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星州) 3 처사(處士) 이홍기(李弘器) 이홍량(李弘量), 이홍우(李弘宇) 유허비명
미수(眉叟) 허목(許穆) 찬
영남3용(嶺南3容)
성주(星州)의 3 처사(處士) 이홍기(李弘器), 이홍량(李弘量), 이홍우(李弘宇)를 말함.
시기 : 명종- 선조시대, 효제(孝悌)로서 유명
영남3용의 관향 : 광산(光山) 이씨
이홍기(李弘器) : 백용(伯容) 1531-1582년(향년 52세)
이홍량(李弘量) : 중용(仲容) 1531-1592년(향년 62세)
이홍우(李弘宇) : 계용(季容) 1535-1594년(향년 60세)
한강 정구 선생과는 남매간
현종 때 영의정 허적(許積)은 계용의 아들 서(서)의 사위
우리 공헌(恭憲=明宗) 소경(昭敬=宣祖)시대에 성주에 3처사가 있었으니, 왈 이홍기 백용(伯容), 왈 이홍량 중용(仲容), 왈 이홍우 계용(季容)이니 세상이 영남3용(嶺南3容)이라고 칭해온다.
이씨는 무진(武珍=光州)이 관향인바 고려시대에 이순(李順)은 판도사(版圖司)가 되었고 그 후에 동정(同正) 항(恒), 판관(判官) 림(林), 진사 근생(根生), 처사 취(萃), 부사과(副司果) 한손(漢孫), 봉사(奉事) 수(樹) 7세이다.
봉사(奉事)가 고성 이씨 사인(舍人) 우(佑)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1531년에 한 젖으로 두 아들을 낳았으니 왈 홍기, 홍량이고, 홍우는 형보다 4세가 적다한다.
처음 그의 아버님이 무과로 출신해서 벼슬이 오르지 않더니 공희(恭僖=中宗) 말에 열사(烈士)로서 영남절도사를 따라 합포(合浦=馬山)에 가서 객사하니, 두 이들은 겨우 13세 어린이로서 분상(奔喪)하면서 한잔 물도 입에 넣지 않으니 사람들이 차마 보지 못했다.
이에 막부 이속들이 모두 탄식하며 효자라 하고 예로서 염습(殮襲)하여 효자의 마음에 어긋나지 않도록 했다. 그 운구를 할 때도 그 예(禮)가 가관이었다. 3년 상으로 애곡하는 것이 초상시와 같이 하였으며 어린 아우는 8세이나 울부짖고 집상하는 것이 두 형과 같이 하니 보는 이가 크게 즐겨했다.
어머님 이씨가 항상 경계해 가로되 예(禮)에 과부의 아들을 취하지 말라 하였으니 가르치지 못한 연고인 듯하다. 불의(不義)로서 미망인을 부끄럽게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효이라 하니 3자가 울면서 가로되, 공경히 명을 받겠습니다 하고 날로 글을 읽으며 힘써 행하여, 행으로써 들어났다.
일찍 어머님을 위해 시험을 치르니 1568년에 백중(伯仲) 2자가 같이 박사(博士)에 합격하고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아니하고 은거하면서 어머님을 봉양하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묘소를 3년 동안 지켰다. 상중에 곡하던 일이 장차 백년이 되었으나 고을 부로들이 서로 옛일을 전한다.
형제가 반드시 한 재산으로 살았고, 한 솥에 밥을 먹으며, 꼭 부모가 계실 때와 같이 늙음에 이르러도 고치지 않으며, 반드시 재실과 주사(廚事)를 세워두고 제사를 당하면 어른 아이 함께 모이어 재계하고, 내외의 직분을 나누어 일을 맡아 반드시 엄하게 하고, 비록 어리고 젊은이도 절하고 끓어 앉을만 하면 반드시 제사에 참여 하도록 하여 가로되 주선하고 진퇴하는 위의(威儀)는 여기서 비롯된다 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칭하여 가로되, 3자의 행실은 족히 풍속을 깨우치리라 하였다. 백용(伯容)이 가장 먼저 죽고 두 아우는 유일(遺逸)로 발천되어 둘째는 참봉이 되어도 나가지 않았고, 막내는 특별히 진천현감이 되었으나 병으로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백용(伯容)의 별호는 용재(容齋)이고, 둘째는 육일헌(六一軒)이니, 정구 선생이 육일헌 기문(記文)을 지어서 숨은 덕과 높은 행실을 다 말했고, 막내의 별호는 모재(茅齋)이다. 회연(檜淵)에 향현사(鄕賢祠)가 있어 3용(容)을 모두 향사한다. 정구선생은 3처사와 남매간이 된다. 백용은 52세에 죽으니 1582년 9월 7일이고 중용은 62세에 죽으니 1592년 11월 8일이고 계용은 60세에 죽으니 1594년 10월 15일이다.
백용은 살고 있던 고촌동(孤村洞) 선영 왼편에 장사하였고, 중용은 오른편에 장사하였고, 숙용은 삼대리(三大里)에 장사하였다.
백용은 성산 배씨 별제(別提) 은(垠)의 딸에게 장가들어 로(簬), 당(당), 심(심)을 낳았다.
중용은 초취는 광주(廣州) 이씨 참봉 백죽(伯竹)의 딸이며 재취는 완산 이씨 충의(忠義) 겸(謙)의 딸이니 난귀(蘭貴), 난미(蘭美)를 낳았고, 또 5사위가 있으니, 곽주, 이중무, 정선, 하홍진, 정무룡이다.
숙용은 진양 강씨 참봉 개(漑)의 딸에게 장가 들어서 서(서)를 낳았으니 벼슬이 절충장군이고, 딸이 1인이니 아직 시집가지 않았는데 임진왜란에 적을 만나 수절해 죽으니 열녀라 칭하였다.
로(簬)는 명룡(命龍)을 낳았으니 진사이고, 두 딸이니 장경우, 성창구이다. 장경우는 참봉이다. 당(당)은 명기(命夔), 명익(命益)을 낳았다.
난귀는 명직, 광언을 낳았다. 광언이 또한 선행으로 드러났고 사위가 3인이니 이진영, 조시맹, 정사주이다. 난미는 광영, 광헌, 광정, 광석, 광백을 낳았고 사위가 4인이니 신함장, 허시흥, 김수륜, 김일주이다.
서(서)가 명구를 낳았고 사위 2인이니 김이형, 허적(許積)이다. 김이형은 진사이고, 허적(許積)은 방금 영상(領相)이라 3세 4세 자손이 심히 많으니 후덕한 집은 하늘이 갑는다 하는 것이 미덥도다.
그 명에 가로되, 백행에 근본은 오직 효, 오직 제(悌)이라. 탁탁(卓卓)한 3용(容)은 가히 착한 풍속을 흥하고 가히 백세에 교훈이 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