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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말들
임지연
ARCADE 0014 ∣ 2022년 6월 10일 발간 ∣ 정가 25,000원 ∣ A5(138×210) ∣ 283쪽
ISBN 979-11-91897-20-3 03810 ∣ 바코드 9791191897203 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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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 소개
우리는 해석자가 아니라 목격자다
[‘이후’의 말들]은 임지연 평론가의 세 번째 평론집으로, 「4.16 이후, 어떻게 말할 것인가?—수치심의 윤리와 증언문학의 가능성」, 「갱신되는 독법/들—1990년대 여성시의 역설에 대하여」, 「손상된 지구에서 생존하기—인류세와 한국문학」 등 19편의 평론이 실려 있다.
임지연 평론가는 말한다. “나는 지금 ‘이후’의 시간 속에 산다.” 여기서 ‘이후’란 세 가지 ‘이후’를 말한다. “4.16 세월호 사건 이후, 강남역 페미사이드 사건 이후, 그리고 지질학적으로 홀로세 이후가 그것이다.” 임지연 평론가의 말을 더 들어 보자면, “4.16 세월호 사건을 바라보면서 문학의 증언능력에 대해 생각하고, 강남역 사건 이후로 나는 어떤 여성 비평가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평화롭던 홀로세가 끝나고 인류세가 시작되었다는 최근의 지질학적 담론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생태적 비전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인간, 자연, 기계의 관계성에 대해 깊은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4.16 이전, 강남역 사건 이전, 인류세 이전으로 우리가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는 이 변화를 문학적으로 해석하고 이후의 비전을 모색하기 위해 이론적 개념들과 관점을 생성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 번째 평론집이 나오게 되었다.” 요컨대 [‘이후’의 말들]은 세 사건들 ‘이후’, 증언자이자 여성 비평가이자 생태주의자로서 새로운 비평 주체가 탄생하고 정립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 임지연 평론가가, 그리고 그녀와 더불어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더는 그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사실들이다. 예컨대 4.16 세월호 사건 이후 임지연 평론가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아감벤을 참조해 재차 확인하자면 증언(의 구조)이란 “증언 불가능성으로서의 증언”일 수밖에 없다는 점, 그래서 증언은 역설적이며 그만큼 복잡하다는 점, 이와 연동해 적어도 증언문학에서만큼은 ‘저자’의 개념이 변경되고 확장되어야 한다는 점, 그러나 “근원적으로 4.16은 치유되지 못할 것이며, 특히 유가족의 고통은 완전히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 증언문학의 “미학적 문제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기 어렵다”는 점, 그렇지만 앞으로도 “문학은 고통받는 자의 언어로 고통에 대해 말하고, 더 적극적으로 고통을 경감시킬 의무가 있”으며 다행스럽게도 “시인들은 기존의 미학과 언어를 포기해야 하는 모험을 감행하면서까지 증언의 미학을 탐색하고 있다”는 점 등을 확인하면서, 마침내는, 시인은, 평론가는, 아니 우리 모두는 이제 더 이상 ‘해석자’가 아니라 ‘목격자’라는 진리에 직면한다. 이처럼 임지연 평론가의 비평은 알랭 바디우가 말한 ‘사건’ 이후 그에 충실하고자 부단히 고투한 한 비평 주체의 탄생 과정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들을 (재)발견하고 그럼으로써 도래하는 진리를 옮겨 적는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임지연 평론가의 비평은 극히 실천적이다. 임지연 평론가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러니까 스스로 진실하다. “텍스트의 독법은 갱신된다. 아니 갱신되어야 한다. 그 갱신의 힘이 시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책머리에
나는 지금 ‘이후’의 시간 속에 산다. 그렇게 되었다. 기존에 머물던 삶의 지반은 의도치 않게 부서져 떠밀려 사라지고 나는 새로운 지평 위에 서 있다. 삶의 외부는 이전과 다를 것이 없지만, 내가 참여하는 세계는 이전과 다르다. 그렇게 느낀다. 나에게 ‘이후’란 이동과 변화, 새로움과 관련된다. 이것은 좋은 일인가? 우선 그것은 고통을 전제한다. 이전의 것으로부터 이동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깨져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후’의 방향에 있으며, 변화에 대한 해석에 있다. 나는 그것을 모색하는 중이다. 그래야 잘 깨질 수 있다. 모색은 모든 역설적인 것들로 뒤범벅된 현상들의 연속이지만, 나는 기꺼이 그 어려움 속에서 기뻐할 것이다.
나의 글쓰기는 세 ‘이후’의 시간 속에 있다. 4.16 세월호 사건 이후, 강남역 페미사이드 사건 이후, 그리고 지질학적으로 홀로세 이후가 그것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마치 내가 세 ‘이후’를 구상하고 기획한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정리는 사후적인 것이다. 나의 미욱한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사유의 흔적과 궤적을 쫓아가다 발견한 것이기 때문이다. 4.16 세월호 사건을 바라보면서 문학의 증언능력에 대해 생각하고, 강남역 사건 이후로 나는 어떤 여성 비평가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평화롭던 홀로세가 끝나고 인류세가 시작되었다는 최근의 지질학적 담론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생태적 비전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인간, 자연, 기계의 관계성에 대해 깊은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4.16 이전, 강남역 사건 이전, 인류세 이전으로 우리가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는 이 변화를 문학적으로 해석하고 이후의 비전을 모색하기 위해 이론적 개념들과 관점을 생성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세 번째 평론집이 나오게 되었다.
세 ‘이후’는 개별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사실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는 것 같다. 4.16 세월호 사건을 의미화하면서 해석자에서 증언자의 위치를 확보하려고 하였는데, 그것은 1990년대 여성과 문학을 읽어 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여성의 의미는 자연과 어떻게 배치되는가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질 수 있었다. 자연(지구)과 여성을 등가적으로 배치했던 1990년대를 예각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얻게 되었다. 가이아 개념을 비판적으로 재설정하면서 여성과 지구, 생태, 기술, 증언 등의 개념들이 어떤 질서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직 그 계보와 체계를 짜 맞추지는 못하고 있지만, 향후 나의 글쓰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세 번째 평론집은 2010년대를 살아 내면서 산출된 부끄러운 글 꾸러미이다. 지난 시기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지평의 사건들로 가득한 것 같지만, 현재의 사건들은 그것과의 연결 속에서 질적 차이를 갖는다.
제1부는 4.16 이후의 문제의식과 강남역 페미사이드 사건 이후에 읽은 여성에 대한 글들이다. 1990년대적인 것들도 이 관점에서 읽어 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제2부에는 생태와 혼종성, 몸에 대한 글들이 묶여 있다. 일관된 주제는 아니지만, ‘이후’라는 지평 위에서 읽고 쓰는 자로서 머무르고자 했다. 제3부와 제4부는 2010년대 중후반 왕성하게 활동했던 시인들의 시에 대한 글들이다. 우연히 내게 도착해 나를 스며들게 한 여러 시인들의 시에 사랑과 감사를 보낸다.
•― 저자 소개
임지연
건국대학교에서 공부했다.
2005년 계간 [시작]을 통해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평론집 [미니마 모랄리아, 미니마 포에티카] [공동체 트러블] [‘이후’의 말들], 인문에세이집 [사랑, 삶의 재발명] 등을 썼다.
1950-90년대 한국시를 세계(문학), 젠더, 자연, 몸 등의 관점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 가이아, 동물, 생태, 신유물론을 공부하면서 세계의 관계성과 재배치에 대해 모색 중이다.
현재 건국대학교 KU연구전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차례
005 책머리에
제1부
013 4.16 이후, 어떻게 말할 것인가?—수치심의 윤리와 증언문학의 가능성
033 갱신되는 독법/들—1990년대 여성시의 역설에 대하여
050 여성혐오 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071 1990년대적인 것을 말하는 방법과 계보
제2부
093 손상된 지구에서 생존하기—인류세와 한국문학
112 혼종적 말하기의 지정학적 위치와 정치성—황병승과 채상우의 시
126 생태를 세속화하기—김종철,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읽기
137 몸의 역설, 그리고 윤리적 결단으로서 글쓰기—오민석의 평론집 [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 읽기
제3부
149 기교주의자의 몸말—이인원, [그래도 분홍색으로 질문했다]
160 울퉁불퉁하고 무작위적으로 봉제된 사물들의 언어—금은돌의 시에 대하여
174 펄럭이는 은유의 그물에 낚이는 타자들의 물질성—박연준의 신작 시 읽기
186 인공언어 제작자, 지구-헵타포드의 비정한 세계의 기록—김준현의 시집 [흰 글씨로 쓰는 것] 읽기
201 시적 하이브리드(괴물, 병신)의 실패담에 대하여—최금진과 김이듬의 시
213 ‘강박적 말하기’라는 모순 회로와 ‘나를 설명하기’라는 윤리성—정철훈의 신작 시 읽기
제4부
225 나(세계)는 책이다!—한용국의 시
238 비휴먼적 세계의 주인공들—손미와 김준현의 시
249 시선의 정치성, 시선의 (탈)정체성—김기택의 시
257 기쁨의 윤리, 악몽의 구조—손택수와 김정수의 시
269 다자연과 기쁨의 시학—김형영의 최근 시
•― 책 속으로
증언의 구조에서 본다면, 이 시는 삼중의 구조로 되어 있다. 죽은 아이들-유가족-시인의 구조는 증언의 역설과 복잡성을 잘 보여 주는 것 같다. 온전한 증인에 대한 유가족의 증언, 그리고 그 증언을 토대로 한 시인의 상상력, 사사키 아타루가 말한 ‘반-대변하기’의 태도, 시인들의 미적 거리와 정직성의 문제들. 그렇다면 이 시는 아이-부모-시인의 중층적 구조라는 점에서 저자의 개념을 확장한다. 내가 아는 한 한국시사에서 이러한 시집은 처음이다. 증언 시집(치유)의 새로운 형식이 등장했다고 봐야 한다.(p.32.)
어머니 몸을 자연과 대지모신으로 연결하는 상상력은 동시에 여성시의 한계를 내포한다. 자연이란 순수한 객관적 영역이 아니다. 또한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공간도 아니고, 풍요와 평등의 원리가 관철되는 이상 세계도 아니다. 그러나 김선우의 시에서 자연은 모성성과 생명성의 원리로 구현되는 이상화된 유토피아에 가깝다. 그 공간에 여성의 몸을 배치하고 여성을 이상적 원리로 추상화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 여성은 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추상화된 신화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p.43.)
이제까지 ‘여성혐오 시’라는 용어는 우리 시문학사에서 포착되지 못한 개념이었다. 21세기 문학장에서 ‘여성’의 의미는 더욱 비가시적인 것이 되었으며, ‘여성문학’은 해체라는 역설적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하나는 여성 차별 혹은 젠더 불평등이 완화되었다는 진보적 자신감 때문이었고, 둘째는 여성 정체성에 대한 개념적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나는 두 번째 문제에 주목하면서 21세기 여성문학을 ‘이상한 여성 주체의 등장과 탈여성적 문학장의 비균질성’으로 파악한 바 있다. 2000년대 미래파 시의 주체들은 여성의 탈정체성을 통해 젠더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p.55.)
최영미의 이 시는 1990년대적 풍경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풍속사적 특징을 갖는다. 대중적으로 사랑을 받았지만, 비평계에서는 후일담 문학으로 취급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 평가는 유효한 것 같다. 이 시는 잃어버린 1980년대적인 것에 대한 애도의 형식을 갖는다. 하지만 애도는 계속 유보된다. 1980년대적인 것을 성찰한다기보다 잃어버린 것으로서의 1980년대를 낭만화하고 있으며, 그 낭만성은 신파조에 가깝다.(p.80.)
인류세는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지구의 시간에 구체적 인간의 시간을 함께 사유해야 하기 때문에 간단치 않다. 지금 폐 속에 들어가 박히는 미세먼지는 거대한 기후변화의 지구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관지에 들어간 먼지가 목을 간지럽힐 때 재채기를 하는 행위는 문화적으로 체화된 아비투스가 작동한다. 서울숲에서 개와 함께 산책하는 한 노인의 시간에는 수십만 년 전부터 늑대에서 길든 개의 시간도 함축되어 있다. 산책하는 노인의 걸음에는 인간과 늑대의 동맹 관계로부터 시작된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시간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은 지구의 오랜 역사의 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류세는 두 개의 시간을 겹쳐 놓는 균열의 시간 지대라고 할 수 있다.(pp.98-99.)
채상우 시의 복잡성을 해명하는 데는 순응/위반, 질서/부유, 대중 취향/지적 제어, 치안/정치라는 혼종적 전략을 파악할 때 가능하다. 채상우 시의 정치성은 소재적인 차원을 넘어 혼종적 전략에 의한 전면적 싸움 걸기를 시도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 싸움 걸기는 위장되어 있으며, 자주 은폐되고, 분명하지 않다. 시적 주체의 지정학적 위치가 내부에 있으면서 그 내부를 확정하지 않는 기묘한 전략은 2010년대 한국시의 혼종성을 거론할 때 가장 탁월한 지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p.125.)
그것이 가능한가? 김종철은 명쾌하게 대답한다. 가능하다! 이 책은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바쳐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게 공생공락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 전환이 바로 생태적 대전환이다. 석유문명의 종식, 노예노동의 종말, 자본주의 시스템 붕괴, 기후변화 위기와 같은 현재적 상황이 생태적 대전환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pp.131-132.)
그가 언급한 ‘신경안정제’에 대해 더 생각해 보자. 우리는 불안을 느낄 때 합리적 이성과 냉철한 지성의 작용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인간적 자신감을 가지고 산다. 오민석은 오랫동안 문학이론을 연구하고 가르쳐 온 지식인이다. 그렇다면 “갑작스런 상처 앞에서 정신이 정신없이 고꾸라지는” 상황이 닥쳤을 때 이성은 명확한 비전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한 알의 신경안정제가 정신의 힘보다 더 탁월했다고 고백한다.(p.138.)
시인 이인원은 기교주의자이다. 특히 시집 [그래도 분홍색으로 질문했다](파란, 2021)는 시적 형식과 그 형식이 어떤 감각으로부터 기원하는가에 집중하고 있다. 기교란 시의 부속물이 아니다. 기교란 시의 형식을 개별화하고 구체화하며 세련화하는 방법이다. 이인원의 이 시집은 무엇을 다루고 있을까? 사실 이러한 질문은 별로 유효하지 않은 것 같다. 시집명이기도 한 “그래도 분홍색으로 질문했다”에서(「분홍 입술의 시간」) 알 수 있듯이, 그는 언어와 세계를 분홍색이라는 감각 형식으로 질문한다. 질문의 내용이 아니라, 질문의 방식 즉 질문법을 질문한다.(p.149.)
금은돌의 시에서 사물은 독립적이지 않다. 사물의 독립성은 인간이 부여한 기능이나 인간화된 상징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개체성을 확보한 자기 자신으로서의 사물을 말한다. 오랫동안 비인간 사물은 인간의 상징체계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았다. 하늘, 책상, 안경, 상처 등과 같은 사물은 인간을 위한 기능이나 상징체계를 통해 이름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사물들은 자신의 물질성이 외면받으면서 수동적 객체에 머물러 왔다. 하지만 사물들에게 자신의 사물성(thingness)을 되돌려 주면 어떻게 될까? 사물이 갖는 육체적 물질성을 부여하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사물들은 기능과 상징체계로부터 멀어져 우리가 알 수 없는 순수한 사물로 태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p.163.)
박연준 시의 비밀 중 하나는 언어의 물질성이다. 하지만 언어는 결코 사물의 물질성에 가닿을 수 없다. 언어가 사물의 사물성을 완전하게 포착할 때, 언어는 기능을 잃고 소멸된다. 그것은 언어의 취약점이기도 하다. 언어가 말하는 자의 주관성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이유다. 너의 고통에 대해 말할 때조차 그 고통은 나의 고통에 달라붙어 있다. 너의 고통을 내가 느끼는 통증에 근거해서 발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너의 고통은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 사이에서 떠돈다. 언어는 시적 주체에 의해 허구적으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언어는 주체 중심주의, 화자 중심주의,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pp.182-183.)
나는 김준현의 시적 주체를 ‘지구-헵타포드’라고 부르고 싶다. ‘헵타포드’는 SF 작가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외계 생물이다. 헵타포드는 일곱 개(Hepta)의 다리(Pod)를 가진 존재이다. 그것은 지구어와는 다른 비선형적 언어를 가지며, 말하기와 쓰기 시스템이 다르다. 원인-결과, 시작-끝, 탄생-죽음, 우연-필연을 이분화하는 지구적 체계와 달리 동시적인 사유를 하는 외계 존재를 일컫는다. 김준현의 언어는 일반적인 서정시의 언어와 다른 시스템을 갖는다는 점에서 낯설다. 또한 그를 지구-헵타포드로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언어에 자기 증식적 인공관절을 장착하고 끊임없이 확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pp.186-187.)
하이브리드적 존재는 과거적이거나 미래적이거나, 또는 새로운 존재가 아니다. 기술 과학과 이성, 자연은 분리가 아니라 혼종적으로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하이브리드적이다. 인공관절을 다리에 심고 걸어가는 인간, 화성 탐사를 하면서도 동시에 달을 보며 기도하는 인간이 우리가 아닌가.(p.203.)
정철훈 시에서 과거는 과거적이지 않다. 남성은 남성적이지 않다. 국가는 국가적이지 않다. 그의 시에서 주체는 자아가 아니다. 정철훈의 시적 전략은 바로 그것이다. 무엇을 말함으로써 그것을 균열시키기. 무엇을 말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혹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 주기. 그 과정을 보여 주기 위해 모순 구조를 반복적으로 증언하기. 그것은 일종의 신경증자의 강박적 언어일 수도 있을 것이다.(p.213.)
한용국 시의 핵심은 세계와 언어를 다루는 지적 태도에 있다. 그의 지적 매력은 읽기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 욕망은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자못 강력하다. 그는 세계를 활자나 책으로 물질화시키는데 때로 자기 자신까지 활자화한다. 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시적 주체는 세계와 자신을 활자화한다. 읽기의 욕망이 먼저여서 해석의 내용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강조되는 측면은 읽기라는 형식이다. 그의 시적 형식은 다채로운 읽기 장치를 마련하는 데 있다. 읽기의 미적 장치를 경험하는 일은 한용국 시 읽기의 최고 즐거움이다.(p.227.)
2010년대 시에서 드러나는 시적 주체의 가느다란 서정적 목소리는 2000년대 미래파 시의 성과를 변증법적으로 승계한 한국시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제도적 서정시의 과도한 계몽성을 혁파한 자리에 서 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아무것도 없는 폐허의 자리가 아니다. 이들은 서정시의 계몽적이고 숭고한 왕좌에서 내려왔으나 서정시의 문법들을 버리지 않고 서정성을 발명하는 중이다. 이들에게 서정시의 문법들은 선배 시인들처럼 혁파해야 할 제도가 아니라, 잘 어루만져 새롭게 활용해야 할 장치들이다. 이들은 제도로서의 서정시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롭다.(p.240.)
김기택의 시는 본다는 것을 시의 원리로 삼아 진화를 계속하는 중이다. 여기서 진화란 사회생물학적 차원의 목적 지향적 발전 개념이 아니라, 탐색과 변화라는 차원에 있다. 대립적인 것들을 충돌시켜 작고 연약한 것들을 옹호했던 초기 시의 시선, 보이는 것들의 바닥에서 죽음과 공포까지 보고자 했던 비판적 태도로서의 2000년대 시의 시선. 그렇다면 최근 그의 시는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p.250.)
손택수의 시에서 자연은 자주 등장할 뿐 아니라, 의미 있는 시적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자연은 인간 바깥에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손택수의 시에서 자연은 (근대적) 자연 없는 자연이다.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절대적인 자연의 원리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258.)
김형영은 우리에게 넌지시 이 기쁨을 권유한다. “당신이나 나는 웃는 걸 좀 배워야 해요”.(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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