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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천역사문화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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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사진 스크랩 어릴 때 놀이터, 춘천죽림동 성당
정재억 추천 0 조회 420 12.03.17 23:58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어릴 때 춘천 죽림동 성당에서 공만 하나 있으면 축구, 농구, 배구 경기와

성코롬방 병원에서 나오는 주사기를 얻기 위하여 쓰레기 통을 뒤지던 일,

세월의 무상함이랄까?

그래도 교회나 성당에는 거의 안가지만 크리스머스 때면 한번씩 죽림동

성당에는 가는데.. 단지 배가 고파서 사탕과 백설기 떡을 얻어 먹기 위하여

갔었고 저 성당에서 처음으로 우유를 먹었던 일! 영양실조로 거의 죽어가는

목숨을 성당병원에서 치료받기 위하여 기다리다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시던

아버지와 어머니! 이북에서 월남하시어 숱하게 고생하시면서 아들을 낳으시고

빨리 크라고 좋아하셨지만 먹기 힘들어 영양실조로 죽어가던 나를 한숨만

쉬시면서 나를 쳐다보시던 부모님들과 병원 안내를 해주시면서 어린애가 참

잘생겼다고 말씀하시면서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어설픈 한국말로 위로의 말씀하시던,

당시 할머니 수녀님(이름은 모름) 생각이 나는 장소입니다!

 

 

죽림동성당

 

죽림동(竹林洞) 성당은 김유용 신부와 엄 회장이 이끈 곰실 교우들이 애써 마련한 아랫터에 보태어 구 토마스 신부가 매입한 언덕 위에 서게 되었는데, 그 기공식은 성당벽에 라틴어로 붙어있는 초석이 말하듯이 1949년 4월 5일 에 있었다. 새 성당의 건립은 구 토마스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한 지 2년 후인 1941년에 감목 대리직을 맡으면서 계획해 오던 것이지만 일제 치하의 외국인 구금 및 연금으로 착공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과 더불어 1946년에 그가 다시 복직하였으나 여러 가지 어려운 다시 미루다가 다행히 미군부대의 도움을 얻어 1949년에 본격 착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6.25 전쟁으로 1951년 1월 3일부터 중공군이 밀물처럼 쳐들어오자 이른바1·4후퇴라는 참패를 당하고, 5월에는 유엔군의 반격이 있었는데 그 작전 중의 공습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짓다 만 새 성당의 한쪽 벽이 무너지고 사제관 등 부속 건물이 대파되었다. 6.25 전쟁 당시 죽림동 성당은 캐바난 신부와 함, 교황사절 방 주교를 비롯한 외극인 사제, 수녀, 개신교 목사 등 수백 명이 끌려가 평안북도 어느 험한 산비탈에 강제 수용되었는데, 케바난 신부도 방주교처럼 그곳에서 모진 고생과 추위를 못 이겨 선종하였다. 그래도 1953년 4월까지 34개월간의 포로 생활에서 기적같이 살아 돌아온 분 중에는 구 토마스 신부와 조 필립보 신부도 있었다. 당시 순교한 성지자들의 묘소가 본당 뒤편 성직자 묘소에 안장되어 있다. 1951년 8월에 제 13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공 토마스 신부는 마당에 천막을 치고 미사를 드리면서 서서히 복구 준비를 하여 1953년에는 대부분 완료되었다. 한편 수용소에서 살아온 구 신부는 순교하신 방 주교의 뒤를 이어 한 동안(1953~1957)교황사절 서리를 겸하고 있었는데, 1955년 9월 20일 춘천이 지목구에서 대목구로 승격되자 11월 23일에 초대 춘천 대목구장으로 부임하면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듬해인 1956년 6월 8일, 춘천 교구와 죽림동 성당 주보 축일인 예수성심대축일에 새로운 모습을 갖춘 주교좌 성당의 축성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1998년 4월부터 9월 14일 십자가 현양 축일까지 다섯 달에 걸쳐, 성당의 안팎 공간의 형태는 역사적인 모습 그대로 보존한 채 중창하였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54호

 

천주교의 강원도 전래


조선 시대에 우리 나라에서 실학(實學)의 학풍을 일으킨 남인(南人)계 선비들이 18세기 말엽에 이른바 강학회(講學會)를 연 것이 교리 탐구와 신앙 수련의 모태가 되면서 천주교 신앙이 이 땅에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 이승훈 베드로가 1784년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선배와 동지들에게 세례를 주면서부터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태동하였으나 멀지 않아 거센 박해를 받게 되었다. 신해박해(1791), 을묘박해(1795), 에 이은 신유대교난(1800~1801)에 이르러서는 서울과 경기도에 밀집하여 살던 교우들이 충청도 강원도 등의 산간 벽지로 숨어 들어갔는데, 이들 중 경기도의 신태보 베드로가 사십여 명의 교우를 이끌고 갖은 고생 끝에 강원도 횡성군 풍수원으로 피난하여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우촌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퍼져나간 신앙에 귀의한 초기 교우들 가운데는 춘천 신읍리 지방의 최요한과 회양 지방의 조신철 가롤로 처럼 1815년에 투옥된 분들도 계셨는데 후자는 강원도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1984년 5월 5일 서울에서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셨다.  이분들보다 늦게 1840년에는 춘천에서 신자 아홉 명이 투옥되어 그중 두 명이 옥사하기도 하였다. 종교의 자유가 1880년을 전후하여 공인되기까지 강원도 시골 교우촌을 두루 다니며 힘겹게 전교에 헌신한 김 시몬 신부와 최 요한 신부도 울진과 춘천 말고개에서 각각 잡혀 두 분 모두 원주 감영에서 치명하셨다. 이처럼 강원도 지방에 천주교가 전래 된 지 80여년 동안, 상주하는 신부 없이도 교인 수는 소리 없이 늘어 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888년 서울에서 조선 대목구장 민(Mutel)주교에 의해 파견된 파리 외방 전교회 르메르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풍수원이 본당이 되었으니 신태보의 피난 이후 무려 87년만의 일이었다. 

(글 출처- 성당 홈피, http://juklim.diocc.or.kr/)

 

풍수원 성당과 곰실 공소의 성장


당시 풍수원 본당은 춘천, 원주, 화천, 양구, 홍천, 횡성, 평창, 양평 등 12개 군에 걸쳐 29개 공소에 2천여 명의 교우를 관할하게 되었다. 르메르 신부 후계로 방인 사제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1896년부터 1943년까지 48년동안이나 2대 풍수원 주임으로 있으면서 교회는 강원도 땅에 깊이 뿌리내렸다. 풍수원의 교세가 점점 늘어감에 따라 이미 1896년 원주 본당 분할을 비롯하여 1920년에는 춘천(죽림동의 전신 곰실)본당을, 1948년에는 홍천 물구비(현 양덕원)본당을 분할 독립시켰다. 풍수원 본당은 경성(서울)대목구로부터 1939년 4월 25일 춘천 지목구(1955. 9. 20. 부터는  대목구, 1962. 3. 10. 부터는 교구)가 분할·설립되면서 춘천으로 편입되었다가, 1965년 3월 22일 원주 교구가 춘천 교구로부터 갈라져 나가면서 이번에는 원주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죽림동 본당의 모체인 춘성군 동내면 곰실(고은리)공소는 1920년에 본당으로 정식 설립되기까지 정규하 신부가 해마다 서너 번씩 찾아가 가정집과 '강당'에 모이곤 하였으나 교우 수가 무려 300명에 이르자 본당 설립과 상주 사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죽림동 본당의 모체인 곰실 공소


우리나라의 신앙 전래가 외국 선교사의 전교 없이, 스스로 신앙 교리를 찾아 그 가르침대로 살게 되면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듯이, 춘천 지역 또한 교회의 정착이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 이 경우 역시 천부적인 종교심성을 지닌 한 젊은이의 자발적인 신심과 열정이 훌륭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으니 그 공로자인 청년의 이름은 엄주언 말딩이었다. 엄주언(嚴柱彦)말딩은 1872년 12월 10일(음) 춘성군 동면 장학리 노루목에서 4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 착하고 총명하던 그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우연히「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구도에 나설 것을 결심한다. 이태 후 1893년 늦가을에 그는 맏형과 함께 일곱 식구를 모두 데리고 우리나라 천주교 발상지인 경기도 광주 천진암을 찾아가 거기서 움막을 짓고 어렵게 지내면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에는 형과 함께 프랑스인 목 신부에게 영세한다. 그렇게 3년간의 광주 생활을 마칠 무렵인 1896년에는 나머지 가족이 다 영세한 후 굳은 전교 사명감을 품고 고향에 돌아온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학쟁이로 냉대를 받으며 마을에서 ?겨나 외가의 도움으로 고은리 윗너부랭이라는 곳에 폐가 한 채를 사서 겨우 정착한다. 엄주언 일가는 이처럼 친척과 이웃으로부터 따돌림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맨손으로 어렵사리 화전을 일구어 나가며 묵묵히 살기 시작한다. 마침내 주경야독 하며 근검하게 사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차츰 감동하여 가르침을 청하기에 이른다. 윗너부랭이에서 여러 해 땀흘린 보람이 있어 살림과 농지를 늘려 아랫너부랭이로 옮겼다가 다시 곰실 공소로 옮긴 후 조촐한 '강당'까지 마련하여 공소 예절을 보게 되자, 물구비 · 춘천 · 화천 · 양구 순으로 공소를 순방하던 정규하 신부가 곰실에서 해마다 4~50명 씩 세례를 줄 정도가 된다. 곰실 공소 교우들은 엄 회장 지도하에 자선 봉사 외 엄하고 독실한 모범적 신앙 생활에 전념하면서 마침내 300명 가까운 수로 늘면서 1920년에는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공소를 건립하고 지역을 3구역으로 나누어 실로 모범적인 신앙 공동체로 성숙한다. 

 

곰실 본당의 춘천 진출


이렇게까지 되는 동안 엄회장이 풍수원과 서울 명동을 수년간 거듭하면서 상주사제 파견을 거듭 간청한 결과 마침내 곰실이 본당으로 설립되면서 1920년 9월 초대 김유용 신부를 모시게 되었다. 활기 넘치는 곰실 공동체는 춘천시내 진출을 위해 교우 전원이 애련회와 계조직, 가마니짜기, 새끼꼬기, 짚신삼기 등을 통해 몇 해에 걸쳐 품품이 애써 모은 돈에 논까지 팔아 약사리고개 현 죽림동 성당아래 골롬반 병원 터와 아랫마당 그리고 수녀원 터인 당시 김영식의 대자의 집(약사리 148번지)을 사서 개조하여 1928년 5월부터 춘천의 옛 성당으로 쓰게 되었다. 그후 4대의 방인 사제가 1938년까지 주임을 맡다가 같은 해에 강원도 지역의 사목 책임이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되고, 곧 이어 원(Larribeau)주교가 맡고 있던 서울(경성 대목구)에서 춘천 지목구가 1939년 4월 25일자로 분할되면서 새 지목구의 명의상 서리로는 당시 광주 지목구장 오원 맥폴린(Owen McPolin) 신부가 임명되었다. 그러자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구인환(Quinlan) 토마스 신부가 춘천 감목대리로 임명되면서 제6대 춘천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얼마 후 약사리 고개 언덕에 있는 어느 있의 도토리 밭을 사서 현재의 성당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로부터 골롬반회가 춘천 교구를 1994년에 장익 요한 주교가 부임하기까지 모두 55년간을 사목하면서 초대 구 토마스 주교와 2대 박(Stewart) 토마스 주교가 교구를 사목하였고 도합 7명의 외국인과 12명의 본방인 주임 사제를 지냈다. 이렇게 자립한 춘천 교구가 1999년 4월 25일에 60주년을 맞았다.

 

머릿돌

 

현재의 죽림동(竹林洞) 성당은 김유용 신부와 엄 회장이 이끈 곰실 교우들이 애써 마련한 아랫터에 보태어 구 토마스 신부가 매입한 언덕 위에 서게 되었는데, 그 기공식은 성당벽에 라틴어로 붙어있는 초석이 말하듯이 1949년 4월 5일 에 있었다. 새 성당의 건립은 구 토마스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한 지 2년 후인 1941년에 감목 대리직을 맡으면서 계획해 오던 것이지만 일제 치하의 외국인 구금 및 연금으로 착공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과 더불어 1946년에 그가 다시 복직하였으나 여러 가지 어려운 다시 미루다가 다행히 미군부대의 도움을 얻어 1949년에 본격 착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 건축 작업은 전남 광주에서 온 '자'씨 성의 한 화교 기술자와 또 한 사람의 기술자가 맡았다. 석재는 멀리 홍천 발산리 강가에서 날라다 썼다.

 

죽림동 새 성당 건립


그러나 거의 한 해 동안 돌로 외벽을 훌륭하게 다 쌓고 동판 지붕까지 덮고 나서 내부 공사에 들어갈 참에 6·25전란이 터졌다. 춘천시에서는 그 이튿날인 6월 26일 아침부터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 주일인 7월 2일 구 토마스 교구장이 본당 미사를 드리는데 인민군이 들이닥쳐 성당 안에서 공포를 쏜 후 20여 명의 교우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캐바난 신부와 함께 체포 연행했다. 소위 이 죽음의 행진으로 교황사절 방 주교를 비롯한 외극인 사제, 수녀, 개신교 목사 등 수백 명이 끌려가 평안북도 어느 험한 산비탈에 강제 수용되었는데, 케바난 신부도 방주교처럼 그곳에서 모진 고생과 추위를 못 이겨 선종하였다. 그래도 1953년 4월까지 34개월간의 포로 생활에서 기적같이 살아 돌아온 분 중에는 구 토마스 신부와 조 필립보 신부도 있었다. 1951년 1월 3일부터 중공군이 밀물처럼 쳐들어오자 이른바1·4후퇴라는 참패를 당하고, 5월에는 유엔군의 반격이 있었는데 그 작전 중의 공습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짓다 만 새 성당의 한쪽 벽이 무너지고 사제관 등 부속 건물이 대파되었다. 1951년 8월에 제 13대 본단 주임으로 부임한 공 토마스 신부는 마당에 천막을 치고 미사를 드리면서 서서히 복구 준비를 하여 1953년에는 대부분 완료되었다. 한편 수용소에서 살아온 구 신부는 순교하신 방 주교의 뒤를 이어 한 동안(1953~1957)교황사절 서리를 겸하고 있었는데, 1955년 9월 20일 춘천이 지목구에서 대목구로 승격되자 11월 23일에 초대 춘천 대목구장으로 부임하면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듬해인 1956년 6월 8일, 춘천 교구와 죽림동 성당 주보 축일인 예수성심대축일에 새로운 모습을 갖춘 주교좌 성당의 축성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주교좌 성당 완공 후

 

주교좌 성당 중창


죽림동 성당은 45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누수로 삭아가는 지붕과 천장, 몹시 녹이 슨 창틀과 꺼지는 마루, 뒤틀린 문틀, 누전 위험이 큰 배선 등, 견고한 돌 벽채를 제외하고는 가벼운 개보수를 넘어 총체적 중창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 1994년 12월 14일 춘천 교구장으로 서품 착좌한 장 익 요한 주교는 죽림동 22대 주임 이정행 요한 신부를 비롯 많은 분들의 협조와 가톨릭 미술가회 중진 작가들의 적극적 참가에 힘입어, 1998년 4월부터 9월 14일 십자가 현양 축일까지 다섯 달에 걸쳐, 성당의 안팎 공간의 형태는 역사적인 모습 그대로 보존한 채, 순전히 우리 나라 사람들만의 기량과 성의와 노력으로 전례 거행에도 합당하고 예술적으로도 흡족한 성당을 실현하는 데 진력하였다. ( 글 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

 

주교좌 성당 중창 모습 (출처- 성당 홈피, http://juklim.diocc.or.kr/)

 

죽림동성당 청동문 

 

죽림동성당 

 

  

 

죽림동성당 측면, 돌아가면 뒷편에 성직자 묘소가 나온다.

 

죽림동성당, 후면(성직자 묘소 쪽에서)

 

예수 성심상 

 

예수 성심상 

 

성모상과 사제관

 

성모상

 

목백합 고목

 

목백합 고목  

 

성직자 묘소

 

1950.6월 26일 아침부터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 주일인 7월 2일 구 토마스 교구장이 본당 미사를 드리는데 인민군이 들이닥쳐 성당 안에서 공포를 쏜 후 20여 명의 교우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캐바난 신부와 함께 체포 연행했다. 소위 이 죽음의 행진으로 교황사절 방 주교를 비롯한 외극인 사제, 수녀, 개신교 목사 등 수백 명이 끌려가 평안북도 어느 험한 산비탈에 강제 수용되었는데, 케바난 신부도 방주교처럼 그곳에서 모진 고생과 추위를 못 이겨 선종하였다. 그래도 1953년 4월까지 34개월간의 포로 생활에서 기적같이 살아 돌아온 분 중에는 구 토마스 신부와 조 필립보 신부도 있었다. 

 

성직자 묘소

 

순교한 성직자들은 라 바드리시오 신부, 고 안당 신부, 진 야고보 신부 등으로 모두 아일랜드 출신이었던 세분 성직자는 1950년 남한에서 피살되었다. 그리고 당시 교구장이었던 구 토마스 신부는 1950년 북한으로 납치당하였다가 4년 후 민간 포로 석방 때 무사히 생환하였다. 구 토마스 교구장은 1896년 아일랜드 출생으로 1920년 사제 서품을 받고 오랫동안 희망하던 선교사의 꿈을 실현, 1933년부터는 중국에서 전교하였다. 한국에는 1939년에 입국하였는데 6·25가 터지자 납북되었다가 생환되는 불행을 겪기도 하였다. 수용소에서 살아온 구 신부는 순교하신 방 주교의 뒤를 이어 한 동안(1953~1957)교황사절 서리를 겸하고 있었는데, 1955년 9월 20일 춘천이 지목구에서 대목구로 승격되자 11월 23일에 초대 춘천 대목구장으로 부임하면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한국의 교우들을 위하여 동분서주 전교하다가 1970년 영면하였다. 외국인 성직자들은 낯선 땅 타국의 전쟁 포화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다가 끝내는 공산군에 의해 끌려가 피살, 주검이 되어 사목을 받던 교우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들의 전교활동은 오늘날 춘천 지방을 신앙의 요람지로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다. 현재 위 성직자들의 묘는 죽림동성당 내에 모셔져 있다. (글 출처- http://www.cccatholic.or.kr/dioc/diocc08.php

 

순교자 명단

 

       성   명

 세례명

 출생지

생년월일

 서품일

 순교일

 순교

진(Pt. Maginn)

야고보

미국(골)

1910

1935

1950.7.4

피살

라 (P. Reilly)

바드리시오

아일랜드

1915

1941

1950.7.

피살

고(A. Collier)

안토니오

아일랜드

1913

1938

1950.6.27

피살

백응만

다마소

황해도

1919

1945.4

1950.

옥사

손카나반(F. Canavan)

프란치스코

아일랜드

1915

1941

1950.12.6

옥사

이광재

디모테오

황해도

1909.6.9

1936

1950.10.9

피살

구인란(Quinlan)교구장

토마

아일랜드

1896.9.

1955

1970.12

납북생환

조선희(Philip Crosbie)

필립보

오스트리아

1915.11

1939

2005.3.24

납북생환

 

이광재 신부 등 성직자 묘소 

 

이광재 신부(1909-1950)  묘

 

이광재 신부

 

이광재 신부 묘 

 

백응만 신부 (1919-1950) 묘

 

백응만 신부

 

백응만 신부 묘 

  

진(Pt. Maginn) 야고보 신부(1910-1950) 묘

 

진 야고보 신부 묘

 

고(A. Collier) 안토니오 신부(1913-1950) 묘

 

 

 

 

고(A. Collier) 안토니오 신부 묘

 

라 (P. Reilly) 바드리시오(1915-1950) 묘

 

라 (P. Reilly) 바드리시오(1915-1950) 묘

 

손카나반(F. Canavan) 프란치스코(1915-1950) 묘

 

손 카나반 신부

 

 손카나반(F. Canavan) 프란치스코(1915-1950) 묘

 

 

 구인란(Quinlan)교구장  토마(1896-1970) 묘

 

구인란 교구장

 

조선희(Philip Crosbie) 필립보(1915-2005)  

 

박 도마 주교의 묘 

 

추모석

 

성당 내부

 

내부

 

제대

 

제대

 

십자고상

 

제대 스테인드글라스

 

제대 스테인드글라스

 

제대 스테인드글라스

 

제대 스테인드글라스

 

독서대

 

성화

 

감실

 

감실 위 성화 

 

 

 

내부 출입구 쪽

 

십자가 14처 중 1처

 

2처

 

3처

 

4처

 

5처

 

6처

 

7처

 

8처

 

9처

 

10처

 

11처

 

12처

 

13처

 

14처

 

15처 

 

소성당

 

성 가정상

 

성심유치원

 

성 골롬반 외방 선교수녀회

 

성 골롬반 외방 선교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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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2.03.18 00:00

    첫댓글 다음블로그<효자동춘발이>에서 스크랩해 온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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