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론>
신춘문예 시(詩) 이대로 좋은가
- 2018년 당선작을 중심으로
김영미
∎문제 제기
문학작품의 존재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래 우선 독자들에게 신선한 기쁨을 주면서 감동적인 교훈을 전하는 일이 문학의 기능으로 여겨져 왔다. 이것을 근래는 실용적으로 교육적인 면에서, 작품을 통해서 배움과 교시적인 깨달음을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심리적인 면에서는 즐거움(감동)과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문학의 기능은 독자들에게 효과를 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효용론이라고 한다. 따라서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효용은 재미가 있고 동시에 무엇인가 유익한 것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의 신춘문예 당선 시(詩)들 중에는 감동은커녕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는 시들이 대부분이다. 교육적인 면은 제쳐 두고, 심리적인 면에서도 감동 보다는 시를 읽고 나면 오히려 어수선하고 산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필자만이 이해가 안 되는가 싶어 기성 문인 10명 에게 2018년 신춘문예 당선작인 「복도」를 보여 주면서 느낌을 말해 달라고 했다. 물론 신춘문예 당선작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 할 수가 없다는 응답이 9명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글이 앞뒤가 맞지 않고 횡설수설 한데, 혹시 정신이 조금 이상한 사람이 쓴 글이 아닌가요?” 라고 하면서 필자에게 반문을 하였다. 그래서 2018년 신춘문예 당선작이라고 하자 깜짝 놀라면서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춘문예’라고 하면 문단에 오르는 방법 중에서 가장 전통적이면서도 권위가 있는 등단제도로 알려져 있다. 이는 한국 시문학의 방향과 전망을 가늠하는 바로미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해마다 새해 아침에 조간신문을 장식하는 신춘문예 작품들은 신년의 환한 메시지로서 시민들의 가슴을 부풀게 했었다. 하지만 그런 감동이나 기대는 사라진지 오래이다. 그것은 스마트 폰이나 TV의 영향보다 당선 작품의 부실성에 있다고 봄이 더 현실적인 것 같다. 당선작을 읽어 봐야 새로운 재미와 교훈이나 힐링은 커녕 아리송한 회의감만 더 한다.
이러한 신춘문예 당선 시들이 일반 독자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 하겠다. 이에 필자는 신춘문예 시가 독자들의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문제점이 무엇인가 살펴보고 그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독자들이 공감할 수 없는 시
시란 허버트 리드의 견해처럼,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을 함축하여 리듬감을 바탕으로 나타낸 짧은 글이다. 그런데 2018년 신춘문예 시들을 보면 사물의 인상을 함축하여 나타낸 글인지. 리듬감이 있는 글인지 헷갈린다. 그 뿐만 아니라 시의 길이가 길고, 연의 구분이 없거나 혹은 산문화 되어 외형상으로도 시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시들이 많다.
나는 기나긴 몸짓이다 흥건하게 엎질러져 있고 그렇담 액체인걸까 어딘가로 흐르고 있고 흐른다는 건 결국인 걸까 힘을 다해 펼쳐져 있다 그렇담 일기인 걸까 저 두 발은 두 눈을 써내려가는 걸까 드러낼 자신이 없고 드러낼 문장이 없다 나는 손이 있었다면 총을 쏘아보았을 것이다 꽝! 하는 소리와 살아나는 사람들, 나는 기뻐할 수 있을까 그렇담 사람인 걸까 질투는 씹어 삼키는 걸까 살아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걸까 고래가 나를 건너간다 고래의 두 발은 내 아래에서 자유롭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래의 이야기는 시작도 안했으며 채식을 시작한 고래가 있다 저 끝에 과수원이 있다 고래는 풀밭에 매달려 나를 읽어내린다 나의 미래는 거기에 적혀있을까 나의 몸이 다시 시작되고 잘려지고 이어지는데 과일들은 입을 지우지 않는다 고래의 고향이 싱싱해지는 신호인 걸까 멀어지는 장면에서 검정이 튀어 오른다 내가 저걸 건너간다면… 복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무수한 과일이 열리고 있다 그 안에 무수한 손잡이
- 2018년 《동아일보》신춘문예 - 「복도」 전문
위의 글은 앞에서 언급했던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복도」이다. 이 작가의 심상(心象)이 워낙 다층적이서, 이 심상들의 상호작용을 독자들이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물론 고급 독자라 하더라도 창작 배경이나 사전 정보 없이 잘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제목 「복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리송하다. 삶의 기나긴 여정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한된 공간의 교실 복도를 연상케 하는 그 무엇인가를 의미하는지 모호하다 하겠다. 그리고 이 시에서 언급되는 몸짓, 액체, 두 발, 두 눈, 손, 총, 고래, 과수원, 검정, 과일 등 시어에 선택된 단어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기 보다는 제각각 떠돌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제목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마치 글쓴이가 자기 세계에 갇혀서 타인(독자)과의 소통을 불허하고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언술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엠프슨이 지칭한 모호성의 매력들과는 거리가 멀다.
필자가 나름대로 이 작품을 바라보자면, 허구 속을 허우적거리며 표류하는 자아의 미시적 심상들을 재현해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아니 아무래도 이런 정도의 시 작품은 문학 지망생이 마음껏 유희해 보는 습작 냄새가 짙다. 그래서인지 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찾아보려는 되풀이 행동에 대한 착잡한 상징처럼 보여 지기도 한다. 과연 이러한 시작품을 독자들이 잘 공감하고 호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전문
위의 글은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이 글 또한 일반 독자들이 공감하기에는 쉽지 않는 듯하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어휘는 지시적이거나 정보적 의미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시의 언어는 함축적인 의미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함축적인 시어는 무엇인가 암시적이고 상승적인 정서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면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내기도 한다. 그런데 위의 시를 살펴보았을 때, 무엇을 암시하는 것인지 술이 약해서 취중에 횡설수설 한다고 보아야 할지 일반 독자들이 공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다. 이런 정도의 선풍기 바람 같은 시는 일반문예지에 중견 시인 급의 시인이 가벼운 여행 시 정도로 손쉽게 발표할 걸 어울리지 않은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포장해서 띄운 느낌이다.
위의 글에서도 「복도」와 마찬가지로 몇 군데 ‘사이비 진술’ 방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러한 진술방식이 너무 낯설어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폭을 넘어서고 있다고 하겠다. 작가는 시적 화자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수국의 즙 같은 말투’나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다거나 ’김포를 훔치는‘ 일 같은 진술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언술이 유기적으로 작용하여 어떤 새로운 의미 창출을 하고 있는지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에는 힘들다고 여겨진다. 이는 시의 주제가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 화자의 일상적인 생활 반경에서 지각되는 내면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 밖에도 《중앙일보》 당선작인 「수술」은 수술대 위에 누워서 마취되어가는 화자의 감각을 자의식 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서울신문》 당선작 「정말 먼 곳」은 그 먼 곳이 치열한 현실인지 아니면 닿고자 하는 욕망의 목적지인지 너무 추상화 되어있다. 그리고 《매일신문》 당선작인 「박쥐」 는 알 수 없는 언술의 이미지들이 둥둥 떠다니는 듯해서 독자의 시선에서는 공감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겠다.
∎심사위원의 문제
신춘문예 작품이 이와 같이 대중없이 난해해진 이유는 심사위원들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된다. 시 작품은 우선 주제에 잘 맞게 소재를 선택하여 유기적이고 함축적으로 중심테마를 끌고 가는 힘이 있어야 하고, 추상적인 묘사 보다는 구체적인 묘사로 주제의식을 뚜렷이 드러내는 것에 비중을 두고 심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올 해 신춘문예 당선작에도 너무 비약적인 진술이나 지나치게 비틀어 놓은 표현들로 인해 독자들이 해독할 수 없는 시들이 많다. 으레 몇 천편의 응모작 가운데 하필 이러한 작품들을 당선작으로 선정한 것은 심사위원들만의 눈높이에 맞추어 놓은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해당 신문사에서는 과연 올바르고 객관적인 기준에서 심사위원들을 엄선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이번 신춘문예 작품들 거개가 중심을 가진 일관된 논리적 체계에서 벗어나는 다층적인 체계를 갖는 작품들이 많다. 이는 유동성과 모호성의 스펙트럼으로 작가의 세계관을 표현하기 때문에 주제를 전제로 한 작품 체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 또한 시대적 추이로 몰아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독자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시를 심사위원들이 결정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도시 종잡을 수 없는 이런 성향의 시가 당선작으로 뽑히는 폐단은 거의가 같은 취향의 시에 안주하는 분을 심사위원으로 여러 해 붙박이로 위촉하는 신문사의 책임도 없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신춘문예 작품들이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돋보기의 공식」 같은 예외적인 작품도 있다. 이 작품은 돋보기를 통해서 자신의 얼굴을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밤이라는 돋보기로 밖의 소리도 들여다보고 있으며 또한 마음의 돋보기로 자신의 미래까지도 들여다본다. 매직 ‘돋보기’를 통해 다원적인 현재 속에서 안과 밖의 공간 상호성, 그리고 현재와 미래의 동시성을 획득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공간의 확산을 통한 동참 의식을 갖게 한다. 이와 같은 작품은 독자들에게도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호응하게 한다.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을 읽어보면 심사평 또한 모호한 내용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표현이 훌륭했는지 혹은 어떠한 표현이 미학적인 측면에서 높이 평가되었는지, 그리고 어떠한 부분이 독자들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인지 등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정보가 미약하다. 단지 시의 분위기를 에둘러 두리뭉실하게 평을 함으로써 심사소감 또한 추상화 되어 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전략>
「복도」는 소재를 다층적 은유에 의해 능란하게 확장함으로써 흥미로운 시적 사유의 전개를 보여 줬다. 시가 감상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과장으로 치닫거나 지적 퍼즐로 스스로를 축소시키는 현상이 빈번하게 목도되는 이즈음에 소재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힘과 다층적 사유를 전개하는 역량을 지닌 신인에게 출발의 즐거움과 불쾌하지 않은 부담감을 함께 안겨 주는 것이 제법 그럴듯한 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후략>
위의 글은 「복도」에 대한 심사평의 일부분이다. 심사평에서 “다층적 은유에 의해 능란하게 확장함으로써 흥미로운 시적 사유의 전개를 보여 줬다”고 말하고 있는데, ‘다층적 은유’가 무엇에 대한 은유인지 독자들은 전혀 알 수가 없다. 시어의 의미는 시의 문맥 속에서 생명력을 가지면서, 시어의 전후 문맥과 시적 상황을 파악하여 시적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파악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복도」는 반복해서 읽어도 시어의 전후 문맥과 시적 상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너무 “능란하게 확장”함으로써 독자들의 눈높이를 초월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뿐만 아니라 “소재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힘과 다층적 사유”로 인해 마치 현실이 아닌 사이버 공간에 떠돌아다니는 언어의 조각들을 보이는 대로 주워다 이어 붙여 놓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전략>
노래처럼 흐를 줄 아는 시였다. 특유의 리듬감으로 춤을 추게도 하는 시였다. 도통 눈치란 걸 볼 줄 모르는 천진 속의 시였다. 근육질의 단문으로, 할 말은 다 하고 보는 시였다. 무엇보다 ‘내’가 있는 시였다. 시라는 고정관념을 발로 차는 시였다. 시라는 그 어떤 강박 속에 도통 웅크려 본 적이 없는 시였다. 어쨌거나 읽는 이들을 환히 웃게 하는 시였다. 웃는 우리로 하여금 저마다 예쁜 얼굴을 가져 보게도 만드는 시였다.
<후략>
위의 평은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라는 작품의 심사평 가운데 일부이다. 제목부터 “도통 눈치란 걸 볼 줄 모르는” 시 임이 분명하다. 작중 화자가 “할 말은 다 하고 보는 시”이긴 하지만 청자인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필자가 느끼기엔 화자가 술에 취해 있는 정서를 투영한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제목이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하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작품은 심사위원들이 심사평을 할 때에 시 내용에 있는 심상들이 어떻게 실상과 연관되는지 하는 설명 정도는 해주어야 독자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라는 작품은, 낯 설은 제목에 주제는 없고 제목에 걸맞음직한 분위기, 감정, 이미지의 체계로서 실질적인 내용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작품평에 있어서도 “시라는 고정관념을 발로 차는 시였다.”고 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새로움이 독자들의 시선에는 매우 일탈한 여성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을 심사위원들은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결코 신춘문예 당선시라는 권위와 선입견에 갇힌 맹목적인 기준에서만이 아니다.
∎전승되는 시의 공감성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오늘날의 신춘문예 시는 일반 독자들의 눈높이로 보아선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작품들이 많다. 이런데다가 특별히 새로운 기법의 접근노력마저 보이지 않는 근래의 신춘 시에 실망할 바에야 차라리 우리 고전을 감상하는 게 낫겠다는 의견들도 적지 않다. 서두에서 금년 신춘 당선 시에 대한 소감을 말한 시인 중 태반의 견해였다. 거슬러 올라가 삼국시대의 작품들을 현대어로 풀이해 보면 그 때의 작품들이 오히려 독자들에게는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면서 친근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고구려 유리왕 3년에 쓰여져 『삼국사기』에 전하는 「황조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翩翩黃鳥, 雌雄相依, 훨훨 날으는 저 꾀꼬리는, 암수가 서로 정다운데
念我之獨, 誰其與歸. 외롭기만한 이 내 몸은,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꼬
이 작품을 읽고 어려워서 이해 못하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유리왕이 사랑하는 임을 잃고 슬퍼하는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직후에 이 시를 읽었다면 아마도 감정이 더욱 고조되어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백제에서 불려 진 「정읍사」는 구전 전승 되다가 『악학궤범』에 수록된 노래로써 원문의 감미로운 리듬 못지않게 현대어 풀이의 다양성도 더욱 흥미롭다. 많이 알려진 고전시가이므로 그 대강의 내용만 살펴본다. -하 노피곰 도샤/…시장에 있는 건가요/사창가에 빠지진 않으신지/ …어긔야 어됴리/아으 다디리/.
이 밖에 고려시대의 작품인 「가시리」나 「청산별곡」 등 수많은 고려가요들도 독자들의 큰 공감을 얻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전후의 시조 또한 큰 호응을 얻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천 년도 더 지난 삼국시대 작품에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작품들이 오늘날에 와서도 독자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고 있다. 하물며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필요 없이 난해해서 독자들이 이해 못하는 시를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한다면 그게 바람직한 현상일까 하는 의문이다. 그리고 신춘 당선 시들에서는 전통 시의 현대화를 위한 접근 노력마저 보이지 않았다. 수년 전 《세계일보》의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된 「신별주부전」에서는 고전인 「별주부전=토끼전」을 현대 서울의 한 가정을 통해 페러디해서 성공한 경우와는 대조를 보인다.
돌이켜 보면, 1930년대 작가인 이상의 시도 너무나 난해해서 당대 독자들 층에선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이상의 시작품들은 적어도 당대의 식민지적 고뇌와 모더니즘적 지향 가치가 내재해 있었다. 그러기에 오늘날에 와서 많은 연구자들이 이상에 대한 시 연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요즈음의 신춘문예 당선 시편들의 국적 없는 모호성이나, 대중없는 시 지망생들의 방랑적인 읊조림 같은 양상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이런 신춘문예 당선 시 작품들에 대한 비판은 이전 세대의 당선작 성향과 같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님은 물론이다. 역시 문예의 흐름이 일정하지 않고 다원적이며 해체적인 면이 짙음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분명한 시문학의 바람직한 모색점이나 실효적인 성과 없이 방황하는 선에서 배회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자면, 한국전란 이후이던 1950년대 후기의 거창한 역사성을 지닌 장시형의 신춘문예만 기대하지 않는다. 당시 신동문의 「풍선기」, 박봉우의 「휴전선」 등은 선명한 메시지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60년대 4.19 의식을 드러낸 김종해의 「내란」, 이에 상반된 정통 서정성을 되살린 나태주의 「대숲아래서」, 그 밖에 1980년대 중반의 당선작인 안도현의 「서울로 가는 전봉준」 등을 넘어서는 문제작이 없어 아쉽다.
∎보다 향상된 시단을 위하여
필자는 2018년 신춘문예 당선 시인들이나 심사위원들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을 폄하 하거나 비하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힌다. 단지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춘문예 시의 ‘풍향’이 이대로 지속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독자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시가 신춘문예를 통해 많이 산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다름 아니다.
시의 외피만 뒤집어 쓴 듯한 작품이 아니라 건강한 삶과 공동체적 행복을 위해 고뇌에 찬 리얼리티가 확보된 작품에 비중을 두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리하여 그들만을 위한 시가 아니라 일반 독자들과 함께 소통하고 공감하는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기에 필자는 신춘문예 시의 방향에 대한 몇 가지 대안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첫째, 적어도 신춘문예 당선 시에는 뚜렷한 주제 의식이 있어야 한다. 요즘의 시들은 시의 주제는 없고 이미지들을 조합한 집합체인 듯한 글들이 많다. 그럼에도 무슨 탈 모더니즘적인 실험성이 없어서 문제이다. 함축적인 단어들의 유기적인 상호작용이 없는 이미지들을 산만하게 흩트려 놓고 이들의 조합을 추구하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둘째, 지나친 산문화 현상이나 리듬감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시는 배제되어야 한다. 요즘은 시의 형태가 길어지다 보니 일반 시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고 수필의 길이 보다는 조금 짧은 시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형식을 무시한 채 시의 겉옷만 걸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지면을 꽉 채운 듯한 글자에 압도당해, 독자들은 시각에서부터 읽을 맛을 잃어버린다. 독자들이 시각에서 부터 여유를 갖고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여백이 있는 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셋째, 일부의 고급 독자나 편향적인 시인 자신만이 아니라 문학 수용자 층인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시를 써야한다. 요즘의 시들은 은유와 상징을 통한 보편적 진리와 가치를 외면하고 있다. 독자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시가 아니라 화자의 시 쓰는 행위에 대한 절실함과 핍진성만을 노출하고 있다. 이는 일상의 생태학에서 오는 일그러진 자아가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의 언어 자체만을 직시하고 있는 듯하다. 작가들은 이 같이 의미 없는 내면 심리묘사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넷째, 1925년 《동아일보》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신문사들이 90여 년 동안 시행해 온 한국 유일의 전통적인 문단 등용문인 신춘문예 현상 제도가 본연의 취지와 성공을 거두도록 개선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제도는 초창기 문예 동인지 중심의 폐쇄성과 영세성은 물론, 추천제의 정실주의 등에 막혀온 한국 문단을 문호개방해서 문학의 인재들부터 널리 발굴한 가운데 크게 발전시키려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등단 제도는 오늘의 변화된 실정에 맞게 개선해서 활성화해 가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지 않을 경우, 요즘 문학의 위기 속에 난립되다시피 생겨난 각종 문예지들에서 일정한 규제나 질적인 보장 없이 신인을 양산하는 문단 질서에서 올곧게 역할하기 버거울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미 : 시인, 문학박사, 한성대학교 외래교수역임,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불교문학회 부회장, 계간 현대시선 주간
구로문학의집 행정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