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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세미나(3. 24.) 발제문입니다.
레닌주의와 ‘룩셈부르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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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주의와 룩셈부르크주의를 실천 이론 차원에서 대등한 비중을 두며 비교하는 것은 무리수처럼 보일 것이다. 레닌주의는 정치적 찬반을 떠나 이미 보통명사처럼 쓰이지만, 룩셈부르크주의라는 말에 친숙한 사람은 극소수다. 레닌주의가 온갖 난관을 뚫고 1917년 후진국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데에 반해, 룩셈부르크주의는 당대 최대 세력을 자랑했던 독일 사회민주당과의 불편한 관계 속에서 그러한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는 실패했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의 죽음과 함께 독일의 사회주의 혁명은 좌절했다. 룩셈부르크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미 우경화된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 룩셈부르크의 발언권 내지 설득력은 제한되어 있었으며, 그 후 어느 정도 성장하는 독일 공산당에서 룩셈부르크주의가 차지할 수 있는 영역도 거의 없었다. 그녀의 때 이른 죽음 때문만이 아니다. 독일 공산당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도 간과할 수 없는데, 레닌 사후 레닌주의 유산 관리자 역할을 맡은 스탈린은 룩셈부르크가 역설하는 대중의 자발성을 우호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 룩셈부르크의 혁명사상이 제대로 꽃을 피울 환경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체제, 더욱이 그 최악의 형태인 군국주의에 순응하여 제국주의전쟁을 변호하는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에 맞서, 세계대전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적 야만의 대안으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적극 옹호한 점에서 룩셈부르크주의는 레닌주의와 비교⋅검토할 만하다.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10월 혁명의 의의를 적극 평가하면서도 레닌 및 트로츠키의 주요 정책과 운동방식에 원칙적인 이의를 제기하는데, 이는 사회주의 운동 일반과 특히 1905년 혁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부터 형성된 룩셈부르크 이론의 기본성향에 기인한다. 레닌주의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반론들은 레닌주의 입장에서 간단히 이론적 오류 내지 일탈로 보아 넘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운동방법의 관점에서 양자를 대질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이 경우 대질을 통해 양자 가운데 어느 쪽이 옳았다고 일괄 판정하여 그것을 초역사적 실천원리로 삼고 그것에 대한 부분적 비판들마저 적대시하는 관성에 빠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택한 길들을 그 당대적 불가피성과 함께 역사적으로 파악하고, 또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문제의식들은 적극 살려내는 것이 좀 더 생산적일 것이다. 룩셈부르크가 부단히 추구했듯이, 또 레닌이 명확히 의식했듯이, 진리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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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일보 전진, 이후 후퇴를 다루는 글 「러시아사회민주당의 조직문제」(1904)에서 룩셈부르크는 레닌이 추구하는 ‘중앙집중주의’에서는 당 중앙위원회가 “당의 유일무이한 두뇌로 기능할 것이며, 기타 모든 조직들은 신체의 운동기관처럼 당의 수족으로 기능할 것”을 우려한다. 이때 룩셈부르크도 사회민주주의 당 역시 투쟁을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에너지를 결집해야 하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이로 인해 당이 블랑키주의에 빠질 것을 경계한다. 과거의 부르주아 혁명당의 경우와 달리 사민주의에서는 평당원들이 중앙위원회에 기계적으로 맹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사민주의는 역사적으로 기본적인 계급투쟁에서 비롯하였다. 그리고 잇따른 변증법적 모순에 따라서 확대발전되어 왔다. 노동계급군대는 투쟁 그 자체의 발전 속에서 충원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당조직의 활동, 즉 투쟁목표에 대한 노동계급의 자각과 투쟁 그 자체는 연대기적으로나 기계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은 동일한 과정의 각기 다른 측면들일 뿐이다. 투쟁원칙을 별도로 한다면, 사민주의에는, 군대조직이 훈련소에서 훈련을 시키는 것처럼 중앙위원회가 당원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상세한 전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사회주의정당의 영향력 범위 자체는 투쟁의 부침에 따라 끊임없이 동요하는 것이며, 당조직은 바로 그러한 투쟁과정에서 만들어지고 성장하는 것이다.”(123) 또 이런 이유에서 룩셈부르크는 사민주의 운동에서는 당조직에 결합된 노동계급의 핵심과 당에 흡수되지 않은 비조직적 인민대중을 엄격히 구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본다. 레닌의 중앙집중주의의 특징은 모두를 위해 혼자 사고하고, 결정하고 지도하는 당 중앙에 모든 당기관이 세부에 이르기까지 ‘맹목적으로 복종’하며, 조직의 핵심과 주변인물을 엄격히 구별하는 데에 있는데, “이러한 중앙집중주의는 블랑키주의의 조직원리를 노동계급대중의 사회주의운동에 기계적으로 이식시킨 것이다.”(124) 그 결과 “권위주의적 당중앙위원회의 권능 속에서 선진 노동계급 부문의 자생적 투쟁⋅창의성 및 정치적 감각의 발전이 저해되고 제약”(138)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에서 레닌은 친절하게도 특히 1903년 2차 당대회를 중심으로 벌어진 당내 투쟁 내용을 일일이 적시하면서, 룩셈부르크의 비판이 러시아 당내 투쟁의 구체적 사실들에 대한 무지의 소산인 탁상공론일 뿐이라고 논박한다. “그녀는 내가 판에 박혔다는 불평을 하면서, 그 근거로 맑스의 변증법을 끌어내고 있다. 그러나 존경하는 이 동지의 논문이야말로 머리로만 생각해 낸 판에 박힌 것에 불과하며, 변증법의 기초원리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이 기초원리는 추상적인 진리라는 것은 조금도 없으며 진리는 항상 구체적이라고 주장한다. 룩셈부르크 동지는 우리 당내 투쟁의 구체적인 사실들을 거만하게 무시하면서, 진지하게 논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열변을 토하고 있다.”
사실상 차르 치하 러시아의 현실에 비춰볼 때 혁명당조직을 유지하는 데에 엄격한 규율과 통일성 내지 중앙집중주의는 불가피했다고 인정하고, 사태파악의 구체성이나 현장성의 차원에서 레닌의 입장을 옹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조직을 투쟁과정에서 만들어지고 성장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룩셈부르크의 사고방법도 단순한 탁상공론과는 거리가 있다. 다수를 점하지 못하면, 또 모든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투쟁하지 않으려 드는 기회주의를 물리치고, 투쟁을 통해 투쟁의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가려는 적극적 실천방법은 오늘날에도 존중할 만하다. 그런데 바로 레닌주의야말로 이러한 방법을 러시아의 정치현실 속에서 구현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룩셈부르크의 비판에서 좀 더 실질적인 부분은 중앙의 소수 지도부가 당의 의사결정을 독점한다는 대목이다. 실제로 중앙위원회 내지 지도부가 두뇌 역할을 하고 나머지 모든 조직이나 당원들은 수족 노릇을 해야 한다면, 그러한 당이 활력을 띠고 혁명투쟁을 수행해 나가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당과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성립된다. 그렇다고 룩셈부르크가 모든 문제를 전체 당원들 내지 노동계급의 대중들과 협의하여 투표로 결정하자거나 중앙위원회를 해체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전위당의 주도적 역할과 대중의 자발성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바람직하냐에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룩셈부르크는 원론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민주주의는 부르주아 지배로 억눌리는 모든 사람의 이해를 대변한다.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다종다양한 집단의 분노⋅원한⋅희망을 노동계급의 최상의 목표 아래 묶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사회민주당은 현존 러시아사회에 이의를 제기하고 적극 반대하는 비노동계급의 격정을 노동계급의 혁명투쟁에 유리하게 싸안아야만 한다.”(139) 이는 사회주의운동을 위협하는 두 가지 위험에 맞서기 위한 룩셈부르크의 처방이다. 두 가지 위험이란 당의 대중적 성격 상실로 인해 “운동이 전 인민대중의 운동이 아닌 내부 특정분파의 투쟁으로 축소”될 위험과, 역사적 목표인 사회주의혁명을 포기하고 “부르주아 사회개량운동으로 변질”될 위험이다.(140) 룩셈부르크는 특히 후자와 같은 기회주의적 일탈 가능성을 당 규약으로 제거할 수는 없다고 본다.(141) 오히려 엄격한 당 규약으로 사회주의운동 속의 기회주의를 몰아내려는 레닌의 시도는 기회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운동에 타격을 주게 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노동운동이 잘못 나아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전지전능한 중앙위원회의 보호막을 치려는 레닌의 과도한 욕망”에서는 “주관주의적 징후”가 드러난다고 진단한다.(142) 이런 맥락에서 룩셈부르크는 노동계급이 “역사의 변증법 속에서 실수하며 깨우쳐 갈 권리”를 옹호하며, “역사적으로 볼 때, 진실로 혁명운동이 범한 오류는 가장 현명한 중앙위원회가 절대적으로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성과를 가져올 것”(143)이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룩셈부르크가 사회주의자들에게 내놓는 과제, 즉 “다종다양한 집단의 분노⋅원한⋅희망을 노동계급의 최상의 목표 아래 묶어내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과제는, 인민의 호민관이 되라는 레닌의 요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상적인 사회민주주의자는 노동조합의 서기가 아니라, 전횡과 억압−그것이 어디에서 발생하건, 어떤 계급, 계층에 관계된 것이건 상관없이−이 드러나는 온갖 현상에 대응할 능력이 있는, 그리고 이 모든 현상들을 경찰의 폭력과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하나의 그림으로 종합할 능력이 있는, 또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념과 민주주의적 요구를 표명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 해방투쟁의 전세계적,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어떤 사소한 사건이라도 활용할 능력이 있는 그런 인민의 호민관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주장해도 충분치 않다.” 즉 레닌 역시 “비노동계급의 격정을 노동계급의 혁명투쟁에 유리하게 싸안아”가는 일을 사회주의운동의 대중성과 혁명성을 위해 사활이 걸린 문제로 여긴 셈이며, 이 점에서 그들은 함께 간다. 그러나 ‘권위주의적 당중앙위원회의 권능’과 ‘선진 노동계급 부문의 자생적 투쟁⋅창의성 및 정치적 감각의 발전’, 전위의 의식성과 대중의 자발성 사이의 관계를 둘러싼 대립은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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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는 1918년에 쓴 「러시아 혁명」에서 10월 혁명의 의의를 더할 바 없이 높이 평가한다. 즉 레닌과 트로츠키와 그 측근들이 이룩한 일은 사회주의의 실현을 통해 “자본과 노동의 불평등한 관계에 과감히 종말을 가져온 점에서 국제노동계급의 선두에서 앞서 나가는 불멸의 역사적 기여”(305)라고 격찬한다. 그러면서도 룩셈부르크는 다시 프롤레타리아독재 및 민주주의 문제 등과 관련해 레닌주의와 대립한다.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레닌-트로츠키의 독재이론에 깔려 있는 암묵적 가정은 다음과 같다. 즉 사회주의 변혁은 혁명정당의 주머니 속에서 완성된, 사전에 마련된 공식이 적용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294) 이에 맞서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의 구체적 실현과정은 그러한 공식이나 법령들로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사회주의경제로 거침없이 나아가기 위해서 그 시작에서부터 배제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소간 알고 있다. 그러나 경제⋅법률 및 전 사회관계에 사회주의 원리를 도입하는 데 필수적인 온갖 구체적⋅실천적 조치의 성격을 고려할 때, 사회주의 정당의 강령이나 교과서 속에는 어떠한 열쇠도 감추어져 있지 않다. 이 점은 결점이라기보다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온갖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보다 우월하게 만드는 바로 그것이다.”(295) 이때에도 룩셈부르크는 1904년의 레닌주의 비판에서 내놓았던 것과 동일한 운동논리, 즉 “사회주의 사회체제는 그 자신의 경험 속에서 탄생하며, 사회주의의 실현과정에서 탄생되는 역사적 산물이어야 하고, 또 산물일 수밖에 없다”(295)는 논리에 근거를 둔다. 이에 따르면 사회주의체제는 생동하는 역사발전의 결과로서, 실제적 사회요구에 따라 그 요구를 만족시킬 수단을 생산하며, 제기된 과업에 따라 그 해결책을 마련해내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칙령을 선포하거나 도입하는 것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295)이다.
물론 룩셈부르크가 칙령과 규제의 필요성을 부인하거나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정적⋅파괴적인 것은 칙령으로 결판날 수 있다. 그러나 건설적⋅긍정적인 것은 법령으로 결판날 수 없다. 그것은 새로운 영역이며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단지 실제적 경험만이 새로운 진로를 정립하고 개척할 수 있다. 구속되지 않고 표출되는 공공생활만이 수많은 새로운 형태와 즉흥성을 발휘하고, 창조력을 점화하며, 모든 잘못된 시도들을 스스로 바로 잡아갈 것이다. 자유가 제한된 국가에서의 공공생활은 엄밀히 말해, 국가가 민주주의를 배제함으로써 모든 정신적 풍요와 진보의 살아 있는 원천을 차단하기 때문에, 빈곤에 허덕이고 가련하고 경직된 불모의 것으로 나타난다.”(296) 이 점에서 룩셈부르크는 전체 인민대중이 공공생활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따라서 제헌의회 해산이나 투표권 제한을 비롯한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 민주주의적 권리에 대한 소비에트 정권의 공격에 대해 불만을 표한다.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는 언론, 제한 받지 않는 집회⋅결사의 권리가 없이는 광범위한 인민대중의 지배는 결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임이 자명하다.”(292) “트로츠키와 레닌이 발견한바, 민주주의를 완전히 제거하는 식의 처방은 치료될 수 있는 질병 그 자체보다 더욱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처방은 모든 사회제도의 선천적 결점을 유일하게 치료할 수 있는 바로 그 살아 있는 원천을 차단시키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원천이란 인민대중의 활동적이며 자유롭고 활력에 찬 정치활동이다.”(288)
이때 룩셈부르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물론 형식적 자유와 평등 아래 자유의 부재와 사회적 불평등을 감추고 있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정당에 의한 권력장악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노동계급독재와 같은 것이다.”(303) 그러나 “그 독재는 당의 독재나 파벌의 독재가 아닌 계급의 독재라야 한다. 즉, 가장 활동적이고 무제한적인 인민대중의 참여가 보장된 토대 위에서, 또한 제약 없는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실행가능한 형태의 계급독재라야 한다.”(302) 대중들의 참여가 보장되지 않을 때 현실적으로 예상되는 부정적 결과를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보통선거, 언론 결사의 문제한적 자유, 여론을 획득하기 위한 자유로운 투쟁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모든 공공기관에서의 생활은 소멸되고, 단지 관료제만이 판을 치는 외견상의 정치활동만이 유지된다. 공공생활은 점차 동면에 들어가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네르기와 무한한 경험을 지닌 소수 당 지도자들만이 명령하고 지배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는 그 중에서도 몇몇 탁월한 당 지도자가 전권을 행사할 것이며, 노동계급의 엘리트들은 가끔씩 회의에 초대되어 당 지도자의 연설에 박수를 치고, 이미 결론이 내려진 제안을 이의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들러리가 될 뿐이다.”(297)
이러한 비판은 다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풀어야 할 난제, 즉 어떻게 해야 공공생활에 대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되(대중성), 자본주의체제로 회귀하려는 내부의 흐름 및 외부 제국주의 세력의 간섭 위험을 막아낼 수 있는가(혁명성)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룩셈부르크는 전자를 통해 후자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셈이다. 그러한 믿음에 따른 정책으로 신생 사회주의체제가 활성화될 수 있었다면, 이 또한 볼셰비키가 이미 이룩한 ‘불멸의 역사적 기여’에 새로운 역사적 기여를 보태어, 그 후의 세계 사회주의운동은 새로운 모습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이 경우 소수 자본가들이 노동자 대중을 매수하거나 저임금과 실업으로 위협할 아무런 수단도 가지지 못하고, 언론을 통해 여론을 멋대로 조작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과거로 돌아가자고 아무리 자유롭게 여론투쟁을 벌여도 현실적 파급력이 미미하게 된 단계, 사회주의가 상당 정도 진전해 높은 단계의 공산사회를 눈앞에 두고 있는 발전단계를 전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볼셰비키는 고립무원 상태에서 갓 태어난 사회주의체제의 존망을 걸고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상황에 ‘제약 없는 민주주의’나 ‘무제한적 인민대중의 참여’라는 일반론적인 처방을 적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를 건 도박이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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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도 부르주아지의 힘이 간단히 무력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의식하고 룩셈부르크와 전혀 다른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의의를 파악한다. “프롤레타리아독재란 새로운 계급이 보다 강력한 적, 곧 부르주아지에 맞서 수행하는 가장 단호하고 가장 무자비한 전쟁인바 이 부르주아지의 저항은(비록 단 한 나라에서일지라도) 자신들도 타도됨으로써 열 배나 강화되고 있으며, 이 부르주아지의 힘은 국제자본의 세기, 곧 부르주아지의 국제적 유대가 얼마나 굳세고 끈질긴가에뿐만 아니라 습성의 힘에도, 곧 소규모 생산의 세기에도 놓여 있다. 왜냐하면 소규모 생산은 세상에 여전히 널리 퍼져 있으며, 이 소규모 생산은 끊임없이, 매일, 매 시간, 자연발생적이고 대규모로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를 발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낡은 사회의 힘과 전통에 맞선 집요한 투쟁으로서, 유혈 투쟁과 무혈 투쟁, 폭력 투쟁과 평화 투쟁, 군사 투쟁과 경제 투쟁, 교육 투쟁과 행정 투쟁이다. 수백, 수천만 명이 갖고 있는 습성의 힘은 가장 무서운 힘이다. 투쟁 속에서 단련된 철의 당 없이, 일정 계급의 모든 정직한 사람들의 신뢰를 누리는 당 없이, 대중의 분위기를 지켜보고 그것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당 없이, 그와 같은 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가 없다.”(소아병43)
투쟁으로 단련되고 대중의 신뢰를 누리는 당을 전제로, 레닌은 대중들과 지도자들을 나누어놓는 논의 방식에도 이의를 제기한다. 즉 그러한 논의는 제국주의 시대에 몇몇 선진국에서 노동귀족층의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변절적 지도자, 기회주의자, 사회배외주의자들이 배출되고, 이들이 주도하는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적 정당들이 광범한 근로인민들로부터 분리된 데에 기인하는데,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악과 싸워 기회주의적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추방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레닌은 제3인터내셔널이 그 일을 수행해낸다고 자부한다. “이런 맥락에서 일반적으로 대중들의 독재와 지도자들의 독재를 대비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은 웃길 정도로 터무니없는 짓이며 어리석은 짓이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사실 이 간단명료한 문제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견해를 가진 옛 지도자들에 대신하여 지독한 잠꼬대와 허황된 말을 지껄여대는 새 시도자들이(‘지도자를 타도하자’라는 슬로건 아래)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소아병41) 레닌이 보기에 이런 논의의 귀결은 당 원칙과 당 규율의 거부인데, “이것은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완전히 무장해제시키는 것과 똑같다. 이것은 바로, 내버려두면 필연적으로 어떤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도 박살내 버릴, 저 프티부르주아적 분열과 동요로 귀결되며, 또한 지속성, 통일 및 조직적 행동에 대한 저 프티부르주아적 무능으로 귀결된다.”(소아병42)
러시아의 내전기간을 떠나서도 프롤레타리아독재를 부르주아지(혹은 자본주의)와의 ‘가장 단호하고 가장 무자비한’ 장기전쟁, ‘낡은 사회의 힘과 전통에 맞선 집요한 투쟁’으로 보는 데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러한 전쟁의 관점에서 스탈린은 혁명당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어떤 군대라도 전쟁에서 패배의 운명에 처하고 싶지 않으면 노련한 참모부를 필요로 한다. 하물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들의 불구대천의 적들에 의해 멸망당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러한 참모부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는가? 그러나 어디에 이러한 참모부가 있는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당만이 이러한 참모부로서 기능할 수 있다. 혁명적 당이 없는 노동계급은 참모부 없는 군대이다.” 이런 이유에서 스탈린은 대중들의 자연발생적 운동을 따라다닐 것이 아니라 당이 지도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은 노동계급의 선두에 서야 하며, 노동계급보다 더 멀리 내다보아야 하며, 자연발생적인 운동의 뒤꽁무니에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도해야 한다.”(기초132)
이러한 지도에 필요한 당 원칙이나 규율은 강령이나 간단한 법령 제정, 혹은 공포나 당의 무제한적 권한을 통해 유지되고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레닌은 잘 알고 있다. 당 규율이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레닌은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의식성에 의해서, 그리고 혁명에 대한 그들의 헌신, 곧 전위의 끈기와 자기희생 및 영웅적 행동에 의해서이다. 둘째, 일차적으로는 가장 광범한 프롤레타리아 근로인민 대중들과, 뿐만 아니라 비프롤레타리아 근로인민 대중들과도 연결을 갖고 가장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며, 그리고 당신들이 원한다면 어느 정도는 융합할 수 있는 전위의 능력에 의해서이다. 셋째, 이 전위가 발휘하는 정치 지도력의 올바름에 의해서, 곧 전위의 정치 전략 및 전술의 올바름에 의해서이다. 이것은 가장 광범한 대중들이 자신들의 경험으로써 그 전략 및 전술의 올바름을 인정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소아병18) 레닌은 이러한 조건이 단번에 생겨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그것들은 꾸준한 노력과 고난 속에서 얻어진 경험에 의해서만 창출된다. 이들 조건의 창출은 올바른 혁명이론에 의해 촉진되며, 역으로 이 혁명이론은 도그마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으로 대중적인, 진정으로 혁명적인 운동의 실천과 밀접히 연관될 때에만 완전히 나타나게 된다.”(소아병19)
이러한 조건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할 때, 즉 전위와 대중 사이의 신뢰가 무너지고, 대중과 당 사이의 긴밀한 접촉이 어려워질 때, 당의 규율이 문제가 아니라 당 자체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당이 비당원 대중들로부터 유리된다면, 당은 하나의 당이기를 그칠 것이다. 비당원 대중들과 연결되지 않고, 당과 비당원 대중들 간에 유대가 존재하지 않고, 이 대중들이 당의 지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중들 사이에서 도덕적⋅정치적 신뢰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당은 계급을 지도할 수 없다.”(기초134)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당이 대중들의 신뢰를 잃게 된다고 지적한다. “1) 당이 당 사업과 대중의 신뢰가 아니라 ‘무제한적’ 권리를 바탕으로 하여 대중들 속에서 당의 권위를 세우기 시작하는 경우. 2) 당의 정책이 명백히 잘못인데도 그 오류를 다시 살펴 교정하고자 하지 않는 경우. 3) 당의 정책은 대체로 올바르지만 대중들이 아직 정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당이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당의 정책이 올바르다는 것을 납득하게 될 기회를 대중들에게 주기 위해 때를 기다리려 하지 않거나 기다리지 못해 그것을 대중들에게 강요하는 경우.”
스탈린은 당과 대중의 결합에 근거한 프롤레타리아독재에는 당만 아니라 여러 조직들, 노동조합⋅협동조합⋅소비에트⋅청년동맹 등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프롤레타리아독재를 당독재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당의 독재’를 프롤레타리아독재와 동일시하는 사람은 누구나 암묵적으로 당의 권위는 노동계급에게 사용하는 폭력 위에서 확립될 수 있다는 터무니없고도 레닌주의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가정으로부터 생겨난다. 당의 권위는 노동계급의 신뢰로써 확보된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신뢰는 폭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폭력은 오직 신뢰를 파괴할 뿐이다−당의 올바른 정책, 당의 노동계급에 대한 헌신, 노동계급 대중과의 결합, 대중들에게 슬로건의 정당성을 확신시켜 줄 준비와 능력으로써 획득된다.”(문제197) 레닌 역시 노동조합들의 절대적 중요성을 인정한다. “경제적 건설에서뿐만 아니라 군사적 건설에서 노동조합들과의 밀접한 접촉이 없었다면, 노동조합들의 정열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노동조합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당연히 2년 반은커녕 2달 반도 나라를 통치하거나 독재를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소아병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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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레닌과 스탈린은 당과 대중과의 결합, 융합, 당의 올바른 정책, 전위의 헌신, 끈기, 자기희생, 영웅적 행동 등을 요구하지만, 레닌은 “우리 공화국의 어떤 기구도 당 중앙위원회의 지도 없이는 어떤 중요한 정치적 문제나 조직적 문제도 결코 결정하지 못 한다”(소아병47)고 못 박는다. 소련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총괄지도를 떠맡은 중앙위원회는 당대회에서 선출된 19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레닌은 사망 직전에 중앙위원회 위원 수를 수십 명에서 백여 명 정도로 확대할 필요성을 느꼈다. 트로츠키와 스탈린 사이의 분열과 당에까지 파고들어온 관료주의의 위험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1922년 12월 24일자 ‘당대회에 보내는 서한’은 스탈린에 의해 묵살되고 레닌 사후에야 공개되었다. 1923년 1월 4일자로 쓴 추신에는 스탈린이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들어 있다. “스탈린은 너무도 무례합니다. 그리고 이 결점은 우리들 공산주의자들 속에서 사업을 할 때나 우리들 사이에서는 용인될 수 있을지라도, 서기장직을 맡는 데에서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저는 동지들이 스탈린을 그 직위에서 해임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다른 모든 측면에서 스탈린 동지와는 다른 사람을, 말하자면, 보다 참을성 있고, 보다 성심 있으며, 보다 공손하고, 동지들에 대해 보다 세심하게 배려하며, 덜 변덕스러운 등등의 그런 사람을 그 대신 지명하도록 요청합니다.”(투쟁45)
이러한 요청은 레닌의 정신이 혼미해서 일어난 삽화라고 보기에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죽음에 임박한 레닌은 스탈린의 정치생명을 끊어버리고 싶어 했지만, 스탈린은 서기장직만 아니라 감찰인민위원회 위원장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활용해 레닌의 적자로 자리를 굳혔다. 레닌 사후에 표면화되는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갈등과 트로츠키 암살,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등 볼셰비키 지도자들과 심지어 스탈린의 오른팔이었던 부하린에 대한 숙청을 감안하면, 그들의 정치적 오류가 무엇이었든, 또 스탈린은 어떻게 오류의 지뢰밭을 벗어날 수 있었든, 당의 두뇌인 중앙위원회의 인식과 판단이 늘 완벽할 수는 없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소련 사회주의는 중앙위원회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중주의를 완성된 프롤레타리아독재의 형태로 내세웠고, 우월한 제국주의 군사력과 자본의 포위공세 속에서도 현실사회주의의 보루로서 수십 년을 버텨냈다. 그렇게 버텨냄으로써 레닌주의는 자신의 현실성 내지 불가피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파리코뮌이 프롤레타리아독재의 맹아인 반면에 소비에트 권력은 그것의 최종형태라고 규정했다. “소비에트공화국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 해방과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완수할 수 있는 구조 중에서 오래 동안 탐색되어 최종적으로 발전된 정치형태이다. 파리 코뮌은 이 형태의 맹아였으며 소비에트 권력은 그것의 발전이자 완결이다.”(기초76) 이러한 주장에서는 소비에트체제를 이론적으로 절대화하려는 형이상학적 열망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레닌의 논리는 다소 다른 면을 보인다. 레닌 역시 러시아 혁명의 몇몇 기본 특성들이 국제적 타당성 내지 역사적 불가피성을 지닌다는 점을 역설한다. 그러나 레닌은 소비에트 모델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진실을 과장하여 우리 혁명의 몇몇 기본적 특성들 이상으로 확장할 경우에는 엄청난 오류에 빠질 것이다. 또한 선진국들 중 적어도 한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승리하게 되면 아마도 곧 러시아가 더 이상 모델이 되지 못하고 또다시 (소비에트적 의미 및 사회주의적 의미에서) 후진국으로 전락하게 될 격변이 십중팔구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하는 것도 분명히 오류일 것이다.”(소아병13-14) 변증법적 사유에 충실했던 레닌으로서는 러시아 모델을 최종형태라고 못 박을 수 없었던 것처럼, 룩셈부르크가 역설한 대중주의나 민주주의 역시 절대화할 이유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레닌이 보기에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의존은 제2인터내셔널의 우경화와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일어난 노동귀족화 현상이라는 조건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레닌주의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비판과 제안들은 그러한 조건에 매어 있지 않고 좀 더 일반적이다. 야마구치 마사유키는 레닌의 관점을 받아들여 룩셈부르크의 자본주의 붕괴론과 자연발생성 숭배 경향을 묶어 이렇게 비판한다. “대중의 ‘자연발생적’ 에네르기의 감상적인 찬미 뒤에는 투쟁적인 노동운동의 실천 속에 참가하지 않고 또 노동자의 투쟁과 긴밀한 결합을 갖지 못한 아웃사이더인 인텔리겐챠의 무기력한 탄식이 가려져 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외부로부터 ‘무기력한 노동운동’에 ‘자극’을 주려고 하는 허무한 기대뿐이다. 그리고 그 ‘자극’이 순조로운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면 노동운동은 마이홈주의의 ‘체제내 존재’로 타락했다고 탄식하며 죄를 노동자에게 전가시키고 스스로는 ‘좌절감’에 도취하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으로는 대중의 자발성과 관련한 룩셈부르크의 문제의식에서 별로 얻을 것이 없을 것이다. 룩셈부르크주의의 한 축인 자발성⋅자유⋅민주주의 등은 또 다른 축인 혁명과 사회주의 못지않게 여전히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 물론 그 일반성 내지 추상성 때문에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는 만큼이나 그 구체적 내용규정을 위한 이데올로기 투쟁이 사회주의 운동의 주요과제가 될 수 있다. 자발성을 의식성과 분리하여 의식성의 예비단계로 천시하고 지도라는 별도공정을 통해 한 차원 올려놓으려 하거나, 자생적 저항운동들의 의의를 사후에 확인하는 데에 만족하기보다, ‘의식적 자발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운동의 관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자발성을 어떻게 사회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구체적 인식 및 욕구들과 결합해 갈 것이냐는, 레닌의 전위 내지 ‘인민의 호민관’ 혹은 룩셈부르크의 사회주의자, 즉 ‘비노동계급의 격정을 노동계급의 혁명투쟁에 유리하게 싸안아’갈 줄 아는 사람들에게 늘 제기되는 과제다. 이런 의미에서 자발성을 존중하자는 것은 자유주의적 아웃사이더의 ‘자연발생성에 대한 숭배’와 무관하다. 집요한 논쟁, 토론, 현실과의 실천적 대질 등의 변증법적 실천을 통해 의식성과 자발성의 역동적 통일을 만들어가자는 것이며, 이는 레닌과 룩셈부르크 양자 모두가 추구한 바이기도 하다. 이 문제와 관련해 오늘의 사회주의운동이 스스로를 레닌주의나 룩셈부르크주의 속에 미리부터 가두어 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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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반소 이데올로기에서 잠시 벗어나 역사적 거리를 두고 냉정히 레닌과 트로츠키 혹은 스탈린이 선택한 길을 돌아보면, 그들이 기존의 지배적 통념에 연연하지 않고 자본주의와의 전쟁을 위해 당대의 현실조건 속에서 불가피해 보이는 일들을 과감하게 실행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일들 가운데 무엇이 오늘날에는 이미 불필요해졌거나 또는 우회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부분들인지 식별하는 일은 역사적 사회주의 운동의 심대한 의의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운동의 생명력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당대적 구체성 차원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룩셈부르크의 원론적 비판을 고려하는 것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예컨대 룩셈부르크는 볼셰비키의 토지정책이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사회주의적 조치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조치로 나아가는 길마저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농업관계의 사회주의적 이행에 심각한 장애물이 될 뿐이다.”(270) 즉 과거에는 사회주의적 토지개혁의 반대세력이 소수의 귀족, 자본가 지주, 토착 부르주아계급뿐이었으나, 이제 대중운동을 통한 몰수가 완료된 후에는 “농업생산의 사회주의화에 관한 어떠한 시도에도 반대하는 거대한 세력이 형성되었다. 즉, 모든 사회주의적 조치에 반발해 새로운 얻은 재산을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강력한 농민대중이 새로이 형성된 것이다.”(271-272) 룩셈부르크는 “이 새로운 적대계층이 귀족지주보다도 한층 더 위험스럽고 강력하게 사회주의에 저항할 것”(273)이라고 예상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제2인터내셔널을 상대로 스탈린이 던지는 비판처럼 농민문제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나 “무조건적 반감”(기초78)의 산물이라기보다 러시아혁명의 구체적 실태에 접근하지 못하는 원론적 평가이지만,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레닌은 이 문제에 룩셈부르크보다 훨씬 더 전략적으로 접근했다. 그에 따르면 “전체 농민과의 동맹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농민을 분해시키고 농촌프롤레타리아와 반(半)프롤레타리아를 설득하면서, 그들을 단결시켜 쿨락과 농촌 부르주아지의 반항에 성공적으로 대항한 결과, 마침내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진시켰다.” 반면에 만일 부농에 대항하여 농촌 빈민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했다면 “참으로 러시아에 사회주의 혁명의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음’을 증명하게 되어 버렸을 것이다. 또 농민은 ‘분해되지 않은 전체’로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쿨락들, 부자,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정치적 및 정신적 지도 아래 여전히 남아 있었을 것이고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배신자118) 스탈린 치하에서 1928년부터 급속히 이루어지는 농업집산화에 따르는 심각한 난관들을 감안하더라도 레닌의 선택은 불가피한 면을 지닌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문제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비판은 좀 더 복잡한 성격을 띤다. 그에 따르면 레닌과 그의 동지들은 ‘분리’까지 포함한 민족자결권을 옹호함으로써 핀란드, 우크라이나, 폴란드, 리투아니아, 발틱국가들, 커카서스 등을 러시아혁명의 맹방으로 변모시킬 것으로 확신했지만, 이들 민족들은 새로 인정된 자유를 이용해 러시아혁명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삼고 독일제국주의와 동맹함으로써 그러한 기대와는 어긋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계급사회라는 냉엄한 현실 속에서는, 또 계급적대가 극도로 첨예화된 상황에서 민족주의적 슬로건은 단지 부르주아 계급지배의 수단으로 변화될 뿐이다.(…) 부르주아계급에게 민족적 자유란 계급지배를 전적으로 보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277) 그 결과 “볼셰비키는 민족자결권이라는 슬로건으로 말미암아 반혁명에 연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러시아혁명 그 자체를 질식시키는 이데올로기만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세계전쟁에서 비롯된 제위기를 고착시키는 계획을 위한 이데올로기도 제공했던 것이다.”(281)
스탈린은 문제를 전혀 다르게 파악한다. 그는 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식민지 해방운동과 직접 동맹하지 않고도 가능하다거나, 민족-식민지 문제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혁명투쟁 없이 해결될 수 없다고 본다. 이에 따라 그는 “민족문제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일반적 문제 가운데 일부분이며, 프롤레타리아독재 문제의 일부분”(기초98)이라고 규정하며, 지배 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종속 민족의 해방운동을 지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룩셈부르크가 우려하는 것처럼 부르주아계급에게 유리하도록 무차별로 지지하자는 것은 아니다. 즉 그것은 “제국주의를 강화시키고 보존하는 경향이 있는 민족운동이 아니라 그것을 약화시키고 타도하는 경향이 있는 민족운동을 지지해야 함을 뜻한다. 어떤 피압박국에서는 민족운동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발전이 지니는 이해관계와 상충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런 경우에, 지지는 물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민족의 권리문제는 고립적인, 자족적인 문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일반적 문제의 일부분이고 전체에 종속되며 전체의 관점에서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된다.”(기초99)
이처럼 민족문제를 프롤레타리아혁명 및 프롤레타리아독재의 문제와 결합시키고 약소 식민지의 해방을 지지하는 관점은 룩셈부르크가 목격한 현상들과 달리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룩셈부르크의 비판이 아무 근거도 없는 비방이었던 것은 아니며 또한 원론 차원에서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세계 사회주의 운동 전략의 측면에서 레닌주의의 민족정책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룩셈부르크는 그 후의 세계 사회주의 운동 전개과정을 확인할 수 없었고, 또한 전략적 효용의 단순 비교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또한 스탈린의 민족정책은 룩셈부르크의 비판과 대립한다기보다 그것을 흡수하여 현실에 합당한 형태로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코민테른의 중국정책, 독소불가침조약, 헝가리와 체코사태, 중소분쟁 등의 문제에서 소련이 취한 조치들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서도 논란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애국적 사회주의자로 규정하며, 1924년 민족해방의 이름 아래 중국 부르주아지를 지도세력으로 인정하여 중국공산당원들을 국민당에 예속시키고 중국혁명을 사보타주했다고 신랄하게 비난한다. “코민테른 6차 대회는 스탈린과 부하린의 지도 하에 이 모든 교훈을 송두리째 뒤집어엎었다. 한편으로 당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 독재를 전략적으로 강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독재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민주주의적 구호들을 활용하는 것을 금지시킨 것이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무장해제당한 셈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알거지가 되어 버린 셈인 것이다. 이 당에게 유일한 위안이 있다면, 그것은 반혁명이 제멋대로 날뛰는 동안만은 소비에트라는 구호를 활용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은 것이다. 물론 이 구호는 혁명의 고양기에 사용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금지조항과 함께 말이다.”(영구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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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제를 둘러싸고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 사이에는 오늘날까지도 타협 불가능한 대립이 지속되고 있다. 이 대립 속에서 종종 과거의 투쟁으로부터 무엇을 배워 받아들이고 무엇을 비판하여 거부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사라지기 일쑤다. 그리고는 서로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한줌의 진보운동 속에 넘나들 수 없는 칸막이를 수없이 세운다. 브레히트가 읊었듯이 “우리는 다정한 세상을 만들려 했지만, 우리 자신은 다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에는 나치 독일에서 망명하여 코민테른 대리인으로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공산당원 베너가 코민테른 기관지에 룩셈부르크에 대한 사설을 쓰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에는 룩셈부르크의 이름을 상기시키는 것만으로도 모험이었다. “그녀보다 오래 살아남은 그녀의 가까운 동료 투사들과 함께 당의 연보에서 오랜 기간 삭제되어 있던 그녀에 대해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설혹 그것이 그저 쓸모없는 잡담일지라도 은밀히 1918년 12월 당을 설립할 때 누가 그녀 옆에 있었는지를 지적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악명 높은 자, 배척당한 자, 혹은 살해된 자들이었다. 브란들러, 탈하이머, 크니프, 플리크, 에벌라인, 레멜레, 프뢸리히 등 모두가 스파르타쿠스단원이었다. 이 서클 가운데 단 한 사람, 피크만이 아직 무사했다.” 피크는 나중에 동독 수상이 되었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대부분은 우경화를 이유로 당에서 축출되었다. 반파쇼투쟁에 목숨을 걸었던 베너 자신도 결국 당에서 축출되어 사민당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장면에서 룩셈부르크주의가 사회주의운동 속에서 처해 있던 위치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레닌주의는 룩셈부르크의 원론적 비판들에 대해 충분히 응수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논리 속에 융합해낼 능력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융합은 사회주의운동의 활력과 탄력을 늘이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 그러한 작업은 어쩌면 오늘의 운동문화를 붙들고 있는 편협성을 대신해 단결투쟁의 지상명령을 복권시키고, 풍부한 혁명적 내용으로 우리의 태만해진 자발성을 바꿔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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