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 장군 전사 지점을 찾아서
(김이진 '워커대장추모기념사업회' 회장 인터뷰)
김이진 회장은 워커 장군 전사지점(사고지점)을 찾아내는 데 3년 4개월이 걸렸다고 했다. 미국 국방성 8군, 육군사관학교, 재향군인회 등에 워커 장군 전사지점을 문의했지만, 그들도 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 측에서 회신한 자료에는 워커 장군이 전사한 곳이 ‘서울 북방 11마일, 의정부 남방 6마일 지점’이라고만 나와 있었습니다. 정확한 좌표가 없어서 전사지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워커 장군은 한국 사병이 몰던 쓰리쿼터 트럭과 충돌해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트럭을 몰았던 한국군 운전병을 찾으면 정확한 전사지점을 찾을 수 있겠구나 싶어 그 운전병을 찾아다녔습니다.”
김 회장은 워커 장군의 지프와 충돌사고를 낸 그 운전병이 당연히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고 판단하고, 육군본부 법무감실의 협조를 받아 1950년도에 군법에 회부된 자료 1만 2000건을 뒤졌다고 한다. 하지만 워커 장군 사망사고와 관련한 기록을 찾지 못하자 이번에는 그 운전병이 소속되었다는 6사단 2연대를 찾아가 부대 연혁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6사단에는 자료가 남아 있었다.
확인 결과 그 운전병이라고 알려진 사람의 이름은 박경래로 나타났다. 박경래씨의 신분은 군인이 아니 군속(군무원)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쓰리쿼터를 몰았던 군속 박경래씨는 군사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분 고향이 춘천이라고 해서 춘천을 9번 찾아가 박씨란 박씨는 다 뒤졌습니다. 나중에 동사무소의 협조를 받아 호적을 확인하니까 대전으로 이사했다고 나오더군요. 그래서 대전에 찾아갔더니 1980년에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찾아다닌 것은 워커 장군의 정확한 사망지점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렵게 찾아낸 유일한 증언자가 사망했다고 하니 그 허탈감이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하지만 김이진 회장은 워커 장군 전사지점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 국방성으로부터 워커 장군 사망 당시 현장 사진을 넘겨받은 그는 사진에 나오는 지형과 같은 곳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군 야전사령부의 데이비드 넥 대령이란 분을 만났고, 그를 통해 미 8군 보병 2사단 공병대의 지형 분석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와 넥 대령, 지형분석 장교가 서울에서 의정부로 연결된 국도의 지형을 분석하고 다녔는데, 어느 날 도봉구에 사는 김태욱이란 분이 자기가 14살 때 워커 장군 사고 직후에 현장을 봤다는 증언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한 곳의 지형을 분석하니까 사진의 워커 장군 사망지점과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그래서 워커 장군의 전사지를 현재 서울 도봉구 도봉 1동 596-5번지로 확증할 수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워커 장군 전사지점을 찾은 김 회장은 그 자리에 기념 표지석을 세우려고 했지만, 수십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일대가 주택가로 개발되어 여의치가 않았다고 한다.
“장군의 사망 지점은 현재 식당의 주차장으로 쓰이는 사유지(私有地)로 변했습니다. 전사지점에 추모비를 세울 수가 없어서 그곳에서 200m 떨어진 도봉역 출구 입구 인도 변에 세웠습니다. 워커 장군 전사지는 6ㆍ25 전쟁의 역사를 조명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길이 보존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수년 동안 자비를 들여 찾아낸 전사지인데 표지석 건립허가를 받는 데 6개월이 걸렸고, 구청을 수없이 들락거렸습니다.”
김 회장은 “전사지를 찾으면 국방부나 담당 관청이 기념 표지석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줄줄 알았는데, 늙은 내가 뛰어다니며 모든 일 처리를 했다”고 말했다.
어쨌든 김 회장의 노력으로 2009년 워커 장군 59주기 추모식부터는 워커 장군의 전사지에서 개최할 수가 있었다. 김 회장은 “현재 워커 장군 전사지를 식당 주인이 팔 의향이 있다고 하는 데 자금이 없어 살 수가 없는 형편”이라며 “정부나 독지가가 나타나 이 땅을 사들여 역사적 장소로 보존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14-02-07 조선일보 이상흔기자
워커전사지 추모 표지석 : 도봉역 2번출구 길건너 럭키아파트 105동 옆 인도 모서리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