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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토닥토닥 ( comfort )
(이사야 40장 1-2절을 읽어 보세요)
우리 모두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입시지옥을 견디며 공부하며 이력과 경력을 쌓기 위하여 동분서주 합니다. 마치 자신의 인생에 이력과 경력이 단절되는 것은 내 인생에 공백이 생기는 것으로 여기며 그런 일이 자신의 인생에 생기지 않게 하려고 부단히 애를 씁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가장 얻고자 하는 그 경력을 가지기 위해 사람들은 애써서 공부하고 시험을 치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복해지려고 해도 이 세상에선 참 잘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출근길의 지하철에서부터 우리에게 경험되어집니다. 사람들로 가득한 차량에서 사람들이 타고 내릴 때 보면 남보다 한발 앞서기 위해 달려가서 이리저리 휩쓸리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한숨을 쉬게 됩니다. 왜 이렇게 우리는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떠하신가요,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더 일찍 지하철을 타려고 새벽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새벽 5시 30분 정도 운행하는 첫차의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하철을 타면 여유 있게 자신의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여유로움은 아침 7시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가능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아침 6시 45분에만 타 봐도 지하철에 사람들이 가득하여 선뜻 발을 디디고 탈 수 없습니다.
특별히 지하철 9호선 급행열차는 더더욱 그 혼잡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김포공항에서 출발하여 마곡나루, 당산, 여의도, 노량진, 동작을 거쳐 고속터미널까지 30분 정도 걸리는 이 급행열차는 강남으로 출근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합니다. 지하철 9호선 상징 색깔이 금색인 것처럼 정말 이 열차는 기존에 강남으로 출근하는데 있어 2호선을 타고 돌아가야 하는 어려움을 해결한 행운의 노선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정말 많이 이용합니다. 거기에다 급행열차는 개통당시 4량만 운행하다가 지금은 6량으로 운행합니다. 보통 1-4호선이 10량, 5-8호선이 8량으로 운행하는 것과 비교해봤을 때 정말 적은 수의 차량만 한 번에 운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급행열차에 적은 수의 차량으로 인하여 9호선 급행열차는 말 그대로 아비규환, 제일 붐비고 제일 서비스 안 좋은 열차로 서울 시민들 사이에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유로 지하철 9호선 급행열차는 오직 첫 출발지인 김포공항에서부터 많은 이들로 발을 디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일반열차보다는 급행열차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급행열차가 훨씬 강남에 빠르게 도착하기 때문입니다. 신논현역에서 내려서 5-10분만 걸어가면 강남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는데 불편하더라도 급행열차를 타고 빨리 출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9호선 급행열차가 역에만 도착하면 서 있는 사람들은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직여집니다. 정신 차리고 있지 않으면 사람들의 움직임에 휩쓸려 큰일 날수도 있습니다. 몸이 서로서로 부딪치고 정신없이 좁은 공간에서 가까스로 출근하는 사람들, 그런 상황에서 여유와 웃음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사회는 참으로 여유와 웃음을 찾는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무한 경쟁이 21세기 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말로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유와 웃음은 어쩌면 사치스러운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인데 참으로 세상살이가 더 팍팍해지는 것 같아 슬픕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복잡하고 무한 경쟁하고 여유와 웃음이 없어진 세상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것은 비그리스도인들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힘든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며 그 분과 호흡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과 평안을 통해서 위로를 얻었던 이들입니다. 그들은 죄가 용서받았음을 알고 이제 우리와 하나님께서 함께 기쁨의 교제, 생명의 삶을 나누며 살아간다는 것을 전인격적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교회에 오면 예배와 나눔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심을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그렇게 느끼기가 쉽지 않게 여겨집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생명의 교제를 예배를 통해서는, 그리스도인들끼리의 나눔을 통해서는 확실히 알 수 있는데 교회를 벗어난 세상에서는 예배를 드릴 수도 없고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소그룹에서 나누는 것처럼 그런 나눔과 기도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인들은 21세기 무한 경쟁사회에서 여유와 웃음이 없어진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더 어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평일에 세상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주말에 교회에서 지내는 시간을 갈구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또, 어떤 그리스도인은 평일의 삶에서 진정으로 추구할만한 가치를 찾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와 같은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니,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위로하고 계시는 건가요? 혹시 일주일에 고작 주말 이틀에 우리가 교회에 나와 그 위로를 누리는 것으로 하나님은 당신께서 하실 일은 다 했다는 식으로 스스로 만족해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요? 지하철에서,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시달리며 좌우로 밀쳐지는 우리네 인생 가운데 무엇으로 위로를 구할 수는 있는 것일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출근길 지옥철에 함께 타고 계시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혹 우리의 죄 때문에 계속 이런 어려운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실까요?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의 실제 대상이 되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총 66장으로 되어 있는데 1-39장과 40장에서부터 54장까지, 그리고 55장부터 66장까지 각각 다른 주제를 가지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장부터 39장까지는 포로로 끌려가기 전의, 유다왕국이 신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망하기 직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40장부터 54장까지는 신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유다왕국이 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을 향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1-39장과 40-54장까지의 이야기 어조가 다릅니다. 1-39장까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것이라는 어조가 강합니다. 그러나 40장에 들어서면 그 어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40장 1-2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이사야40:1~2)
본문의 1차 독자들이었던 이스라엘 포로들은 그야말로 절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자신들이 고향 땅을 떠나 멀리 남의 나라 수도에 끌려온 것에 대해서 절망했을 것입니다. 특별히 신바벨론제국이 있던 수도인 바벨론에는 그들을 지키는 신 “마르둑”이 있었습니다. 포로로 끌려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바벨론제국의 사람들로부터 “너희의 신인 여호와가 우리의 신인 마르둑에게 패배했다”는 조롱을 들었습니다. 이런 조롱에 포로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대한 슬픔의 노래, 애가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그 시편이 137편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시편 137편 1-3절)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불러내어 주셨던 거룩한 땅, 곧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한탄합니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시편 137편 4-5절)
이렇게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의 슬픔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아파했습니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와 조롱을 당하는 상황에 대해서 비통해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슬픔의 노래를 지었고 그것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여기서 분명 아이러니한 것이 있습니다. 슬픔의 노래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라니. 찬양이란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려드릴 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는 그 아픔과 비통함에 대해서 숨기거나 애써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슬픔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포로로 삼아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한 분노도 그대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잔인하다 여겨지는 부분이 이 시편 9절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시편 137편 9절)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이 구절을 보고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잔인한 구절이 성경에 기록될 수 있는가 이야기하며 또한 이런 내용이 성경에 나와 있는데, 이 구절을 토대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도저히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부를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갈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말로 다할 수 없는, 결코 잊을 수도, 결코 씻을 수도 없는 그런 잔인한 일들을 경험했었습니다. 그리고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계속해서 신바벨론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위로를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환경 가운데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복잡한 심경들을 하나님께 꺼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통해서 자신들에게 잔혹한 일을 행했던 그들에게, 그들이 했던 일들이 절대로 정당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게 해주는 공의가 세워지기를 포로로 끌려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찬양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21세기, 평범한 대한민국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요? 요즘 웃을 일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지옥철이라고 불리는 그 장소에 있으면서 사람들이 휩쓸리는 대로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우리가 거기서 마음의 여유를 찾고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 할지라도 웃으십시오, 삶의 여유를 찾으십시오. 사람의 마음은 당신 하기 여하에 달려있기에 당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 상황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값싼 위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위로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지옥과 같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으면서 마음의 여유와 평화를 찾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럴 때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상황에 대한 애통함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우리네 상황은 빡빡할까? 잘 살고 싶어서, 행복하고 싶어서 살아가는 것인데 왜 이렇게 점점 행복은 저 멀리로 도망가고 불공평하고 부정의한 일들만 일어나는 것인지에 대해서 아픔의 크기 있는 그대로 우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시편 137편의 저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그런 극심한 스트레스의 상황 가운데서, 어디서 위로를 얻을 수 있는가를, 어디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찾을 수 있는가 울면서 애통했습니다. 이런 애통과 슬픔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것이었기에,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열고 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가운데 기록될 수 있었습니다. 그 슬픔을 왜곡시키지 않고 그대로 슬퍼하며 동시에 공의의 일들이 세워지기를 바라는 솔직함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나님은 표현하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정직하고 솔직한 애통함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애통은 말 그대로 애통함입니다. 부정의하고 불공평한 상황 가운데서의, 어디서도 위로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가운데서 흘리는 눈물, 한탄이 이 애통함에 포함되는 중심 내용입니다. 그것을 어설픈 위로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아픈 것은, 힘든 것은, 진실로 그것이 아프고 힘들었던 것이다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힘든 일은 누구나 다 겪는 일이니까 내가 겪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야”, 또는 “인생 살다보면 이런 일이 생기기도 하고 저런 일도 생기지. 슬퍼하지 말자. 그냥 넘어가자.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으로 넘기자” 하며 그 슬픔의 크기를 변형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겪는 그 아픔의 실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고,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그에 대해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위로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의 크기를 온전히 똑바로 인지할 때만 우리는 진실로 그에 대한 온전한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상황에 적용한다면 다음과 같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옥철을 타고 출근하고 있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애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지옥철을 타고 갑니다, 참 힘듭니다. 몸이 아픕니다. 출근하기 전부터 몸이 피곤해집니다. 정말 인생 살기 힘듭니다. 나도 기분 좋게 출근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이 상황이 참으로 슬픕니다.” 이런 진실한 상황을 인정하는 것, 그런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진실로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인생에서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일을 겪을 때, 그것을 그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변형하지 말고 그 일에 대해서 아파하고 그 일에 대해서 공의를 바라는 제대로 된 애통함을 가질 때 우리는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참된 위로를 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으니 우리의 애통에는 반드시 그 애통을 온전히 들어주시고 위로해주시는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상을 잊은 애통함은 잘못된 애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애통이 향해야 하는 유일한 대상은 바로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같은 죄 가운데 빠져 있는 다른 사람들을 우리의 위로를 주는 대상으로 인식하고 애통한다면 우리는 잘못된 애통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도, 아니 인간들 모두는 참된 위로, 참된 공의를 해결할 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직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주시는 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37편의 저자도 그의 한탄을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으며 하나님을 향한 감사, 한탄 등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시편 137편의 저자도 자신의 한탄과 애통함을 하나님을 향하여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애통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을 때 우리의 애통이 진실로 온전한 것으로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만이 우리의 온전한 애통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그 분과 견줄 수 있는 존재가 단 하나도 없다고 고백해 왔고 선포해 왔습니다. 그 기본적 고백이 욥기에 나타납니다. 욥기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들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답을 적어놓은 일종의 변증서입니다. 거기서 악한 일을 일으키는 사탄은 하나님의 보좌 아래에 서 있어서 하나님의 허락을 받는 존재로 욥기 1장에 그려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보좌 앞에 어떻게 악한 영적 세력의 대표주자인 사탄이 서 있을 수 있냐고 묻지만 이 본문을 다르게 보면 악한 세력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밑에서 그 분의 허락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감히 비교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악한 세력이 선하신 하나님과 힘을 견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어떤 세력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오직 유일하신 주인이시며 창조주시며 구속주이신 것입니다.
이런 고백은 이사야 40장이 기록되고 있는 대상들인 포로기에 놓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고백되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창조하다”는 말로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인 “바라”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쓰이는 이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며 또한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포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이사야 40-55장에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이사야 40장 21절입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이사야 40장 21절)
온 세상의 기초를 놓으신 하나님. 포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희망과 위로의 하나님을 전했던 이사야는 그 하나님께서 너희의 아픔을 위로하시며 힘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하나님만이 아픔을 위로하실 수 있는 이유는 그 분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하여 창세기 1장이 기록되었습니다. 다른 말로는 창세기 1장이 기록된 시기가(또는 편집된 시기가) 포로기 시절이라고 보통 학자들이 이야기하는데, 창세기 1장의 저자는(또는 편집자) 이 본문을 통하여 포로생활 가운데 애통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로를 얻기를 소망했습니다. 신바벨론 제국의 수호신인 마르둑에 하나님은 결단코 패배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악 때문에 그에 대한 처벌과 새롭게 함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포로로 끌려가게 하신 것이지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그 근거가 온 세상의 시간과 장소의 기초를 놓으신 분이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창세기 1장의 저자(또는 편집자)는 선포한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은 단순히 세상이 어떻게 창조 되었는가 만을 그냥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은 기본적으로 말로 다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 가운데 애통하고 있는 이들을 위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는 것을, 그 이유가 바로 그 분이 오직 유일하신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시기 때문임을 선포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습니다. 포로기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창세기 1장을 읽으며 그리고 이사야 40-55장을 읽으며 위로를 얻었습니다.
이 위로는 21세기 세상에서 정말 행복해지고 싶지만 그렇게 행복해지지 않는 인생 가운데 애통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움 가득한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우리의 등을 토닥거리며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 주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우리가 쉽게 믿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0여년의 시간 속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그 전 시대에 먼저 부르심을 받았던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그 하나님을 만났고 그렇게 믿음으로 고백하고 선포해 왔습니다. 지금 저 또한 그 하나님을 만나며 겸손히 고백합니다. 우리의 진실하고 온전한 애통을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매순간마다 풍성히 누릴 수 있는 것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가장 힘들게 느끼는 그 순간에서 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내 마음 가운데에 풍성히 나타나길 바랍니다. 아침 출근길의 그 지옥철에서, 사람들의 타고 내림에 따라 정처없이 휩쓸리는 그 힘든 순간에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애통함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그래서 그 온전한 애통함 가운데 찾아오시는 유일하신 창조주시며 동시에 구속주이신 하나님의 위로를 우리가 진실로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그리고 마음을 모아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의 근원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어느 세대나 그런 삶을 살았다고, 그래도 다 참고 견디며 살았기 때문에 그냥 삶은 그런 것이니 참으며 살아가라고, 그것이 삶의 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요? 주위의 순간이 어떻든 그냥 내 마음만 잘 다스리거나 아님 그냥 참고 견디며 사는 것이 다 일까요? 그 힘든 순간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그 분은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성경은 힘들고 어려운 순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온전한 애통,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하심.
성경은 고통과 아픔 가운데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한탄과 애통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시편입니다. 또한 예레미야애가입니다. 시편 137편은 신바벨론 제국의 포로로 끌려와 신바벨론 사람들에게 조롱당하는 것에 대한 적나라한 아픔과 애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편들은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그냥 참고 견뎌라 는 식의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우리가 겪고 있는 그 힘든 일에 대해서 한탄하고 애통할 수 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과 힘든 일에 대해서 솔직해질수록, 더욱 더 분명하게 인식할수록 그 일에 대해서 우리가 바라는 위로가 무엇인지를 온전히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겪은 힘든 일에 대해서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애서 무시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도 없고 그것을 바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에 대해서 솔직해질수록, 그것을 표현할수록 우리는 겪고 있는 아픔의 근원이 무엇인지, 무엇이 문제인지를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애통함을 온전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는 온전한 대상을 향하여 우리는 애통해야 합니다. 그 온전한 대상은 바로 세상의 유일한 창조주시며 구세주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아닌 불완전하고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에게 애통해하며 위로를 구한다면 잘못된 애통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히려 더 큰 한탄을 내가 위로를 바랐던 사람으로부터 받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온전한 대상이신 하나님께 애통해할 때 우리는 내가 당했던 일에 대한 복수로부터 벗어나 유일하게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공의를 바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겪고 있는 한탄스러운 일에 대해서 다른 이가 또는 내가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애통한다면 우린 자칫 잘못된 인식으로부터 공의를 세우지 못하고 또 다른 이에게 억울함을 전하는 그런 복수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억울하고 애통하는 일을 완전히 끝내실 수 있는 분이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온전하게 하나님만을 향하여 애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 어떤 악한 세력과도 비교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욥기 1장에는 악한 세력의 대표주자인 사탄도 하나님의 밑에서 그 분의 허락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사야 40-55장의 저자는 아무런 희망도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조롱당하던 포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는 참되시고 유일하신 분이신데 그 이유가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시간과 장소의 기초를 두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운행하고 계신 분이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당시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던 사람들은 창세기 1장과 이사야 40-55장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다”는, 오직 하나님만 사용하시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며 세상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며 구속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그 분이 우리를 건지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 분의 위로하심을 받으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이 선포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사로잡히지 말고 세상의 기초를 두시고 유지하시며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 분의 위로하심을 받으라고, 오직 그 분께만 우리의 모든 아픔을 솔직하게 토로하며 애통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그것을 잊지 말라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삶으로 고백해오고 있습니다.
♧삶의 적용♧
①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일이 무엇이었나요? 나는 그 힘들게 하는 일에 대해서 지금까지 어떻게 이겨내라는 이야기들을 들어왔나요? 그것이 도움이 되었었나요?
②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일에 대해서 축소시키거나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 말고 참되게 우리를 위로하시는 살아계시며 완전하시고 비교불가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애통하라는 이야기가 어떻게 나에게 다가오고 있나요? 하나님께서 나의 등을 토닥거리시며 위로하시며 그 모든 상황에서 나를 건지신다는 것을 믿으실 수 있나요?
③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우리를 향한 위로의 이야기라는 것이 지금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나요?
④ 혹시 지금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이 있어 내가 겪고 있는 아픔에 대해서 하나님께 온전히 애통하고 싶으신가요? 그럼 지금 할까요? 미루지 말고요. 하나님께서 지금 원하신다면.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위로하실 것을 믿음으로 겸손히 그러나 담대히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