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3년6월 27일(음력 5월 19일) 선조와 인목왕후 김씨 사이에서 선조의 21번째 자식이자 10번째 딸로
태어났으며, 선조에게는 유일한 적녀이다. 선조는 52세의 나이에 본 늦둥이 딸 정명공주를 무척 귀여워했으나[1] 이복오빠 광해군이 즉위한 뒤 정명공주의 외할아버지 김제남과 동생 영창대군은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역모죄로 처형되었다.
이후 어머니 인목왕후가 서궁[2]에 유폐되면서 정명공주도 함께 감금되었다. 인목왕후를 폄손하는 절목에
정명공주와 관련하여 "공주의 늠료(廩料)와 혼인은 옹주의 예에 따른다"고 규정했다.[3] 당시 정명공주의 폐서인 여부를 놓고 류간(柳澗)이 '대비(인목왕후)를 후궁으로 대우한다면 그 딸인 공주도 옹주(翁主)로 강등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으나, 이이첨이 그 말을 듣지 않고 공주를 폐서인하되 오로지 늠료와 혼인만 옹주의 예에 따르도록
했다.[3] 이미 아들을 잃은 인목왕후는 딸마저 잃을까 두려워 광해군이 정명공주의
일을 물으면 죽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4]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정명공주는 공주로 복권되고 어머니와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정명공주는 21세로, 이미 혼기가 한참 지난 나이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공주를 서둘러 시집보내기 위해 부마간택령을 내렸다. 그러나
공주의 나이가 너무 많아서 전국에서 단 아홉 명만이 부마단자를 내어 간택령에 응했다.[4] 결국 부마단자를 받는 기한을 늘리고 신랑감의 나이 제한을 약화한 끝에
동지중추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을 부마로 간택했다.[5] 그 과정에서 인목왕후는 사위 홍주원에게 왕만이 탈 수 있는 말인 어승마를
타고 궁에 들어오라고 하여 조정에 문제를 일으켰으나 [6] 인조는 반정의 명분 때문에 인목왕후를 벌하지 못했다.[7] 인조는 인경궁의 재목과 기와를 내어주어 정명공주의 살림집을 짓게 하고[8] 또 정철을 내어주는 등[9] 그녀를 후대하였다. 본래 《경국대전》에서는 공주의 집은 50간을 넘지
못하게 규정하고 있었는데 정명공주의 집은 200간에 이르렀고, 경상도에만 8,076결[10]에 이르는 넓은 땅을 하사받는 등 엄청난 호사를 누렸다.[7]
정명공주는 선조와 인목왕후를 닮아 선이 굵고 힘이 넘치는 한석봉체를 잘
썼는데 조선 후기의 서예가 남구만은 자신의 저서에서 정명공주의 글씨를 칭찬하기도 했다.[11] 인목왕후 또한 한석봉체를 잘 써 생전의 선조를 기쁘게 했는데[11], 정명공주도 서궁에 유폐되어 있을 당시 아버지 선조를 닮은 글씨를 쓰며
어머니를 위로하였으나 30대와 40대 때에는 붓글씨를 끊었고, 한문도 쓰지 않았다.[12] 인조의 의심을 살 것이 두려워 바느질과 가사에만 전념하며 의도적으로
정치를 외면하였다.[12] 인목왕후 사후 궁중에서 발견된 무도한 백서(帛書)로 인해 인조와 효종의 의심을 산 적도 있으나, 인조반정의 공신인 장유, 최명길 등의 구명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인조가 죽고 나자 효종, 현종, 숙종 3대 동안 정명공주는 종친의 어른으로서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12]
남편 홍주원과의 사이에 7남 1녀를 두었으며 1685년9월 8일(음력 8월 10일) 8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 공주 가운데 가장 장수한
기록이었다.[12]
옛날 우리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서궁(西宮)에 있을 적에 정명공주가 이때 아직 하가(下嫁)하지 않아 실로 좌우에서 모시고
있었다. 공주는 슬프고 분하며 두렵고 조심하는 가운데 할 일이 없었으므로 붓을 잡고 글씨를 써서 대자(大字)와 소자(小字)를 썼으니, 이는 모두
인목대비의 마음을 위로하고 풀어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1683년(숙종 9) 봄에 암흑 속에 빠졌던 나라가 다시 밝아지자, 비로소 높은 가문으로
하가하고는 말하기를, 문한(文翰)은 부인이 할 일이 아니다. 하여 안부를 전하는 글도 모두 국문을 사용하였고 조보(朝報)와 이문(吏文)도 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주가 문장을 잘한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으며, 별세한 뒤에 유묵(遺墨) 또한 드물었다.
지금 공주의 막내 아드님인 무주군(茂朱君)이 공주가 서궁에 있을 때에 쓴 ‘화정(華政)’이라는 두 대자를 나에게 보여
주며 말하기를, 이는 우리 선비(先妣)의 필적입니다. 선비께서 평소 겸손해하신 뜻을 가지고 말한다면 본래 굳이 남에게 보일 필요가 없겠으나
자손들이 오늘날 선비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한다면 또한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에 모각(模刻)하여 탁본해서 여러 자손과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니, 그대는 왼쪽에다가 이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이 우환의 즈음에 지은 것이고 화려한 날에 나온
것이 아님을 알게 하며, 또 이 모각은 실로 집에 보관되어 있는 글씨가 아주 적어서 장차 없어질 지경에 이름을 애석해한 것이요, 자랑하고
전파해서 한묵(翰墨)의 집안에 과시하고자 해서가 아님을 밝혀 주십시오. 하였다. 이에 나는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로부터 제왕(帝王)의 딸에 대해서는 우(虞)나라와 하(夏)나라는 증명할 만한 글이 없으며, 주(周)나라 태희(太姬)로
말하면 무왕(武王)의 친 따님이었으나 무당과 가무를 좋아하였다. 그리고 한당(漢唐) 이하로는 혹 부유함이 지나쳐서 사치하고 혹 은총이 지나쳐서
안일에 빠져서 어진 덕으로 일컬어진 자가 더욱 드물다. 오직 공주는 안에 밝으면서도 외면에 감추고 재능이 있으면서도 그 명예를 사양하여,
심덕(心德)의 온전함이 그 일부분에 나타난 것이니, 어찌 자제들이 본받을까 걱정하는 후세의 재주 있는 부녀자들과 똑같이 말할 수 있겠는가.
도리화(桃李花)가 아름답게 피고 봉황이 온화하게 울며 자손들이 번창하여 과거 급제가 이어지고 대관(大官)이 이어져서 존귀한 영화로움을 지극히
하고 수고(壽考)의 복을 구비함은 이유가 있다고 할 것이다.
또 필적을 받들어 보니, 실로 그 규모가 우리 선조대왕의 필법에서 나와 필세가 웅건(雄建)하고 혼후(渾厚)하여
규중(閨中)의 기상과 전혀 같지 않다. 아, 그 필법에 있어 심획(心畫)을 얻은 것이 이와 같다면 그 성정(性情)에 있어 보고 감동하는 교화에서
얻은 것을 또 알 수 있으니, 가문이 엄숙하고 화목한 아름다움이 어찌 유래한 바가 없이 그러하겠는가.
정명공주는 선조와 인목왕후 연안 김씨(김제남의 딸, 1584~1632) 사이에 태어난 유일한
공주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공주는 광해군 5년의 계축옥사(1613)로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될 때 함께
유폐되어 인조반정(1623)까지 만10년을 덕수궁에 갇혀 살았습니다.
11세 때 갇힌 공주는 다음해인 1614년에 동생인
영창대군이 지금의 강화도 살채이(살채이의 지명은 殺. 昌. 즉 ‘영昌대군이 殺해 당한 곳’이라는 뜻)에서 증살되었고, 외할아버지 집안까지 완전
쑥밭이 되었으니 정명공주는 꽃다운 소녀시절을 어머니 인목대비를 위로하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기나긴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선조의 글씨와 인목대비의 "민우시" 고통과 불안을 잊는 방법으로 공부하는 일이 최선이었을까? 정명공주는 명필이던 인목대비로부터 글씨를 지도받으며 서도(書道)
수련에 매진해 유폐 기간 중에 이미 한석봉체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한편 반정으로 왕에 오른 인조는 인목왕후와 정명공주를 잘
모셔야만 반정의 명분이 확고하게 되므로 이 두 모녀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인조는 반정 바로 그 해인 1623년에 이미 혼기를 놓쳐 있던 21세의
정명공주를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에게 하가(下嫁, 공주나 옹주가 귀족이나 신하에게로 시집가는 일)하였습니다.
정명공주는
1637년 병자호란 때(35세) 강화도로 피난 와 고려산 적석사에 피신해 있었다는 기록이 ‘강화사’에 있습니다. 피난 당시 갑곶나루로 건너려할
때 미리 공주의 금은보화를 실은 배가 기다리고 있자 “재화들을 다 내리고 백성들을 먼저 배에 태우라!”고 명하자 이를 본 사람들이 “과연
정명공주로다. 공주의 마음씀이 저러하니 그 아래 후손들이 반드시 번창할 것이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통했는지
공주는 7남 1녀의 많은 자손을 두며 다복번창(多福繁昌)했습니다. 또 장자인 홍만용(洪萬容, 1631~1692)은 훗날 숙종조에 이조판서와
예조판서 등 고위직을 두루 지냈으니 또한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음을 더불어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공주께서는 당시로는 드문 장수를
누렸고, 시집올 때 인조가 많은 땅을 내려 돌아가실 때 남긴 재산이 전라도 하의도 섬 전체와 땅 8,000만평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정명공주의
이 재산은 두고두고 풍산홍씨 가문의 밑천이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후대의 그의 후손으로는 홍양호, 홍국영,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과 딸
혜경궁홍씨, 홍범식 등등 수많은 인물들이 있으며, ‘임꺽정’ 소설을 쓴 현대의 벽초 홍명희도 정명공주의 자손)
여기 정명공주의 서예작품으로 한석봉체의 ‘華政’(간송미술관 소장) 두 글자를 살펴보겠습니다. 화정은 ‘빛나는(華) 정치(政)가 백성을
편안히’라는 속뜻으로 사방 73cm 나 되는 큰 글씨입니다.
이 글씨에 대해 미술사가들은 ‘이런 큰 글씨는 남자의 필력으로도
감당하기 힘들진데, 연약한 여인의 체력으로 이런 글을 써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 ‘중국에도 유례가 없다’ ‘결구(結構)나 필력(筆力),
운필(運筆)에 있어 어느 한 군데의 머뭇거림 없이 당당하기만 하니 타고난 명필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라고
평합니다.
정명공주_선조의 딸 : 공주로 죽고 싶소
정명공주貞明公主는 조선의 제14대 왕인 선조의 딸이다.
그것도 11명이나 되는 선조의 딸들 중 유일한 공주다.
정명공주는 선조 36년(1603) 5월 19일에 정릉동 행궁에서 태어났다.
정명공주가 태어난 정릉동 행궁이나 선조 36년이라는 시점 모두 공주에게
불길하게 작용했다.
축복을 받기에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정명공주가 태어난 정릉동 행궁이라는 장소부터가 문제였다.
행궁이란 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궁궐이었다. 정식 궁궐이 아닌 임시 궁궐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파란의 예고였다.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 선조는 46세였다.
왕위를 물려주기에는 젊은 나이였다.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열등감이 커갈수록
미움이 커졌고,
광해군 측 사람들의 불안도 점점 커졌다.
그런 상황에서 선조가 인목왕후 김씨와 재혼하자 광해군 측 사람들은 혹시라도
인목왕후 김씨가 아들을 출생할까 두려워했다.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 자리에서 쫓아내고 새로 태어난 아들을 세자로 삼을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불운하게도 정명공주가 태어난 시점이 바로 그런 때였다.
정명공주는 선조가 인목왕후 김씨와 재혼한 동왕 35년(1602) 7월
13일로부터 10개월 만인 동왕 1603년 5월 19일에 태어났다.
물론 정릉동 행궁에서였다.
『계축일기癸丑日記』에는 정명공주가 출생했을 때 광해군 측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에 떨었는지 기록되어 있다.
만력 임인년(선조 35년, 1602)에 왕비마마께 태기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세자 광해군의 장인인 유자신은 그 소식을 듣고 왕비마마를 놀라게 하여
낙태시키려고 하였다.
유자신은 대궐에 돌팔매질도 하게 하고, 대궐 사람들을 꾀어 궁녀들의 측간에
구멍을 뚫고 나무로 쑤셔대게 하기도 하고,
대궐 밖에 화적떼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자 대궐에서도 마침내 유자신을 의심하게 되었다.
계묘년(선조 36년, 1603)에 왕비마마께서 공주를 낳으셨는데, 해산
소식이 잘못되어 대군 아기씨가 태어났다고 전해졌다.
그러자 유자신은 한마디 말도 않다가, 다시 공주마마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간신히 축하 예물을 올렸다.
그가 얼마나 왕비마마를 미워했는지 알 만하였다.
정명공주의 출생은 광해군 측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할 일이었지만 선조와
인목왕후 김씨에게는 기쁜 일이었다.
특히 인목왕후 김씨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정명공주의 유년 시절은 선조와
인목왕후 김씨의 보살핌 속에서 평안했다.
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정명공주가 겨우 6세 때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선조는 첫 왕비였던 의인왕후에겐 자식이 없었고 여러 후궁에게서 왕자와 옹주를 보았다.
광해군은 공빈 김씨 소생으로 동복형인 임해군이요. 딸들은 11명의 옹주와 1명의 공주가 있어요. 선조는 성질이 난폭했던 임해군 대신 똑똑한 광해를 세자로 책봉 했어요.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파전을 한 후 한양으로 돌아왔죠.
전쟁으로 인해 선조와 광해 사이엔 큰 갈등이 생겼는데, 광해는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의병을 독려하는 등 활약을 했으나 선조는 여차 하믄 중국으로 내빼려고 해서 백성들이 광해를 따르는 상황이었데요.
임진란 후 선조 나이 51세에 19살 인목왕후 김씨와 재혼을 해요.
정명공주가 태어난 이 시기에 광해군 사람들은 인목왕후가 행여 아들을 낳을까봐 두려워했데요. 그래서 인목왕후가 머무는 궁에 돌을 던지기도하고 측간에 구멍을 뚫고 쑤셔대기도 했으며 화적떼가 나타났다고 헛소문을 퍼뜨리는 등 왕후를 놀라게 해서 유산시키려고요.
그럼에도 왕후는 무사히 공주를 출산했고, 이어서 영창대군까지 출산 했어요.
영창대군이 출산하자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이 서로 대립하게 되요.
정명공주가 6살 때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죠.
광해는 임금이 되어 명과 금사이에 중립적인 외교를 펼치며 훌륭한 정치를 하요.
그란디 가족사는 힘듭니다.
광해군측 대북파는 왕위에 위협되는 존재 영 임해군을 귀양보낸 뒤, 사약을 내려 죽입니다.
인목황후의 아버지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역모사건으로 몰아 죽게 만든디요. 이거이 계축옥사여요.
광해군은 대비가 된 인목왕후와 정명공주를 경운궁에 남겨두고 창덕궁을 중건하여 떠나요.
공주는 11살에 천연두를 앓았는디, 그 때 광해는 공주와 인목대비가 함께 죽기를 바라며 고사를 지내기도 했었다요.
이쯤 인목대비는 서궁으로 강등되고 정명공주와 함께 서궁에 유페 되요.
*서궁 : 후궁의 궁호. 창덕궁 서쪽에 있는 후궁이란 뜻
공주도 강등되어 옹주가 되어야 했는디요. 평민신분인 서인이 되었다요.
그 때 나이가 16세엿다요. 시장으로 치면 감성이 민감한 사춘기 소녀였죠.
인목대비는 아버지와 영창을 역적으로 내몰아 죽임을 당하자 딸 정명도 잃을까싶어서 궁에서 정명공주 소식을 물으면 죽었다고 대답했다네요.
이때 공주는 어머니를 위로하고자 붓글씨를 썼다요. 그 글씨를 보고 인목대비가 잠시 씨름을 잊었기 때문에...선조도 명필이고 인목대비도 명필이었는데 정명공주는 선조의 필체와 똑같이 쓰려고 노력했다는 군요.
세월이 흘러 정명공주가 21살이 되었을 때 인조반정이 일어나 한 밤 중에 광해를 축출하고
인조는 인목대비와 정명공주에게 권위를 올려주었고, 예우와 정성을 다했다고 해요.
신분을 되찾은 인목대비는 노처녀인 21살, 정명공주의 혼인을 서둘렀다요.
노론가문의 홍주원이 공주의 남편이 된거여요.
인조는 선조의 유일한 공주이며 인목대비와 유폐생활을 보상하고 인목대비에게 효성을 과시하기 위해 공주의 살림집을 100칸이 넘는 집과 재산(노비,토지,섬등등)을 내주었는데 이런 비호는 인목대비가 살아있는 동안 계속 되었다요.
인조 9년 정명공주30세에 인목대비가 병으로 승하하고, 인조는 정명공주와 인목대비를 의심하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인목대비 방에서 나온 '임금을 폐하고 세우는 것과 같다'는 백서삼폭의 비단에 쓴 글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어요.
인조는 대비가 살아 있을 때도 대비전에 첩자를 심어뒀거나 대비가 승하한 후 대비전을 샅샅이 뒤졌던 거요. 겉으로는 애우하면서 속으로는 의심하며 살았던 거죠.
인조는 백서삼폭과 누군가 궁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정명공주를 의심하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정명공주가 시댁이 명문가인 노론 집안이었으며 머리가 상당히 똑똑했다는 겁니다.
나중에 진상조사를 한 결과 궁녀들이 한 짓이라고 결론을 냅니다.
정명공주는 인조가 세상을 뜬 17년간 아슬아슬하게 세상을 살았다고 해요.
늘 쓰던 붓글씨도 절필하고, 글씨를 매개로 양반들과 교류한다고 하면 큰일이니까요.
정명은 인조보다 8살 위였지만 인조가 세상을 뜬 이후 36년이나 더 살았어요.
효종 -현종-숙종은 정명공주에게 최고의 예우를 해주었어요.
정명공주는 7남 1녀의 자녀를 두었고요, 그 자녀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었네요.
정명공주는 자식들에게 이라고 말했다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을 때 한 귀로만 듣고, 입으로 말하지 말 것이며, 다른 사람들과 시비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나는 내 자손들이 이런 행실 하는 걸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