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에서의 관광을 마치고 오늘은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로 가는 날이다. 하루에 한 나라씩을 강행군을 하다 보니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그래도 하늘을 올려다보니 모처럼 파란 색을 볼 수 있어 기분은 괜찮은 편이었다. 게다가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뿐만 아니라 부다페스트의 날씨도 좋겠다는 예보라고 한다. 그러면서 오늘은 오랜 만에 해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일행은 오늘 역시 묵언수행 하듯 버스에 올랐다. 그저 묵묵히 각자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몇몇 부인들이 사탕이며 초콜릿 등을 좌석을 돌며 나누어 주고 있었다. 그것이 버스 안에서 서로를 마주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듯 했다. 곧바로 버스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를 향해 출발했다. 오늘은 또 어떤 일이 생길지 궁금하다.


자그레브의 북쪽 국경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조용한 가을풍경이 가득 펼쳐졌다. 목초지를 연상케 하는 푸른 들판과 한쪽으로는 추수를 마친 텅 빈 밭이 교차되고 있었다. 북으로 이어진 길은 온통 구불거렸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집들이 길을 따라 만들어지지 않고 멀찍이 산허리에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대개 마을은 도로를 따라 발전을 하는 것이 아니던가? 띄엄띄엄 있는 도로주변의 집이나 산허리의 집이나 하나같이 유령처럼 표정이 없었다. 어디에도 아이들은 볼 수 없었다. 출산 문제는 지구촌 전체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저 간간히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차량을 제외하면 모두지 바깥 풍경으로는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낯선 이방인에게는 그 자체로 낯설었다. 북으로 가는 길은 어제의 산악지형과는 달리 너른 들판이었다.


들판 사이로 4차선의 도로가 구불거리고 있었고 우리가 탄 차는 그 길을 여유롭게 달렸다. 가이드는 지난번에 못다 본 오랜 명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다시 보여주었다. 창밖을 내다보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니터로 향했다. 영화는 한참 짤쯔부르크 시내를 아이들이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호엔짤쯔부르크 성에서 내려다본 너른 벌판 뒤의 개울에서 아이들이 작은 배를 타고 내려오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가이드는 입이 근질거리는 모양이다. 그는 다시 크로아티아를 중심으로 유럽의 역사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며칠이나 시달린 일행들은 과감한 반란을 한다.
“영화나 더 보여줘요.”


그 한 마디를 하는데 며칠이 걸렸다. 그 말을 하기 위해 모두 눈치를 살폈을지도 모른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모를 일이다. ‘우리들이 당신의 고용주야’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이가 있을 리가 없다. 어떻든 그 작은 반란 덕분에 우리는 영화를 마지막까지 볼 수 있었다. 영화가 명화이기 때문에 보는 것이 아니라 가이드의 지루한 설명을 참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크로아티아는 생겐 조약 미가입으로 인해 여행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슬로베니아에서 크로아티아로 들어올 때 우리는 한 차례 국경검문소에서 여권에 입국 도장을 받는 바 있다. 오늘은 다시 헝가리로 출국을 함으로 다시 그런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런데 크로아티아를 들어올 때와 나갈 때는 그 절차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검문은 대체로 30분 이상 더러는 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순전히 검문소 초병들의 기분에 따라 시간이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는 것 같단다.



영화는 끝나게 마련이고 가이드는 결국 그의 입담을 뽐내었다. 그는 여행객들의 기분은 전혀 아랑곳 않고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한바탕 풀어 놓는다. 각 나라의 역사며 제 나름의 해석까지 덧붙여 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버스에서 줄곧 졸거나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며 지루한 시간에 맞서고 있었다
국경검문소에 이르자 우리 앞에 두 대의 관광버스가 서 있었다. 모두가 한국 관광객들이란다. 검문을 하는 건지 검문을 할 게 많은 건지 모르지만 그저 더디기만 하다. 여권을 일일이 한 장 씩 스캔을 하기 때문에 시간이 더디다고 한다. 설마 했더니 거의 한 시간 반 정도를 기다린 끝에 모두 차에서 내리란다. 차여서 내려 일일이 한명씩 확인을 하는 동시에 출국 허락 도장이 찍힌 여권을 건네받고 버스에 올랐다. 10시40분이 지나 겨우 국경을 통과했다. 짧은 겨울 해가 마음을 급하게 했다,

국경을 지나도 길은 여전히 지루하게 이어졌다. 검문소를 제외하면 여느 유럽의 국경과 다를 바 없었다. 버스에서 내다보이는 헝가리는 음울해 보였다. 20세초의 격랑을 피해가지 못했던 터라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버스는 제한속도 탓인지 앞에 차가 있거나말거나 제 속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빨리 빨리에 길든 우리로서는 참기 힘들 정도다. 나른하고 따분한 마음에 한 잠을 자고 눈을 떠보니 여전히 가이드는 아무도 들을 것 같지도 않을 이야기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남의 나라 역사 이야기를 강제 주입하는 것 같아 지겹다. 무슨 말을 그리도 하고 싶을까 모르겠다. 그저 앞으로는 롯데관광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으리란 다짐으로 지겨움을 달랠 뿐이었다. 문득 그는 학창시절 역사 공부를 잘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창에서 내다보이는 풍경은 그저 황량하다. 너른 들판은 온통 목초지로 보이는데 군데군데 소들이 한가함을 더해주고 있다. 우리의 가을 들판은 지금쯤 추수를 마쳐 온통 벌거벗은 채로 드러누워있을 텐데 이곳의 들판은 아직도 푸르다. 버스에서 멀리 보이는 풍경은 참으로 여유로워 보였다. 더러는 그 넓은 벌판이 버려진 땅 같은 생각도 들었다. 고속도로의 차들은 그 너른 벌판 한가운데를 참으로 여유롭게 오가고 있었다. 바쁠 것이 하나도 없는 ㅡ
그러다보니 차들 간의 간격이 넓어 교통사고는 없겠다 싶다. 그저 빨리 가지 못해 안달 난 우리만 힘들다. 부다페스트를 목전에 두자 평온은 더욱 넓어졌다. 멀리 지평선이 가물거렸다. 우리는 전라도에 가서야 겨우 한 장 면을 볼 수 있을 뿐인데 그런 풍경을 유럽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어 부러웠다.

마침내 버스가 부다페스트에 다다랐다. 부다페스트는 도나우 강을 중심으로 두 개의 도시 즉, 강 서쪽의 부더(Buda)와 동쪽의 페슈트(Pest)가 합쳐진 도시라고 한다. 부다는 역사적 전통이 남아있으며, 마치 오래된 성당을 연상케 하는 멋진 국회의사당 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1956년 헝가리 혁명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부다페스트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록이 되어 있다. 도시 중심에 도나우 강이 흐르고 있어 ‘도나우의 진주’, ‘도나우의 장미’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겔레르트 언덕, 어부의 요새, 영웅광장 등을 돌아볼 예정이다.
시내로 들어서자 삼성, 한국타이어 같은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행은 그 간판들에 즐거워했다. 그 간판들로 인해 내가 어떤 혜택을 받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긴 그들로 인해 수출 증가세가 두드러지고 경제성장이 이루어진다고 정부는 자랑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의 집중 문제와 함께 대기업의 독점적 폐해를 들추어내느라 정신들이 없다.

수출이 증가하고 있다는 정부의 발표는 자기들의 정책이 좋은 탓에 그렇다는 설명에 입이 근질거리는 모양이다. 그러나 수출을 주도하는 기업은 분명 그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대기업이라는 사실이 우습다. 그 웃기는 이율배반을 관전하는 포인트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젠장ㅡ
버스는 2차선 도로의 좁은 길을 꼬불거려 점심 식사를 할 식당 앞에 당도했다. 오늘은 모처럼 한식이란다. 한식을 제공하는 것은 현지 음식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분들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실 개인적으로 해외여행을 할 때 한 두 번씩 들르게 마련인 한식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동안 들러본 대부분의 외국 한식집들은 해외여행객만을 위한 식당으로 보였는데 음식의 질이 형편이 없었다. 한 번도 가격을 알려준 적도 물어본 적도 없지만 하여튼 한국에서의 음식의 질에 비해서 형편없는 수준이라는 말이 꼭 맞을 것 같다.


게다가 음식을 선택할 수도 없이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 현지 음식은 주는 대로 먹어도 감당하는 것은 현지 음식의 내용을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무엇을 먹든 그것은 모두 현지 음식 문화 체험이라는 큰 틀에서 수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식은 좀 다르다. 그것은 우리의 음식이므로 모두들 제대로 입맛을 알거니와 음식의 수준, 질 등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다. 부다페스트의 점심은 비빔밥이었다. 그곳 한식집의 간판에는 <아리랑>이라는 아주 익숙한 이름이 달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식탁 위에는 이미 상이 차려져 있었다. 커다란 비빔밥 대접에 네 댓가지 나물이 담겨져 있었고, 우리가 자리에 앉자 공깃밥이 나왔다. 비빔밥이기 때문인지 반찬이 따로 없는 듯 했다. 겨우 김치가 조금 나왔을 뿐이다. 아주 단출한 식탁이었다. 일행의 눈치는 음식점에 들어올 때와는 사뭇 달랐다.

기대는 잠깐이고 실망은 오래 갔다. 결국 나는 그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자 양쪽 다리에 두드러기가 붉어져 나오는 것을 내려다 봐야했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행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치료를 받고 쉬이 호전이 되기는 했었다. 문제는 혹시 하는 마음에 함께 여행을 하는 일행 몇몇 분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그 분들도 약하게나마 그런 증세를 겪었다고 한다. 이걸 그거 운이 없다고 해야 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정작 나를 화나게 한 것은 가이드의 대응이었다. 여행 중 다리를 보여주며 관광사에서 현지 식당 음식도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고 했으나 가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하고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여행객의 불편보다 이 일로 자기에게 무슨 불이익이 돌아갈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여행의 즐거움이 이로 인해 반감된 것은 틀림없다. 그는 그러면서도 여행이 끝날 즈음 자기네 회사의 상품을 소개했다. 물론 고객 여러분을 잘 모시겠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고서 말이다. 그 말도 그저 가이드의 말이니 무조건 믿으라는 것인가 보다. 여행이 끝나고 인천 공항에서 모두들 짐을 찾자 총총히 사라진 것으로 보아 모두들 한 마음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