = 노비)이 전날에 미리 반촌마(泮村馬)를 준비해 놓으면 먼저 타고 나가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생원가 진사가 알성을 할 때 하재생으로 하여금 통알(通謁)을 하게 하였다. 통알은 다른 사람이 알성을 할 때 옆에서 돕는 것이었다.
대성전 앞에 짝지어 서서 서로 흥배(興拜)라고 외쳤다.
만약 대과면 생원과 진사로써 통알을 하였다.
통알의 일은 타인을 위해 시집갈 옷을 짓는 것이다. 통알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출재(黜齋, 퇴학)에 이르게 되는 일인데도 불구하하고 즐겨하지 않았다.
공신과 훈신 자제들에게 주어지는 과도한 특전(門蔭制度)은 학교를 통한 양인(良人)들의 신분상승 기회를 많이 봉쇄하여 상층부의 순환과 세대교체가 원활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했다. 그러한 특전으로 인해 성균관 교육은 좀처럼 활성화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세종후기부터 성균관 교육은 더욱 침체되어 교관직은 실세관리(失勢官吏)의 유배지와 같은 한직으로 인식되었다.
당시 대사성 황현도 사유(師儒)의 도를 대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으며, 교관의 대우가 소홀한 것은 반대로 성균관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진 것이었고 기능이 약화된 것이었다. 유능한 교관이 부임한다고 해도 곧 전직이 되었으며 때로는 환임(還任)을 요구해도 거부되기가 예사였다.
또 성종때에는 성균관 유생들이 교관의 학문적 자질과 인격을 희롱하는 시와 글을 쓰고 체벌에 대한 불만을 품어 권당까지 감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유생들의 반학교문화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지나친 학생중심의 운영과도 무관하지는 않았다. 학생자치권이 매우 강한 교육제도였기 때문에, 교수진들의 권위가 서지 못했던 데에도 그 주요한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반촌과 반촌인
반촌은 일종의 대학촌이었다.
따라서 성균관의 하위문화로서 기능하였다.
여기에는 주로 성균관 소속의 노비(반노, 반인)들이 살았다.
또 때로는 입재하지 못한 유생들이 하숙을 하기도 하였다.
성균관에서는 오락금지의 규정때문에 바둑이나 장기를 둘 수 없었으므로, 향관청이나 반촌으로 유생들이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놀러나오기도 하였다.
반촌은 큰 길을 경계로 하여 동반촌 서반촌으로 나누어지는데, 반촌 동구 서쪽에 하마비가 전석현에 있어 이현대로와 통하였다. 전석현에서 동구에 석교가 있어 정조때에 관기교(觀旂橋, 학교를 방문하는 왕의 깃발을 본다는 뜻) 세 글자를 교두(橋頭)에 새겼다. 시경 노송(魯頌)의 시구에서 그 뜻을 취하였다고 한다.
또 동반촌 언덕위에는 사현사(四賢祠)가 있었는데, 영조의 어필로 되어 있었고, 속종 때의 숭절사(崇節祠)를 반촌 동구에 명하여 세운 것이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진(晋)나라 때의 태학생 동양(董養), 당나라 때의 태학생 하번(何蕃), 송나라 때의 태학생 진동(陳東)과 구양철(歐陽澈)을 모셨는데, 그들은 태학의 귀감이 되는 학생들로서 충언과 직간(直諫)으로 유명하였으며, 충신과 효자의 반열에 들었다.
또한 동반촌 큰길가에는 병자호란 때에 오성십철(五聖十哲)의 위판을 남한산성으로 옮긴 성균관의 수복(守僕) 박잠미, 정신국 등의 정문(旌門)이 있었다.
반촌인은 대개 고려 국학에 소속되었던 노비들의 후손이었다.
일찍이 안향이 국학 부흥을 위하여 사노비 100구를 바쳤는데, 이들 반인은 안향을 옛 상전으로 추모하여 단을 쌓고 그의 기일이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반인은 본래 성균관의 이전으로 개성에서 이주한 자들로서 그 말소리와 곡성이 개성 사람과 같고 여자가 곡을 할 때는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았으며, 남자는 의복이 매우 사치스러웠고 협기가 있었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때는 칼로써 가슴이나 다리를 찌르는 풍습이 있어서 서울 본토인과는 판이하게 달랐다고 한다.
반인들에게 국가에서는 쇠고기 전매권을 주어 현방(懸房)이라는 푸줏간을 경영하게 하였으며, 반인의 관비 소생은 성균관의 재직이 되고, 타비 소생은 서리(書吏)가 되었으며, 재직이 장성하면 수복이 되었다. 그 나머지는 재인화척(才人禾尺)으로 일생을 불우하게 지낸 특수신분 계층들이었다.
보통 반인은 편놈 또는 관사람이라 하여, 소위 재인백정의 신분에 해당하여 궁중의 잡희나 산대놀이 때의 배우로도 출연했다. 이들 노비에 관하여는 이미 선초 태종 7년에 "성균관에 전지 10,000여 묘와 노비 300구를 하사했다" 고 한 것이 있고,
9년에 "성균관 관비로서 시녀가 된 경우는 본래 안향이 반궁에 기증했던 것이기 때문에 환속시키도록 명하였다"라 하여, 관비(여종)는 태종 때 노비를 붙여준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노비를 성전화(成典化)한 것으로, 그 원류는 고려시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식당 공궤(供饋)는 주로 남복 즉 재직들을 썼으나 찬품을 장만하는 것은 역시 여비를 썼고 이 소생들이 재직이 되는 것이었다. 또 재직들은 아침 무렵의 식당ㅇ[서나 재회 시간에 서로 손을 잡고 노래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정원에서 읊조릴 때 노래인지 암송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형태로 옛날부터 시경 녹명장을 유생들로부터 얻어 들은 풍월로써 내려온 것이 있다고 한다.
본래 성균관에 신역을 바치는 자는 반노(泮奴)였고, 신공을 바치는 자는 외거노비였다. 성균관의 노비가 차츰 늘어나자 다른 곳으로 이속시키려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때마다 성균관에서는 "선현(안향)이 기증한 뜻과 어긋난다"고 하며 환속을 요구하였다. 아마도 성균관의 기능이 약화될수록 노비 침탈은 더욱 자주 발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종실록에 의하면, 옛날 태종이 궁내에서 사역하고 있는 한 작은 비자를 보고 "너는 어느 관청의 종이냐" 하니, 답하기를 "양현고의 종입니다"라고 하자, "양현고의 종을 어찌 감히 쓰겠느냐?" 하고 환속시켰다는 일화가 있기도 하다.
문종 1년에 양현고의 비자를 상의원에 이속시켜 침공으로 사역하자, 성균관 지사 김조서가 위와 같은 태종의 고사를 인용하여 요긴한 공장 이외에는 모두 환속시켰다.
예종 1년에는 양현고의 노비를 여러 곳의 잡심부름을 하는 차비노로 차출하고, 성종 5년에 또한 공신노비 또는 다른 관청에 이속시켜 그 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이에 성균관에서는 "본관의 노비는 다른 공천(公賤)과는 달리 모두 안향이 기증한 것인데, 타관으로 이속시키는 것은 선현의 뜻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인재를 양성한다는 뜻에도 어긋난다"고 하며 예조에 이첩하여 모두 성균관으로 환속시켰다.
성균관 노비 환속에 관한 기록 - 성종실록 7년 8월 계유조 -을 보면, 당시 권세가들의 학전(學田)과 노비에 대한 침탈상을 살필 수 있다.
익재공신 여산군 민발이 사패노(賜牌奴)로 성균관 노비 2명을 받았다. 이에 관생들이 '민발일무이(민발은 일개 무인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극렬한 비난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민발은 권세를 빙자해 돌려주지 않았으며, 김순명이 판결사가 되어서 '사패는 왕명이므로 한 번 하사한 노비는 돌려줄 수 없다'고 하여 유생들이 장예원에 제소하였는데, 손순효가 판결사가 되가 나서는 선현이 기증한 노비를 뺏을 수 없다는 정반대의 판결을 내렸다. 그 뒤, 다시 김극뉴가 판결사가 되자 원심으로 되돌아갔다.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성균관 유생 윤속종 등이 불복하는 상소를 올려 판결사 김극뉴를 탄핵하였다.
이처럼 권세가들의 성균관 노비 침탈에 대하여 유생들이 대의명분으로 맞섰으나, 당대의 대학자 서거정은 마침 성균관 지사로 있으면서도 유생들의 상소를 만류하였다는 사실이 전한다. - 성종실록 7년 8월 병술조
성종 14년에는 성균관 노비 4명을 원각사에 이속하였다가 말썽이 생겨 환원시키는 등, 관비를 다른 곳으로 이속한 사례가 많으나, 그 때마다 성균관에서는 노비가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었으므로, 안향의 노비라는 구실을 붙여 성균관에 환속시켰다. 그리고 숙종 원년에는 공씨 성을 가진 7반천역들을 성인의 후예라 하여 모두 해방시켜 주였다.
4) 성역보호와 반동명승
성균관에는 열성조가 우대하므로 순졸이나 금리(禁吏) 등의 경찰과 군 계통 관리도 들어가지 못하였다. 말하자면, 성균관 주변의 반수를 경계로 하여 일반인이 임의로 들어올 수 없었고, 비록 범죄자라고 할지라도 일단 성균관 일원으로 들어와서, 특히 대성전으로 도피할 경우 삼한시대의 소도처럼 포졸들도 이를 체포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인조때는 한 군교가 순찰하다가 성균관에 들어갔었는데, 왕이 그 사실을 전해 듣고 그 군교를 잡아다가 성역 침입의 죄로 다스렸다고 한다.
증보문헌비고 권208, 학교고 7, 잡고, 성균관뿐 아니라 성균관 근처의 반촌까지도 순라졸과 금부리속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금역이었다.
또 명종때에는 살인범을 체포하기 위해 형조서리가 성균관에 난입한 사건이 발생하여 징계한 일도 있었다.
명조실록 권27, 명종16년 1월 계축조
이와 같은 일들은 학원을 매우 신성한 장소로 여겼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며, 그것을 공적제도화해서 공권력이 보호해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울타리 안에서 배우는 지식이야말로 지극히 정당한 지식으로 간주되는 것이었다.
성균관은 내부적인 환경도 건물들과 나무들이 미학적으로 잘 배치되어 그 조경미가 뛰어났다. 주변의 동반수와 서반수도 천연적으로 있는 것이어서, 이것들이 주변의 소음과 격리시키는 역할을 해 성균관 경내는 자연적으로 정숙한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또 그 반수는 유생들의 건강을 위해 습도를 유지하는 측면의 기능도 있었다.
이와같이 지 저 의를 잘 도야할 수 있는 성균관의 교육시설을 둘러싼 반촌의 자연환경은 풍수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환경이었다.
그리하여 반촌의 주변풍광을 이른바 '반동명승'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연경치가 아주 수려하였기 때문이며, 동북쪽의 송동(宋洞), 포동(浦洞), 어정동(御井洞) 일대 -명륜동 일원-는 특히 암벽과 계곡이 잘 어우러져서 복사꽃 피는 봄에는 신선이 사는 세상을 방불케 하여 상춘객이 많았다고 한다.
반동명승에 속하는 것으로서 계성사 서북쪽에는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달고 시원한 샘이 있었는데, 그 샘을 '어정수'라 하였으며 석채(釋菜= 소나 양 따위의 희생을 생략하고 소채 따위로 간소하게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일 )때는 정결함을 보존키 위해 샘을 지키는 관원까지 차출되었다.
그리고 명륜당 뒷편 응봉 기슭의 절벽위에 있는 망향대와 더불어 그 아래 근처의 벽송정도 키 큰 소나무가 많은 최고의 휴식처로서 이름 높았다.
반촌 동쪽 조금 멀리의 흥덕동은 흥덕사가 있었으므로 흥덕골 또는 흥덕동이라고 하였는데, 산수가 매우 맑고 아름다웠으며, 온갖 꽃나무 화려한 누각 큰 연못들이 있어서 봄으로부터 가을까지 꽃들이 연달이 피어 늘 꽃동산을 이루었으므로, 경도십영의 하나인 흥덕골 꽃구경 또는 연꽃구경으로 이름이 났었다.
말하자면 들판에 복숭아나무 버드나무 뽕나무 등이 밀집되어 있어서 하나의 별세계와 같았다. 그리하여 한 복판의 뽕나무밭은 마치 숨어사는 은둔지사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이와 같이 수려하고 청정한 반동명승 속에서 , 역동적인 청장년층에 속하는 성균관 유생들이 동료 및 선후배들과 교제를 나누며 수많은 일화와 추억들을 만들었을 것이로 생각된다.
최근 소풍이나 데이트를 대학 캠퍼스에서 하는 일이 많은 것은 계절에 따라 교정의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학교는 학생들만이 아니라 이제는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는 평생교육의 장이 되어가고 있기에 아름다워야 한다.
왜냐하면, 학교와 학교주변의 풍광은 두말할 것 없이 공부에 앞서서 심신도야와 정서순화에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5) 기타
관비생이 아닌 사량기재생 최항은 세종 16년 별시 대 장원급제하여 세조 대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고 영의정 및 영성부원군까지 되었다.
세종때 석전을 앞두고 치재하던 날 유생들이 반수에서 목욕하다가 지나가던 부녀자를 희롱하여 해당 유생들이 태 40대와 장 80대 처벌 받은 일이 있었다.
성종때와 선조 때에 벽서 사건이 있었다. 각각 특정 교관과 조정을 비방하는 대자보였다.
성종때 궁실의 부탁을 받고 반수에서 어떤 무당이 기도하다가 유생들에게 발각되어 내쫓긴 일이 있었다.
숙종 8년에 강풍에 쓰러진 전내의 살구나무와 늙은 회나무를 위해 위안제를 지냈으며,
영조 31년에도 서쪽에 큰 잣나무가 역시 강풍에 쓰러져 위안제를 지냈다.
은행나무와 홰나무는 각각 학문과 관직을 상징하는 이념적 수목이었다.
대성전 왼쪽의 나무는 삼강을, 오른쪽의 것은 오륜을 상징하였다.
건물 하나하나가 고도의 미학적 구도를 갖춘 예술품이었듯이 나무 한 그루, 초속 하나도 함부로 배치했거나 심은 것이 아니었다.
성균관에서는 각종 하사나 은전에 대하여 가요 송가 전문 등을 바쳐 국왕을 예찬하고 행례하였다.
기타 스님들과 싸운일, 하급관리들과 싸운 일, 유생 간에 싸운 일, 추인(=저주인형) 사건, 부정시험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結 :
조선왕조는 성균관을 매우 중요시 여겨 각종 정미 중흥책을 썼으며, 국가적인 사회교화의 중심지로서 문묘를, 지배계층 후속세대의 생산기지로서 명륜당을 운영했던 것이다.
이러한 최고 학부로서의 성균관을 손색없게 하기 위해서 길지(吉地)의 위치선정 규모의 확대, 교관수의 증원, 겸직을 통한 품계의 격상, 유생정원의 확대, 양현고 재정의 확충, 국왕의 장학정책 등을 통해 그 사회적 위상을 계속 높여갔던 것이다. 여말선초의 시련을 한양에 고려 성균관의 제도를 그대로 옮겨다가 신설한 성균관은 그 출발부터가 고려와는 매우 다른 성격과 모습을 지닌 것이었다고 하겠다.
한편, 국가적 대제인 석전제는 문묘에서 행해지는 사회교화적인 제례로서 으뜸가는 것이다. 예악일치 행사로서 현실사회의 갈등을 해소하고 인간의 심성을 순화시키며, 평화세계를 실현하는 종교적 정치적 수단으로 작용했던 석전제는 제례악의 기능을 또 중요시 여겨 팔일무(八佾舞)와 함께 보는 이들의 마음을 평정케 만드는 최고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항시 참배하고 참여하는 유생들에게는 하나의 교화적 교육과정으로서 기능하였으며, 정치담당 후보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예악교육에 의한 유덕자(有德者)가 되는 통로였던 것이다. 예에 의해 민심을 규제하고 악(樂)에 의해 민성(民聲)을 교화시키며, 이렇게 함으로써 조화를 이루어 지배체제의 유지 존속과 아울러 태평성대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사회교화적인 석전은 유생들에게게 지배적인 가치와 위계질서를 체득시키고 내면화시키는 교화적 교육과정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하겠다.
또, 성균관 교육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궁극적으로는 군자였으나 개인적인 수양차원에서 도덕적 인간의 최고 경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 치인(治人)의 위치에 서야하는 군자였다.
성리학 이념상 민을 자발적으로 순응시키기 위해서는 군자 위치에서의 교화가 필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왕도정치나 덕치주의 모두 치자의 도덕적 감화를 바탕으로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균관 교육의 목적은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유덕한 치자 계급의 양성이 현실적인 교육목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기간의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 이러한 목표들이 현실적인 이익을 앞세워 과거준비에 급급해 단기간의 재학으로 끝나고 말아 교육목적이 불분명해진 채, 과거준비 교육기관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었다.
한편, 교육과정도 강경이냐 제술이냐하는 과거방법의 논쟁때문에 지배집단 간에도 양분되어 정치적인 파당싸움으로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고,
강경과 제술의 머리글자를 따서'講製是非'라고도 한다
과거준비에 급급한 유생들도 우왕좌왕해야 했다.
단순지식의 암기력을 테스트할 것인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응용력을 테스트할 것인가? 하는 것은,
교학기능을 강화할 것인가? 관료양성기능을 강화할 것인가? 하는 관학파와 사림파로 귀결되는 권력기반조성과도 관계가 깊지만, 사회흐름이 혁명기냐 보수기냐 복고기냐 하는 시대적 상황과도 관계가 깊은 것이었다.
이른바 도덕성이 강조되는 혁명기와 복고기에는 단기간을 요하는 강경론이 우세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 상태에서는 성균관 교육의 내실을 기하기가 어려웠으며, 유생들의 현실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속에서는 재학연수가 규정되어 있지 않은 장점을 가지고서도 거관생수를 제대로 늘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과거 응시자격의 변화가 심하고 관직진출의 통로가 다양하여, 각종 특전을 베풀더라도 장기간 거관할 필요가 없는 점도 큰 요인이 되었다.
원점제에 의한 출석평가와 성적평가도 과거와 관계시켜 유생들의 학습의욕을 고취시키는 유용한 내신성적 반영제도의 장점을 많이 갖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권강화를 견제코자 하는 집권관료층의 심리때문에 큰 부흥을 이룩하기 어려웠다.
한편 조선시대의 성균관 유생들은 자치활동을 통해서 나름대로의 힘을 발휘하였다.
재회가 비록 권위적인 구조로서 정부(朝廷)에 의해 이용당한 적도 있었으나, 유생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 세력을 과시한 적이 많았다.
유벌은 재회의 자치적인 법으로서 이른바 '사문난적'을 토벌하는 데 효과적이었고, 성리학적 이념을 수호해 나가는 일에 있어서 이탈을 막을 수 있는 허가된 특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자치활동들이 큰 세력을 형성해 정치 사회적 문제의 해결에 참여하면서 때로는 긍정적인 효과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하면서 성균관의 사회적 위상과 함께 변화되었다.
즉 유생들은 정부에 많은 저항을 시도하여 바르지 않은 정치를 시정시키기도 하고, 정부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가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성균관 유생들의 자기보존욕구와 사회변화와의 충돌이었던 셈이다.
현실정치에의 참여와 교육환경의 개선을 위해 유생들은 유소 공관 권당 등의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때로는 끝까지 그들의 의사를 관철시키기도 하여 나름대로의 단합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사회가 혼란해짐에 따라 집단시위가 남발되면서 순수한 의도도 변질되어 분열을 거듭하고, 명분이나 여론으로서의 공약수를 거의 상실하기도 하였다.
또 유생들의 풍속을 통해서 반학교문화적인 것들을 많이 엿볼 수 가 있으며, 거기서 많은 시사점들을 얻을 수가 있다.
반학교문화적인 것들 중의 하나인 교관천시풍조는 여러가지 정치 사회적 요인 탓이었다.
이는 후기로 갈수록 정치기강의 해이라든가 강력한 교권의 부재, 전란으로 인한 재정의 결핍, 당쟁으로 인한 집단이기주의 풍조, 서원의 발달, 양반수의 증가 등으로 인해 관학교육이 점차 쇠퇴하면서 높아졌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