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결을 따라 걷는 사람
— 오도 원준연 수필집 『빨간 페도라』의 수필세계
늘샘 최원현·수필가⋅문학평론가
한국수필창작문에원장⋅사)한국수필가협회 제7대이사장⋅사)한국문인협회 제27대부이사장⋅재)국립세계문자박물관 이사
수필가는 세상을 다르게 보는 사람이다. 남들이 그냥 지나치는 자리에서 멈추고, 남들이 흘려듣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남들이 잊어버린 것들을 오래도록 품고 사는 사람. 원준연 수필가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원준연 수필가는 2005년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하여 왕성한 문단 활동을 하는 작가다. 한국문인협회 감사·대전문인협회 회장·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수필문학추천작가회 부회장·원종린수필문학상 운영위원장·한금산문학상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이미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미울 정도로 곱게』 『이순의 경지는 어찌하여』 『피아노 건반처럼』과 『오도 원준연 교수 정년기념 수필선집』을 낸 바 있다. 그의 수필적 공로는 제24회 수필문학상·제28회 대전문학상·제21회 한국문협작가상을 수상케 한 중견 작가이다.
그래서일까. 이번 수필집에 실린 작품들을 읽어 나가면서 한 가지 분명한 인상을 받게 되었다. 원준연의 글들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글에서도 조급한 결론을 향해 달려가는 법이 없다. 마드리드 마요르 광장에서 빨간 페도라를 집어 들던 순간도, 우유니 소금사막의 하얀 벌판을 걷던 시간도, 하얼빈 빙등축제(氷燈祝祭)를 앞두고 손가락을 꼽던 설렘도, 모두 천천히, 사람의 걸음 속도로 쓰여 있다. 그 속도야말로 원준연 수필가의 체질이며 문학적 태도다.
빨간 페도라를 쓰고 개선장군처럼 가게 문을 나서던 장면을 떠올려 보자. 20여 년 전 이탈리아에서 본 유학생의 빨간 모자 하나가 기억 속에 각인된 채 세월을 건너왔다가 스페인 마요르 광장의 기념품 가게에서 마침내 재회하는 그 순간. 이것은 단순한 충동구매가 아니다. 오래전에 품었던 어떤 꿈이 뜻밖의 장소에서 불현듯 실현되는 순간이다. 원준연 수필가는 이처럼 그런 찰나를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빨간 모자가 리마인드 웨딩 촬영의 신랑 역할을 기꺼이 감당하게 하는 대목에 이르면 독자도 어느새 환한 광장의 햇살 속에 함께 서 있게 된다.
원준연의 수필에는 스페인, 대만, 쓰시마, 마쓰야마, 가가와, 돗토리, 볼리비아, 이집트, 하얼빈 등 여행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글들은 그냥 여행기가 아니다. 여행지는 원준연에게 생각의 문을 여는 열쇠다. 대만 101빌딩을 보며 내진·제진·면진 구조를 설파하고, 용의 몸통 속 여의주로 쇠구슬을 읽어내는 시선. 가가와현의 사누키 우동 한 그릇에서 음식과 문화와 민간 외교의 품격을 길어 올리는 눈. 우유니 소금사막 벽돌 단면에서는 나무의 나이테를 찾아낸다. 산삼의 뇌두(腦頭)와 코끼리 상아와 물고기 이석을 차례로 소환하는 박학(博學)의 이런 지식들은 과시가 아니다. 세상을 더 풍요롭게 보고 싶다는, 그래서 독자에게도 그 풍요를 나눠 주고 싶다는 성의다. 그의 수필 스승 갈석 강석호(1937-2018) 선생과 부친이신 원로 수필가 원종린(元鍾麟1923-2011) 교수가 입을 모아 당부했다는 말, "수필가는 박학다식해야 하고 유머와 위트가 있어야 한다"는 그 가르침이 이 수필집 곳곳에 살아 있다.
특히 「잎 하나로 강을 건너다」에서 히구치 이치요와 나카라이 토스이, 일엽 스님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의 수필 특유의 결을 잘 보여준다. 사실과 사실이 이어지고, 역사와 인물이 맞닿으며, 동아시아의 시간이 하나의 말차 향 속에 녹아든다. "기념관에서 마신 말차가 쓰고 떫기보다 감미로웠던 것은 이치요의 러브스토리가 녹아있기 때문이리라"는 마지막 문장은 정보를 감정으로 환원하는 이 수필가의 솜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백미(白眉)와 백미(白米)」도 마찬가지다. 쌀알 하나에 반야심경 전문을 새기는 중국 전통예술 '호망조각'을 발굴하여 세밀하게 풀어 놓더니, 마지막에 "여럿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을 가리키는 말 백미(白眉)와 같은 뜻으로 백미(白米)를 써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는 결론으로 착지한다. 이 착지가 억지스럽지 않다. 쌀 한 알에 수백 자를 새기는 인내와 기예 앞에서 그 말은 자연스럽게 옳다. 독자는 이 마지막 한 줄에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원준연 수필가의 글에는 사람이 많이 나온다. 테니스장의 총무, 장학생 P양, 후지시마 선생, 우동집 오카미상. 이 인물들은 짧게 등장하지만 생생하다. 짧은 빨간 치마를 입고 나타난 총무에게서 "새빨간 장미"를 보는 눈, 졸업 전에 찻잔 하나를 두고 간 제자를 "겨울 장미"라 부르는 마음, 기모노 차림으로 50미터 주차장까지 마중 나왔다가 어둠 속에서도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오카미상에게서 "공손유례"의 민간 외교를 읽어내는 시선. 이 모든 것이 그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수필집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아마 「잊히지 않는 고향처럼」과 「얼음꽃처럼」일 것 같다. 전자는 등단 20주년과 스승 갈석 강석호 선생 그리고 아버지를 함께 떠올리는 글이다. 세미나에서 단상에 올랐다가 머릿속이 하얘져 버린 수치스러운 기억을 솔직하게 꺼내놓는 대목에서 이 수필가의 진심이 보인다. 부끄러운 기억을 굳이 소환하는 것은 "그때 좁은 방에서 여러 명이 부대끼며 돈독하게 쌓인 정을 잊지 못해서"라는 한 줄이 그 이유의 전부다. 회한이 아니라 그리움으로 과거를 여는 사람, 그것이 원준연이다.
「얼음꽃처럼」에는 회갑을 기념해 아들딸이 함께 유학 시절의 돗토리를 찾아준 이야기가 담겨있다. 오래된 아파트 앞에서 "순간 울컥한다"는 ‘울컥’ 두 글자가 10개월의 유학 생활을 압축한다. 도서관에서 자신이 기증한 책 다섯 권이 그대로 꽂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오래전 고국으로 전화를 걸던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수화기를 들어보는 장면. "이제는 장성한 아들의 귀여운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듯하다"는 문장에서는 시간이 겹친다. 지금의 칠순이 그때의 청년을 안아준다.
「마지막 퍼즐 조각」은 이 수필가의 문학관을 정면으로 드러내는 글이다. 수필이 시낭송이나 소설의 영화화처럼 역동적인 형태로 대중에게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수필극'의 등장을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으로 규정하는 사유. 이 글에는 수십 년 수필을 써온 사람의 진심 어린 갈망이 담겨있다.
원준연 수필가는 스스로 "강연은 치마와 같아서 짧을수록 좋다"는 임어당의 말을 즐겨 인용하지만 정작 그의 수필들은 짧지 않다. 풍부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넓게 펼쳐진 사누키 평야처럼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로 잘 흘러간다. 그것은 아마도 이 수필가가 독자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글을 쓰는 내내 옆에 앉아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처럼 그는 독자를 혼자 두지 않는다.
우유니 소금사막의 나이테 무늬 벽돌처럼 이 수필집은 오랜 시간의 켜켜이 쌓인 층위들을 보여준다. 농학도의 눈, 여행자의 발, 교육자의 마음, 아버지와 아들, 스승과 제자, 문인협회장의 책임감과 수필 동인으로서의 자유로움. 이 모든 층이 한 사람 안에 들어 있다. 그리고 그 층들 사이사이에는 언제나 사람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 흐른다.
마지막으로 「아르테미스」의 한 구절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달은 이지러지면 이지러진 대로, 구름에 가리어지면 가리어진 대로 아름답다." 원준연의 수필이 그렇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자리보다 흔들리고 돌아오는 자리에서 더 깊어지는 글들, 이지러져도 빛나는 달처럼 이 수필집은 독자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둥글게 떠 있을 것이다. 수필집 『빨간 페도라』를 통해 보여주는 삶의 결을 따라 걷는 원준연의 수필 결이 또 하나의 문학 탑을 쌓아내는 열정과 문학 사랑에 큰 박수로 응원을 보낸다.
2026년 여름
도현재에서 늘샘 최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