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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타타가타, 여래(如來) (부처님 이름의 하나).
꽃 등을 바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즉 도덕 (실라), 명상 (사마디), 지혜 (판나)로 대체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그 꽃들을 바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꽃의 아름다움은 피어날 때와 질 때, 꽃이 시들어버릴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무우수 나무 아래에서 태어나셨고,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셨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살라 나무들이 주변이 있었다고 합니다.
베트남에 와서 이 살라 나무의 경이로운 꽃들을 만났고, 부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특별하고 아름다운 살라 나무의 꽃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열대의 나라에서 성장하는 꽃인데요,
꽃이 연약하지 않고 단단하게 보이고 인공적으로 만든 것 같은 느낌도 있습니다.
보통의 꽃들은 이렇게 싱싱하면서도 튼실하게 보이는 않습니다.
만지면 찢어질 것 같은 연약함이 보통의 꽃들에 있습니다.
하지만, 살라 나무의 꽃은 단단하고 심지어 근육이 있는 것 같아요.
사유의 힘줄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에도 빠지는 것이 부처님의 열반을 상상하게 됩니다.
"미래의 종교는 우주적인 종교가 될 것입니다. 개인적인 신을 초월하고 독단과 신학을 지양해야 합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모두 포괄하여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모두 의미 있는 하나의 통합체로서 경험함으로써 생기는 종교적인 감각에 기초해야 합니다. 불교가 이 설명에 답합니다. 현대의 과학적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종교가 있다면 불교일 것입니다."
- 아인슈타인의 불교에 대한 어록 중에서
아인슈타인의 어록을 생각하면서 불교학을 더욱 공부하게 됩니다.
저는 성당에도 또 불교 법당에도 그 앞에서 기도를 합니다.
분석적,논리적, 과학적인 불교학은 공부할수록 삶과 죽음의 그 깊은 철학에 빠지게 됩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에게 깊은 영향을 준 불교 철학의 깊이는 아인슈타인도 동의하였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에 즈음하여 다시금 이 세상에 부처님이 설법하신 그 뜻을 담아봅니다.
살라 나무에도 밀림에도 사랑들의 세상에 흘러오는 저 호수에도 불법이 담겨 있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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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밀림
부처님께서는 자연에서 태어나시고 출가하시고 깨달으시며 열반에 드셨습니다.
우리가 대자연에서 깨닫게 되는 많은 것들이
비록 찰나의 인연일지라도 소중합니다.
우리가 저 살라 나무의 꽃이 될 수도 있고, 밀림의 물에 젖은 나무 밑동이 될 수도 있겠네요.
나를 찾아가는 것이 멀리 있지 않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주관적인 시각으로 나의 감각들을 통해 깨달으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피부로 감각하는 것, 맛보는 것, 인지하는 것... 모든 것이 깨달음의
길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그 길을 모르고 지나치면서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불교학을 배우면 참으로
좋다고 권하고 싶습니다.
호프맨작가는 인문학을 진심으로 공부하는 작가입니다.
인문학에 불교학은 중심축 중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배우고 싶습니다.
살라 나무 공원의 대자연을 만나면서 부처님 오신 날을 감사히 합장하게 됩니다.
저의 베트남 호찌민 생활은 감사와 축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국에서 볼 수 없는 불교의 성스러운 나무들 모두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살라 나무의 공원이 있고 그 안에 밀림이 있습니다. 맹그루 나무들이 호수의 입구를 지키고 막아섰습니다. 사람들의 세상으로 들어오는 공원 입구에는 사람과 대자연의 경계가 있네요. 그곳에 인공적으로 정리 정돈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밀림이 펼쳐집니다. 그곳에서 멈추어 경계지점을 바라봅니다. 저 경계를 넘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삶과 죽음, 선과 악, 전쟁과 평화, 분노와 평정, 깨달음과 무아.. 모든 것이 경계의 반대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넘어서야 하는 지점들이 겹쳐있음을 봅니다. 앎이 또 무엇이고 그렇다고 앎을 저버릴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르지 않았으니, 열심히 배우고 인식하고 적어가면서 살아야 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