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15년 전만 하더라도 정권 교체, 특히 평화적 정권 교체는 불온한 상상에 불과했다. 최근 아랍 지역의 소요를 지켜보며 나는 한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발전하고 성숙했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 국민의 뇌리에서 쿠데타에 의한 권력 탈취의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모든 것이 투표라는 절차에 따라 진행되고, 그 결과에 승복하는 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민주주의는 이제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따라서 올해 양대 선거를 맞이하는 우리 국민의 자세도 달라져야 한다. 한쪽에선 정권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다른 한쪽에선 정권을 잡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분노’를 가지고 있다. 두려움과 분노의 자리에 ‘평화’가 임해야 한다.” 문창극 중앙일보 대기자는 두려움과 분노가 아닌 평화의 마음을 갖자고 호소하는 것으로 강연의 서막을 열었다. 그는 “특정 정치 세력을 편들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면서 “어떤 세력이 정권을 잡더라도 대한민국은 변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관전 포인트로 공천, 구도, 바람 등을 언급한 뒤에는 ‘안철수 현상’에 대한 견해도 밝혔다. “나는 안철수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부터 ‘안철수는 대선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몇 차례 주장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바람이 12월까지 불어야 하는데, 바람은 1년 내내 불지 않는다. 기껏해야 3~4개월 부는 것이 바람의 속성이다. 둘째, 정치인의 기질이 필요한데, 그것이 부족하다. 정계에서 겸손은 미덕이 아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나서야 하는데, 안철수와 어울리지 않는다. 셋째, 정치는 세력의 힘으로 하는 것인데, 안철수는 그런 세력이 없다. 동서고금에 ‘백마 타고 온 초인’이 천하 대권을 잡은 전례가 없다. 넷째, 권력 의지가 강해야 하는데, 그것이 부족하다. ‘개천에서 난 용’이 되려면 여의주를 낚아챌 강한 이빨이 있어야 한다.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은 한국 정치에서 성공하기 힘들다.”
박근혜, 이건희에게 배워라
문 기자는 이 대목에서 작고한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이 말했다는, “정치 세계는 허위 구조의 세계”라는 문학적 표현을 소개했다. 현실 정치는 ‘진실’이 아니라 도리어 ‘허위’에 가깝다는 발언인데, 안철수 원장처럼 순수한 사람이 정치에 뛰어들면 자신을 잃어버리고 상처만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문 기자는 ‘성찰의 리더십’을 열망했다. “선거 결과를 예측하는 것에 매달리지 말라. 어느 정당이 이길 것인지, 어떤 후보가 당선될 것인지 집착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좀 더 크고 넓은 시야로 현 국면을 봐야 한다. 그렇게 하면 정권이 교체된다 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중요한 민주주의의 도구일 뿐이다.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명박 정부의 파멸의 원인이다. 문제의 핵심은 ‘권력의 오만’인데, 집권과 동시에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는 교만에 빠졌다. 대권을 노리는 리더라면 워싱턴과 링컨의 절제와 겸손과 성찰을 배워야 한다. 워싱턴은 ‘왕이 되라’는 주변의 달콤한 권고를 뿌리쳤다. 링컨은 중요한 연설 일정이 잡히면 일주일 동안 헌법과 성경만 가지고 조용한 곳에 들어가 묵상했다. 그랬기에 게티즈버그 연설이 나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문 기자는 “국민들이 현명한 유권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쪽 귀를 모두 열 때, 그리고 균형 잡힌 말을 할 때 유권자의 올바른 판단을 도울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언론인의 발제가 끝나자 정치학자와 사회학자의 논평이 이어졌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올해 대선이 ‘민주적인 박정희’와 ‘합리적인 노무현’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 정치에는 박정희 패러다임과 김대중 패러다임이란 양대 산맥이 존재한다. 김대중 패러다임은 노무현 모델을 통해 진화하고 발전했다. 반면에 박정희 패러다임은 한 번도 진화한 적이 없다. 따라서 박근혜 전 대표는 아버지를 뛰어넘을 뭔가를 준비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박 전 대표가 벤치마킹해야 할 사람이 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각종 설문조사에서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재계 지도자’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으로 나온다. 그런데 2위는 이병철 회장이 아니라 이건희 회장이다.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꾸자’는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이 결정적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500억 규모에 달하는 기존의 불량 제품을 공개적으로 남김없이 불태워버린 것도 큰 영향을 줬다.”
“김 교수는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의 ‘양적 성장’에서 벗어나 ‘질적 성장’을 지향하며 마침내 아버지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면서 “박 전 대표도 국민에게 진정으로 사랑받고 대선에서 기대하는 성과를 얻으려면 아버지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민전 경희대 교수는 시대적 환경, 장기적 지향, 국민적 불만이 시대적 과제를 형성하는 3가지 요소라고 말했다.
“국민은 민주주의와 정치개혁의 후퇴, 한반도 위기관리의 실패에 불만을 갖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복지국가를 지향한다.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정치적 환경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지금 SNS로 무장한 대중은 엘리트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게 되었고, 단순 소비에서 벗어나 제조와 유통에도 참여하기 원한다. 실제로 그들은 기존 정당이 제공한 인물만 소비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인물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나아가 기존 정당이 이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직접 새로운 인물을 제조한다. 사실 안철수 현상도 프로슈머(Prosumer)적 대중이 만들어낸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프로슈머에게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그들은 새로운 인물을 끊임없이 테스트하고,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지 버리고 새로운 대안을 찾는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아라
따라서 안철수 개인이 정치를 하느냐 마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김 교수의 분석이 사실이라면 대중은 필요할 경우 제2, 제3의 안철수를 계속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자인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선거가 구도, 인물, 비전, 전략 등 4가지 요소의 영향을 받으며 진행되지만 현 정부에 대한 심판이 주요 흐름을 형성할 것이라고 했다.
“선거는<파우스트>에 언급되며 유명해진 ‘시대정신’과도 무관치 않다. 해방 이후 우리에게는 경제적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화라는 2개의 시대정신이 있었다. 그렇다면 산업화 25년 민주화 25년의 시점에서 무엇이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어야 할까? 불과 한두 해 전만 하더라도 보수는 선진화, 진보는 복지국가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현 정부에 대한 국민적 심판의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선진화 담론은 거의 폐기됐다. 한나라당 비대위조차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 사회에 가장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건은 1987년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1997년 외환위기인 셈이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에 대응해서 한국 사회의 발전모델을 어떻게 수정할 것인지가 새로운 시대정신의 척도가 될 것이다.”
한편 토론자들은 비슷한 진단을 내놓았다. “국민의 열광과 환멸의 주기가 너무 짧은 것은 극복해야 할 과제다.”(김형준) “집권 3년차부터 갈등과 분열이 시작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김호기) 대안과 희망은 있을까? 인간개발연구원 창립 37주년 기념식을 겸한 이날 발표자들은 이원기 원풍물산 회장의 다음과 같은 회원 대표 축사를 희망의 단서로 언급했다.
“나는 22년 동안 열심히 참여해왔다. 다른 조찬과 달리 매주 한 번씩 열려서 좋다. 강연을 한 번 듣고 말면 금방 잊는다. 그래서 CD로 2~3번 반복해 듣는다. 변화를 유도하고자 회사 간부에게도 듣게 한다. 목요 조찬에 참여하는 것은 이제 나의 습관과 생활이 되었다. 이를 위해 전날 저녁에 약속을 잡지 않고 일찍 잔다. 그리고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이 자리에 나온다. 진지한 경청과 꼼꼼한 메모는 기본이다. 덕분에 22년 동안 축적된 자료와 정보가 내 머리 속에 지능과 지혜로 잘 정리돼 있다. 기업인이 수시로 부닥치는 글로벌한 문제와 로컬한 문제를 분석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이것은 위력을 발휘한다. 누구도 나에게 묻지 않았지만 20년은 더 참여하려고 한다. 20년 후에는 내 나이 100세가 된다.”
정리=정지환 인간개발연구원 편집위원/감사나눔신문 편집국장 lowsaejae@gamsa.or.kr
문창극 대기자의 이력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 서울대 정치학 석·박사 ▲ 중앙일보 사회부, 정치부 기자, 워싱턴특파원 ▲ 중앙일보 정치부장, 논설위원 부장 ▲ 중앙일보 미주총국 총국장 ▲ 중앙일보 회장비서실장 겸 전략기획담당 ▲ 중앙일보 논설위원실장, 논설주간 상무 ▲ 한국프레스클럽 운영위원 ▲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 ▲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이사장<상훈> 제16회 관훈언론상, 제8회 한국언론대상, 제9회 삼성언론상 外 <저서> 한미 갈등의 해부, 워싱턴특파원 귀국보도, 미국은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