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하늘과 새 땅
Special A Artist Park In Kwan 박인관 -미술과 비평 75집 2024/4 -26p~31p
글 이선영 (미술평론가)
박인관의 [새 하늘 새 땅] 시리즈는 새해를 맞는 시기에 어울리는 작품들이다. 일상의 풍경과 거리가 있는 그것은 단지 기계적으로 1년이 추가되는 새해가 아니라, 낡음을 갱신하는 근본적인 새로움과 관련된다. 유화지만 도상에서 동양화 분위기가 있는 그의 작품은 동양의 순환적 시간관을 반영한다. 순환과 새로움은 일견 모순되어 보인다. 니체가 영원회귀의 신화에서 말하듯이, 필연적인 것만 회귀한다. 우리가 인생을 다시 산다고 가정할 때 지금 걸어온 길을 다시 선택하는 것이 회귀다. 작가에게는 작업하는 삶이 아니겠는가. 역사보다 더 보편적으로 평가되는 예술이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영원회귀의 사상은 심미적이다. 작업 또한 놀이처럼 매번 새로이 시작하는 과정이다. 그 점이 예술의 가장 큰 덕목이 아닐까. 예술가들이 정신적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도 거기에 있다고 믿어진다. 그들은 매번 새로이 시작하고 배우고 실험한다. 박인관의 작품에서 서로 연결된 봉우리들은 본래의 물리적 상태와 달리 유연하다. 풍경이지만 자연의 재현이 아닌 생성의 과정을 시각화한다. 그러한 유연함과 자유로운 색감 덕분에 굳이 산이 아니더라도 아래쪽에서 위로 치고 올라가는 운동성을 지닌 모든 현상과 연결 가능하다. 보다 미시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에서는 상처 난 새살이 돋는 과정, 삶과 작업에 있어서 새로운 영감이 솟구치는 과정같이 말이다. 박인관의 작품에는 압축된 용수철에서 잠재 에너지가 풀려나오는 듯한 활기가 있다. 원초적 혼돈을 품은 덩어리는 형태와 의미로 펼쳐지곤 한다. 단단한 암석이 몸통일 산도 지하의 끓어오르는 용암이 흘러 굳은 것이다. 흐르는 듯한 솟구치는 듯한 산세는 생성기의 흐름을 보존한다. 지금 굳어있는 모든 것이 유동적인 때가 있었고, 인간사보다 더 큰 주기의 자연사 속에서 정지 또한 운동의 일부분이다. 모든 물신화된 체계는 정지를 절대화시키는 것과 관련된다. 일순간에 지나지 않은 현상의 법칙화는 모든 현상옹호적이고 현상 유지적인 관념에 깔려있다.
박인관의 작품에서 밑에서 땅에서 솟은 봉우리들은 묵직한 중량감보다는 위로 날아오르는 듯 비상을 꿈꾼다. 어떤 작품은 화폭에 펼쳐진 산세가 날개같은 모습이다. 물론 솟은 것은 다시 내려가겠지만, 샘물처럼 계속 솟을 수 있다. 봉우리들은 아래는 흐릿하거나 붕 뜬 듯이 처리되어 있고 윗부분의 표현에 더 집중되어 있다. 통상적으로 산의 풍경은 (구름이나 안개, 또는 원근감에 의해)위쪽이 희미하지만, 그의 작품은 물리 법칙에 역행하는 것이다. 중력의 방향이 선명한 봉우리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한다. 산은 땅에 속하지만 그 방향성은 하늘을 향한다는 점에서 지하 지상 천상 3계를 연결시키는 매개고리 이다. 산들은 무기물이지만, 3계를 가로지르는 속성은 나무나 인간에게도 해당된다. 인류학적 상상력은 그러한 산에 세계의 중심 자리를 배정했다. 옴팔로스나 세계수같은 관념이 그 예다. 이 중심은 새하늘과 새땅이 시작되는 신화적 지점, 또는 시점이다. 역사적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은 낡고 사라진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영원회귀의 시간; 원형과 반복]에서 역사와 초역사, 또는 역사와 신화를 대조한다. 그는 역사철학 입문에 가깝다고 밝히는 이 책에서 전근대적인 사회 속의 인간의 행동에서 추출해낼 수 있는 존재와 실재의 관념들을 검토한다.
전근대적인 사회 또는 전통사회, 즉 우리가 보통 원시적이라 칭하는 세계가 모두 포함하는데, 전통적인 경향이란 모든 원시 문화 속에서 감지되는 주기적으로 무한히 재생되는 순환적 시간을 지향하는 경향을 가리키고, 현대적인 경향이란 두 개의 비시간적인 무한 사이에 끼어 있는 파편, 즉 유한한 시간을 지향하는 경향을 가리킨다고 본다. 신화 속에서 황금시대는 모범이 되는 아득한 그때에 잇닿아 있는, 순환의 시초에 자리잡는다. 예술 또한 덧없이 흐르는 역사적인 시간에 저항한다. 이를 통해 예술은 신화와 만난다. 제임스 조이스를 비롯한 현대예술가들은 이러한 선택을 통해 그들을 압박했던 ‘역사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엘리아데가 말하는 기원의 신화적인 시간, 위대한 시간으로 주기적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향수, 즉 원형과 반복에 대한 의지는 역사보다 더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는 예술과 친근하다. 초역사적인 모델에 대한 추구가 단지 과거로의 퇴행은 아니다. 역사적 인간이 겪어내야 하는 세속적 시간의 지속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다. 역사는 새로움을 향한 진보를 말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새로움인지 또는 진보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히려 새로움은 모든 것이 신선했을 시기로의 회귀일 수도 있다는 것이 신화적 사유의 핵심이다. 이 근본적인 추구는 신화와 종교의 몫이었지만, 근대 이후 예술도 그 역할을 맡는다. 박인관의 [새하늘 새땅] 시리즈는 진정한 갱신이 일어나는 지점 또는 시점을 지향한다. 작품 [새하늘 새땅24-3](작품 제목의 첫 숫자는 제작년도)은 지구의 내부를 그린 것처럼 상승하는 덩어리들이 보인다.
색의 덩어리를 감싸는 밝은 덩어리 부분은 자유로운 색점들로 채워진다. 내부의 색점들은 곧 현실화될 것을 기다리고 있는 잠재태다. 형태가 질서라면 형태가 감싸고 있는 부분은 무질서하다. 그의 작품에서 질서와 무질서는 상대적이다. 질서에서 질서가 나오는, 무질서에서 무질서가 나오는 동어반복이 아니라 반대되는 것들이 상호전환하는 진정한 변화가 바로 ‘새하늘 새땅’이다. 신화의 도입부는 세상의 질서가 시작된 유래를 설명하기 위해 무질서를 상정한다. 특정 형태 및 의미로부터 자율적인 색점들이 바로 질서로 자리잡을 무질서에 대한 상이다. 작품 [새하늘 새땅2024-15]처럼 푸른색 기운들이 포함된 봉우리들은 샘물처럼 솟아오른다. 작품 [새하늘 새땅21-4]은 유화와 아크릴 외에 한지 죽을 사용했다. 그것은 자연이 가지는 풍부한 질감을 표현한다. 그는 다른 작품에서 스톤파우더를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 작품 [새하늘과 새땅 22-8]에서 산을 뒤로하고 새들이 날아가는 장면은 산의 생동감을 더한다.
순간멈춤일 수 밖에 없는 회화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 형태의 여러 자세를 배치함으로서 움직임의 환영을 연출한다. 작품 [새하늘과 새땅 23-19]에서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자유로운 색점들은 형태와 의미를 향하여 움직인다. 그의 작품은 혼돈과 질서의 상호관계를 보여준다. 작품 [이미지-새하늘 새땅23-3]에서 화면의 밝은 부분은 원초적 카오스의 부글부글 끓는 듯한 거품 내지는 기운이 충만하다. 작품 [새하늘 새땅23-7]에서 겹겹이 층을 이루는 두터운 실재감은 자연에 대한 작가의 직관이다. 자연의 재현이 아닌 과정의 묘사는 추상에 가까와진다. 초기 추상부터 미술과 음악의 관계는 밀접했다. 음악은 그자체가 추상적이기 때문에 재현으로부터 멀어지려는 회화의 이상적인 모델이 되어주었다. 그의 작품을 음악과 비교하자면 환희에 가득 찬 웅장함일 듯하다. 잠재적 동감을 표현하는 새의 모습처럼 산세는 음의 폭과 진동을 공(共)감각적으로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