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과 문학: 2023년 10월 20일 기한>
그의 유미주의와 정념
-정승윤 산문집 《눈 한 송이의 무게》
이 상 은
정승윤의 수필집《눈 한 송이의 무게》를 두 개의 시선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유미주의와 정념이다.
정승윤의 수필집《눈 한 송이의 무게》를 폈을 때 가장 먼저 눈길이 머문 곳이 작가의 프로필이었다. 프로필의 끝부분에서 작가는 자신을 유미주의라고 천명했다. 많은 수필가의 수필집을 접했고 프로필을 읽었지만, 유미주의자라는 소개는 낯설다. 정승윤 작가가 말하는 작가의 유미주의가 무엇인지를 정리해 소개하고자 한다. 작가의 유미주의를 살펴보고 이해하는 것이 《눈 한 송이의 무게》를 읽는 데 도움이 되리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정념은 프랑스 철학 사전의 정의를 빌리자면 “어떤 대상을 통해 상상되거나 느껴지는 기쁨이나 고통으로 자극받아, 그 대상을 멀리하거나 가까이하려는 정신적 움직임”이다. 정승윤의 많은 작품은 슬픔, 외로움 등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정념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정념이 그의 작품 속에 어떻게 작동하고 드러나는 지를 살펴보아야 그의 작품 제대로 감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해서 유미주의와 정념 두 개의 관점에서 《눈 한 송이의 무게》를 읽어 보고자 한다.
1. 유미주의자
나는 대체로 유순하지만 글 속에서만은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한 유미주의자의 독하고 아름다운 결기가 있다.
《눈 한 송이의 무게》의 작가 프로필 중에서
‘美’라는 용어는 미적 가치를 지닌 대상을 지칭하거나 서술하기 위해 일상이나 미학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좁은 의미로는 많은 미적 가치(가령 아름답다, 예쁘다, 매력있다 등)의 종류들 중 오직 하나만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특정 미적 가치를 지니며 그 가치를 서로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하면 난감해진다. 그중에서 가장 곤란한 질문은 아름다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美’라는 가치는 본질적으로 정의하기가 불가하고 정의하더라도 모호할 수밖에 없다. 해서 ‘美’라는 가치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다양한 형태를 지닐 수밖에 없다.
신앙인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저를 항상 딜레마에 빠지게 합니다. 거기에 '진정한'이나 '참된'이란 수식어까지 붙게 되면 아예 답변 불능 상태에 빠져버립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종교란 어떤 준엄한 가치체계의 문제가 아니라 저 개인의, 또는 우리라는 집단의 신념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스스로 유미주의자라고 천명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미가 모든 가치들의 우위에 있다는 예술지상주의 이론을 주장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신념의 문제일 뿐입니다. 미가 모든 가치를 총괄할 수 있다는, 모든 진실의 힘을 통합할 수 있다는 저의 신념과 소신의 문제일 뿐입니다. 패배마저 미로써 승화시킬 수 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신념에 따른 발언에 불과한 것입니다.
《수필 미학》 문학 캠프 <한 유미주의자의 고백>중에서
2023년 9월 청도에서 열린 《수필 미학》 문학 캠프에서 발표자로 나서 정승윤은 ‘美’는 개인이나 우리라는 집단의 신념이고 소신이라고 말한다. 정승윤의 유미주의에서 ‘美’는 고정되거나 절대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美’의 가치는 언제든지 수정이 가능한 것이다. 정승윤이 말하는 유미주의는 그가 밝혔듯이 예술지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유미주의를 말할 때 예술 운동, 예술 이론, 삶의 태도 세 측면을 말하곤 한다. 이 기준들을 통해서 정승윤의 유미주의를 살펴보자.
1.1 예술 운동으로서 유미주의
인간은 정치적 동물입니다. 좋든 궂든 우리는 정치를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수필에도 얼마든지 정치의식은 반영될 수 있습니다. 단 정치적 파당성이나 권력욕은 문학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쳐 나가는 것입니다. 지성은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의 기저가 됩니다. 그러나 관념의 노출은 문학이 되기 힘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무엇이 수필 문학인지 단적으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수필이 될 수 없는 것들은 본능적, 감각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격월간지 《에세이스트》 인터넷 카페에서
정승윤의 예술 운동을 대변할 만한 글이다. 수필 문학의 정체성을 명확히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 경계와 외부에 대해서는 명확히 하고 있다. 수필 문학의 경계를 정의하는 주체는 나와 우리이다. 권력이나 관념이 문학과 수필을 정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수필과 문학의 경계는 나와 우리의 자율적인 권리이다. 정승윤이 말한 수필 문학의 경계를 결정하는 도구는 본능과 감각이다. 합리성, 효율성, 진보가 아니다. 본능과 감각이라는 도구는 낭만적이고 다소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정체성을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대상을 다루는 도구로 오히려 현실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에세이스트》에서 남긴 글에서 정승윤은 ‘이것이 수필 문학이다’를 말하기보다는 ‘이것은 수필 문학이 아니다’를 말하자고 한다. ‘이것은 美이다‘가 아니라 ’이것은 美가 아니다‘ 라는 입장이다. 역설적으로 정승윤의 ‘美’에 대한 배제 기준은 오히려 포용적이라 할 수 있다. 잠재적으로 모든 것이 ‘美’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문학에 대해서도 같다. ‘美’이기 위한 혹은 문학이 되기 위한 특정한 조건이 불필요한 것이다. 정승윤이 말한 문학에서 배제되어야 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학판 안으로 들어오지 말아야 할 것은 정치적 파당성이나 권력이다. 이는 미학적이거나 문학적 가치라기보다는 윤리적 문제다. ‘美’나 문학이 권력욕의 대상이 되거나 정치의 도구가 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역으로 ‘美’나 문학이 권력이 되어 다른 것 위에 군림해서도 안 된다는 견해다. 정승윤이 문학판과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정승윤의 유미주의자 입장의 예술 운동은 포용과 배제를 함께 한다. 하지만 배제는 지극히 최소한 자리를 차지한다. 정치적 파당성과 권력을 문학 밖에 두고자한다.
1.2 예술 이론으로서 유미주의
내 글을 시로 분류해야 하느냐 수필로 분류해야 하느냐 라고 물으신 적이 있다. 나는 보다 폭넓게 산문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장르 구분의 통념상 수필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중략>… 글이 짧은 이유는 원래 폐활량이 적은 탓도 있지만 효과적인 측면에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일부러 글을 길게 늘이는 일은 글을 죽이는 일에 가까웠다.
시에 가깝게 글을 쓴다는 것은 그 글이 시를 모방하고 있거나 시의 자장 아래 있다는 말일 수 있다. 정통 수필가들에게 내 글이 수필의 정체성을 흐린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떤 비판을 받더라도 타 장르와의 경계의 벽을 허무는 것이 수필의 예술성을 담보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눈 한 송이의 무게》의 작가의 말에서
정승윤은 자신의 글이 시인지 수필인지 묻는 질문에 산문이라고 대답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또 그의 길이가 짧은 것은 시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효율성의 문제라고 밝혔다. 더 나아가 장르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야 수필은 예술적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승윤은 장르 간의 경계를 허물어 성공한 사례를 시에서 찾아 소개했다.
백석의 경우 무너진 정주 성터를 넘어오는 청배 장수 노인이 등장합니다. 그의 또다른 시 '고향'에서는 진맥을 하며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흰수염을 길게 기른 한의사가 등장합니다. 이 인물들 만으로 우리는 끝모를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고 시가 주는 메시지에 공감하게 됩니다.
단지 어떤 정황이 서사가 되기도 합니다. 이상의 '오감도'에 13인의 아해가 나옵니다. 어떤 사건이나 갈등도 없습니다. 다만 두려운 아해와 두려워하는 아해가 있다는 정황만 주어집니다. …<중략>…
저는 백석과 이상을 가장 중요한 산문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에 서사적 요소를 도입하여 성공한 전범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시의 서사란 차라리 '이미지 서사'나 '상징적 서사'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수필 미학》 문학 캠프 <한 유미주의자의 고백>중에서
정승윤은 백석과 이상을 산문 시인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시에서 발견되는 서사를 ‘이미지 서사’ 혹은 ‘상징적 서사’라고 말한다. 어쩌면 정승윤이 추구하는 문학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도 ‘이미지 서사’와 ‘상징적 서사’를 글 속에 도입했다는 말일 것이다. ‘이미지 서사’는 사진이나 회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개념이다. 사진이나 그림은 매체의 특성상 서사를 시계열적으로 나열할 수 없다. 대신 평면에 상상이나 유추의 실마리들을 배치한다. 서사의 확장과 완성은 감상자의 몫인 셈이다. 한 장의 그림이나 사진에 구체적이고 긴 이야기를 구성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선명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는 효과적일 수 있다.
…<중략>… 그 말은 키가 작은 조랑말이었다. 키 작은 마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도 하고 짐이 없는 날은 신이 나는지 마부를 싣고 흥겹게 또각또각 달리기도 했다.
그날은 마침 그 말의 편자를 가는 날이었다. 대장간 앞을 지나가던 몇 사람이 둘러서 구경하고 있었다. 대장장이가 말의 무릎을 구부려 발목을 껴안듯이 하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화로에 발굽 모양의 편자가 벌겋게 달궈지고 있었다.
…<중략>…
우리가 죽을 때 모두 신발을 벗고 맨발이 되듯이, 그 조랑말도 죽고 나서 편자가 벗겨졌을까. 얼마 전에 사업에 실패한 오십 대 가장이 강물에 투신자살했는데 시체가 인양되는 장면이 티브이로 보도된 적이 있었다. 방수포 밑으로 드러난 그의 발에는 구두가 그대로 신겨져 있었다. 나는 그의 구두를, 그의 편자를 벗겨주고 싶었다.
정승윤 산문집《나 홀로 간다》의 <편자>중에서
정승윤의 <편자>에는 두 개의 이미지가 배치되어 있다. 편자 갈이를 하는 말과 구두를 신은 채 투신자살한 오십대 가장의 시체다. 이 두 개의 이미지에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고 독립적이다. 하지만 편자와 구두는 모두 발에 신겨지고 말과 가장은 노동을 감당해야 했다. 또한 스스로는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말과 가장의 이미지 두 개를 비유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말과 가장의 삶은 하나의 연속적인 서사 이미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말은 평생 편자를 벗지 못하고 노동에 시달리다 죽었다는 해석도 가능하고 오십대 가장은 끝내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 나지 못했다도 가능하다.
정승윤의 비교적 초기작에 해당하는 <편자>에는 비언어적 매체인 사진이나 회화의 이미지 서사 기법과 유사한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장르에 구애되지 않는 글쓰기 방법은 낭만적인 유미주의자의 자유로움이다. 두 권의 산문집에 수록된 많은 작품들이 구체적이고 명확한 서사로 구성되기보다는 정승윤이 말하는 이미지 서사 기법으로 혹은 상징적 서사 기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승윤의 이러한 글쓰기 방법은 일상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서사들을 소재로 다루기에 효과적이다. 수필 작품 속 서사들은 과거형이거나 완결형인 경우가 많다. 이런 서사의 경우 언어로 요약할 수 있고 서사가 지닌 의미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하지만 정승윤의 많은 작품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강렬한 정념을 여운으로 남긴다. 낭만적 유미주의자다운 글쓰기의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정승윤의 예술 이론은 특정 장르에 머물지 않는다. 시와 산문이 함께 한다. 시의 이론과 산문 이론 혹은 회와의 이론들까지 그의 작품 작법에서 느껴진다. 그의 이론은 시와 산문의 장점들을 조합하고 필요에 따라 회화의 이론도 함께 한다. 앞에서 언급한 예는 다양한 이론이 적용된 사례 중의 하나일 뿐이다.
1.3 유미주의자로서의 삶의 태도
가령 다른 말로 하자면 지금의 내 삶이란 이렇다. 나는 비 오는 날, 십 분이면 폭풍우가 밀려오는 망망대해 앞에 마주 설 수 있다. 밤이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집을 벗어나 달빛을 밟으며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걸을 수 있다.
《눈 한 송이의 무게》의 작가 프로필 중에서
그를 제주에서 만난 적이 있다. 약속은 없었다. 나는 그가 사는 동네를 지나고 있었고 혹시나 작가를 만날 수 있을까 하고 동네에 길을 잠시 서성이고 있었다. 작가는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고 길 주변에 자라고 있는 풀들을 살펴보며 걸어왔다. 《눈 한 송이의 무게》의 프로필에 남긴 그의 현재 삶은 바다와 걷기 정도가 전부다. 지나온 삶에 대한 소개나 수상 실적이나 학력 따위는 아예 없다. 애써 자신을 소개하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세태와는 다른 삶의 태도이다.
오늘은 청귤차를 담그기 위해서 마누라와 종일 어린 청귤을 썰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육체, 노동이 힘들고 지겹습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엔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가 끊임없이 샘솟습니다. 내 글을 알아봐 주는 그 누군가를 위하여. 내 글이 초라한 나를 위로해 주고 상처투성이 내 감정을 위무해 주고 나처럼 또 한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 기슭에 닿기 위하여.
격월간지 《에세이스트》 인터넷 카페에서
그의 현재 삶을 지탱하고 위로하는 것은 글쓰기라고 작가는 밝힌다. 글쓰기가 작가의 삶에서 차지하는 크기와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할 수 있다면 글을 통해 타인에게 다가서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살아온 삶이 초라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글쓰기에 전념하지 못했던 삶에 대한 아쉬움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정승윤의 삶에서 글쓰기는 위로이고 세상과 연결된 통로다. 문학은 신념이고 남겨진 마지막 과제이다. 정승윤의 현재 삶은 그 자체가 문학이다.
2. 정념
2.1 감성 그리고 정념
정승윤의 글은 감성적이다. 글을 쓰는 이유와 글이 드러내는 것은 작가와 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정승윤의 글에는 감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심리학이나 철학에서 감성, 감정, 정서, 정념 등으로 구분하고 뜻을 정의하지만 이 글에서는 정념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사용하고자 한다.
정념이라는 용어를 선택한 이유는 이렇다. 정승윤의 글은 윤리적이거나 사회적 가치를 주제로 한 작품보다는 강렬한 감성적 이미지를 남기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이 남기는 감성은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고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들이다. 감성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고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글이 가진 매력이다. 해서 나는 오래전부터 그의 글에 나타나는 감성들을 정념이라 불러왔다.
내 글쓰기는 어쩌면 경계의 글쓰기일 것이며 …<중략>… 감성에 따른 결과물일 따름이다. …<중략>… 내 글들을 다시 읽어 볼 기회가 있었다. 문면마다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내 글들은 한 마디로 실패자의 노래였다. 실패자의 원한, 울분, 후회 따위가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러나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나의 슬픔의 글들은 단지 자기연민이라든가 자기 위로의 글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당신도 역시 실패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슬픔은 당신의 슬픔을 반영한다. 나는 결국 공감을 확신하며 글을 쓰는 것이다. 슬픔이 없는 글은 글도 아니다. 패배가 없는 인생은 인생도 아니다. 나는 패배에서 진정한 극복의 의지가, 슬픔에서 삶에 대한 진지한 관조와 성찰이 생겨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정승윤 산문집《나 홀로 간다》의 <작가의 말>중에서
첫 산문집을 내면서 정승윤은 내 글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고 나의 슬픔은 당신의 슬픔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이는 ’나의 슬픔은 당신의 슬픔이다‘ 가 아니며 또한 ’당신과 같은 경험을 함께해 슬프다’라는 뜻도 아니다. 나의 슬픔은 당신의 슬픔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정승윤은 말하기를 공감을 확신한다고 한다. 내가 당신의 슬픔에 반응하듯이 당신도 나의 글을 통해서 반응할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정승윤의 감성적 글쓰기는 대상과 나를 동일시 하는 서정적 글쓰기와는 맥락을 조금 달리한다. 대상과 나를 동일시 하지 않는다. 또한 독자를 향한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감성과 독자의 감성 일치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독자와의 공감을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통의 경험을 통한 공감을 끌어내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달동네에 사는 소녀를 사랑했다. 나는 달동네 판잣집에 사는 소녀를 사랑했다. 나는 달동네 판잣집 처마의 삼십 촉짜리 전등을 켜는 소녀를 사랑했다. 하굣길이었다. 나는 한길 가에 서 있었다. 한길 가에 서 있던 내가 달동네에 사는 보이지도 않는 소녀를 사랑했다. 그때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시간도 공간도 상관 없었다. 그때 나는 한길 가에서 멀리 산등성이 판잣집에 불이 켜지는 것을 보았다. 해질녘 쓸쓸한 순간이었다. 처마 밑에 서 있을 쓸쓸한 소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정승윤 산문집《나 홀로 간다》의 <달동네에 사는 소녀>
정승윤의 <달동네에 사는 소녀>는 원고지 2매도 되지 않는 짧은 글이다. 구체적 사실을 진술하거나 재현하기 불가능한 분량이다. 이 글에서 ‘나‘는 화자이지만 작가 자신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그저 그림 속에 등장하는 소녀와 소년 중의 소년을 지칭하는 대명사일 뿐이다. 나 대신 너로 바꾸어도 이 글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물론 소년이라 바꾸어도 가능할 것이다. 달동네와 산등성이를 바닷가로 판잣집을 천막집으로 바꾸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마지막까지 바꿀 수 없는 것은 사랑과 쓸쓸함이다.
작가가 재현해 놓은 경험은 구체성이 절제되어 있다. 구체성의 절제가 아이러니하게도 보편성을 띠기 시작한다. 작가 개인의 경험이지만 누구나 성장기에 겪었을 법한 일이다. 또 직접 경험하지 않았어도 이해하고 그 쓸쓸함을 느낄 수 있는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정승윤의 글은 자신의 이야기이지만 보편적이고 일반화된 슬픔과 서사를 다룬다. 정승윤의 <달동네에 사는 소녀> 속의 나와 소녀는 작가 자신이면서 독자이다.
정승윤의 글의 길이가 짧은 이유를 나는 이러한 연유에서 찾는다. 길게 구체성을 드러내는 문장은 경험을 보편화하거나 일반화한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승윤의 짧은 글들은 수필 문단에서 보면 파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작가 자신이 추구하는 글쓰기 측면에서 보면 효과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2 정념의 안쪽
우정이라거나 우애, 순수라거나 사랑, 우선 이런 말랑말랑한 가치들이 나에게서 없어졌다. 이념이라거나 의리, 지성이라거나 의지, 좀 더 단단하게 느껴지던 가치들도 사라졌다. 사람들도 떠났다. 내 잘못이든 그들의 잘못이든 그들은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다.
…<중략>… 추상적인 가치들이 사라질 땐 슬픔이 있었다. 사람들이 떠날 땐 아픔이 있었다. …<중략>… 지금 하나씩 하나씩 ’나‘라고 불리었던 존재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 결국 가장 버리고 싶었거나 버려야 할 수치와 혐오들만 남아 그래도 마지막까지 나를 지키고 있다. 그들은 한밤에 잠들어 있는 나를 흔들어 깨워 우두커니 침대 위에 앉아 있게 한다.
정승윤 산문집《눈 한 송이의 무게》의 「늙어감에 대하여」
「늙어감에 대하여」는 두 번째 산문집의 마지막 작품이다. 작가는 주체와 타자로 세계를 분할한다. 그리고 타자는 다시 둘로 나누어진다. 연접(가까이 하다)하고자 하는 존재들과 이접(멀리 하다)하고자하는 존재다. 연접을 원하는 존재는 이접하게 되고 이접하고자 하는 존재는 연접한다. 주체는 이접하고자하는 존재들에게 둘러싸여 점점 왜소해진다. 이를 작가는 늙어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놓인 주체가 느끼고 발산하는 정념을 정승윤은 슬픔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연접하고자 원함과 이접하고자 원함은 둘 다 주체의 욕망이다. 욕망의 방향이 다를 뿐 인 것이다. 정념은 욕망의 성취와 좌절의 강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버려야 할 수치와 혐오와 같은 이접을 원하는 가치들이 나에게 연접함과 우정, 사랑, 순수 같은 연접을 원하는 가치들이 이접함은 다른 현상이지만 유사한 정념을 유발하는 것이다. 정승윤은 이러한 현상을 실패라고 말한다.
별 보러 간다. 나는 별 보러 간다. 인위의 불빛을 등지고 나는 별 보러 간다. 캄캄한 밤, 나는 별을 보러 산으로 들어간다. 그대들이 금맥을 캘 때 나는 별을 캐러 간다. 그대들이 우주를 향해 미래로 갈 때, 나는 별을 보러 과거로 간다. 별을 본다는 것은 문명을 등진다는 것이다. 모든 휘황한 것들을 등진다는 것이다. 모든 욕망들으로부터 등 돌린다는 것이다. 자진하여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거. 절망일 수도, 도피일 수도, 퇴행일 수도 있는 길을 걷는다는 거. 별을 보기 위해서는 모든 인위의 길에서 돌이켜야 한다. 점점 인기척이 없는 무위의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모든 문명의 불씨들을 꺼뜨리고 가야 한다. …<중략>… 어쩌면 더 깊은 숲으로, 더 먼 섬으로 가야만 한다. 문명에 대하여 더 깊이 절망하고 더 심하게 회의(懷疑)해야 한다. 집에 돌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마지막 등불마저 꺼버려야 한다. 세상과 차단된 어둠 속에서 오로지 별빛만으로 내 존재를 드러내야 한다. 내가 우주를 사랑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정승윤 산문집《눈 한 송이의 무게》의 <태허>
<늙어감에 대하여>에서 작가는 현재 자신이 속한 공간 속의 존재들을 연접과 이접이라는 관점에서 인지하고 있지만 <태허>에서는 시간을 과거와 미래로 나누고 또 세계를 인위와 무위로 분류한다. 작가는 미래와 인위와 문명을 욕망하는 세계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세계와 멀어지기를 욕망한다. 과거와 무위와 자연에 다가가기를 원한다. 작가는 문명에 대한 절망과 회의를 말한다. 작가의 욕망은 작가가 속한 세계의 타인들의 욕망과는 역행하고 있다. 작가는 타자들의 등을 마주하고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명, 미래, 인위에 대한 멀어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이다. 작가는 문명과 모든 욕망이 사라진 오래 전의 우주를 태허라 말하는데 글의 끝 무렵에서 세상과 차단된 어둠 속에서 오로지 별빛만으로 내 존재를 드러내야 한다라고 말한다. 또 내가 우주를 사랑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말한다. 작가는 문명과 인위가 존재하기 이전의 우주를 알기를 절망과 회의를 통해 갈망한다. 그 욕망이 향하는 다른 한 끝은 별빛만으로 드러나는 내 존재 자신이다. 아마도 별빛만으로 드러나는 내 존재의 모습은 인간의 태허 일 것이다. <태허> 속에서도 <늙어감에 대하여>에서도 주체는 연접과 이접의 욕망을 마주하고 있다. 「늙어감에 대하여」에서는 주체의 욕망과 세계는 역행하고 있고 <태허>에서는 존재들이 태어나기 이전의 세계를 갈망한다. 주체는 외롭거나 슬프거나 좌절할 수밖에 없다.
정승윤의 글에 나타나는 정념의 근간을 연접과 이접의 욕망 사이의 성취와 좌절로 나는 이해한다. 정승윤 작품 속 정념의 안쪽에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연접과 이접의 부조화가 존재한다. 그 부조화가 작품 속의 정념이다.
2.3 정념과 부사
또 어떤 이는 내 글에 부사어가 과용된다고 지적했다. 일반적으로 수식어가 너무 남용되는 건 경계할 만한 일이다. 나 역시 형용사나 직유는 가급적 피하려고 애를 쓴다. 지나친 분칠은 역겹기 때문이다. 내게 형용사가 색채라면 부사는 음영이다. 음영은 내 글에 입체감이나 깊이를 준다고 믿고 싶다. 그러니까 화려한 채색보다는 대조의 효과가 있는 미묘한 흑백 톤을 더 즐긴다고 할까. 물론 과유불급이다. '너무'를 너무 쓰지 않도록 주의하겠다.
《눈 한 송이의 무게》의 작가의 말에서
정승윤이 형용사와 부사에 대한 의견을 피력한 대목이다. 작가는 형용사와 부사를 색채와 음영이라 했다. 작가는 부사를 통한 미묘한 대조와 흑백 톤을 즐긴다고 말한다. 존재 자체에 집중한 글쓰기가 아니라 존재가 나타내는 현상과 여운을 나타낸다는 글쓰기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광원 앞에 드러난 존재는 명확히 얼굴을 드러낸다. 하지만 음영은 흑백 톤이고 형태마저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 여러 존재가 근접해 무리를 이루면 개별 존재를 구별하기조차 불가능하다. 존재의 뒤로 남겨진 그림자를 보고 있노라면 존재의 원래 모습보다는 움직임이 먼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선창까지 물이 가득 찬 만조였다. 그 배는 통통선이 아닌 노로 가는 조그만 목선이었다. 한 청년이 서서 노를 저었다. 그는 비스듬한 원을 그리며 뒤적이는 듯 부드럽게 노를 저었다. 그에 따라 배도 부드럽게 흔들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노가 걸려 있는 곳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그때마다 달빛에 놋쇠 꼭지가 빛났다. 바닷물에 잠긴 노에 달빛이 엉겼다 풀려나갔다. 그가 노래를 불렀는지, 그냥 노만 저었는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그가 정확히 누구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옷차림이 누추했고 말이 없었는데 노를 저을 때만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늠름해 보였다. 심지어 그의 남루조차 맞바람에 펄럭이는 기폭처럼 당당해 보였다. 그 배엔 몇 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 밤마실을 가는 배라 정처가 없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바다와 그 가운데 떠 있는 한 척의 배와 뱃전에 출렁거리는 바닷물 소리가 전부였다. 어린 내가 처음 배를 타면서도 아무 두려움이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푸른 달빛과 파도가 빚어내는 대자연의 리듬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승윤 산문집《눈 한 송이의 무게》의 <노>
《눈 한 송이의 무게》를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작품이<노>였다. ’노‘라는 명사를 형용사와 부사와 동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동사와 부사와 형용사 속에 ’노‘라는 명사가 작게 자리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제도 뚜렷이 드러나는 존재도 없다. 감각 주체가 인식하는 현재를 진술하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의 제목은 노이지만 노보다는 노 주변을 둘러싼 움직임과 색채가 글의 대부분이다. 또 부드럽게, 늠름해 보였다. 누추했고, 정처가 없었다. 등의 주체가 감지한 정서들이 남겨져 있다. 글이 남겨주는 명확한 메시지를 기다리는 독자라면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흔히 산문에서 찾을 수 있던 주제나 관념적 의미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내가 처음 배를 타면서도 아무 두려움이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푸른 달빛과 파도가 빚어내는 대자연의 리듬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문장에서는 일관성을 띠기 시작한 이미지마저 대자연의 리듬이라는 말들로 흩트려 버린다.
이 글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흑백톤의 여운이다. 이 작품에서는 몽환적인 이미지 한 장을 독자들에게 보여 줄 뿐이다. 명확히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 글에서 편안함과 위로를 얻는다. 내가 작품 속 풍경을 직접 경험한 듯 선명하다. 그리고 내 안에 지워지지 않고 그림자로 남아있다.
정승윤의 <노>라는 작품은 낯설고 새롭다. 산문의 특성을 구체적 정보 공유라고 한다면 <노>는 산문적이지 않다. 정서적인 면이 더 돋보인다. 시적 특성이 강한 것이다. 그런데 시라고 하기에는 리듬이나 함축성이 충분하지 않다. 정승윤은 새로운 글을 시도하고 있는 듯하다. <노>는 지금까지의 정승윤의 작품 속의 정념보다는 다소 감미롭고 경쾌하다. 나는 정승윤의 <노>를 읽으면서 앞으로의 글의 변화를 상상해 본다. 지금까지 독특한 형식을 완성해 왔듯이 또 새로운 형식의 글을 보여 줄 것을 확신한다. <노>는 부사와 형용사와 정념으로 만들어 낸 새로운 형식의 글이었다.
3. 읽기를 마치며
정승윤이 말하는 유미주의를 살펴보고 그의 글에 나타난 정념을 이야기해 보았다. 그의 유미주의는 신념이고 의지이다. 그 신념 속에는 문학에 대한 갈망이 포함되어 있다. 그 신념이 정승윤만의 글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변화해 오고 있다. 《눈 한 송이의 무게》는 그의 긴 문학의 여정 중에 남긴 흔적 중의 하나다. 정념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보여주었다. 독특하고 새롭다. 일독을 권한다. 유미주의자의 개성 넘치는 글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