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의 예언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7:14) 하나님께서 메시아 출현의 한 징조를 보여 주시는데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처녀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알마'인데 처녀를 지칭하는 전문 단어라기 보다는 젊은 여자 또는 결혼하기 전의 여자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성경에서 처녀를 가리키는 단어로서는 '베툴라. 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70인역에서는 '알마'를 처녀를 뜻하는 '파르쎄노스'로 번역을 하였고, 라틴어 성경도 동일하게 처녀를 뜻하는 '비르고'로 번역을 하였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처녀'와 '젊은 여자'에 대해서 논쟁을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내용들이다. 신약 성경에서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확증지어진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0~31) 마리아는 약혼한 처녀였으며 처녀인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하여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구약의 예언은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다.(마1:26~35참조) 예수님이 탄생하시기도 전에, 그것도 약 700 여년 전에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과 세상 온 땅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이 이렇게 선포된 것이다. 임마누엘이란 '함께하신다'는 '임'과 '하나님'의 '엘'이 합성된 단어로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메시아 출현의 상징적 표현이다. 상식과 과학을 뛰어 넘는 기적적인 메시아의 출생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논쟁거리가 될만하다. 남자를 모르는 순수한 처녀의 몸에서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은 현대 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내용이다. 메시아의 출생은 사람의 상식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지식과 과학을 뛰어넘는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 메시아는 잉태하셨다. 그러나 '임마누엘'을 메시아의 이름만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 안에서 독생하신 메시아가 임마누엘로 오셔서 모든 백성들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임마누엘)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성도들은 모두 '임마누엘'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오셨고 또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신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17:21~24)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 처럼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임마누엘'하는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의 옛 지명으로서 라헬이 장사된 곳이며(창35:19,48:7), 다윗의 고향이다.(삼상17:12) 이스라엘을 다스릴 영원한 왕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메시아의 오심은(모차아:근본) 영원전에(올람:상고) 세워졌으며, 아주 오래전에(케뎀:영원) 언약된 내용이다.(창3:15) 이 말씀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예언된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다. 하나님의 천사가 목동들에게 메시아가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 나셨음을 선포한다.(눅2:8~1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눅2:1~5) 로마 황제 줄리어스 시이저 옥타비누스(아구스도는 별칭임)가 치리하던 때에 요셉은 호적을 정리하러 약혼자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 베들레헴에 이르렀으나 방을 구하지를 못했다. 방이 없어서 구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호구조사로 인하여 대 규모의 사람들이 이동을 함으로서 방이 부족했다. 여관이나 개인 집들이 방을 빌려주면서 고액의 돈을 받고 영업행위를 하고 있었다.(이 시대에는 여관이라는 개념의 숙소는 없었다. 다만 여행객을 위한 여자 숙소와 남자 숙소 등으로 나누어 있는 객사가 있었고 돈을 많이 주면 자기가 쓰던 방을 빌려 주기도 했다.) 요셉이 방을 구할 때 사람들은 빈 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요셉에게 방을 빌려주지를 않았다.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돈을 받고 빌려주기 위해서였다. 돈을 사랑하면 동정심도 긍휼도 없어지고 하나님의 말씀도 가슴에서 지워진다. 오직 현실만이 진리처럼 마음과 가슴을 가득 채우게 만든다. 예수님은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이 있다고 하셨다.(마6:21) 만일 이들에게 형제애와 긍휼이 있었다면 임신한 마리아에게 서로 방을 내어 주고자하는 행동이 뒤따랐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여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던 것처럼 지극히 환난 중에 있는 자에게나 나그네에게 행하는 사랑은 어떤 기도보다 아름다운 기도가 될 것이다. 요셉은 가난하게 사는 한 농부의 집에 들어가서 이미 오래전 부터 동물이 없어서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마굿간을 돈을 주고 빌리게 되었다. 요셉은 마리아에게 짚을 깔아주고 쉬도록 했으나 여독에 지친 마리아는 준비됨없이 아기 예수님을 낳게 되었다. 우리가 구주라고 말하는 우리 주님은 이렇게 가난해서 여관 방 하나 제대로 빌릴 수 없는 가난하고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나셨다. 그것도 양들이 머물다간 사방이 탁 트인 마굿간으로 우리 구주 예수님은 그렇게 오셨다. 구주께서 마굿에서 태어나신 이유는 죄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세상이 아니므로 왕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 것을 아무것도 취하지 않은 청빈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을 구주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들은 청빈과 가난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본받아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도들이 돈과 관련된 청원의 기도들 뿐이다. 예수님은 청빈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나는 부자로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들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사역을 꼭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청빈하지 않은 풍요하고 교만한 사역을 원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비천해지고 가난할해 질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창 49:10) '규'란 '셰베트'로서 막대기, 목자의 지팡이, 징벌의 도구, 지도자의 권위 등을 상징하는 단어로 쓰여졌다. 유다 지파에서 지도자의 지팡이가 유다 지파를 떠나지 않고 이어져서 실로가 오시기까지 백성들을 통치하게 될 것을 야곱은 예언적 기도를 하고 있다. '실로'는 '평화를 주는 자'란 뜻이다. 여기서 실로는 메시아를 상징한다. 지명으로 실로는 예루살렘 북쪽 약 30마일 지점에 위치한 옛 성읍으로서 에브라임 지파의 땅이며 여호수아가 성소를 모셨던 거룩한 하나님의 성읍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수18:1) 야곱의 이 예언은 주전 2000년 경에 있었던 일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하나님이 메시아 출현과 사탄의 최후에 대하여 에덴 동산에서 주전 약 4,000년 경에 선포하신 말씀이다. 여자의 후손은 하와의 후손으로서 죄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다. 사탄의 후손(사탄의 종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은 서로 원수가 될 것을 선포하셨다. 당연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대적자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이 함께 공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여자의 후손인 메시아는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터인데, 사탄의 머리란 육체적 머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생각과 계획과 생명 까지를 포함한 뜻으로 쓰여졌다. 메시아는 사탄이 하나님의 대적자임을 온 우주에 드러내고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이끌고 가는 모습과 이 세상을 죽음의 세계로 만들어가는 공포스런 죄의 결과를 드러나게 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탄은 하나님의 대적자임을 온 천하에 드러내게 된다. 사탄은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로마를 충동질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하는 대적자로서의 모습을 온 우주와 천사들 앞에 자신의 정체를 확실하게 드러내게 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서 마치 사탄이 승리한 것 같지만, 부활을 통해서 구주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다시 얻으심으로 인하여 발꿈치만 상하셨다. 그러나 사탄은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계20:7~10)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구주 예수님은 수난을 받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할 것이지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구주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뿌리치시고 아담이 빼앗긴 지구의 장자권을 찾아오셨다(마4:1~11).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적자로서의 범죄가 온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예수님이 속죄 양으로서 드리는 희생적 보혈이 모든 생명을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다고 말씀하신다. 사탄의 범죄는 예수님이 직접 그 죄악을 책망하지 않아도 우주와 천사들과 선한 양심과 모든 생명들 앞에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다. "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요16:9~12) 예수님께서 죄란 예수님에게 생명의 권세와 심판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고, 사탄(세상임금)은 이미 천사들과 우주 앞에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대적자로서 그 죄악이 온 천하에 드러났다. 그것을 예수님은 세상 임금(사탄)이 심판을 받았다고 친히 증언하신다. 또한 의란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친히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이루지 않으시면 구속의 공의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 양의 제물이 되시고, 대속죄일의 제물이 되심으로서 원죄의 대속제물이 되셨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의'인 것이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가장 약할 때 유혹을 한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인도되어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하신 뒤에 사탄은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이 되게 하라"고 유혹을 한다(마4:1~11) 그러나 예수님은 굶주린 상태에서도 말씀으로 싸우셨고 유혹을 물리치심으로 아담이 빼앗긴 장자권을 찾아오셨다. 출애굽 과정에서 사탄의 종인 아말렉은 병들고 지치고 아픈 이스라엘 백성들이 뒤 쳐져 있을 때 그 후미를 공격해서 살육을 한다. 하나님은 천하에서 비겁한 아말렉의 이름을 없애라고 명령하신다.(출17:14, 신25:17~19) 사탄의 정신이란 이웃이 곤경에 처했을 때 그것을 짓밟고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비겁한 아말렉과 같은 행동들이다.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자기 이익을 위해 바쳐지는 이기적인 행동과 기도를 원하지 않으신다. 세상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람은 회개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날 많은 성도들은 교회에서 침례를 받고, 직분의 안수를 받았으므로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이고 구주 예수님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들을 한다. 그리고 세상 것을 청원하는 이기적인 기도도 당연한 권리 행사라고 생각들을 한다. 이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이들은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을 것이다. 사탄은 이미 선택된 자들도 유혹하여 구원받지 못하게 하려고, 달콤한 위안적 설교나, 사람의 철학으로 하나님을 조각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 말씀 보다 사람의 가르침을 더 사랑하게 만들 것이다. 성경에 없는 내용들을 진실처럼 구전 운운하며 가르치거나, 또는 성경 내용을 철학과 논리와 이기적인 수단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 3:21) 하나님은 아담에게 어린 양을 잡도록 명령하신다. 아담은 양을 어떻게 잡아야할지도 몰랐지만, 두 눈이 반짝거리며 애처롭게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 양을 죽이는 것이 몹시 미안하고 무서웠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동물이 희생되는 모습을 보면서 죄를 짓지 않기를 원하셨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 양을 죽이고 그 피를 땅에 쏟았다. 땅에 쏟은 피는 메시아의 보혈을 상징한다. 그리고 나무를 베어다가 큰 바위 위에 벌려놓고 어린양의 고기를 각을 떠서 올려 놓았는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이 재물을 모두 태웠다. 그 죽은 어린 양은 메시아의 예표이며, 아담의 죄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어린 양 처럼 죽어야만이 아담의 모든 죄가 사하여질 것이라고 하나님은 알려주셨다. 하나님은 메시아가 올 때 까지 아담은 그 자녀들에게 메시아의 오심을 교육하고 번제를 드리며 거룩하게 살 것을 명령하셨다. 아담은 자신의 죄로 어린 양이 죽어야 하고 구주 메시아가 희생제물이 되셔야만이 자신이 죄로 부터 속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담은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동물과 식물들과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에게 죄된 세상에서 살게 해준 사실에 대하여 무척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이들은 죽음을 경험해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양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도록 명령하신다.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잎을 벗고 양가죽 옷을 입었다. 아담은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수치를 느끼자마자 무화과 잎으로 수치를 가렸지만, 하나님은 메시아의 사랑으로 거룩하게 옷입혀 주셨다. 네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면 메시아는 너를 보호하시고 너를 지켜주시고 너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네가 굶주릴 때에도 메시아는 너와 함께 할 것이며, 네가 아플 때에도 메시아는 너와 함께 아파하고, 네가 추울 때에도 메시아는 너와 함께 추위를 견딜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 너는 혼자가 아니라 메시아와 함께 동행하며 살 것이다. 너와 네 후손들의 마음 문을 메시아가 두드릴 때 겸손하게 영접하고, 메시아와 함께 살면 그는 너와 더불어 먹고 함께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계3:20)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속죄양이 되시면 너희는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초대될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 잠자는 이들도 부활하여 메시아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의 잔치에 참여하거나, 유황불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알려 주셨다.(요5:27~29, 벧후3:7,계20:9~15참조) 모든 예언과 규례와 법도와 명령을 받은 아담은 에덴 동산을 뒤로 하고 그곳을 떠나게 된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은 에덴 동산 밖에서 살았다. 아침 부터 이들 부부는 열심히 땅을 일구고 채소와 과일과 견과류를 가꾸었다. 이 때에는 곡물을 먹지 않았고 씨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의 수확물만을 식용으로 사용을 하였다.(창1:29참조 *과일, 견과류, 채소 등) 이 때 부터 계절이 생겼으므로 이들 부부는 봄에 씨앗을 뿌리고 가을에 수확을 하였다. 가을이 되면 모든 나무는 잎을 떨구고 풀들도 시들어 버렸다. 겨울이면 온 세상은 모든 생명이 죽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때에는 하늘에 물이 있었으므로 비나 눈이 내리지 않았고 심한 추위도 없었다. 지면에서 안개가 올라와서 땅을 촉촉히 적셔 주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에게 에덴 동산에서의 사건을 알려 주며 제사제도와 규례에 대해서 교육을 하였다. 아담의 말을 들은 아벨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죽이시고 돌들로도 생명을 창조할 수 있었는데(눅3:8), 이들을 살려 주시고 메시아의 구속의 은혜를 알게하신 것은 하나님의 큰신 은혜라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아담 부부는 아벨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왠지 그 말이 불편하고 싫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은 사랑이 없으시며 잔인한 분이라고 화를 낸다. 아빠와 엄마를 한 번쯤은 용서해 주고 기회를 주셨어도 되었는데, 기회도 주시지도 않고 내쫒고, 이렇게 척박한 땅에서 살게 하시고, 행여 다시 에덴 동산으로 들어갈까봐 천사들을 세워서 지키게 하시며, 큰 불 기둥(쉐카이나:하나님의 임재)으로 지키시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화를 낸다. 아담 부부는 가인의 생각과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인의 말이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었다. 아담 부부의 에덴에 대한 지나친 그리움의 표현들이 가인과 다른 자녀들을 옳바르게 교육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더 사랑하게 만들었다. 가인과 다른 자녀들은 영원히 갈 수 없는 에덴 동산을 바라만 볼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에덴 동산 보다 더 크고 화려한 자신들만의 동산을 만들어서 고생하며 살지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언약과 명령과 법도를 바르게 지키지 못하고, 자신이 위로 받고자 하는 방향으로 아담처럼 이끌고 갈 때,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세상으로 우리는 이끌려 갈 것이다. 아벨은 인생의 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며 선하게 살면 반드시 에덴동산 보다 더 좋은 곳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었다. 그러나 가인은 더 많고 풍성한 과수와 식물을 뿌리고 가꾸어야 겨울에 고생을 안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아벨은 천연계의 계절을 통해서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했다. 아무리 농사를 짓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풍요롭게 살아도 우리는 죽게 될 터이지만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메시아의 오심을 소망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적인 풍요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준행하기 위해 번제에 필요한 양을 키우는 양치기가 되었다. 아벨은 오직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이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그러나 가인은 풍성한 음식과 호화로운 생활을 원했으므로 농사짓는 자가 되었다. 아담 부부는 아벨의 정의로운 모습이 하나님을 보는 것 같아서 몹시도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가인의 행위가 잘못된 모습인 줄 뻔히 알면서도, 자신들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편을 들어주고, 하나님을 자기들 대신 원망해주는 가인이 더 사랑스럽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들 부부가 가인을 나무라지 않고, 허물을 덮어주고, 그의 잘못된 말로 위로를 삼은 이 잘못된 행동과 교육으로 말미암아, 장차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죽이게 만드는 죄의 원인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벨이 죽고 나서야 이들 부부는 정신을 차리고 셋을 낳아 양육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교육을 했다. 아담이 낳은 약 100여명의 자녀들(추론) 중에서 오직 셋만이 온전하게 하나님을 섬겼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오늘 날 우리들도 아벨처럼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옷입고 살고 있는지, 아니면 아담처럼 에덴동산(천국)을 그리워하며 자신이 위로받고자 하는 말씀만으로 옷입고 사는 것을 즐거워하지는 않은지 깊이 성찰해 보았으면 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죄를 용서했으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든지, 하늘나라에 간다는 이 황당한 거짓 가르침을 진실처럼 믿고 따르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았으면 한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6) 하나님께서 아들인 메시아를 우리 가운데 보내 주시는데, 그의 어께에는 이 세상을 통치하는 권세가 주어졌고(미쉬라: 정사),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생명을 살리는 기적을 베푸실 것이며(펠레: 기묘자), 이 세상에 오셔서 잘못된 신앙을 꾸짖고 옳바른 신앙을 가르쳐 주실터인데(야아츠: 모사), 세상을 심판하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 목자시며 지도자시라(사르: 지도자, 방백, 통치자, 군주)고 예언하고 있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생애 중에 대부분 이루어졌고, 심판의 권세만이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심판을 이야기하면 창세기 에녹 때에 네필과 지도자들이 에녹을 죽이려고 했던 것 처럼, 오늘 날의 교회와 성도들은 싫어한다. 종말론자라고 폄하하며, 자기들은 이미 구원을 다 받아서 천국에 가 있는 것 처럼 표현들을 한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으로 살다가 홍수로 심판을 받은 20억명의 노아 때의 사람들 처럼 하나님(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모두 불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벧후3:7, 계20:15)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 9:9) 시온의 딸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시온(치온)이란 '하나님께 보호받는 성'을 뜻한다. 시온은 예루살렘 옆 산등성이 여부스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으나(삼하5:6~8, 대상11:5), 다윗이 이 성을 빼앗고 다윗성이라 하였다.(삼하5:7, 대상11:5~8) 시온은 여부스 사람 아리우나의 타작 마당으로 다윗이 제단을 쌓은 곳으로서(삼하24:18~24) 그 범위가 조금 더 확대되어 사용되었고, 이 아리우나 타작 마당에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다.(왕상6:1~38) 이 곳은 모리아 산으로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재물로 바치도록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던 곳이기도 하다.(창22:2~13) 시온은 더 확대되어 예루살렘 전체를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으며(시102:21,사4:3),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시50:2),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곳으로 확대되어진다.(사35:10, 사62:11,슥2:10~11) 하나님을 믿는 예루살렘(시온)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왕(메시아)이 공의로 구원을 베푸시며(사탄의 종됨으로 부터 속량), 나귀를 타고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왕위를 계승할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고(삼상16:13왕상1:39), 나귀를 타고 입성하게 했다.(왕상:44)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하신 규례로 행한 것인데, 장차 오실 메시아(마쉬아흐: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예표로서, 제사장(출28:41)과 왕의 위임식에서 행하여졌다. 이 때 사용하는 기름은 올리브유였는데 올리브유는 치유를 상징한다. 메시아는 우리가 죽을 병에 걸린 질병을 치유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위해 치유자로 오시기 때문이다.(마9:35)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11:1~10)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는 예수님으로서 이스라엘(하나님 백성의 왕) 왕으로 예루살렘에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다. 로마의 황제나 헤롯이 화려한 마차를 타고 입성하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세상의 왕은 이 세상에서 온갖 부귀와 권세를 누리기를 즐겨한다. 이 세상 외에 그들이 누릴 행복은 영원히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의 왕이시며, 온 우주의 왕이시며, 천천 만만의 천사들의 주인이시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자장이신 구주 예수님은 이 세상의 허접한 권세와 격식을 외면하시고 겸손되이 힘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다. 들풀도 화려하게 입히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우리가 있어야 할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겸손의 본보기로 나귀 새끼를 택하신 것이다. 우리가 바라 볼 천국은 죽어서 육체없는 영혼이 머무는 천국이 아니라 육체와 함께 부활하여 어린 양과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온갖 영화와 축복을 받으며 영원히 사는 세상이다.(계22:3~5참조) 오늘 날의 모습으로 비유하면 예수님은 고급 차를 타고 호위를 받으며 오신 것이 아니라, 이름없는 작은 소형 차를 타고 초라하게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왕으로 오신 것이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사 52:13~15)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메시아는 십자가에 높이 들려서 고귀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메시아는 출생 부터 마굿간에서 출생하셨고, 집 고치는 자 요셉의 집에서 가난하게 굶주리며 성장하셨다. 키도 작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천국 복음을 전파할 것이며, 알지 못하던 복음으로 사람들을 깨우쳐 주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메시아께서 십자가에 들린 후에야 많은 사람들이 깨달아 진리를 알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윗 왕 같은 메시아의 출현을 기대했으므로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싶지도 않았고,믿으려고도 하지않았다. 오늘 날의 유대인들도 이사야서 52장에서 53장의 내용이 메시야의 예언이라고 믿지를 않는다. 어떤 경건한 선지자들이 고난 받을 내용이거나, 유대인들이 이방인으로 부터 핍박을 받을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말씀을 직접 주신 이스라엘 민족들도 이렇게 하나님을 벗어나서 사람의 전통과 교리를 따르는 모임으로 변해버렸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아니하였도다"(사53:1~3) 이 말씀은 예수님 사후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회개에 가까운 마음을 표현한 예언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온갖 모욕을 받으셨으며, 십자가형을 받을 때에 요한을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은 안위가 염려되어 모두 도망을 갔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요19:1~6)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백성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강도이며 폭력배인 바라바를 내어달라고 한다. 그들이 바로 바라바와 같은 강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막15:11~13) 이 오만한 태도는 자신들과 자신들의 후손의 미래를 결정하는 과오를 범하게 한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마27:25) 구경하는 무리 중에는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은 자들과 예수님으로 부터 설교를 들은 자들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군중들과 더불어 외롭게 세상의 권력 앞에 무너지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자신들이 잠시 현혹되어었다고 생각을 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27:39~44)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오순절이 되어 성령의 권능이 보여질 때에 사도 베드로는 능력을 받아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언한다. 이 때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자들은 예수님에게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십자가 아래에서 구주를 모독을 했던 무리들이 제일 먼저 회개를 하고 침례를 받았다. 그 무리들로 인하여 초기 교회는 부흥을 한다. 이것은 구주께서 뿌려놓은 복음의 씨앗이었으며, 베드로와 사도들은 추수꾼이 되었다. 베드로의 설교 때문에 교회가 부흥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1~42)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53:4~5) 이 고백 역시 730년 후에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이 회개를 하며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로 인하여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는 예언이다. 750여년 후에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증언을 한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벧전2:20~25)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이 세상에는 죄가 들어왔고,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죄된 세상의 언어와 철학과 지식과 생활 방식을 배우며 이 세상을 사는 방법을 먼저 교육받고 훈련을 받으며 살아왔다. 원죄란 아담이 범죄하므로서 이 세상이 죄된 세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담이 사탄에게 빼앗긴 장자권을 다시 찾는 길이며, 죄된 세상을 심판하시고 죄 없는 영원한 세상으로 백성들을 데려가는 사역이시다. 그래서 구주 예수의 십자가는 사탄의 종됨에서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켜서 자유를 주신 사건이다. 이 자유란 이 세상이 사탄의 나라였으나, 예수님이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지구의 장자권을 찾아 오셔서 지구의 주인이 바뀐 사실이며,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과 인류를 화해시키는 대속 제물이 되신 것이다. 오늘 날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경륜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병을 고치기 위해, 또는 사업의 번영을 위해 교회들을 나가서 기도를 한다. 그리고 열심히 금식도 하고 기도들을 한다. 이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신앙이라면 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이 버리실 이유는 더욱 없다. 예수님의 질고란 나를 사탄의 올무에서 건지시기 위해 사탄의 대적행위를 몸으로 겪으신 수난을 말한다. 나를 살리시기 위해 침뱉음을 당하시고, 매를 맞으시고, 옷벗김을 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조롱을 받으시고, 제자들과 치유를 해준 백성들로 부터 배신을 당하시고, 온갖 모욕을 당하셨다. 그리고 아담의 죄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값을 치루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다. 그리고 십자가의 피 흘리심과 죽으심으로 죄값을 지불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정죄하고 죽음으로 이끈 죄인들을 바라보며 기도하신다."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신앙은 창조전 부터 인류를 속량하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섭리를 믿으며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믿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구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구주께서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은 복음서에서 모두 12번이나 나온다. 기도는 세상 재물을 청구하는 청구권 남발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온전히 무릎꿇는 믿음의 고백이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활인 것이다. 참된 기도는 선한 믿음의 결실들이 들어나는 삶이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53:6~9) 양은 놀랍게도 남이 침을 발라놓은 풀을 먹지 않는다. 옛날 어린 시절 먹을 것이 귀할 때 형제들이 많은 가정에서 고구마나 감자에 침을 발라놓고, '이것은 내거'하던 추억이 생각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양은 남이 침을 발라 놓은 주인 있는 풀은 절대 먹지 않는다. 아마 이 양의 모습을 흉내낸 행동들이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양은 털을 깎을 때에도 반항하지 않고 죽은듯이 있고, 죽을 때에도 바둥거리지 않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기까지 대속제물인 어린 양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골고다 언덕에서 강도 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며(마27:38), 숨을 거둔신 후에서야 공회(산헤드린) 의원이며 부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사흘간 잠들어 계셨다.(막15:42) 예수님의 생애에서 부자로서 생활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으셨다. 부자의 무덤에 잠들어 계신 것이 예수님이 누리신 이 땅에서 누리신 최고의 호사였다. 우리가 세상에서 얻는 재물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 처럼 이렇게 귀하게 쓰여져야 마땅하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전통을 깨고 자신이 죽을 각오를 하고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요구했다. 빌라도는 예수에 대한 호감이 있었고 요셉이 부자였으므로 차후에 자신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을 하고 그의 청을 들어 주었다. 대제사장은 돈을 받고 다음 날이 안식일이라는 핑계를 대고 눈감아 주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에서 일어날 모든 일들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예언해 놓으셨다. 성경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록해 놓은 말씀이다. 예수님은 살기위해 자신을 변명하지도 않았고, 제사장을 정죄하지도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하늘의 천사들을 동원해서 이들을 벌하고 죽일 수도 있었지만 사탄으로 부터 인류를 속량하시기 위해 죄인처럼 순명하셨다. 이 큰 사랑 앞에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리고 살고 있는지 부끄럽기만 하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모든 세상 욕심을 죽여야,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과 모든 축복을 누릴 수가 있음을 구주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 주신 내용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사 53:10~12) 이 말씀들은 위에서 충분하게 설명했으므로 생략하도록 한다. 구주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죽는 순간까지 범죄자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예언하고 계시다. 이 모든 일은 신약에서 모두 성취되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 22:16~18) 개란 정조 관념이 없는 음란함의 상징적 동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예수님은 개들에게 비유하셨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7:6)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했던 제사장들도 개들이고, 바리새인들도 개들이고, 군중들도 개들이고, 로마의 병사들도 구주 예수님을 둘러싼 개들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사람의 철학과 교리로 유대교단을 이끌고 자신들의 이기심에 눈이 멀어 구주를 죽이는데 혈안이 된 이 무리들은 사탄에게 길들여진 충실한 개들이었다. 군중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며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며 조롱을 했고(마27:40), 남을 치료하고 죽은 자도 살렸으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다고 조롱을 했다.(마27:41~42)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졌고(요19:23~24), 예수께서 죽으신 것을 확인하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쏟아졌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19:34) 십자가 형은 사형수가 죽은 후에도 경각심을 주고 본보기를 삼기 위해서 며칠씩 십자가에 놔두는 것이 관례였는데, 구주께서는 강도들이 살아있는 가운데에서 먼저 돌아가셨고 잠시 후 강도들도 모두 숨을 거두었다. 병사들은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보통 정강이의 뼈를 부러트리는게 관례였으므로 강도 두 사람의 정강이를 부러트리고 강도들이 죽었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죽은 줄을 알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 이것은 예언된 성경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민9:12) 유월절 뿐아니라 번제에서도 뼈를 꺾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었다.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요19:36) 요한은 구약 제사제도의 어린 양이신 메시아의 예표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셔서 굶주림과 조롱과 비웃음과 멸시 속에서 성장하셨고, 공생활을 시작하신 후에도 가난하게 사셨다. 십자가의 수난을 받으시며 구주께서는 자신의 옷과 피와 물 한방울 까지도 속죄물로 다 내어 주시고 그렇게 돌아 가셨다. 그 분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내려 놓고 가셨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그 주님께 무엇을 달라고 기도들을 하고 사는지 반성해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깨닫고 예수님 처럼 이 세상 것을 모두 내려놓고 생명을 살리는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거룩한 십자가의 성혈 앞에서 우리는 정성어린 감사의 기도들을 드리며 매일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시 110:1) 구주께서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행7:55~56, 골3:1, 히1:3,히12:2, 벧전3: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하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이다. 주님이 오실 때에 사탄과 하나님의 대적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엎드려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6~29)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역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기도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함께하면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를 간구하는 일이다.
첫댓글“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사 11: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예수 그리스도 (메쉬아흐)가 없는 신앙은 있을 수 없읍니다. 구약의 창세기 부터 구약의 역사 제사제도 선지자들를 통한 예언을 통해서 메쉬아흐의 출현을 예언하고 있읍니다. 신약은 구속주가 오셨음을 확증시켜주고 있으며,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게 합니다. 참된 신앙이란 하나님의 구속에 참여하는 길이며,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는 언약은 에덴 동산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 오심을 소망하는 기도들을 드렸다. 메시아가 없는 메시아의 중보없는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2000년간 전통에 찌든 유대교의 허물을 나무라시고 천국 복음을 선포해 주셨다. 다시 2000년이 흘렀다. 현재의 그리스도교는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경만을 따르고 있는가? 2000년 전의 유대교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예레미야에게 기도하게 해서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응답을 듣고자 했던 것처럼 오늘 날 교회는 개인이 원하는 기도의 응답을 받기를 원한다.
첫댓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사 11: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예수 그리스도 (메쉬아흐)가 없는 신앙은 있을 수 없읍니다. 구약의 창세기 부터 구약의 역사 제사제도 선지자들를 통한 예언을 통해서 메쉬아흐의 출현을 예언하고 있읍니다.
신약은 구속주가 오셨음을 확증시켜주고 있으며,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게 합니다.
참된 신앙이란 하나님의 구속에 참여하는 길이며,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는 언약은 에덴 동산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 오심을 소망하는 기도들을 드렸다. 메시아가 없는 메시아의 중보없는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2000년간 전통에 찌든 유대교의 허물을 나무라시고 천국 복음을 선포해 주셨다.
다시 2000년이 흘렀다. 현재의 그리스도교는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경만을 따르고 있는가?
2000년 전의 유대교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예레미야에게 기도하게 해서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응답을 듣고자 했던 것처럼 오늘 날 교회는 개인이 원하는 기도의 응답을 받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