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래(李光來) |
본명 | 이흥근(李興根) |
필명 | 광래(光來) |
호 | 온재(溫齋) |
출생 | 1908년 9월 29일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출생 |
사망 | 1968년 10월 29일 |
| 극작가, 연출가 |
생애 | 1928년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를 졸업 |
1930년 도쿄[東京]고등학교 졸업 |
1933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 3학년 때 중퇴 |
1933년 중앙일보 기자 |
1935년 1월 1일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촌선생> 당선 |
1935년 [극예술연구회], [조선연극협회] 가입 |
1935년 조선일보 기자 |
1938년 중간극(中間劇)을 표방하는 극단 중앙무대(中央舞臺)를 설립하여 극작ㆍ연출ㆍ제작 등을 맡아 활동 |
1942년 제2회 국민연극경연대회 황금좌 <북해안의 흑호> 참가 |
1945년 극단 민족예술무대를 조직해 좌익극단의 통합체인 [조선연극동맹]과 대결하여 우익민족연극운동을 전개, 민족예술을 지켰다 |
1945년 서울시문화위원 |
1947년 한국무대예술원 조직, 예술국장 |
1948년 서라벌예술대학 강사, 학과장 |
1949년 유치진(柳致眞)과 [한국연극학회]를 발족, 간사장 |
1949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 |
1950년 국립극장 전속극단인 신극협의회의 대표 |
1951년 극단 [극협] 대표 |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학과 초대 학과장 |
1955년 한국문학가협회 희곡분과위원장 |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1958년 국제극예술협회 한국지부 이사 |
1958년 소극장 [원각사(圓覺社)]를 중심으로 극단 원방각(圓方角)을 조직하고 소극장운동을 벌였다. |
1960년 한국연극연구소 상무이사 |
1962년 동국대학교 연극학과 강사 |
1962년 한국연극협회 이사 |
작품 | 193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장막극 〈촌선생 村先生〉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촌선생>은 농촌을 무대로 한 사실주의적 희곡이다. 〈촌선생〉을 비롯한 초기작들은 유치진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후기에는 차츰 표현주의적 경향으로 이동했다 |
총 3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는 동안 계몽적 리얼리즘에서 출발하여 낭만적, 신파적인 상업주의 연극을 거쳐 표현주의, 상징주의를 도입한 반사실주의 희곡, 뮤지컬, 심포닉드라마 등을 차례로 실험한 이광래는,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을 추구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
1934년 <지는 해> |
1935년 <촌선생(村先生)> ;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1935년 1월 1일 |
1937년 <석류나무집>, <해질 무렵>, <태양의 집> |
1938년 <항구의 노래>, <아베마리아의 만종> |
1939년 <지새우는 뒷골목> |
1940년 <지하도> |
1941년 <청계천 풍경> |
1943년 <북해안의 흑호>, <아리랑 처녀> |
1944년 <동상(銅賞)> |
1945년 <독립군>, <백일홍 피는 집> |
1946년 <최후의 밤>, <독립군>,) <구원의 모상(母像)>, <청춘의 열정> |
1947년 <청춘산맥> |
1948년 <들국화>, <민족의 전야>, <탈곡(脫穀)하는 미이라> |
1952년 <낙조> |
1953년 <디시 피는 꽃> |
1954년 <이상(裡像)>, <견우와 직녀> |
1955년 <집> |
1956년 <해와 달과 별과>, <반달이 떠있는 새벽> |
1957년 <기류의 음계> |
1959년 <대수양> |
1962년 <고도 있는 인간광장> |
1964년 <한낮에 등불 아래 나비들>, <여명기> |
1965년 <붉은 손들 가운데서>, <남모랑과 준정랑> |
1966년 <지옥문을 열어라〉 |
태평양 전쟁 시기에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개최된 관제 연극경연대회에 〈북해안의 흑조〉를 출품했다. 이 작품은 1943년 열린 제2회 대회에 출품되어 박춘명 연출로 극단 황금좌가 공연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연극/영화 부문에 수록 |
연극이론에 관한 논문으로 〈극시형태론(劇詩形態論)〉·〈제4벽을 모색함〉·〈비극미에 관한 서설적 개관〉<단군신화의 연극사적 고찰> |
평론집으로 〈현대희곡론〉(1982) |
평론 | <연극수난기(演劇受難期)> ; 영화시대.1946년 4월 |
<연극인의 윤리> ; 자유세계.1952년 8·9월 합병호 |
<1955년의 회고(回顧)와 신년에의 희망 : 연극> ; 새벽.1956년 1월 |
<연극감세(演劇減稅)와 희곡단(戱曲壇)의 책임> ; 새벽.1956년 11월 |
<희곡의 이론과 창작> ; 불교지록원 1. 1957년 |
<공중위기(空中危機)에 저항> ; 코메트 26, 1957년 5월 |
<단군신화(檀君神話)에 대한 연극적 고찰> ; 예술원보 4권 1960년 9월 |
<연극예술의 형성미(形成美) : 주로 비극시(悲劇詩)를 중심으로> ; 예술논문집 1집 1962년 |
<제4벽(第四壁)을 모색(模索)함> ; 예술원보 8집 1962년 |
<연극예술의 형태미(形態美) : 주로 무대형상(舞臺形象)을 중심으로> ; 예술논문집 2, 1963년 |
<연극과 문학 : 문학과 기타의 제분야> ; 현대문학, 1965년 6월 |
<유고특선(遺稿特選), 단군신화(檀君神話)의 연극성 고찰 : 토테미즘의 언어학적 견지에서> ; 현대연극 3집 1971년 12월 |
연출 | 1938년 <헬겔랜드의 해적〉 |
1940년 <지하도> |
1941년 <청계천 풍경> |
1954년 <나상(裸像)> |
1959년 <대수양(大首陽)> |
1962년 <고도(孤島) 있는 인간광장(人間廣場)> ; 국립극장 |
1963년 <그 얼굴에 햇빛을> |
1966년 <담배내기> ; 드라마센터 |
<맹진사댁 경사>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
상훈 | 1963년 대한민국문화포장 |
1965년 오월문예상 연극 본상 |
196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
1969년 삼일연극상 특별상 |
묘 |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공원 묘지(묘지번호 No 108899) |
부 | 이무상((舞相) |
형 | 이일래(一來) ; <산토끼> 동요 작곡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