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해만의 수학여행 (3)
운전기사 바로 뒷자리엔 김00선생이 앉고, 버스 출입문 입구엔 내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내 바로 뒷좌석엔 이번 여행에 동행한 사진기사가 넉넉하게 자리를 차지했다. 우리 반 학생인원 스물다섯에다 어른 셋을 합치면 스물여덟이니, 45인승 버스 안은 여유롭고 한가했다. 산새들이 보금자리 찾아들 듯, 우리 모두는 저마다 자기가 앉고 싶은 자리를 정하고는 한담과 정담을 나누었다. 나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김00선생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마침 버스 텔레비전 화면에선 아이돌그룹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얼마 전에 끝난 텔레비전 프로인 ‘K-팝스타’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이번 결승에서 이하이가 노래를 더 잘한 것 같지 않아요?”
“이하이는 소울 보이스가 매력적이고 저음이 아주 강력하지요. 고음이 조금 부족한 게 단점이지만요. 반면 박지민은 고음, 저음에 다 뛰어나 결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일찍부터 박지민이 우승하리라고 예상했습니다.”
김00선생은 음악 전문가로서 자신의 솔직한 식견을 드러냈다. 요즘 한창 인기프로인 ‘나가수’에 대해 한마디 덧붙였다.
“‘나가수’는 편하게 볼 수 없는 프로지요. 가수 순위를 매겨 꼴찌한 사람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경쟁이 과도해지거든요. 가수마다 개성과 스타일이 다른데, 거기다 대고 순위를 매긴다는 게 말이 안 되지요. 더구나 전문가가 아닌 관객들이 평점을 매기니, 편안한 노래는 사라지고 과격한 액션 쪽으로 흐를 수밖에 없고요. 저는 ‘나가수’보다는 토요일 방영하는 ‘불후의 명곡’을 즐겨 봅니다. 그 프로도 순위를 매기기는 하나, ‘나가수’처럼 탈락이 없기 때문에 느긋하게 즐기게 되지요.”
지금까지 ‘불후의 명곡’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번 토요일 꼭 한 번 보리라 다짐했다. 이번엔 기존 가수에 대해 물었다.
“임재범, 노래 잘하나요?”
“임재범이요? 아! 노래 잘하지요. 타고났지요. 임재범 머리를 한 번 보세요. 머리통이 커서 두성이 대단합니다. 이하이 얼굴도 보시면 알 수 있지요. 광대뼈가 툭툭 불거졌잖아요. 박지민도 마찬가지고요.”
사람의 몸통 그 자체가 악기니, 몸통이 훌륭해야 노래가 뛰어나다는 얘기다. 허나 예외도 있지 않을까. 다시 물었다.
“조용필은 어떤가요?”
“조용필은 타고 났다기보다는 노력팝니다. 늦게 데뷔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소리가 확 트이거나 성량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그의 노래엔 우리 민족의 한(恨)이 녹아 있어요.”
조용필은 1950년생인데, 1979년에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했으니 우리 나이로 서른이다. 가수로서는 늦은 나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가 가왕(歌王)의 자리에 오른 것은 한국인의 정서를 건드리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나간 영화다. 우리 집 네 식구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갈 때 조용필 시디를 틀면, 애들 둘은 제발 끄라고 난리를 친다. 만국의 공통어인 노래도 세대를 가르고 식구를 갈라놓는다.
다시 입을 열었다.
“패티김은 어떤가요.”
“패티김, 몸 좀 보세요. 장대하잖아요. 당시 트로트가 대세일 때, 발라드로 가요계를 흔들었지요. 한 시대의 개척자입니다. 길옥윤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길옥윤과 패티김의 만남은 운명이었지요.”
패티김은 얼마 전 은퇴 공연을 끝으로, 이제 영원히 무대 뒤로 사라졌다. 세상에 영원불멸은 없는 것이다. 한 시대를 선도한 개척자도 때가 되면 물러가는 게 세상사 이치요 세월의 법칙이다! 패티김은 조용필과는 다른 의미에서 한국적인 정서를 노래한 가수다. 패티김의 한국적 정서는 뽕짝의 퇴폐와는 거리가 멀다. 패티김의 노래는 인류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었다. 허나 세계무대를 휘어잡지는 못했다. 패티김을 키울만한 우리 사회의 물적 토대가 부족했던 것이다. 길옥윤도 패티김에 견주면 조족지혈이다.
나는 이후로도 여러 가수들에 대해 속사포같이 질문을 쏟아냈다. 그때마다 김00선생의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우리 둘의 문답은 즉문즉답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버스는 계속해서 달렸다.
갑자기 버스 안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버스 차창 위쪽에 설치된 화면에 미소년 한 무리가 등장한 것이다. 가수들의 율동과 노래가 흘러나오자, 아이들이 고래고래 목청을 높여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너무 의외였다. 버스 뒤쪽을 돌아보았다. 00이가 통로 쪽으로 머리통과 온몸을 내놓고 꽥꽥거리며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고 있다. 00이의 얼굴은 금세 붉게 물들었고 눈동자는 풀린 듯 초점이 없다. 인간을 맹목으로 내모는 게 종교와 전쟁과 남녀의 사랑이라던데, 이 자리에서 한 가지 더 추가해야겠다. 그것은 노래다. 아현이한테 물었다.
“쟤네들 누구니?”
“빅뱅이에요.”
아! 빅뱅... 빅뱅이라, 지금까지 이름만 들은 빅뱅이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날 난생 처음 빅뱅의 노래를 들었다. 사실, 빅뱅이란 가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4년 전이다. 미국쇠고기 광우병문제로 촛불데모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다. 그때 옥련중학교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동방중학교로 1학년 순회수업을 다녔다. 순회수업 시간 중, 한 녀석이 느닷없이 물었다.
“선생님~~ 빅뱅이 뭐죠?”
의외의 질문이라 깜작 놀랐다. 한창 장난질에 정신을 팔 사내 녀석이 우주물리학 이론에 관심을 갖고 있다니! 참,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지한 질문에 소홀히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칠판에 BIG BANG이라 크게 쓰고, 신나게 우주탄생의 순간을 설명해주었다. 아이들은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서로 마주보며 깔깔대고 헤헤거렸다. 나는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아이들이 왜 그러는지 그 영문을 몰랐다.
일주일이 지났다. 동방중학교 순회 수업을 나갔다. 다시 그 반 교실에 들어갔다. 이번엔 수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질문이 들어왔다.
“선생니임~~ 빅뱅이 뭐예요?”
지난번 질문을 반복하는 걸 보니,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나보다 라고만 생각했다.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했다면 교사의 불민(不敏)이요, 불성실이다. 이번엔 제대로 깨우쳐주리라. 최대한 쉬운 용어를 써가며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낄낄낄, 깔깔깔~~ 이번엔 박수까지 치며 온통 난리다.
아니! 뭐가 문제지? 무슨 일이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때 어리벙벙한 나를 깨우쳐준 것은 교탁 바로 앞에 앉은 여학생이었다. 빅뱅은 물리학 용어가 아니라, 한국의 아이돌 그룹 이름이라는 것을.
2012. 5. 6(일) 13:01 자중 서.
#그의 노래엔 우리 민족의 한(恨)이 녹아 있어요 #패티김의 노래는 인류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었다.# 빅뱅은 물리학 용어가 아니라, 한국의 아이돌 그룹 이름이라는 것을
첫댓글 학생들 덕에 젊어지고 계셨습니다. 선생님은 식견을, 학생은 젊음을 주고 받기했습니다. 대등한 관계가 보기 좋습니다. 오늘 본 화가 중 눈에 띄는 사람은 70년대생, 언제나 배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