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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유영모
1. 유영모와 함석헌
1901. 3. 13 평북 용천~1989. 2. 4 서울.
종교인·사회운동가.
함석헌 (한국 종교인·사회운동가) [咸錫憲]
함석헌 /함석헌
1916년 양시(楊市)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 재학중 3·1운동을 맞아 당시 숭덕학교 교사인 함석은에게서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평양에 배포한 사건으로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1921년 정주 오산학교에 편입하여 1923년 졸업했다. 이때 민족주의자인 안창호·조만식·이승훈 등의 영향을 받았다. 1928년 도쿄[東京] 고등사범학교 문과를 졸업했으며 1927년 도쿄에서 김교신·유석동 등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유학시절 일본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金監三]의 성서집회의 영향을 받아 이후 무교회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 1928년 귀국 후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40년에 평양교회 송산리 농사학원장을 지냈고, 1942~43년 고향인 용천에서 〈성서조선〉 필화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45년 평안북도 자치위 문교부장을 지냈고, 1947년부터 학교와 단체를 상대로 성서강론을 했다. 1958년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인한 필화사건은 자유당 시절의 대표적 필화사건이다.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종교인으로서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등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1961년 7월 〈사상계〉에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5·16군사정변에 해한 한국에서의 첫 비판을 발표해 또다시 필화를 입기도 했다. 1960~89년에는 퀘이커교 한국대표로 미국 국무부의 초청을 받았다. 1970년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10여 년 간 발행인·편집인·주간으로 있으면서, 1980년 1월 폐간당할 때까지 여기에 발표한 많은 글과 강연 등을 통해 민중계몽운동을 폈다. 1984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고문을 역임했고 1985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추천받았다. 제1회 인촌상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32~33 : 뒤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개제)·〈역사와 민족〉(1964)·〈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1984) 등 다수가 있다.
풍류도인 함석헌
유 동 식
1) 신천옹(信天翁)과 ‘한’님
⑴ 하늘만 믿은 바보새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은 자신의 호를 만든 일도 없고 또 누구에게서 지어 받은 일도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여 함석헌 ‘옹’(翁)이라 했다. ‘옹’이란 칭호에 부담을 느끼던 함석헌은 ‘신천옹’(信天翁)이라는 새 생각이 났다. 일본사람들은 이 새를 “바보새”라고 부른다. 그런 뜻에서 자신은 하늘만 믿고 산 바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떤 때에는 호 아닌 호로 스스로 바보새, 아니면 신천옹이라고 하는 때가 있었다. 아무리 실패는 했더라도,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오느니만큼 하늘을 믿었다고는 할 수 있기 때문이다.”(『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p.308).
1907, 「신학월보」에 “성산유람기”를 연재한 최병헌은 그 글에서 불자를 “원각”이라 하고, 유생을 “진도”라 부르고, 도사를 “백운”이라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신천옹”이라고 했다. 신천옹이라는 새는 오리같이 물위에 떠다니되 입은 항상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을 뿐 물 속의 고기를 탐내지 않는다. 어쩌다 하늘로 뛰놀던 고기가 입에 들어오면 그것으로써 굶주린 창자를 달래는 바보새다. 신천옹은 “사욕을 거절하고 천명에 순종하는지라”그리스도인을 불러 신천옹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하늘만 믿는 바보새 신천옹”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국적 전통인 것 같다. 바보새 신천옹에게는 그를 서게 한 두 다리가 있다. 하나는 한민족이요 또 하나는 기독교이다. 신천옹은 “어려서부터 가문적으로 강한 민족주의와 기독교 교육 속에 자랐다.” 한국과 기독교, 기독교적 신앙에 의한 민족구원이라는 것이 신천옹의 일생을 이끌어 간 목표요, 이념이었다.
그에게는 민족과 기독교를 묶는 하나의 개념이 있다. 곧 ‘한’인 바 우리 민족은 ‘한’족이요, 성서 전체는 ‘한’님에 대한 증언이다. ‘조선’은 나라 이름이고, ‘한’은 민족의 이름이라고 한다.(같은 책, p.42). ‘한’족의 신앙과 유래에 대해 신천옹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천지의 주인인 동시에 또 민족의 조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믿었고, 정치는 곧 그를 섬기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하늘과 관계 있는 말이다. 하늘은 ‘한울’인지 ‘하날’인지 그 분명한 것은 알 수 없으나, …… ‘한’ 혹은 ‘칸’인데, 수의 하나를 표하는 동시에 또 크다는 뜻이다. ‘한’과 ‘큰’이 한 말일 것이다. 한자로는 한(韓)·간(干)·한(汗)·환(桓)으로 썼으나 음을 표했을 뿐이다. 이 ‘한’ 혹은 ‘?阪?이 우리 정신 생활의 등뼈다. 우리 사람은 한 사람이요, 우리 나라는 한 나라요, 우리 문화는 한 문화다. 그리고 그것을 인격화하여 대표하는 것이 한님 곧 하나님, 환인(桓因)이다.”(『뜻으로 본 한국 역사』, p.105).
이러한 ‘한’의 본체를 최치원은 풍류도라 했고 풍류도는 유·불·선 삼교를 포함한 포월적 양상을 가진 것이라 했다. 민족주의에 투철한 신천옹에게는 민족적 영성인 풍류도가 그의 얼이었고, 그는 자연히 포월적인 ‘한’의 자리에서 기독교와 종교를 보게 되었다. 신천옹의 일생을 지배한 경전은 기독교의 성서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유교의 사서를 읽고, 불교의 경전들을 읽었으며, 노자와 장자를 읽었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한’의 진리를 발견했다. 그의 자리는 포함삼교한 ‘한’의 자리였으며, 그 자리에서 성서를 해석했고, 또한 성서의 눈으로 동양 경전들을 해석했다.
‘한’족으로서의 주체적인 입장에서 동양 사상과 서구 기독교 사상을 소화하고 수용한 것이다. 말하자면 두 사상의 지평융합을 통해 신천옹의 신앙 세계는 넓은 우주로 확대되어 갔다. 따라서 전통적인 기독교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과 종교의 기본 틀은 여전히 기독교였다.
⑵ 신천옹의 기독교 신앙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함석헌이 기독교에 접하게 된 것은 그가 기독교에서 세운 덕일소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그는 아홉 살에 이미 학습과정을 마쳤으나 당시로는 아직 부모님이 믿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세례는 받지 못했다. 교회는 보수적인 신앙을 가르쳤으며, “주일날은 어른을 만나도 절을 해서는 아니되었다.” 제사떡을 먹어서도 안되는 것은 물론이고, 주일날에는 나들이를 가는 것도 금했다. 어린 함석헌은 교회의 가르침에 누구보다도 충실히 복종하려고 했다.
함석헌이 3·1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은 그가 평양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였다. 그로 인해 학교를 중단했다가 2년 후에 민족학교인 오산학교에 편입하여 1923년에 졸업을 했다. 이 기간에 그의 생각과 신앙에는 변화와 성장이 있었다. 첫째는 3·1운동을 통해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생긴 일이다. 그때부터 “무엇을 가지고 우리 나라를 건지느냐 하는 문제”로 번민하기 시작했다. 둘째로는 오산학교 교장 유영모 선생을 만난 일이다. 그에게서 그는 깊이 생각하며 성경도 읽고 신앙생활도 해야 하는 법을 배웠다. “그때까지 교회에서 배운 것은 기독교라는 한 개 형식이었다.”(『전집』4, p.190)
오산 시절에 그는 비로소 책을 읽자는 생각이 들어, 세계 명작들을 읽었다. 그 중에도 크게 영향을 받은 책은 H.G.웰즈의 『세계문화사대계』였다. 역사에 대한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나, 진화론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된 것도 다 그 영향이었다.
1923년 봄 그는 진학을 위해 동경으로 갔다. 그는 철학을 하던가 아니면 미술을 전공할 생각도 해 보았다. 고등학교 시절엔 윌리엄 브레이크도 읽고, 미술 강의록을 보며, 스케치장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몰고 간 것은 민족 교육이었다. 3·1운동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는 동경에 도착한 해 9월에 관동대진재와 일인들의 한인 대학살의 참상을 목격했던 것이다. 한민족에게 급한 것은 민족을 일깨우는 교육이라 생각하여 그는 다음해 동경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동경고사 시절에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이는 무교회주의의 창설자 내촌 감삼이었다. 김교신의 소개로 매주일 그의 성서연구 모임에 참석하여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다시 배우게 된 것이다.
내촌은 “교회 안에 있는 형식과 거짓에 견딜 수 없어서 뛰쳐나와 독립 전도를 시작했는데, ”“그 특색은 성경을 중심으로 삼고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하는”데 있다. 그는 특히 두 개의 J를 사랑한다고 했다. 하나는 Jesus고 또 하나는 Japan이다. 내촌의 강의를 들으면서 함석헌은 그의 오랜 번민이 해결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참 믿음이 곧 애국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그의 신앙은 필시 두 개의 C를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될 것이다. 곧 Christ와 Corea의 두 중심을 가진 타원형의 신앙이다. 그리하여 그는 “크리스챤으로 서서 나갈 것을 결심”하는 데 이르렀다.(“이단이 되기까지”,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우리 나라와 민족이 살 길은 참 믿음에만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귀국한 함석헌은 1932, 33년에 걸쳐 동인지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했다. 그의 신앙은 내촌에게서 눈떴지만, 한민족의 독자성을 바라보는 그의 신앙은 내촌을 벗어난 주체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 신앙이 한민족을 살릴 뿐만 아니라, 한민족이 세계를 살리는 중책을 지고 있다는 신앙을 천명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조선사람의 손에 세계 운명이 달렸다는 신념을 가지지 못했다면 저의 신앙은 껍질이요,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러한가? 우리는 세계의 불의를 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계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무교회 신앙과 조선”『전집』3, p.130).
기성교회에서는 무교회주의자들을 이단으로 몰아세웠다. 특히 “민족정신, 장로파의 특사로 자임하는 김인서” 같은 이가 가장 심했다. 신앙은 심령의 문제요, “나와 하나님 사이는 직접적인 문제인데 항상 교회란 우상이 그 중간에 선다.” “나는 그런 종교에서 이단이란 말 들어서 영광일지언정 털끝만큼도 부끄럽게 알지 않는다”(“이단자가 되기까지”)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1953년에 ‘대선언’을 발표했다. 그 몇 절만 적어 본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 있으리오.
그것은 교회주의의 안경에 비치는 허깨비뿐이니라.
미움은 무서움 설으고 무서움은 허깨비를 낳느니라.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
60년대 이후 신천옹은 퀘이커 모임에 참석했다. 퀘이커 신앙의 특징은 기독교신앙의 제3전기를 대표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제1전기가 복음의 생명을 유지 전승하기 위해 교리와 제도를 만들고 형식과 교회의 권위를 주장한 것이라고 한다면, 제2전기는 오직 성서와 믿음만을 주장하던 종교개혁의 신앙이다. 그러나 이것이 또다시 책의 종교, 주지주의나 도덕주의로 전락하게 되자 하나님의 생명을 직접 체험하는 심령의 종교 성령중심의 종교가 주장되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제3전기요, 그 한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퀘이커이다.
퀘이커운동은 “인간의 영혼 깊이에 직접 현존하는 말씀과 빛의 체험, 그 체험을 통한 인간 영혼의 정화와 고양된 절대평화와 자유, 하나님에 ‘관한’말씀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생명 그 자체의 싱싱한 뛰놂을 득중하려는 신앙운동이다”(김경재, “함석헌의 종교사상”, 『씨 의 소리』). 영과 생명과 빛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계시하는 요한복음을 중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천옹이 퀘이커의 신앙운동에 공감하는 것은 이러한 영적 종교체험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공동체 이론이 또한 중요했다. 브린튼의 『퀘이커 300년』을 번역한 그는 자신의 개인 중심적인 종교 이해와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반성하면서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퀘이커들은 역사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고 용감한 태도로 대하고, “자기 걱정이 아니라 세계 걱정을 하기에 힘을 다하고 있다”고 이해했다.(“옮긴이의 말”, 『전집』 15권, p. 357).
개인의 영적인 하나님 체험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면서 신천옹은 그의 말년을 지냈다.
또 하나 신천옹의 신앙 생활을 풍요롭게 한 것은 그의 동양사상 연구였다. 해방후 남하한 그는 성서연구 모임과 함께 자주 노자, 장자 연구 모임을 열었다. 기성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노장을 강의하는 데서 그가 과연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앙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내가 늘 노자, 장자를 많이 말한다고 그런다지만, 내가 내 주님이라 한다면야 예수가 내 주님이지 노자 장자겠어요? 사상으로 한다면 거기 좋은 점이 있으니까 그러지만”(『전집』15권, p.79).
신천옹은 동양사상를 통해 성서를 더 깊이 이해한 이요, 전통적 기독교를 벗어남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에 더 가까이 한 그리스도인이었다.
⑶ ‘한’님과 새 종교
하나님은 ‘한’님이다. 다신이니, 범신이니, 유일신이니 하지만 그건 신을 상대적으로 보는 것에 불과하다. “신이라면 하나일 수밖에 없다.”하나란 수적인 개념이 아니라 “수로써 표시할 수 없는 절대라는 의미의 하나”이다(“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전집』14권, p.249). 하나면서 일체라는 뜻의 ‘한’이요, 일체의 종교를 포함하는 풍류도의 포월적 자리를 의미하는 ‘한’이다. 하나님은 실로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해 계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한 분이시다”(에베소서 4:6).
하나님은 ‘삶의 밑둥’이요, 인생과 존재의 근원이며 궁극적 실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대하려면 대하고, 아니 대하려면 아니 대할 수 있는 이가 아니다.……하나님은 내게 필연이고, 나는 하나님께 대해 필연이다”(“하나님에 대한 태도”,『전집』3권, p.361 f).
하나님은 생명이요 빛이시다. 하나님은 영원히 새로움을 창조해가는 영원한 현재의 생명 그 자체이다. 그런 뜻에서 “하나님은 자람이다. 영원한 미완성이다”(“하나님에 대한 태도”). 창조의 생명이신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요, 따라서 인격적으로 접해야 한다.”요한은 생명을 빛이라 하고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한다(요일 1:5). 빛이 자연계에서는 파동인 동시에 입자로 파악된다. 이것을 종교적으로 이해한다면, 궁극적 실재는 인격적 형태로 체험되기도 하고(기독교), 존재론적 근본원리로 체험되기도 한다(불교) (김경재, “함석헌의 종교 사상”).
“종교란 인간의 앞에 죽을 운명을 던진 신이 또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던지는 말씀의 생명줄이다. 저는 살려면 그 줄에 전력을 다해 매달리는 것밖에 없다”(“존재하는 종교”, 『전집』3권, p.343 ff). ‘한’님인 하나님에게 매달려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종교다. ‘한’의 자리에서 본다면, 하나님이나 진리가 하나인 것 같이 종교의 본질도 하나이다. “종교는 하나 있지 여럿 있는 것 아니다.” 기독교니 불교니 하는 것은 제각기 문화적 전통과 필요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붙인 데 불과하다. 그리고 각 종교는 그들의 한계내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동양 종교를 보고, 동양 종교의 빛에 비추어 기독교를 볼 때 보다 넓게 또 깊게 ‘한’님을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종교는 문화와 시대에 따라 그 문화와 시대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을 재인식하고 재해석함으로써 종교 자체가 변화해 간다.
“종교는 변치 않으면서 또 변해야 하는 것, 늘 그대로 있으면서도 늘 새로와야 하는 것이다.……조물주는 모든 시대를 접견하는 순간 그것을 죽여버린다. 그리하여 자기는 영원히 절대 거룩한 자로 서고 그 앞에는 영원히 새로운 현재의 처녀가 선다”
(“새시대의 종교”,『전집』3권, p.195).
오늘의 세계문명은 과거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향해 급속도로 전개해 가고 있다. 따라서 현대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새 종교를 요청하게 된 것이다.
새 종교의 모습에 대해 신천옹은 세 가지 특성을 지적한다.
첫째는 하나되는 종교다. 하나님은 ‘한’님이시다. “모든 종교는 하나다 하는 것을 거부하는 종교는 앞으로 몰락할 것이다”(“새시대의 종교”). 모든 종교를 하나로 통합한다는 말이 아니다. 세계를 온통 한 집안으로 만드는 새로운 차원의 말씀 위에 선 종교를 뜻한다.
둘째는 이성적 종교이다. 이성이란 “나 이외에 남이 있음을 알고, 물질 이외에 정신이 있음을 알고, 이제 외에 과거와 미래가 있음을 알고, 존재 외에 절대가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이 인간의 본래적인 영성을 아는 것이 신앙이다. 이성을 무시한 신앙이어서는 안된다.
셋째는 통일된 인격의 종교이다. 인간은 영과 육이 하나로 통일된 인격이다. 영만의 종교가 아니다. 하늘과 땅, 초월과 내재가 하나로 ‘뚫려 비침’의 종교이다. 개인과 전체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종교는 믿는 자만의 종교가 아니다. 시대 전체, 사회 전체의 종교다. 종교로서 구원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라 그 전체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라 그 전체다”(“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전집』3권, p.36).
2) 역사와 씨 의 ‘삶’
⑴ 역사의 의미
초월적인 하나님은 우주 안에도 밖에도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구체적인 장소는 우리의 마음과 인간의 집단적 인격체인 역사이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격적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이다.
“밝히 말하자, 하나님은 하늘 아닌 하늘, 우리 혼 안에 있다. 절대의 하나님 그 자체야 우리가 이러니 저러니 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맘에 있다. 정신에 있다. 고로 맘이 청결한 자 하나님을 본다고 했다. 맘은 자주 껍질을 걷어 내야 맑을 수 있다”(“새시대의 하나님”, 『전집』3권, p.247)
예수가 사람을 사랑한 것은 그의 외모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모신 지성소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세리, 창기의 친구가 되신 것은 그들의 가슴 속에 하나님의 새로운 터가 있었기 때문이다”(『전집』3권, p.248)
사람은 우리 안에 모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그의 뜻을 실현하는 데에 인간으로서의 삶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인식하는 개체는 사회적, 역사적 전체를 떠나서는 생존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곳은 사회와 역사이다. “역사 없는 인생도 없고, 인생 없는 역사도 없다.” 하나님이 나타나는 곳은 전체요,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있는 역사이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에는 더러울 듯한데 거기가 좋다고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가신다.”그것은 그 역사를 통해 자신의 뜻을 실현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때문에 역사는 사건들의 나열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 있는 영원자의 섭리와 경륜 곧 뜻의 나타남이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는 하나님의 자기 실현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외아들을 주셨다.” 자기를 한없이 주는 그의 사랑이 역사의 구원이 되고, 원동력이 되고, 원리가 된다(“종교적 사관”, 『전집』1권, p.43).
“하나님은 영이시다.”자유하는 생명의 영이시다. “생명의 근본원리는 스스로 함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하는 정신이기 때문에 지은 그의 세계도 스스로 하는 생명에 이르기를 바란다.……자유하는 생명을 가진 인격을 통하여 나타내기를 쉬지 않는다”(『전집』1:48).
“하나님은 빛이시다.” 공명정대한 정의의 하나님이다. “정의는 공산당에 주어질 것도 아니고, 미군에 주어질 것도 아니요, 조선 민족에게 주어질 것도 아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정의를 사랑하고 행하는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우리가 만일 “정의를 거스른다면 하나님은 이 백성을 다른 혹독한 자의 손에 붙이기를 주저치 않을 것이다”(『전집』9:180∼195).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역사는 영원의 층계를 올라가는 운동이다. 영원의 미완성곡이다. 하나님도 죽은 완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영원의 미완성이라 하는 것이 참에 가깝다.” 역사의 운동은 수레바퀴나 나선의 운동에 비유할 수 있다. 바퀴나 나사는 제자리를 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요, 올라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역사는 반복되는 것 같지만, “영원히 앞으로 나아가는 혹은 위로 올라가는 단 한번의 운동, 곧 뜻을 이루기 위한 자람이다”(“세계 역사의 테두리”, 『전집』1:57f).
생명에는 또 하나의 원리가 있다. 그것은 ‘고난’이 생명을 키우고 승화시킨다는 것이다.
“고난은 결코 정의(情意) 없는 자연현상이 아니다. 잔혹한 운명의 장난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다. 인도의 위대한 혼이 성스러이 말한 것 같이 ‘고난은 생명의 한 원리이다’”(간디).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이다”(“고난의 의미”, 『전집』1:315).
고난은 인생을 씻어 깨끗하게 하고, 고난은 인생을 깊게 만들고 위대하게 만든다.
그런데 신천옹이 본 한국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였다. “한국 역사의 밑에 숨어 흐르는 바닥 가락은 고난이다. 이 땅도, 이 사람도, 큰 일도, 작은 일도, 정치도, 종교도 예술도, 무엇보다도 다 고난을 드러내는 것이다”(“한국역사의 기조”, 『전집』1:72).
이러한 것은 부끄럽고 쓰라린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인 신천옹으로서는 한국의 고난을 역사 속으로 내려온 하늘의 섭리라고 믿고 거기에서 역사의 뜻을 해석했다. 그는 자신의 ‘고난의 사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독교를 믿습니다. 또 사실을 사실대로 알자는 과학을 배운 사람입니다.……기독교의 진리인 고난의 메시아라는 사상 그대로를 역사에 한번 적용해 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고난의 사관’입니다.……성경의 입장에 서서 마치 예수라고 하는 하나의 개인이 인격으로 나타낸 것을 역사에서 하나의 민족에다가 적용해 보자는 것입니다”(“한국역사의 의미”, 『전집』1:383).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인간을 새로운 존재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이제는 우리 한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통해 인류의 새로운 역사를 전개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한 것이 신천옹의 역사 이해였다.
⑵ 씨 의 소리
한국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라고 보았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그 고난을 짊어지고 역사를 이끌어 온 존재는 지배자가 아닌 민중이다. 고난의 역사의 주체자는 민중인 것이다.
신천옹은 민중을 “씨 ”이라 했다. 민중이라는 개념이 사회, 정치, 경제적인 피지배자와 관련된 봉건시대의 산물인데 대해 “씨 ”은 민주주의 시대의 표현이요, 거기에는 보다 철학적, 종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개념이다. 더구나 한자가 아닌 우리말에 의한 주체적 표현이다.
‘씨’는 생명을 내포하고 있어 새로운 생명을 출발시키는 동시에 그것이 자라고 무르익은 후 다시 씨를 열매맺게 한다. 생명의 영원한 순환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씨이다. 따라서 씨는 죽지 않는다. 개체적인 사람은 죽으나 씨로서의 사람이란 존재는 죽지 않는다(“씨 의 제소리”, 『전집』8:273).
‘ ’의 ‘ㅇ’은 극대 혹은 초월적 하늘을 표시하는 것이고, ‘·’은 극소 혹은 내재적 하늘 곧 자아를 표시하는 것이며, ‘ㄹ’은 활동하는 생명의 표시이다(“우리가 내세우는 것”).
“씨 의 은 하늘에서 온 것입니다. 하늘은 ‘한 얼’입니다. 하늘에서 와서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입니다”(“생각하는 씨 이라야 산다,”『전집』8:56)
씨 은 하나님의 생명이 내재하여 우리의 얼이 된 존재이다. “하나님이 현상계에 내려오는 자리가 씨 이다”(“인간을 묻는다”, 『전집』4:340). 씨 이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원형이다.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씨 이다(“씨 혁명의 꿈”). 씨 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그릇이기 때문에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씨 을 통해 일하신다. 그런 뜻에서 하나님과 씨 은 둘이면서 하나이다. 씨 이 역사의 주체자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씨 이 당하는 고난은 곧 하나님이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에 고난의 역사는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고난의 역사로서의 한국역사가 의미를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씨 은 하늘 말씀이 내려온 것이요, 씨 의 운동은 곧 하늘로 올라가는 운동이다”(“씨 의 설움”, 『전집』3:147). 역사는 씨 을 통한 하나님의 운동과정이다. 그러나 씨 은 하나님의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 주체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여야 한다. 이에 대해 신천옹은 씨 이 해야 할 일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씨 이 ‘제 소리’를 내야 한다. ‘제 소리’란 씨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민심이 천심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씨 이 제 소리를 내면 천지가 바뀝니다. 세계혁명을 하기 위해 씨 이 제 소리를 내야 합니다”(“씨 의 소리”, 『전집』14:334). 씨 들이 지금까지 자기네 지배자나 그에게 아첨하는 자들의 소리를 들어왔지만 그것은 온통 협잡의 소리요, 참 소리가 아니었다.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서 씨 은 하늘의 소리인 제 소리를 내야 한다.
둘째는 씨 이 전체를 향해 모여야 한다. 씨 하나 하나는 미약한 것이지만 하나로 모일 때 거기에는 놀라운 생명력이 일어난다. “전체는 부분의 모아 놓은 것보다 크다.” “물체는 분자 모여서, 분자는 원자가 모여서, 원자는 전자 모여서 됐다더라. 자(子)는 알이다. 굳센 힘이 어데서 나오느냐. 씨 과 씨 이 서로 손잡음 아니냐? 힘줄도, 강철도, 바위도 다 보이지 않는 씨 의 악수다”(“씨 의 울음”,『전집』14:340).
셋째는 씨 안에 있는 전체의 소리를 내는 일이다. 부분은 전체 안에 있고, 전체는 부분 안에 있다. 개체 안에 있는 전체야말로 하나님의 소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가 소리를 낼 때 개인으로서는 누구도 할 수 없었던 혁명이 이루어집니다. 그때에 소리가 개인들의 입에서 나와도 그 개인의 소리가 아닙니다. 그 개인을 통해 전체가 직접 외치는 것입니다”(“씨 의 소리”, 『전집』14:335).
⑶ 씨 신천옹
민중을 뜻하기도 하는 ‘씨 ’은 단순히 사회적 어느 계층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씨 은 하나님의 영성이 자신의 얼이 된 ‘ 사람’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그대로의 사람이다. 사회 제도나 문명의 해독에 침식되지 않은 난 대로의 사람이요, ‘맨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꾀 약은 지배층에게 항상 이용당하고 착취당하는 어리석음을 감내하고 산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만을 믿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와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신천옹 함석헌은 씨 이요, 하나님만을 믿고 살아 온 바보새였다.
씨 은 제 소리를 내는 주체적 존재이다. ‘제 소리’란 자기 안에 있는 하늘의 소리이다. 역사는 하나님의 뜻의 실현과정이기 때문에 씨 은 역사의 바닥에 있으면서도 실은 역사의 주체자가 되는 것이다.
씨 신천옹은 ‘제 소리꾼’이었다. 제도적 기성교회에서 기독교를 배웠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를 아니했다. 그는 우찌무라에게서 성서의 진수와 신앙을 배웠기 때문에 그를 항상 존경했다. 그러나 무교회주의라는 틀에 사로잡혀 있지를 아니했다. 그는 한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제 소리를 냈다. 다석 유영모는 신천옹의 존경하는 스승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사상을 반복만 하는 충실한 제자가 아니었다. 그는 스승을 넘어서 제 소리를 낸 씨 이었다.
“씨 의 소리”는 제 소리인 동시에 하늘의 소리이다. 개인을 통해 전체가 직접 외치는 소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씨 의 소리는 어두운 역사에 혁명을 초래한다. 신천옹은 「씨 의 소리」지를 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일생이 바로 ‘씨 의 소리’운동이었다.
씨 운동은 억압된 민중의 해방운동이요, 인간화 운동이다. 따라서 비인간화를 초래하는 지배층이나 기득권층에 대해서는 저항운동이 된다. 저항에는 탄압이 오고, 씨 의 소리꾼에게는 고난이 오게 마련이다. 신천옹의 일생에는 끊임없는 고난이 뒤따랐다.
외형적인 고난만 보더라도, 그는 1940년에 계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평양 대동경찰서에서 일 년간의 옥고를 치루었고, 2년 후에는 「성서 조선」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일 년간 복역했다. 해방되던 1945년 11월에는 신의주 학생사건의 책임자로 소련군 사령부에 체포되어 50일간의 감방생활을 했다. 다음해 12월에 또다시 검거되어 일개월간의 옥고를 치루는 등 고난의 연속이었다. 공산치하에서만이 씨 의 소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월남한 신천옹은 자유당 독재정권 치하에서도 고난을 당했다. 1958년 「사상계」에 투고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 20일간이나 구금당했던 것이다.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삼엄한 계엄령하에서도 즉각 그 잘못을 지적하는 글 “5·16을 어떻게 볼까?”를 「사상계」에 게재했다. 1962년에는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외유하게 되자 이것을 계기로 다음해엔 유럽에 머물면서 간디의 고향 인도를 방문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1963년 박정희가 다시 대통령으로 타고 앉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의 여행계획을 포기하고 민주화투쟁을 위해 곧장 귀국해버렸다.
그가 「씨 의 소리」를 창간한 것은 1970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2호를 간행하고는 인가 취소로 일 년간 정간되고 말았다.
1972년 유신헌법이 공포되자 함석헌은 장공 김재준과 함께 ‘민주수호협의회’의 공동의장으로 추대되어 일선에서 투쟁했다. 1974년부터는 긴급조치법이 연발되면서 신천옹은 계속 연행되고 구금당하는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마침내는 1976년 3월 1일 명동사건이 일어났다.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3·1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신·구교 합동기도회가 열렸는데, 그 마지막 순서로서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이 나라는 일인 독재 아래 인권은 유린되고 자유는 박탈당하고 있다. 이리하여 이 민족은 목적의식과 방향감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고 총파국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이 나라의 먼 앞날을 내다보면서 ‘민주 구국선언’을 선포하는 바이다.”
그리고 박 정권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에 정부는 서명자 11명을 전원 구속 기소했다. 그 선두에 서 있던 이가 신천옹이었다.
신천옹은 저항과 투쟁만을 일삼아 온 것은 아니다. 그의 꿈은 평화를 이룩하는데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몇 개월 전 그는 ‘서울 올림픽 평화대회’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1988년 9월 12일 서울평화선언을 제창함으로써 그의 평생의 한 꿈을 상징적으로 실현시킬 수가 있었다.
3) 수평선 너머의 ‘멋’
⑴ 풍류도인
풍류도는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고, 모든 사람들을 인간화하는 한국의 얼이다. ‘포함삼교’는 풍류도의 양상이요, ‘접화군생’은 풍류도의 쓰임이다. 본체인 풍류도를 ‘멋’이라 했고, 그 양상을 포월적인 ‘한’이라 했고, 인간화 하는 작용을 ‘삶’이란 말로 표현했다.
멋과 한과 삶은 체·상·용 삼대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셋이면서 하나를 이루는 관계구조이다. 그러나 그 실체는 역시 멋이다. 멋의 양상이 한이요, 멋의 쓰임이 삶이다. 돌려서 말하면, 멋은 한과 삶의 창조적 상호작용을 통해 승화된 것이다. 만약 한과 삶을 같은 수평선에 놓는다면, 멋은 그 수평선 너머에 있는 것이다.
함석헌은 오로지 하나님만 믿고 살아 온 바보새였다. 그리고 그가 그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사람의 마음과 역사에서였다. 하나님의 뜻이 마음과 역사를 지배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그러나 마음과 역사가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안에 있으면서도 역사의 수평선을 넘어 있는 세계이다. 초월과 현실, 하나님과 인간의 창조적 만남에서 창출된 다른 차원의 세계이다. 그는 “수평선 너머”에서 이렇게 읊었다.
“바다,
넓이 끝없이 까만
깊이 한없이 아득한
바다 또 바다
저 바다 너머는 또 무엇이 있나?
물결,
앞에도 앞에도 푸른 푸른
옆에도 옆에도 하얀 하얀
물결 또 물결
저 물결 뒤에는 또 무엇이 있나?
……
바다 아닌 바다
물결 아닌 물결
바람 아닌 바람
소리 아닌 소리
거기가 가고파서 그리워서”
신천옹이 그리워하며 추구해 온 곳은 바다( )와 물결(用)을 넘어선 세계였다. “유(有)의 물결, 아득한 수평선”과 “무(無)의 모래밭, 뽀얀 지평선”을 넘어선 세계였다. 그곳은 “유와 무가 녹아들어 한빛”을 이룬 세계이다. 마음과 역사를 넘어선, 그러면서도 종교와 역사가 하나로 녹아든 하나님의 나라요, 예술의 세계였다.
“끝없는 바다 끝없는 모래밭,
그칠줄 모르는 떨리는 교향악,
수평선 지평선 넘겨다보며,
그 서품에 천평선(天平線) 기대고 서서,
어부는 영원히 영원을 내다보더라.”
어부는 예수인 동시에 신천옹이기도 하다. 어부는 “수평선 넘어오는 소식 오직 들으려” 숨을 죽이고 서 있는 시인이다.
신천옹은 풍류도인이요 시인이다. 시는 내 안에 임재하시여 내 얼이 되고 혼정(魂精)이 되신 ‘한’님의 뜻을 읊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뜻을 우리는 여실히 표현할 길이 없어 “바람(風)에 붙이고 달(月)에 붙여”읊을 뿐이다. 풍월과 풍류가 시의 형상이라면, 시인은 풍류도인이다.
우리는 자신과 인생과 세계라는 감옥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 안에 ‘한’님의 영원한 생명의 빛을 품고 살아간다. 이 생명이 시를 낳게 한다. “시를 낳았으면 그 곳은 이미 감옥이 아니다.” 그러나 “시 없는 생활은 참담한 들판이 아니냐?”
“일찍이 이 생명의 뜻을 말하는 시가 있었다. 이 어두운 감옥 속에 비치는 불길이었다. 그는 참 뜻을 말하는 참 시였다. 이 우주의 아들이었다. 하나되는 님이 이 우주의 울타리 그늘에 우는 처녀를 만나 그 속에 넣고 그 속에서 키워낸 아들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보다 더 큰 시가 어디 있느냐? 그 외에 또 시가 어디 있느냐”(“시·신”『수평선 너머』, 6:402).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 예수는 최대의 시요, 시인이다. 그로 인해 세상은 감옥이 아니라 평화의 낙원으로 변한 것이다. 신천옹이 예수를 주님으로 믿은 것은 이 때문이다.
신천옹의 시는 말을 넘어선 믿음에서 그 극치에 달한다. 그는 『수평선 너머』 이후 다시 시를 쓰지 않았다.
“시가 끊어진 곳에야 시가 있다. 산 시가 있다. 가람의 종교를 버리고 인격의 신앙으로 들어가자.……
그만두자, 손을 합하고, 입을 다물고 무릎을 꿇자.
생명의 일이요, 인격의 일이다.
입과 입의 맞음이다.
눈과 눈의 맞음이다.
아니다. 혼과 혼의 녹아듦이다.
거기에는 여러 말이 있을 수 없다.……
시는 지성소에는 없다.……
지성소에는 말이 없다”(같은 글).
⑵ 멋의 아름다움
‘멋’은 풍류도의 미적 표현이다. 풍류도가 한국인의 독자적인 얼이니만치 멋은 한국적인 미 의식이요, 아름다움의 개념이다.
풍류도의 초석은 고대 제례의식에서 보았듯이 노래와 춤으로써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가무강신 체험에 있다. 한국적 아름다움인 멋은 ‘하나됨’에 있다. 이 하나됨에는 두 차원이 있다. 하나는 환경과 어울리는 횡적 차원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수직적 차원이다. 이 두 차원이 다시 하나로 어울린 것이 천·지·인 삼재의 조화를 표시하는 삼태극적 경지이다.
첫째, 멋의 아름다움은 하나를 나타내는 조화에 있다. “조화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됨이다. 전체의 각 부분 부분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잘 어울려 하나를 이루는 것이 곧 조화다”(“아름다움에 대하여”, 『전집』, 5:59).
사람과 사람이 서로 호흡이 맞지 않고 어울리지 않으면 어색하고 ‘멋적어 한다.’ 이것은 사물의 세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옷과 신발은 서로 어울려야 한다. 양복에 미투리를 신은 것은 보기 싫다.
부분의 아름다움은 전체와의 어울림 속에 나타난다. “배경과의 어울림이다.”꽃병을 책상머리에 놓으면 아름다워 보이지만 들판 한가운데 내다 놓으면 보기가 싫다. 반대로 들국화는 책상 머리에 있기보다 맑은 가을 하늘 밑 동산에서 바람에 흔들리며 서 있을 때가 더없이 아름답다. “들국화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그 배경에 있다.”
예수께서 “너희는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신다. 그것은 영화를 누리던 솔로몬의 옷보다 아름답다고 하신다. 솔로몬의 옷이 궁궐 속에서는 곱게 보이지만 대자연의 전당인 들에 나가 서면 한 송이 백합화만 못하다. 시가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놀라운 시인이다.”
둘째, 멋의 아름다움이란 본질적으로 물체나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개념이 아니다. 멋은 인격적이요, 예술적인 미 의식이다. “인생 그것이 곧 한 개의 예술이다.”
인격에 있어서도 “개체는 전체의 한 예술적 표현이다.” 인격의 아름다움도 그가 사는 사회·역사·정신적 세계를 배경으로 삼고서야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격에 있어서는 환경과의 단순한 횡적인 조화가 아니라 절대자와의 종적인 조화 속에 아름다움이 창조된다. 신천옹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배경 중의 가장 큰 것은 사회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정말 큰 배경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온 우주를 배경으로 삼아야 정말 아름다운 살림이다. 배경으로 삼는다는 것은 결국 그 배경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 배경 속에 녹아 버림이다. 잊어버림이다. 하나에다 자기를 바쳐버림이다. 둘을 한 개의 산 전체로 살려 내어 그 산 하나 속에 자기를 다시 발견함이다. 사람은 우주를 배경으로 삼지 않고는 위대할 수도 없고, 하나님과 하나되지 않고는 아름다울 수도 없다”(『전집』, 5:62).
인생이 정말로 아름답고 위대한 혼이 되려면 ‘그이’와 짝하여야 한다. 하나님과 하나이신 그의 아들과 짝하여야 한다. “예수를 짝하여서 아름다워지지 않은 인격이 없다.”
셋째, 멋의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영원히 간직하려면 오직 “그이” 곧 예수님의 가슴에 뛰어들어 그와 하나가 되는 길밖에 없다.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 갈 곳은 오직 한 곳밖에 없다. 인간의 모든 쓰레기와 찌꺼기를 다 받는 바다보다도 넓은 가슴, 모든 더러움, 모든 죄악을 다 태우고 녹여버리는 땅 속보다 더 뜨거운 마음 속, 버릴 생각도 씻을 생각도 다 내버리고, 그대로를 안고, 두 눈을 딱 감고, ……영원한 님의 가슴으로 뛰어드는 일이다.……
너를 보지 말고 그만 보고, 너를 생각 말고 다만 그만을 사랑하고 사모하고 그리워하고 공경하고 그를 위해 애타는 마음을 가져! 그 속에 죽어버려, 녹아버려, 타버릴 생각을 해! 그러면 그가 너를 그냥 두지 않는다. 녹여버리지. 자기 영광의 생명 속에 녹여버리지. 그 생명의 불 도가니에 녹아버린 막달라 마리아의 아름다움을 너는 이미 보지 않았느냐?”(『전집』, 5:68)
“님을 위해 미치자.
미치자 해서 미치리마는
미치도록까지 님을 사랑하자.……
날 구하신 님을 바라보니
그 사랑이 고마워 말로 할 수 없어서
몸을 잊고 매달리고 싶구나……
저 님과 나와 단둘이만 마주 앉으면
꿀보다 더 달고 술보다 더 취해
그저 좋아서 내 맘이 어쩔줄을 몰라해.……
미치자, 미치려거든 크게 미치자.
온 세상을 다 잊고 님께만 맘이 홀려
해 달 새로 은하가로 두루두루 헤매자.……
하늘 보고 미친 불길 하늘 향해 펄펄 오르고,
바다보고 미친 물결 바다 향해 철철 흐르니
님 보고 미친 인생이 님의 품을 향해만 달리리라”
(“님을 위해 미치자”, 『전집, 6:270∼272).
⑶ 갈대의 노래
신천옹은 6·25동란 당시 낙동강 강변의 갈대밭에 나가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갈대를 바라보면서 “인생은 갈대”라고 노래했다. 사람의 일생을 여섯 토막으로 나눠서 그 뜻을 씹어본 것이다. 20년이 지나 70고개를 넘은 그는 다시 이 노래를 되새기면서 스스로 그 해설을 시도했다. 파스칼이 말한 대로 인생은 약한 갈대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힘을 가진 갈대다. 신천옹은 자신 안에 있는 그 힘을 보려고 했다. 갈대를 실지로 발음할 때는 “갈때”라고 한다. 사람이 살다가는 ‘갈때’가 있는 것이요, 그 갈 때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남이 건드릴 수 없는 힘이 있게 된다. 갈대는 “갈 데”라는 소리와도 가깝다. 인생에는 갈 데, 갈 곳, 곧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을 생각하는 데서 또 힘이 나온다. 갈대라지만 ‘대’는 본래 힘이다. 꼿꼿하게 서는 것, 버티는 것, 올바른 것,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대가 센 것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신천옹은 자신의 일생에 비추어 인생을 노래했다. 춘하추동으로도 비할 수 있는 인생을 여섯 토막으로 나누어 읊었다. 어림, 젊음, 일함, 찾음, 깨달음, 날아 올라감이 그것이다. 인생이 가을을 맞이하여 하늘을 우러러 영원을 찾고, 깨닫고, 드디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후반부의 노래를 들어보자.
인생은 굽은 갈대 망망한 바닷가에
물소리 들어보다 쓴 거품 마셔보다
다시금 하늘 우러러 생각하고 서는 듯.
환갑을 맞이할 인생은 굽은 갈대와 같이 이상에 불탔던 갈꽃 머리를 이 세상에 드리우고 세상소리 들어보다 쓴 거품 마셔보며 현실주의에 빠져든 듯하다. 그러나 한 번 하늘의 바람이 불어재치면, 구부렸던 갈대는 다시 하늘을 향해 꿋꿋이 설 수 있게 된다. 하늘의 영원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마른 갈대 꽃 지고 잎 내리어
파린 몸 빈 마음에 찬 물결 밟고 서서
한 세상 쓰고 단 맛이 좋고나 하는 듯.
하늘을 향해 생각하고 찾게 되면 깨닫게 된다. 깨달은 인생은 마른 갈대와 같아 세상적인 영화의 꽃도 부귀의 잎도 다 떨어져 나간다. 파리해진 몸매이지만 세상 욕심이 없어 빈 마음이다. 비면 속이 뚫려서 진리를 알게 된다. 진리란 “상대적인 모든 차별에서 초월하는 것이다.” 그때엔 세상의 쓴맛 단맛이 그대로 다 좋다. 빈부귀천에 구애되지 않고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인생은 꺾인 갈대 한 토막 뚫린 피리
높은 봉 구름 위에 가득한 숨을 마셔
처량한 곡조 한 소리 하늘가에 부는 듯.
인생은 결국 꺾인 갈대, 죽고야 만다. 이 죽음을 이기자는 것이 종교요 깨달음이다. 깨달은 인생은 한 토막 뚫린 피리가 된다. 사람의 몸이 영원할 수 없듯이, 갈대가 그대로 영원할 수는 없다. 갈대는 피리로 바뀌어야 하고, 그 피리에서 나오는 음악이 영원하다. 피리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바람이 통과해야 한다. 하늘의 거룩한 숨 성령을 마셔야 한다.
“예수도 한 곡조 음악이요, 석가도 한 곡조 음악이다. 나의 이 노래는 그 영원한 노래의 한 연습이다.”
신천옹이 평생을 두고 마음에 지녀온 노래가 있었다. 그것은 쉐리의 “서풍의 노래”이다. 그는 1937년에 이 노래를 번역했고, 35년이 지난 1973년에 다시 “서풍의 소리”를 우리들에게 들려 주었다.
“오 사나운 서풍이여
너 가을 생명의 입김이여……
사나운 영이여, 아니 가는 곳이 없는 이여
무너뜨리면서 또 간수해 주는 이여
들어라, 오 들어라!”
바람은 영이다. 사나운 서풍은 아니가는 곳이 없는 사나운 영이다. 가을마다 불어재치는 서풍은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무너뜨린다. 그러나 동시에 여문 씨 들을 실어다 땅속에 고이 묻어, 오는 새봄 싹을 낼 때까지 고요히 간수해 주는 이다.
“내 이 죽은 사상을 마치 시든 잎새처럼
하늘가에 몰아쳐, 새 생명 넣어주려므나.
그리하여, 부르는 이 노래의 소리로,
영원의 풀무에서 불꽃을 날리듯이,
나의 말을 인류 속에 날려 흩어주려무나
내 입술을 빌어 이 깨지 못하고 있는 지구 위에
예언의 나팔이 돼 주려무나!
오, 바람아.
겨울이 만약 왔거든, 봄이 어찌 멀었으리요?”
서풍은 혁명적 창조의 바람이다. 시들고 마른 잎새처럼 죽어가는 세상의 문명과 사상을 휘몰아 무너뜨리고 하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바람이요 영이다.
서풍에 힘입어 새싹을 창조하는 힘은 씨 속에 있다. “모든 시대를 죽음에서 건져 내어 새 문화로 부활하게 하는 영원한 메시아는 씨 속에 숨어 있다. 다만 하늘소리 땅소리가 그 속에서 결합되지 않으면 안된다”(“서풍의 소리”, 『전집』, 5:12).
그런데 구원의 메시아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씨 은 죽음으로써 새싹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인류를 대표한 그리스도가 그러했듯이 우리 한민족은 세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 고난의 역사를 겪어오고 있는 것이다. 고난과 죽음의 겨울이 지나면 부활의 봄이 오게 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늘의 영이요 바람이다.
“오, 바람아,
겨울이 만약 온다면야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를 터득했던 신천옹은 철저한 부활 신앙 속에 살았다. 겨울이 오면 언제나 서풍의 노래, 특히 그 마지막 구절을 생각했다. 인생의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이할 무렵 신천옹은 “서풍의 노래”에서 자신의 스완 송을 그려 보았고, 혹 어리석은 누군가가 자신의 비문을 새긴다면 그 노래의 마지막 귀절을 적어도 좋을 것이라 했다. 그는 부활의 새 봄을 바라보며 인생의 겨울을 맞이했다. (전 연세대교수·신학)
“ 고(古) 함석헌 선생의 저서 [생각하는 백성이어야 산다] 선생께서는 ”문을 꽉꽉 닫는 겁쟁이에게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칼날같이 무섭지만 넓은 벌판에 서서 가숨을 헤치는 사내에게는 동서남북의 바람이 다 음악이다. 문틈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을 원수로 알지만 사실은 너 아니면 너와 네 온 가족이 질식해 죽었을 것이다. 아! 하늘진리 참 시원하구나!“
〈참고문헌〉
1. 『함석헌 전집』, 한길사, 1983.
2. 『씨 , 人間, 歷史』, (함석헌 선생 팔순기념문집), 한길사, 1982.
3. 『함석헌선생 추모문집』, 오산학교 동창회편, 남강문화재단, 1994.
☆ 윗 글은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유동식 지음.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펴냄) 중 “풍류도인 함석헌” 부분입니다. 글쓴이의 동의하에 싣습니다. - 편집실
출처 :하나님 내가 누구죠? 원문보기 글쓴이 : 隸僕
내달 11일 ‘씨알 생명평화 문화제’ ‘씨알사상’을 주창한 다석 유영모(1890∼1981)와 함석헌(1901∼1989) 선생의 철학이 본격 조명된다. 씨알은 민중을 뜻하며 씨알사상은 ‘씨알을 섬기는 민주주의’를 강조한 사상이다. 동양의 유불도(儒佛道)와 기독교를 접목해 독특한 한국적 사상을 세운 다석은 종교와 철학의 생활화를 추구했다. 함 선생 역시 한민족에게 철학과 종교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강조했다. 재단법인 ‘씨ㅱ’은 26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올해 집중적으로 열리는 두 선생 관련 사업을 소개했다. 7월 30일∼8월 5일 서울대에서 열리는 제22차 세계철학대회에서 두 선생의 사상이 다뤄지는 것을 계기로 씨알사상을 대중에게 제대로 알리겠다는 계획이다. 스승, 제자 사이인 다석과 함 선생의 생일은 3월 13일로 같은 날이다. 재단은 이를 기념해 3월 11일 오후 7시 은행연합회 2층 컨벤션홀에서 ‘씨알 생명평화 문화제’를 연다. 기념식과 시 창작 대회에 이어 가수 장사익, 테너 임웅균 등이 참여하는 공연이 펼쳐진다. 5월 16일에는 제1차 ‘씨알사상 포럼’이 열린다. 일본 교토철학포럼의 대표 김태창 박사가 공공성과 민주주의에 대해 강연하고, 전 산업자원부 장관인 김영호 유한대 학장은 씨알사상을 토대로 ‘사회적 책임과 한국 경제’를 발표한다. 재단은 7월 하순에는 두 선생을 포함해 간디, 슈바이처 등 생명평화 철학을 펼친 동서양 인사들을 모두 기리는 ‘생명 평화 축제’를 열 예정이다. 재단은 또 씨알사상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시상하는 ‘씨ㅱ상’을 연말경 제정할 계획이다. 7월 말 열리는 세계철학대회에선 20여 명의 학자가 ‘도가철학과 다석사상’ ‘동서문화의 만남으로서의 함석헌 철학’ ‘함석헌의 평화사상’ 등을 주제로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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