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3] 전남대학교 개교 60년을 돌아본다 (3) 사건으로 본 60년
5·18 등 한국 사회 남을 사건들의 산실!
(전남대학교는 지난 60년 동안 학교 안팎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의 중심이었다.
사진 왼쪽은 우리 대학 교수들이 중심이 됐던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기념비(인문대 앞),
오른쪽은 윤상원 열사 기념비(사회대 앞).)
오늘의 전남대학교가 존재하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사연들이 역사의 길 위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모든 이야기는 역사를 기록하고, 그 기록에서 교훈을 찾는 사람들에 의해 복원되고 전승될 것이다. 또는 재구성, 재평가될 것이다. 다만, 60주년을 맞는 지금 특별히 기억하고, 되새겨보고 싶은 일들은 무엇일까? 짧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희로애락을 담고 있는 역사적 기억의 일부를 더듬어 회상의 단초를 제공해보고자 본다.
전남대학교는 1952년 6월 9일, 대학 캠퍼스가 아닌 광주 서중학교(현 광주일고) 교정에서 개교식을 거행했다. 오늘날의 용봉캠퍼스가 위용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54년과 1955년의 시기이다. 1954년 5월, 후원 재단이사회가 당시 농과대학이 위치하던 용봉동(광산군 서방면)에 약 19만 평의 토지를 매입하고, 그해 11월 13일 종합캠퍼스 건설이 시작되었다. 1955년 2월 공과대학 교사를 착공한 데 이어 문학부 합동강의실(현 인문대 1호관)과 중앙도서관(현 사회과학대학 자리, 금호각: 금호그룹 고 박인천 대표 기증)을 착공하였으며, 6월 공대 본관(현 학군단 본부)을 착공하였다. 그리하여 학동, 남광주역, 목포 대성동, 양동 등에 흩어져 임시교사를 사용하던 단과대학들이 용봉동 캠퍼스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당시 선배들의 표현에 따른 ‘장과대학(場科大學)’의 시절을 마감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는 반대와 설득을 거치는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오늘날과 같은 캠퍼스의 모습을 완벽하게 갖춘 것은 1975년 이후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좌측에 건물 121동에 대지 1,343평으로 49세대가 살고 있던 용봉마을(현 당산나무 근처)이 있었다. 전남대학교가 교육시설 사업지구로 인정 고시(1974. 9. 11)되고 그해 마을을 매입할 경비(1억7천여만 원)가 추가예산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민주화 운동의 자랑스런 역사들
“이곳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5·18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된 곳이다.” 전남대학교에 정문 옆에 세워진 광주민주항쟁 기념비 1호의 첫 문장이다. 전남대학교가 한국 민주화의 역사와 함께 해온 과정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표현이다. 1960년 4.19혁명으로부터 시작되어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전남대인의 민주화 열기는 면면히 이어져 있다. 특히, 송기숙 교수를 비롯한 11명의 현직 교수가 해직된 1978년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은 교육의 방향과 지식인의 삶 그리고 한국 민주화에 큰 이정표를 세웠다. 현재 용봉캠퍼스에는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기념비를 비롯하여 박관현, 윤상원 열사 기념비 등이 당시의 숨결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국립대 최초의 직선 총장 선출
지금 전남대학교는 제19대 총장 선출을 위한 선거가 한창이다. 5월23일에는 선거가 치러진다. 총장 선출 제도 역시 전남대학교의 영예로운 전통과 맞닿아 있다. 초대 총장은 1952년 6월1일 임명된 최상채 당시 임기는 6년. 이후 총장 선출은 교수회의의 동의를 얻는 직접선거 방식으로 치러졌다. 1952년 2월28일 제2대 총장을 선출하기 위한 전체 교수회의가 열렸다. 최초의 총장선거였다.
하지만 이때 선출된 최상채 총장은 1960년 4.19 혁명과 대학 민주화의 열기로 4월 30일,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직선으로 선출된 3대 박하욱 총장 역시 이어진 5.16군사쿠데타로 취임 1년 만에 중도하차했다. 이후 총장은 대통령 임명제로 바뀌고, 1990년에 이르러서야 직선제가 부활하게 된다. 당시 교수평의회(1965년 7월6일 전남대학교 교수협의회 창립)를 중심으로 제13대 총장 선출에 대비하여 1988년 1월5일에 직선제 규정을 도입하고, 5월3일에 단독 입후보한 오병문 교수가 총장으로 선출됐다. 빼앗긴 총장 직선제를 쟁취한 최초의 대학이라는 영예를 안은 것이다.
여수대와 하나가 되다
1990년 이후부터 고등교육을 둘러싼 대내외의 환경이 급변하면서 대학에도 변화와 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교육개혁, 구조조정, 대학평가 등을 통해서 경쟁력을 갖춘 대학의 육성이 핵심과제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2006년 3월1일, 90여년의 전통을 지닌 여수대학교와 통합이 이뤄지게 되었다. 더불어 교육개혁에도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며 ‘잘 가르치는 대학’의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1997년 교육부로부터 국립대학 최고의 ‘교육개혁 우수대학’에 선정되었는데, 총동창회(당시 김양균 회장)는 그해 12월3일 동창회관에서 동문 축하연을 열기도 했다.
이후 2003년 국립대 자체 발전계획 추진실적 최우수 평가, 2007년 ‘아하! 학습공동체’ 국립대 우수혁신사례 선정 등 성과가 이어졌다. 특히, 2011년 학생 1인당 교육투자비가 등록금의 3배에 가까운 1,300만원으로 거점국립대학 1위를 차지했고, 경향신문이 발표한 2011 대학가능지수 학생생활만족도에서 거점국립대학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박세종 / 신문방송·84 모교 홍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