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사람들
김주석과 친일화가들의 그림
Late Bloomer ・ 2019. 7. 11. 13:11
곰곰이 생각했다.
우리가 너무 무심해 몰랐던 것일까?
일본강점기하에 이렇게 투쟁하고 고통을 받은 김주석 독립운동가가 있다면
고통을 준 사람과 일본제국주의에 빌붙어 기득권을 누린 자들이 있다.
해방이 된 나라에서는 일제에 저항하고 투쟁했던
사람은 칭찬받고 인정받아야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사후에서야 독립서훈을 받으셨다.
일제 강점하에서 일본에 화필보국과 회화봉공했던 사람들은 해방후 어떻게 되었을까?
김주석 선생님은
손톱에 바늘이 꼽히고 욕조에서 물고문을 받고
찢겨지고 발겨지는 참혹한 고통을 겪었던
우리 민족의 수난을 생생하게 그리고 남겨놓았다.
그 고문을 일제강점기에 전수받은 친일경찰이 고스란히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것이 오욕의 역사일지라도 우리 역사이란 것을 젊은이들에게 알려야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다.
오창성 선생님께서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 가능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해야 될 몫이었다.
우리나라의 내노라하는 미술계의 거장들이 한 부역을 생각해보라.
이당 김은호, 운보 김기창, 월전 장우성 그들은 일제에 충성하고 해방후 모든 요직을 독식했다.
그들은 변명한다. "그 시대는 어쩔 수 없었다''
예술은 정치랑 별개의 것이라고 정치에 휩쓸리는 그림은 천박하다고 민중예술을 폄하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일본에 충성한 것은 괜찮고 민중의 삶을 그리는 그림은 예술의 길을 벗어난 것이란 논리는 독재정권의 입맛에 딱 맞는 변명이다.
지금도 한국 화단을 장악하고 있는 이당 김은호, 운보 김기창, 월전 장우성의 제자들은 억울해 한다.
심지어 김기창은 일제에 부역하지 않았던 미술가는 실력이 없었던 화가라고 성을 냈다.
김은호 화백의 자제 분은 모략이라고 한다.
일본 강점기하 부역했던 선배예술가들을 세상 밖으로 내놓은 교수들은 재임용을 시키지 않음으로 내부고발자들이 겪는 시련을 겪었다.
그런데 난 그들의 해방이후 행보가 더더욱 가관이이기에 지금도 비판하고 청산되어야 한다.
그들은 모든 기회를 독식하고 불의했던 자들이
아무 반성없이 권력화되었다.
이당 김은호는 구한말 어진화가였다. 일제시대에는 철저히 천황에 충성했다. 해방후 독재에 부역한 화가로 규정할 수 밖에 없다.
김은호 (1892~1979) 어전을 그리며 1919년 3.1운동때는 독립신문을 배포하며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1925년 부터 28년까지 일본유학을 통해 일본 화풍을 익혔다.
1937년 11월 가장 먼저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를 그렸다.
애국금차회는 1937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결성된 단체로 국방헌금 조달과 황군 원호에 앞장서기 위해 귀족이나 관료 부인 등이 주축을 이룬 여성단체이다. 애국금차회는 결성식 날 즉석에서 금비녀 11개, 금반지와 금기지개 각각 2개 , 은비녀 1개, 현금 889원 90전을 모아 용산 주둔 조선군사령부 후카자와 중장을 방문하고 헌납식을 가졌다. 이광경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의뢰받은 김은호가 2개월 동안 노력한 역작으로 11월 <금차봉납도>를 완성하였다. 김복수와 애국금차회 간부들이 총독 미나미에게 증정하고 총독부 내에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간에 걸어두는 동시에 엽서로 인쇄하여 황군위문대에 넣어 보내게 되었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김복수의 남편 윤덕영과 김은호는 친분 관계속에서 제작되었다.
김은호가 어용화사로 발탁되었을 때 윤덕영의 옷을 빌려 입고 궁중에 출입할 정도였다.
1941년 2월 화가로서 천황을 위해 <화필보국 및 회화봉공>하고자 결성된 조선미술가협회에 일본 화부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해방후 , 일제 강점기 활동경력 때문에 해방 직후 결섣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이상범, 김기창, 김인승, 심형구, 김경승, 윤효중 등과 함께 제외당하였다. 그러나 미군정 이후 친일파의 재기용에 힘입어 대한미술협회와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미술계에 영향을 행사했다.
그는 1962년 서울시 문화상, 8.15해방 17주년 기념 문화훈장, 1965년 3.1문화상 예술부문 본상, 1968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6년 제11회
5.16민족상 학예부문 본상을 받았다. 1966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에 선정됐다.
그 그림을 그리던 손으로 이순신, 정몽주, 신사임당, 논개, 성춘향까지는 괜찮다. 안중근, 서재필까지 그렸다.
운보 김기창의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와 수건을 둘러싼 어머니의 애잔한 모습에 속지마라. 이 그림의 목표는 아들을 일본제국주의의 부름을 받고 떠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이것이 본분임을 선전하기 위한 그림이다.
친일부역화가들은 서로 밀어주고 땡겨주었다. 김은호의 제자 운보 김기창과 월전 장우성의 그림을 보도록 하자.
우리가 매일 접하는 만원 지폐엔 세종대왕님이 계신다. 세종대왕의 얼굴은 김기창 자신의 얼굴을 닮았다.
결전미술전람회 목록에 들어간 장우성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영정을 거의 다 그렸다. 양심이 있으면 고사했어야 했다. 하지만 해방후 그에게 주어진 권력은 그의 과거 죄악을 변호하는 철옹성으로 둔갑했다.
일본에 의해 17세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류관순의 영정이 친일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그렇게 우리의 민족정신이 훼손된 세월을 보내었다.
그림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안창호, 안중근, 김구 선생의 동상은 모두 친일경력을 가진 조각가의 손에 의해 제작되었다.
우리에게 화가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멋있는 작가들이 있었다.
월북해서 우리에게 묻혀버린 이쾌대의 작품이다.
정종여는 친일경력을 가진 작가이다. 그의 지리산 그림은 또 묻혔다. 그가 북으로 갔기 때문이다.
[출처] 김주석과 친일화가들의 그림|작성자 Late Bloo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