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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 106/조용한 시골마을 냉천(冷泉)에 무슨 일이…
2016년 8월 20일, 시원한 비 한 방울 없이 한달이 다 돼갈까? 지독히도 무더운 여름 끝자락,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봉천리 냉천마을에 난데없는 풍악소리가 왼종일 울려펴졌는디, 그러니까 그게 무슨 잔치인가허먼, 소위 이 동네 출향인사들의 ‘제1회 고향방문의 날’이었단 말이시. 70년대 초중반 인구가 450여명이었다는데(새마을운동, 경지정리에 성대수술까지 하신, 당시 이장 최세태 옹의 증언), 시방은 찌그러질대로 찌그러져 50명도 채 안될, 그것도 맨 과부할머니들이고, 여전히 걸려 있는 돌아가신 가장(家長)들의 문패가 10여집이 넘는, 참으로 요상맹랑한 동네가 바로 이 마을인데, 나의 고향이기도 하여, 참으로 ‘보기 드문 현장’의 적극 참가자가 되어 졸문의 기록을 남기는 행운을 맞으니 이 또한 얼마나 다행인가.
서울향우회에서 40여명이 관광차 1대를 대절하여 새벽바람에 내려와 마이크를 잡은 게 11시. ‘언니, 오빠, 동생, 우리 이 기회에 가족모임도 허게 꼭 그날 와이-” 대전, 광양, 수원, 전주 등 전국 각지에서 호응이 뒤따랐다. 사회자는 일단 편을 갈랐다. 현재 동네에 사시는 분들이 앉아 있는 상태에서 출향인사들이 쭈욱 나래비를 서서 인사를 드렸다. 동네 생긴 이래 최대의 귀빈이 70여명이나 온다는데, ‘늙은 동네’도 1주일 전부터 바빴다. 땡볕을 가린 채양(천막)은 나락을 너는 길다란 검은 비닐포장이 제격이었다. 부모 안계시니 고향 떠난 후 올 일이 없어, 모처럼, 아니 어쩌면 처음 온 사람도 있겠고, 시집간 후 처음으로 ‘없어진 친정마을’을 찾는 사람도 있을 터인데, 기념품으로 무엇을 줄 거나? 젊은 이장(63세)이 몇 분과 고민을 거듭하다, 고춧가루 1kg씩을 정했다던가(이보다 더 좋고 귀한 선물이 어디 있을까). 식탁과 의자를 행사업체에서 빌려오는 등 마음도 몸도 엄청 부산했을 터. 마을 최고령 어르신이 환영사를 하시는데, 기가 맥히다. 짧고도 의미가 깊다. “모다들 객지에서 고생하여 잘 살게 된 것만도 다행인데, 고향을 잊지 않고 찾아줘 반갑고 고맙습니다. 어쩌다 봉개 이 동네에서 최고령인 구십객이 되어 오늘 이처럼 좋은 날을 맞으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우리 다같이 ‘나의 살던 고향은’이라는 노래를 한자락 부릅시다. 노래가 끝나면 우리 동네와 출향객들의 앞날을 위하여 만세삼창을 합시다” 참 멋드러진 환영사에 죽 늘어선 100여명의 박수소리가 요란하다. 향우회 회장님은 “이렇게 늦게 찾아와 인사를 드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매년이 어려우면 2년, 3년마다 마을을 찾아올 터이니, 만수무강하시어 오늘처럼 따뜻하게 반겨주시기 바랍니다” 큰절을 올린다. 어디 큰절뿐이겠는가. 생각하면 가슴이 벅찰 일이다. 우리 생애에 이런 일이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모두 모두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 피어 점드락(저물도록) 가실 줄을 몰랐다. 어디 인상쓸 일이 한 개라도 있을 것인가. 동네에서는 새벽같이 돼지 한 마리를 잡고, 즉석에서 피순대도 만들었다. 이만한 동네잔치가 언제 있었던가. 양로당 복지회관이 오늘처럼 붐빈 날이 있었을 것인가. 군수, 면장, 군의회 의원, 의회 의장, 또 ‘그놈의 군수’자리 넘보는 예비행정가 등 임실군 정치하는 사람들도 ‘때는 요때다’ 인사한다고 여기저기 악수행진이 한창이다. 출향인사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눈꼴 시린 것도 사실이지만,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봐주자.
솔직히 누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투성이였다. 몇 십년 만에 만나 이 노릇을 으째야쓸까? 소개하는 방법은 무조건 어머니 택호를 대야 했다. “제가 오촌댁 셋째아들이구요. 요 옆은 바로 밑의 동생, 그 옆에는 6번인 여동생” 이런 식이다. “새물떡 아시죠? 제가 셋째구요. 아버지 함자가 창자 호자예유. 여기 누나 3명과 우리집은 형님 두 분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100% 참석했구만이라우” “아, 쟈가 긍개 죽은 개 동생이구나. 어디 경기도에서 설계사무소를 채렸다던가, 잘 됐다던디” “야 참, 어릴 적에 들었던 이름들을 다 들어보네” “어쩌면 그러케 얼굴이 하나도 안 변혔냐? 어릴 적 태가 고대로 있네이” “어디서 만나면 알아보기는 허것다이” “씨도둑은 못헌다고 허더만 그 말이 맞네” “자네 봉개 자네 부모들이 생각나네”
남옥이, 숙희, 정희누나, 미숙이, 금주, 혜숙이, 단옥이, 미자, 미령이, 선냄이, 선란이, 혜선이, 보선이, 정혜, 오숙이동생들, 조남이, 재순이, 영주, 금자, 귀자, 유순이친구들, 금순이, 명순이아주미, 길순이, 봉순이, 수냄이아주미, 명자, 기순이동생,순금이, 귀남이, 경남이누님, ...... 누님도 있고 동생도 있지만, 참으로 흔해 빠진 정겨운 여자들 이름이다. 어디 그뿐인가, 남자들 이름을 불러보자. 형님도 있고 동생들도 있지만, 공수형, 진수, 재경이, 동진이, 광익이, 양익이, 기익이형, 재국이형, 재흥이, 재수, 재호, 재인이, 대근이형, 주영이아재, 화용이아재, 종두, 종서친구, 종석이형, 종의형, 종언이형, 종선이형, 태훈이형, 인호형, 왕운이동생, 재선이형, 형주조카, 계영이친구, 재만이, 재준이, 재완이동생, 기수, 성희, 창희형, 강희형, 창익이형, 종열이형님, 명호형님, 수익이형님, 경익이형님, 학용이아재, ,....
삼삼오오, 손을 붙잡고 얼굴을 비비고 ‘하이고메, 50년만이다이“ ”긍개 안죽고 살아 있으면 이렇게 만나는 좋은 날도 있구나“ KBS 이산가족 상봉이 따로 없었다. 사회자가 도무지 진행을 할 수가 없다. 몇 번이고 ‘지방방송 끄라’고 해봤자 쇠귀에 경읽기. 57년생 닭띠들은 신이 났다. 여자 6명 남자 4명, 10명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어찌 인증샷을 찍지않겠는가. 50년만에 처음 있는 일. 오지 못한 동창들을 헤아린다. 그래, 그때 우리가 베이버부머세대라 유독 많았어. 한 동네에서 16명이었으니, 누구는 죽었다던데, 그래, 왜? 어찌 화제가 끝이 있을 것인가. 그 수다 속에서는 그동안 대처에서 살아보면서 겪은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을 터. 어찌 눈물 콧물, 함빡웃음이 없을 것인가. 이장이 주민 소집방송을 하면서 ‘출향민’을 ‘실향민’이라고 해서 한바탕 해프닝이 있었다 하여 모두 웃었다. 택호란 택호는 마을 생긴 이래, 마이크로 거즈반 들먹여지는 것같다. 해명떡, 펭기떡, 금동떡, 금곡떡, 오동떡, 학암리떡, 제월떡, 챙핑떡, 봉국떡, 양지떡, 한암떡, 생기떡, 원촌떡, 고성떡, 자래울떡, 갈매떡, 안해떡, 신촌떡, 목둘떡, 관촌떡 …, 뭔떡의 아들, 뭔떡의 딸 하니까 그제서야 모다 ‘아- 쟈가 가구만. 그려, 지 에미 도싱허네’ 여기저기서 감탄, 탄성의 소리가 이어진다. 댁호(떡)는 대개 친정마을 이름에서 따오니, 인근 임실군 고고샅샅 마을이름이 대부분 나온 듯하다. 서울에서 장만해온 김치와 깻잎김치, 찌개국물로 공기밥 한그릇씩을 뚝딱 해치운 후 곧장 ‘뽕짝 콩쿠르’에 들어간 듯 신청곡이 줄지어 이어졌다. 천막은 둘러씌웠으나 1시부터 5시까지 장장 5시간을 ‘전국노래자랑’식의 막춤으로 일관했으니, 참말로 장관이 따로 없었다. 80이 넘은 할머니들도 신이 나, 도무지 의자에만 앉아 있을수가 없었다니, 아들 딸 며느리들이 대거 내려와 ‘가족잔치’나 마찬가지였으니 왜 아니겠는가. 시도때도 없는 인증샷에 흥이 절로 났다. 우리 국민은 100% 다 가수인 듯, 어찌 그리 구성지게 잘들 부르는지. 환갑이 막 지난 ‘누님 3인조’는 어느새 몸뻬를 빌려 입고 곱사춤을 추는 등 점입가경, 갈수록 태산, 흥미가 진진했다. 그 와중에도 술판은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근황을 묻기도 하고, 덕담을 나누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아, 이게 웬 난리다냐? 삼백육십날 사람 보기도 힘든, 조용한 동네에 풍악이 오후내내 울려퍼지다니. 명절때보다도 몇 배 더 사람사는 동네, 살맛나는 동네가 되었구나. 50만원을 줬다던가, 밴드를 실고 온 트럭연주단도 계약시간을 몇 번이고 넘겨도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런 모임에 몇 곡 더 연주해주는 것은 적선(積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와중에도 서울에서 내려온 아들, 금방 올라가는 아들네를 위하여 호박, 고추, 가지, 깻잎들을 따 꽉꽉 눌러담은 짐가방을 챙기며, 몇 번이고 잘 갖고 가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몇 십년 만에 마을을 찾은 이들은 어르신들을 일일이 찾아 인사를 드리고, 건강하시라는 덕담을 늘어놓는다. 음반을 낸 ‘재야 가수’의 노래솜씨는 단연 발군. 몇 곡을 불러제켜도 좋기만 하다. ”그려, 그 집 아들들이 쪼깐헐 때부터 노래를 잘 부르더니, 기어이 그중의 하나가 가수가 됐구만이. 잘 힛네, 잠 잘 힛네. 우리 동네에서 가수도 나오고“ 한 친구는 한 달 전쯤 아버지 구순생신을 맞아 펴낸 가족문집 ‘총생들아 잘 살그라’를 60여권 쌓아놓고, 일일이 ‘나날이 새로우소서’ ‘평강하소서’ 덕담 한 구절씩을 쓰고 사인을 하여 나눠줬다. 가수에 이어 작가선생도 탄생했다고 치켜대기도 했다. 오랫동안 집안에만 계시던 노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광장 의자에서 흥겨운 듯 5시간을 넘게 노래자랑을 참관하기도 했다. 5시 50분, 동네 출신이 운전하는 서울행 관광버스가 출발하는데, 온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어 금방 헤어짐을 아쉬워한다. 잘 가라고, 또 오라고, 부디 안녕히 계시라고, 또 찾아와 인사를 드리겠다고, 유리창 안팎으로 손을 흔들어댄다. 남북 이산가족 헤어지는 풍경을 방불케 한다.
상경길, 문집을 엮은 ‘작가’는 ‘말티재 신화’ 한 토막을 낭송해 박수를 받았다. 동네 이름이 냉천이 된 유래를 아버지로부터 들었다한다. 옛날 원님이 지나가다 물을 마셨는데, 물이 차고 맛있어 ‘냉천’(찬샘)이라고 했다던가. 뒷산 중턱에 큰 너럭바위가 누워 있었는데, 그게 밑에 쌀을 보관해놓았다는 ‘뒤주’모양이었다 한다. 늙은 쥐가 그 쌀을 모두 파먹고 마을을 향해 슬금슬금 내려오는 ‘노서하전’(老鼠下田) 형상인데, 지금 교회 앞에 놓여 있는 ‘괴바위’가 바로 ‘고양이바위’로 늙은 쥐가 못내려오게 감시하는 모양이라고 한다. 마을 뒤에 있는 ‘등바위’의 ‘등’은 ‘등불’의 ‘등’이라 했다. 고양이바위가 눈을 부릅뜨고 못내려오게 지키고 있는데, 언제나 등바위가 불을 환하게 밝혀준다는 전설, 아니 풍수가 적용되는 마을. 그래서 이 마을이 몇 백년 동안 평화와 안녕이 지켜져 내려왔다는, 믿거나말거나의 이야기. 마을 뒤에는 일본 강점기때 오수에서 임실까지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新作路)를 냈다. 지금은 소방도로로 남아 있는데, S자길이 47개나 된다하여 ‘말칠재’에서 불렀는데, ‘말티재’라고도 많이 불렀다. 한국전쟁때 ‘남부군’들이 이 도로를 걸어 성수산으로, 지리산으로 향하며 빨치산투쟁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 작가는 하루빨리 고향에 내려와 터를 잡고 ‘말티재 신화’를 쓰고 싶어한다. 산자락 아래 여섯마을 이야기를 주워 담기만 해도 한 편의 소설과 시가 왜 아니 되겠는가.
배는 고팠으나 인정은 살아넘쳤던, 30여년 전으로 어찌 돌아갈 수 있으랴. 그리고 오늘처럼 이렇게 1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의 웃음꽃이 피는 날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겠는가. 이미 구석기처럼 퇴화되어 버린 마을은 거대한 양로원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그러나 자기의 평생 ‘껍데기’가 되어주신 부모님이 잠들어 있거나 살아계시므로 1년에 몇 번씩은 찾아오는 고향마을을 어찌 꿈엔들 잊을 수가 있을 것인가. 고향은 어머니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의 젖줄인 것을.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고자 오늘같은 거사(擧事)를 마련한 것을 왜 모르랴. 대처 객지에서 신산하게 젊은 시절을 보낸 후 노년이 허망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는가. 1년에 한번이라도 고향마을 일가친척이나 어르신들을 찾아 뵙고 안부도 묻고 부모님의 일화도 떠올리며 위안을 받으시라. 고향은 그런 곳이다. 한 친구가 의미심장한 노래를 불러제킨다. “고단한 날개를 접어라, 허공의 새여/근심도 걱정도 다 버려라, 사람이여/꽃이 지는 건 다시 피겠단 약속일지니/해가 지는 건 다시 뜨겠단 약속일지니/한 발 물러나 먼 산을 보아라/고개 들어 저 하늘을 보아라”. 날씨가 좀 더운들 대수랴. 다음부터는 추수(秋收)가 끝난 후 11월쯤에 하자. 매년이면 더 좋지만, 안되면 격년, 최소 3년에 한번쯤은 동네사람들과 서울향우회가 중심이 되어 이렇게 ‘흥겨운 일’을 내자. 그러자. 모두 한목소리이다. 하늘은 맑고 구름 한 점 없는 오늘, 냉천마을의 전설은 가만가만 숨쉬고 있었다.
상경길, 음반을 내고 가수가 된 후배는 연짱 불러대는 앙코르에 목이쉬었지만, ‘어머니 무덤가에 꼬부라진 할미꽃’ 가사가 귀에 쟁쟁쟁 꽃혔다. 이 거창한 행사를 주관하신 조기익 이장님과 서울향우회 최영길 총무님께 감사인사를 드리며, 하루가 아쉬운, 참 좋은 고향나들이, 후기(後記)에 가름한다. 내 고향, 찬샘마을, 냉천이여, 영원하라! 부모가 고향이고, 고향이 곧 부모이도다. 그대가 있어, 오늘날 내가 있도다. 아무렴. 아먼. 암먼, 그렇고말고.
첫댓글 우천 부럽네
수고도 많으셨겠고 ^^
요즘 세상에 참으로 보기드문 별난 동네이네 그려.
우리 동네는 원래 10가구였는데 달랑 1가구만 남았더라고.
멋드러진 냉천마을 화이팅입니다...
근디 이런 아이디어는 이장님 작품인가?
아마 우천 작품인 듯..........
이장님이 아니고, 내 바로 위 형의 아이디어였다오.
아버지 구순잔치를 '이런 식'으로 대신한다는,
효심깊은 우리 형님, 왕년에 염창동에서 추어탕집을 했지라우.
나보다 몇 배 다이나믹하게 사시는 분.
@알록달록 아하, 추어탕하신던 형님.
하여간 우천 집안은 별종이여.
좋다는 애기. ㅎㅎ
정과 의리가 넘치는 요상맹랑한 동네에서 태워난 우리 명품 친구 자랑스럽네.
그 옛날.... 온 마을 사람들이 운력하며 치렀던 혼례, 환갑잔치 등이 생각난다!
그리고 칠월칠석날?엔가는 풍장을 치고 우물도 쳤지....
내가 어렸을 적 겪었던 일들인데 아련히 조선시대의 풍속을 얘기하는 듯 하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