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좋은 이미지로 생각하는 성경의 등장인물 중, 조금 더 생각해보면 참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이 있다.
세리, 창녀,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들이다.
세리는 세금을 걷는 사람들. 로마의 강점기였던 유대인사회에서 세리들은 매국노와 같은 이미지이다. 세금을 걷어 로마에 갖다 주는 것도 모자라 자기 배를 채우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세리가 되었을까? 그들이 원치 않았는데 강제로 되었다면 조금의 측은함이 있었을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그런 근거는 찾기가 어렵다. 그들이 자의로 세리가 되었다면 최후의 동정표도 얻지 못하는 말 그대로 "죄인"이요 "매국노"가 된다.
창녀는 몸을 파는 사람이다. 그런데 구약에 나오는 "기생 라합"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에 대해 사람들은 잘 생각하지 않는다.
창녀에 대해서 예수님은 ...
(마 21: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하지만 우리는 기생이나 창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사마리아인. 사마리아인은 조금의 동정표를 얻을 수 있다. 그들은 지배국에 의해 강제 이주해온 이들과 혼혈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혼혈이 되면서 신앙도 혼혈이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사마리아가 혼혈이 되기 전부터, 구약의 분열왕국 시대부터 신앙적 문제는 있어왔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이 그나마 더 있었던 남유다와는 달리 북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변질된 신앙을 취하면서 시작되었다. 종교를 정치의 도구로 여긴 여로보암의 정책에 의해서 신앙은 변질되었다. 북이스라엘은 한번도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왕이 등장하지 못했다. 그 북이스라엘의 수도가 바로 사마리아이다. 이러한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하여,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 신앙이 퇴색되어져가던 유대인들이 바리새인을 중심으로 신앙운동을 함에 있어 사마리아인은 극도로 혐오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누가복음 18장에서의 예수님의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교만하게 기도했고 세리는 겸손하게 기도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모습은 바리새인의 모습과 가깝다. 바리새인이 어떻게 기도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길이 없으나 성경 내용 그대로만 보자면(심지어 예수님의 평가도 일단 배제하고) 바리새인의 기도는 당시 감동적인 기도이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악을 행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는 바리새인의 삶을 살면서 이에 대해 고백하며 감사하는 모습,
세리와 같이 민족을 배신하지 않고 굳게 신앙양심을 지키며 민족의 지도자, 신앙의 지도자로 살아가는 모습,
그러나 결정적으로 예수님이 하신 비유이니 예수님의 평가를 외면할 수는 없다. 예수님의 평가에 의해서 이러한 바리새인의 진실된 모습은 교만의 모습으로 설명된다. 그렇다. 옳다 하더라도 교만해서는 안 된다. 세리처럼 살아서도 안 되지만 세리를 경멸해서도 안 된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겸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찾아와 기도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간 후? 그는 세리의 일을 그만두었을까? 양심적인 삶을 살았을까? 신앙을 지켰을까? 만일 이 세리가 양심적이고 바른 삶을 살면서 신앙을 지켜왔었다면 이렇게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기도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은 단순히 기도하는 그 단편 하나를 두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바리새인을 무조건 경멸하고 세리를 무조건 두둔해서는
우리의 신앙은 뜬구름을 잡는 허상의 신앙일 수밖에 없으며
여전히 우리의 삶은 바리새인처럼 살면서 겸손을 모르고
세리를 향하여 혐오하며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