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눈으로 인생을 투시(透視)하는
희망렌즈의 수필가 윤재천 교수
최원현(수필문학가)
그토록 가슴 두근대며 기다리던 새 천년의 아침해가 솟았다.
2천년마다 세상은 새로운 창조만큼이나 큰 변화가 있었고, 그렇기에 수많은 사람들은 1999년의 마지막에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라는 예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2000년의 아침에 서있고 1천년대에 듣던 새소리와 바람소리와 햇볕 속에 서있다. 그러나 1천년대에서 2천년대에 걸쳐 사는 우리는 큰 행운의 사람들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러한 변화의 때에 나는 '한국수필학연구소'와 '현대수필'이라는 명패가 붙어있는 서초 르네상스오피스텔 902호 앞에 서있다. 윤재천 교수님을 원로 수필가 초대석에 모시기 위해서다.
벨을 누르니 청바지, 청자켓에 모자를 쓰신 윤교수님이 반갑게 맞아 주신다. 안으로 들어가 브라인드를 살짝 들치니 눈 아래로는 서울교대가, 저 멀리로는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근간 수필집 '구름카페'를 연상케 하는 곳, 이곳이 수필의 씨를 고르고 뿌리고 싹 틔워 자라게 하는 윤재천 수필문학의 산실인 것이다.
안은 한 마디로 수필도서관, 수필에 관련한 무엇이든 다 있을 방대한 수필 자료실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발간되는 수필지들이 종류별로 꽂혀있고, 한 쪽 면은 창간호만으로 채워져 있다. 책장을 겹으로 서로 등을 맞대게 하여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자료들을 찾아보기 좋게 잘 정리해 놓고 있는 수필 박물관이었다.
'밤이 깊도록 외딴 방에 불을 밝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자정이라는 시간이 끝이 아닌, 시작임을 알고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불빛 아래 이루어지는 작업 속에서 나는 사물과 인간, 인생에 대한 크고 작은 감동과 조우하기를 기도한다. 정신적 삶과 죽음은 생활의 중량감보다 감동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수필집 '구름카페'의 머리말 중)
온 밤내 불을 밝힌다 해도 아무도 말하지 않을 공간, 그런 공간에서 온 밤내 불을 밝히고 이뤄낸 것들이 과연 무엇일까. 그렇게 만든 것들을 그는 수필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개방하고 있었다.
수필에 대한 애정이야 수필인이라면 다 갖고 있겠지만 그래도 이만한 열정으로 자료를 모으고, 관리하고, 소중한 자료집을 발간하여 비매품으로 보급하는 사명감을 어느 누가 감당해 왔던가. 아무리 맡아도 싫지 않은 책 냄새가 가득한 구름카페(?)에서 손수 끓여 내오신 차를 마시며 윤재천 교수님과 마주 앉았다.
"저는 경기도 안성 봉산동에서 태어나 안성농고를 거쳐 1956년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58년 중앙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상명여사대에서 조교, 강사, 교수를 하다가 80년부터 중앙대학교로 옮겨 교수를 했습니다.
수필집으로는 74년에 낸 <다리가 예쁜 여인>으로부터 87년 <나뉘고 나뉘어도 하나인 우리를 위하여>까지 7권을 내었고, 11년만인 지난 98년에 <구름 카페>를 냈는데 제일 가치도 있고, 또 가장 많은 땀이 배인 수필집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전에는 작품 위주로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근래 들어 문학 이론에 관한 것들을 많이 쓰게 되어 <세계 명수필의 이해>(81), <수필작품론>(96)을 비롯하여 <여류수필작가론>(98)과 이번에 <현대수필작가론>(99)을 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의 처음 수필집 제목들엔 모두 '여인'이 들어가 있고, 최근 수필집 제목은 '구름 카페'인데 아무래도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만 같았다.
" 처음 수필집 제목이 <다리가 예쁜 여인>이고, 4권까지에 여인이 들어가 있는데 모두 상명여대에 있을 때 낸 것들입니다. 상명여대는 들어가는 곳이 언덕길이어서 출근을 하다 보면 지형적인 영향으로 학생들의 다리를 안 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수필집의 제목은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유난했고, 여인은 바로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고 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인 것입니다. 여인이란 제목으로 7권까지 쓸 생각이었는데 4권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구름 카페>는 제가 카페에 대해 큰 의미를 두고 있었어요. '레마르크'의 <개선문>에 나오는 '푸케' 카페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만나 사랑과 문학을 나누던 '드마고' 카페처럼 나도 그런 카페를 갖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문학상을 만든다면 나는 '카페 문학상'이라 할겁니다. 시상은 한 사람만 하고, 시상식도 카페에서 하되 오는 이들은 장미 한 송이씩을 가져와야 입장이 되게 하고, 혹시 '구름 카페'란 카페가 생긴다면 그곳에서 하면 더욱 좋겠지요. "
윤교수님은 수필작품뿐 아니라 수필 이론이나 수필평론에서도 한국문단에 큰 기여를 하고 계시다. 현재 한국수필문학회와 현대수필문학회의 회장과 한국수필학연구소 소장, 현대수필 발행인 겸 주간, 국제펜클럽 및 한국문인협회 이사로 계시지만 이미 그간의 기여로도 노산문학상, 한국수필문학상, 한국문학상을 수상하셨다.
윤교수님은 참 멋쟁이시다. '살아가는 일에서 멋이 상실된다면 그것은 건조한 사막을 혼자 걸어가는 나그네의 힘겨운 발걸음과 같은 것이 되고 만다' 그는 은은하게 멋을 품겨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은 더 큰 매력이기도 하다. 천천히 따라 적어도 될 만큼 또박또박 말씀해 주시는 모습은 자상한 아버지와도 같다.
" 자녀는 아들 딸 남매를 두었는데 아들은 여주대학 기계과 교수로 있고, 딸과 사위는 모두 의사로 하나병원 소아과 과장과 내과 과장으로 있습니다.
나와 문학과의 인연은 내 대학원 석사 논문이 '12가사 연구'였고, 학교로 원고요청이 오면 대개 수필류의 글들로 쓰게 되었는데 1969년 현대문학에 수필 '만년과도기'를 발표하게 되면서부터 수필가로 불러 주더군요. 상명여대 국어국문학과장으로 있을 때는 수필을 교과목으로 채택하는 등 수필과는 아주 자연스레 관계가 맺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해로 인하여 큰 인간적 배신을 겪게 되었던 것이 아픈 기억으로 잊을 수가 없고, 행복한 기억은 제자들이 좋은 글을 발표했을 때 가장 행복감을 느낍니다."
교수님은 현대문학에 썼던 <만년과도기>와 최근에 낸 수필집의 <구름카페>, <바람의 실체>, <정관의 세계>, <청바지와 나> 등을 대표작으로 들어 주셨다. 그런데 수필에도 있지만 교수님이 유난히 청바지를 좋아하시는 이유가 궁금했다.
"지금도 청바지를 입고 있지만 사실 청바지만큼 편하고 실용적인 옷도 없어요. 입기도 자유롭지만 무엇보다도 언제든 가방만 하나 들면 떠날 수 있는 옷차림 아닌가요?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헝가리의 수학자인 '폴 에어디쉬'는 83세로 사망하기까지 결혼도 않고 가방 하나만 가진 채 평생에 1,475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70세가 넘어서 그는 말하길 자기는 한번도 여자를 안아보지 못했다고 말하더랍니다. 하루에 19시간씩 수학문제만 풀었답니다. 자기 삶의 전부를 자신이 하고싶은 일에만 몰두할 뿐 다른 것엔 신경을 끊어버리는 자세, 내가 청바지를 즐겨 입는 것도 편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폴 에어디쉬'가 아무런 거침없이 자기 하고싶은 데로 살았던 것처럼 나도 언제든 내가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생긴다면 가방 하나만 들고 미련 없이 새로운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는 곧 자유로움의 상징적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청바지를 입은 윤교수님을 뵈면 젊은이보다 더 당당해 보인다. 꼭 '아무데나 주저앉아 하늘의 별을 헤아리고,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 모여 사는 곳을 향해 힘껏 이름이라도 불러보기 위해서'일까. 아닐 것이다. 오히려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탈출의 동반자요, 동조자다'라는 고백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아직도 가슴속에 끓고 있는 젊은이보다도 더한 혁명과 해체와 변화의 욕구는 20년 전 청바지를 선택하던 날 그의 나이를 멈춰버리게 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 그런 정신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열정 곧 힘의 원천이 되지 않았을까?
1992년 봄 계간 <현대수필>이 태어났다. 1994년 '한국수필학연구소'가 설립되었다. 그의 새로운 것을 향한 쉬지 않는 시도의 결과였다.
" 나는 술이나 담배를 안합니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를 수집하는 것에 취미가 생겼어요. 책이라던가 민속자료들을 모으곤 했는데 담배도 피우지 않으면서 파이프를 1천개나 모으기도 했지요. 그런데 학교를 그만 두고 나니 35년간이나 수필학 강의를 했는데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보다도 정말 좋은 수필 잡지를 하나 만들어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계간 <현대수필>이 32호가 발간되었고, <隨筆學>은 비매품으로 6집까지 내서 전국의 필요한 곳에 모두 보내어졌다.
" 좋은 수필이란 독자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수필입니다. 채색미학 개념으로 보면 흰색도 10종이 넘듯이 수필도 자기만의 수필, 실험정신이 있는 수필이어야 하며, 수필도 상상력을 가져야 합니다.
수필은 독자를 의식하면 안됩니다. 세계적인 과학자인 '프랑소와 자코부'는 '과학의 젖줄은 신화적 상상력'이라고 했습니다. 곧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릴 때는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 들에 나가 쓰디쓴 고돌빼기를 캐다 먹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돈 있는 사람들이 고돌빼기를 먹습니다.
수필이 오히려 시나 소설까지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필문학의 세계화 조건은 먼저 비평이 따라야 하고, 둘째는 젊은 독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젊은 수필가가 있어야 하겠고 이러한 조화를 이루는 작업-극치-을 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필이 중년의 문학이라고 해서 젊은 층 독자도 없고 젊은 층 작가도 없다면 결국 수필은 온전한 문학으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
윤교수님의 생각은 늘 파격적이다. 그러나 그 파격 속에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마그마처럼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이 꿈틀대고 있음을 본다.
" 평론은 긍정과 부정을 함께 하는 비평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비평을 통해 서로 경쟁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선 학파가 형성되어 건전한 발전적 경쟁이 이뤄져야 하고 서로 비판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수필의 세계화는 서정수필만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혹독한 비평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을 합니다. 1991년 97세의 나이로 우리 나라를 방문했던 세계적 현대 무용가 '마샤 그레이엄'이 휠체어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렸습니다. 그에게는 가장 사랑하는 제자로 '머스 커닝햄'이란 세계적 무용가가 있었는데 그가 스승의 무용에 포스트 모던 댄스로 반기를 들었습니다. 기자가 그 일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때 마샤 그레이엄은 '나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나는 새로운 것을 탐구할 뿐 과거엔 집착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감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의 차이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모든 일을 감성적으로 처리하다 보니 정에 얽메이게 되고 그런 정과 의리는 불법으로 연결되게 됩니다. 센티멘탈리즘은 문학의 발전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서정적인 수필은 곧 나르시시즘이 되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사람들은 '들으라, 비교하라, 자기 것을 만들라'고 말합니다. 곧 변화요 발전인 것입니다. 서정적인 수필에만 관심을 갖다보면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되고, 센티멘탈리즘에 빠진 문학이 되면 발전이 없게 됩니다. "
윤교수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저 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무언가 새로운 변화가 눈에 보일 듯 다가오고 내가 그 주체가 되는 것 같은 생각까지 들게 한다. 윤교수님께 우리 한국수필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또 우리 수필문학 발전을 저해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여쭈어보았다.
" 이제 수필도 젊은이의 문학이 될 수 있도록 해야하며 그러기 위해선 젊은 작가가 배출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합니다. 따라서 과감한 용납이 필요합니다. '잭슨 폴록'이라는 네델란드 출신의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1950년대 베니스 비에날레에 그림을 전시했는데 초현실주의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그림 곧 액숀 페인팅을 선보였습니다. 당시엔 호응을 받진 못했지만 그것이 60년대에 바로 신대륙으로 건너가 미술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수필도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문학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답이 없는 것이 예술입니다. 시대에 따라 정답은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승은 자기를 뛰어넘는 제자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수필가는 많은데 수필 독자는 없다라고 말합니다. 1907년 '피카소'가 27세 때 파리의 자기 화실에서 그림 전시회를 가졌습니다. 가로 세로 각 6미터나 되는 그림엔 여러 명의 여인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한 여자는 앞을 보고, 한 여자는 옆으로 보고, 다른 한 여자는 뒤를 보고, 한 여자의 눈은 비뚤어져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때 선배인 '마티스'와 친구인 '브락크'도 참석했는데 그들은 이것은 그림이 아니고 케리커쳐라고 하며 혹평을 하고 화를 내며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 그림이 바로 '아비뇽의 처녀들'인데 현대회화의 기원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수필에도 메타수필과 같은 새로운 비평의 시대가 열려야 합니다. 나는 스승을 배신하라고 말합니다. 학문적 성공을 위해서 학문적 발전을 위해서 새로운 변화의 시도는 배신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은 바람직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해방전 김덕환이란 평론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문학에는 비평이 없다. 그래서 서양문학에 뒤떨어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백철 선생도 비평이 없기 때문에 한국문학은 50년, 60년 뒤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서양 에세이를 염두에 두며 수필을 써야 합니다. 오래 전 국제 펜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되었을 때 펜 회장이 한국의 대표적 에세이스트가 누구냐고 하며 그의 작품을 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작품을 읽은 후 말하길 좋은 작품이긴 하지만 아이들이나 좋아할 감성적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계화를 지향할 수 있는 수필은 서정적인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현대수필>에도 필진 52명중 현대수필 출신은 12명뿐이고 타지 출신 40명에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출신지의 벽부터 허물어야 발전할 수 있습니다. 안으로만 가두지 말고 밖으로 내보내야 경쟁력도 생기고 그래야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젊은 피를 수혈하는 수필문학으로 젊은 독자의 근접을 막지 말아야 합니다. "
젊은 피의 수혈, 과연 체험의 문학이라고 하는 수필에도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 수필이 중년의 문학이라고 규정 짓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수필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중 하나가 바로 수필은 어른의 문학이라고 하니까 젊은이들이 접근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시나 소설은 젊을 때 쓰고 나이가 들어서 수필을 하려고 하니까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석사, 박사 논문도 수필에 관한 것은 별로 없지요? 모두 시나 소설에 관한 연구잖아요? 내가 한국수필학연구소를 만들고 '수필학(隨筆學)'을 펴내어 각 학교로 보내주고 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이제는 조금씩 수필에 관한 것도 늘어나는 것 같아요. 수필에 젊은 피를 수혈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뜻이예요. "
수필은 만남의 문학이요, 공감의 문학이요, 체험의 문학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필도 문학인 이상 무한한 상상력을 요구한다. 나의 작은 체험이 문학으로 승화되어 독자에게 무한한 상상의 공간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문학의 사명인 감동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생산적인 형식들의 노예가 되어 있다. 문학을 포기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윤교수님은 기존의 중년 이후의 나이에 어울리는 사색적이며 유머와 위트가 있는 문학의 수필을 반박했다. 오히려 연령을 의식하지 않고 패기가 있고, 참신한 젊은 작가가 참여할 때 수필의 발전을 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수필계에도 대변혁이 필요하며 그 대안으로 메타(meta)문학, 메타수필을 주장하고 있다. 기존의 문제점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강구된 문학계의 새로운 움직임인 메타문학, 메타수필이야말로 새 21세기를 수필의 시대로 열 수 있다고 확신했다.
윤재천 교수님과의 만남은 젊은이들에게 크고 씩씩한 날개를 달아주는 계기뿐이 아니라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있는 기성 수필인들에게도 분명한 방향 제시가 되고 있다.
지금은 원고지에 작품을 쓰는 사람보다 컴퓨터를 이용하는 숫자가 월등히 많아졌고, 눈으로 읽기만 하던 문학에서 듣는 문학, 보는 문학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젠 사이버문학 시대이다. 그런데도 21세기는 수필문학의 시대라고 말하면서 정작 수필문학가라고 하는 우리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하고 있다. 무수히 많은 독자가 우리를 향하여 욕구불만을 표출하고 있는데도 아무 것도 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 독자들은 기다리지 않는다. 쉬지 않고 새로운 것을 향해 움직인다.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에 작가보다 독자가 앞서있다면 작가로서의 존재가치는 이미 상실한 것이지 않은가.
윤재천 교수님과의 3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마치 미래의 세계 공간을 체험하고 나온 것만 같다.
'장식품은 진귀한 것이라 해도 체온이 없는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며 '젊은 노년으로 늘 청바지처럼 질긴, 구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고싶다.'는 윤재천 교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새로운 작법의 시도, 생활문학으로서 독자에게 다양한 사색과 인생을 새롭게 음미하도록 도와주는 수필가로서의 사명을 뜨겁게 인식케 해주었다.
희망 가득한 가슴이 되어 문을 나서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공해로 잿빛이 되어버린 저 하늘을 원래의 맑은 하늘로 회복시켜야 하듯 나와 우리의 가슴을 맑히는 수필을 써야겠다는 의지가 또 하나의 희망을 불러오고 있는 것 같다.
하늘 한 쪽 빌딩 끝으로 눈썹 같은 달이 떠있었다. 아직 달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하늘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겨울 바람이 오히려 상쾌하다. < 수필과비평> 2000.1.2월호/원로 수필가 초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