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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항목명 | 곤괘 |
한자항목명 | 坤卦 |
유형 | 개념 |
<요약>
『주역(周易)』의 2번째 괘.
<설명문>
내괘(內卦)도 곤(坤 : 地)이고 외괘(外卦)도 곤이기 때문에 곤위지(坤爲地)라고 한다. 즉 소성괘(小成卦) 곤괘가 중첩되어 있는 팔순괘(八純卦)의 하나로서 괘명(卦名)도 소성괘와 같다. 소성괘 곤은 음효(陰爻) 삼 획으로 이루어져 순수하게 음으로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땅[地]을 상징한다. 땅은 만유(萬有)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능동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지만 그 가운데 만물을 생육(生育)시키는 왕성한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곤괘라고 한다. ‘곤’은 ‘토(土)’자와 ‘신(申)’자가 합해진 회의문자(會意文字)로 ‘토’는 음(陰)의 형체를 대표하는 것이며, ‘신’은 음의 시간을 대표하는 것이다. 곤은 땅의 성능이며, 땅은 곤의 형체인 것이다.
땅은 하늘에 순종하고 하늘의 무한한 창조력을 보존하여 만물을 생장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므로 곤도(坤道)는 무엇보다도 유순(柔順)의 덕으로 대표된다. 이 괘는 이러한 소성괘 곤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지극히 유순한 덕을 갖추고 있는 의미가 있다. 유순하면서도 굳게 지조를 지키는 것, 이것이 곤도를 따르는 군자의 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괘에서는 소극을 지킴으로써 적극을 견디어 나가고, 뒤짐으로 해서 앞서고, 유약함을 가지고 강강(剛剛)함을 제어하는 도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괘사(卦辭)는 “크고 형통하고 이롭고 암말의 곧음이다. 군자가 갈 곳이 있다. 먼저 가면 어릿거리고 뒤에 가면 얻을 것이니 이로움을 주로 한다. 서남쪽에서는 친구를 얻고 동북쪽에서는 친구를 잃을 것이니 곧은 데 안존하면 길하다.(元亨利牝馬之貞 君子有攸往 先迷後得 主利 西南得朋 東北喪朋 安貞吉)”이다.
곤은 유순의 성질을 가지고 건도(乾道)에 순종하여 만물을 화육하기 때문에 그 덕이 건의 덕과 같지만, 건은 강건함으로 바름을 삼는 데 비해 곤은 유순함으로 바름을 삼음으로 ‘암말의 곧음’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곤은 순종을 미덕으로 하기 때문에 뒤에 가야만 정상(正常)을 얻을 수 있으며, 양이 의리를 주로 하는 데 비해 음은 이익을 주로 한다는 것이다. 또 서남쪽은 음의 방위이고 동북쪽은 양의 방위이기 때문에 서남쪽에 가면 친구를 얻는다는 것이며, 결국 이 괘를 얻은 사람이 항상 곧고 바른 도리를 지키면 길복(吉福)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곤괘(困卦)
한글항목명 | 곤괘 |
한자항목명 | 困卦 |
유형 | 개념 |
<요약>
『주역(周易)』의 47번째 괘.
<설명문>
이 괘는 태괘(兌卦 : 澤)와 감괘(坎卦 : 水)로 이루어져 있다. 물은 본래 못[澤]에 있는 것인데 이 괘에서는 물이 오히려 못 아래에 있으므로 못에 물이 없음을 상징한다. 또한 ‘곤궁한 의미’란 뜻이 있으므로 곤(困)이라고 한다. 착괘(錯卦)는 이(履 : )이고 종괘(綜卦)는 예(豫 : )이다. 이 괘의 괘사는 “형통하다. 곧으면 대인이 길하고 허물이 없을 것이다. 말은 하나 믿음을 얻지 못한다.(亨 貞 大人吉 无咎 有言不信)”이다. 이것은 곤궁한 때에 능히 곤경을 면할 수 있고 길을 찾아 나아간다면 형통할 것이나 단지 반드시 곧바름을 지켜야 된다. 그러므로 대인은 비록 곤궁하더라도 도를 지켜 흐트러지지 않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는 의미를 지닌다.
곤도(坤道)
한글항목명 | 곤도 |
한자항목명 | 坤道 |
유형 | 개념 |
<요약>
유순(柔順)하고 포옹력 있는 대지(大地)의 성능인 곤(坤)을 도덕적으로 포현한 말.
<설명문>
『주역(周易)』 「문언전(文言傳)」에서 「곤괘(坤卦)」를 설명할 때 “곤은 지극히 유순하면서도 움직이는 것은 강하다. ……곤도의 순함이여! 천을 이어 행한다.”라고 한 데서 비롯한다. 곤도는 유순함을 표현하지만 강직하고 만물을 생장‧발육시킨다. 이것은 덕(德)으로 표현하면 의(義)에 해당하며, 건도를 도와 인간의 생성을 도와주고 만유(萬有)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참조항목>
건, 건도, 주역
곤지면행(困知勉行)
한글항목명 | 곤지면행 |
한자항목명 | 困知勉行 |
유형 | 개념 |
출전 | 『중용(中庸)』 |
<요약>
인식과 실천의 양면에 노력하는 것으로 선천적인 지행(知行)보다 후천적인 노력을 강조한 말.
<설명문>
이것은 『중용(中庸)』20장에서 지(知)를 ‘생이지지(生而知之)’‧‘학이지지(學而知之)’‧‘곤이지지(困而知之)’로 나누고, 행(行)을 ‘안이행지(安而行之)’‧‘이이행지(利而行之)’‧‘면강이행지(勉强而行之)’로 나누어 인간마다 부여받은 능력의 차이를 구분하고 각자의 처한 위기에 따른 행위를 제시한 데서 유래한다. 따라서 결국 궁구하는 목적과 결과는 하나라고 하여 일반인이 성인에 도달하는 과정과 목표가 일정함을 설명한 것이다. 또한 곤지면행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은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辨)‧독행(篤行)으로 인식과 수양의 양면을 통하여 가능하다.
곤지면행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배워서 능치 못하면 그만두지 않고…… 남이 하나에 능하면 자신은 백배하고……” 하는 면을 지녀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본다. 이것의 결과는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총명해지고 나약한 자라도 강해진다.”라고 할 수 있다. 주희(朱熹)는 이러한 지행을 달도(達道)라고 하여 지행하는 바를 지(知), 그 원인을 인(仁), 실천하여 성공에 이르는 것을 용(勇)이라고 설명하였다. 또 생지(生知)‧안행(安行)은 지, 학지(學知)‧이행(利行)은 인, 곤지‧면행은 용으로 등급에 따른 분류를 하였지만 결국 궁극적인 목적은 같은데, 이렇게 사람마다 편차가 생기는 것은 기품(氣稟)이 서로 같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참조항목>
중용, 지, 행
곤충(昆蟲)
한글항목명 | 곤충 |
한자항목명 | 昆蟲 |
유형 | 개념/의례 |
출전 |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 |
<요약>
사제(蜡祭)의 대상인 여덟 신(神) 가운데 곤충신(昆蟲神).
<설명문>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보인다. 사제는 음력 12월에 1년 농사에 공(功)을 끼친 신을 찾아서 제사(祭祀)하는 것으로, 곤충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충재(蟲災)를 막기 위한 것이다.
<참조항목>
사제
공(公)
한글항목명 | 공 |
한자항목명 | 公 |
유형 | 개념 |
출전 | 『예기(禮記)』 「공자한거(孔子閒居)」, 『관자』 「내업(內業)」, 『광아(廣雅)』 「석고(釋詁)」, 『서경(書經)』 「주관(周官)」 |
<요약>
전체성(全體性)‧보편성(普遍性)‧객관성(客觀性) 등의 개념을 함축하는 말.
<설명문>
‘사(私)’에 대칭되는 용어이다. 이와 같은 ‘공’의 뜻은 고대의 전적을 통해 형성된 것인데, 예를 들어 『예기(禮記)』 「공자한거(孔子閒居)」에서는 성인의 도(道)를 지공(至公)한 것으로 표현하여 ‘공’이 공평무사(公平無私)의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관자』 「내업(內業)」에서도 ‘한마디로 천하가 복종하고 한마디로 천하가 따르는 것’으로 ‘공’을 규정하여 ‘공’의 객관 타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본래 서양 철학에서의 ‘공’은 공리(公理 : axiom), 즉 모든 과학 이론의 출발점으로서 굳이 이론에 의해 증명될 필요가 없는 명제(命題)이며 여타의 명제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유도되는 기본 명제이다. 그러나 유학에 있어서의 ‘공’은 일종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포함한 것으로 규정되어 인간 및 사회의 규범이라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 유가는 이러한 규범을 통하여 도덕적이나 윤리적으로 이상사회가 실현될 수 있다고 파악한다.
그러므로 유가의 정치, 사회 철학에 있어서 ‘공’은 ‘평천하(平天下)’할 수 있는 가능 근거이며, 인욕(人欲)이나 물욕(物欲) 등 일체의 사욕(私欲)이 철저하게 배제된 상태를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공’은 항상 ‘사’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데, 『광아(廣雅)』 「석고(釋詁)」에서도 “공은 바른 것이고, 사는 사소한 것이다.”라고 하여 양자를 대립되는 것으로 보면서 ‘공’의 우위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렇게 ‘공’을 확립하고 ‘사’를 배제하는 것은 고대 동양에서부터 줄곧 관철된 사유이며, 그것은 “공으로 사를 없앤다.(以公滅私)”라는 『서경(書經)』 「주관(周官)」의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정이(程頤)도 정치적‧사회적 실천의 제반 형태가 ‘공’을 기초로 할 때 그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사’를 강조할 때는 분열 상태가 초래한다고 인식하여 이러한 사실을 계승하였으며, 동시에 ‘공’을 국가나 사회 등 공동체 발전의 전제로 상정하였다. 이렇게 ‘공’의 질서가 확립된 이상적 사회 형태로 유가는 대동(大同)이란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공구비경(孔丘秘經)
한글항목명 | 공구비경 |
한자항목명 | 孔丘秘經 |
유형 | 개념/문헌 |
중국 시대 | 진한 시기/전한 |
<요약>
위서(緯書)의 별칭(別稱).
<설명문>
공자(孔子)가 만든 ‘유비(幽秘)의 경(經)’이라는 의미이다. 위서에는 유현(幽玄)한 공자의 감춰진 의도가 이야기되고 있다고 한다. 공자의 감춰진 의도란 한왕조(漢王朝)의 출현을 예상하고 후성(後聖)을 위해 제제도(諸制度)의 이상적인 상태를 말한 것이 위서라는 것으로서, 이것은 공양학(公羊學)에서 말한 공자소왕설(孔子素王說)에 입각한 위서가(緯書家)의 입설(立說)이다. 위서를 공자의 술작(述作)이라고 주창(主唱)한 것은 유가(儒家)의 경서(經書)와 동등한 권위를 갖게 하려는 한대(漢代) 위서가(緯書家)의 의도이다. 위서에는 ‘영편(靈篇)’ ‘내학(內學)’ 등의 별칭도 있으며, 『후한서(後漢書)』의 주(注)에서는 하도(河圖)‧낙서(洛書)나 도참(圖讖)의 서(書)를 말한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또한 참위(讖緯)‧참기(讖記)‧도위(圖緯)‧도록(圖錄)‧경참(經讖)‧위후(緯候)‧도후(圖候)‧도참(圖讖)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공리(功利)
한글항목명 | 공리 |
한자항목명 | 功利 |
유형 | 개념 |
출전 | 『논어(論語)』 「이인(里仁)」, 『맹자(孟子)』 「양혜왕상(梁惠王上)」 |
<요약>
물질적 이익의 추구를 의미하는 말.
<설명문>
이것을 인간의 선천적 본성의 일부분으로 보는가, 혹은 후천적 사욕(私欲)의 결과로 보는가에 따라 이를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였다. 공자(孔子)를 비롯하여 송대(宋代)의 성리학(性理學)에 이르기까지는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자연적 욕망은 부정하였다. 그러나 청대(淸代)에 이르러 이익의 추구는 인간 본성의 일환으로서 이것의 긍정이 적극 주장되었다.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의하면 공자는 이(利)와 의(義)를 대립개념으로 생각하였으며, 또 이 양자에 의해 소인(小人)과 군자(君子)가 나뉜다고 하였다. 공자의 이러한 주장은 맹자(孟子)에 의해 계승되었다.
맹자는 『맹자(孟子)』 「양혜왕상(梁惠王上)」 등에서 이익만을 추구하는 지배층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인의(仁義)를 제시하였다. 한대(漢代)의 동중서(董仲舒)는 이와 의뿐만 아니라 공(功)과 도(道)를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이와 공의 지양과 함께 의와 도를 추구하여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송대의 정호(程顥)‧정이(程頤)‧주희(朱熹) 등은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欲)을 제거한다.”는 기본 원칙에 입각하여 금욕주의(禁欲主義)를 제창함에 따라 공리(功利)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진량(陳亮)‧섭적(葉適) 등은 이(利)보다 의(義)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관념에 반대하고 이 양자의 조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또 청대의 안원(顔元) 등은 이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도 본성의 일부분이라고 전제하고, 의를 실천하고 도를 밝히는 것이 공과 이를 실현하는 근본이 된다고 간주하였다.
<참조항목>
의리사상
공맹지도(孔孟之道)
한글항목명 | 공맹지도 |
한자항목명 | 孔孟之道 |
유형 | 개념 |
중국 시대 | 수당 오대 시기/당 |
<요약>
유학(儒學)의 별칭으로서 그 창시자인 공자(孔子)와 공자의 사상을 확충‧발전시킨 맹자(孟子)의 사상을 위주로 하여 일컫는 말.
<설명문>
공자는 예(禮)와 인(仁)에 중점을 두고 서주(西周)의 전통 예제를 회복‧유지시키고자 하여 정명론(正名論)을 제창하였다. 인이란 최고의 도덕적 표준으로서 그는 이것을 통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구별하고자 하였으며, 그것의 구체적 실현 방법으로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제시하였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자사(子思)의재전제자(再傳弟子)로서 공자의 인을 확충‧발전시켜 인정(仁政)을 주장하였다. 맹자는 스스로 공자의 학설을 계승하였다고 확신하고 양주(楊朱)‧묵적(墨翟)의 학설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후세에 공자의 적전(嫡傳)으로 평가되었다. 위진시대(魏晉時代) 이후로 공자와 맹자는 병칭되었으며, 당대(唐代)의 한유(韓愈)가 공자‧맹자를 주축으로 한 도통설(道統說)을 제창한 이후로 공맹지도라는 말은 유가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공문사과(孔門四科)
한글항목명 | 공문사과 |
한자항목명 | 孔門四科 |
유형 | 개념 |
중국 시대 | 선진 시기/춘추전국시대 |
<요약>
공문(孔門)에서 행해졌던 네 가지 학과목.
<설명문>
공자가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서 재난을 당했을 때 그를 따르던 제자들의 장점을 평하여 열거한 네 가지 학과목으로, 덕행(德行)‧언어(言語)‧정사(政事)‧문학(文學)을 가리킨다. 이 말은 『논어(論語)』「선진(先進)」의 “덕행에는 안연(顔淵)‧민자건(閔子騫)‧염백우(冉伯牛)‧중궁(仲弓)이고, 언어에는 재아(宰我)‧자공(子貢)이며, 정사에는 염유(冉有)‧계로(季路)이고, 문학에는 자유(子游)‧자하(子夏)이다.”라는 기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후세의 사람들은 위의 네 가지를 공문(孔門)의 전문학과(專門學科)라고 하였으며, 그로부터 이것을 공문사과라고 하게 되었다.
이것은 공문의 통학(通學 : 재질에 따라 교육함)의 내용을 말한 것으로 오늘날의 전문 분야와는 다르다. 공자의 제자들이 각각 한 과(科)만에 특장점을 갖게 된 것은 자기의 성품과 가까운 것을 배워서 체득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 사과(四科)를 합하면 성인의 학문이 된다. 후세에 “도학(道學)을 강(講)하고, 사장(詞章)을 떨치고, 간제(幹濟)에 뛰어나고, 경사(經史)에 통했다.”고 했던 것은 사과(四科)의 학문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
주희(朱熹)는 이중에서 덕행을 근본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그것을 통하여 내외(內外)와 본말(本末)이 관통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언어‧정사‧문학은 덕행의 효용(效用)이었다. 그러나 이 공문사과는 제자의 장점과 관계된 것으로 구체적인 공문의 교육 내용은 아니었으며, 구체적인 공문의 교육 내용은 시서예악(詩書禮樂)이었다.
<참조항목>
공문십철
공자비판(孔子批判)
한글항목명 | 공자비판 |
한자항목명 | 孔子批判 |
유형 | 개념/학설‧논변/학풍‧학파 |
중국 시대 | 선진 시기/춘추전국시대 |
<요약>
공자(孔子)를 개조로 하는 유교사상에 대한 비판을 가리키는 말.
<설명문>
원래는 공자 개인의 학술이나 사상 및 언행에 대한 비판을 뜻하였으나, 이후에는 공자를 비롯한 전통적인 유가사상을 비판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논어(論語)』의 기록에 의하면 공자는 그의 제자들을 이끌고 제국(諸國)을 유세(遊說)할 때 은자(隱者)들에게 광상(狂想)적인 생각을 실천하려는 사람으로 지목되고 있는데, 이것이 공자 비판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사기(史記)』나 『장자(莊子)』에서도 공자를 허식적이며 보수적인 사상가로 비판하고 있으며, 『묵자(墨子)』‧『한비자(韓非子)』‧『상자(商子)』에서도 이와 유사한 견해들이 전개되고 있다. 특히 유물주의적 무신론(無神論)의 입장을 가진 학자들은 공자의 유심주의적 천명론(天命論)을 허망한 이론으로 비판해 왔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은 후한(後漢)의 왕충(王充)이다. 그러나 송명대(宋明代)에는 유교의 국교적 지위가 확보됨에 따라 어떤 형태로든 공자나 유교의 비판이 억제되어 왔으며, 이러한 경향은 청말(淸末)까지도 계속되어 공자 비판의 구호는 그다지 성행되지 않았다.
이 문제가 다시 사회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亂)을 통해 유가경전이 요서사설(妖書邪說)로 배격되면서부터이며, 이후 이것은 오사운동(五四運動) 시기에 ‘공가점타도(孔家店打倒)’의 명목 하에 현실적인 문제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경향이 형성되게 된 것은 한대(漢代) 이래 유교가 봉건제도(封建制度)를 지탱하는 체제의 중심사상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평천국의 난, 오사운동 등 봉건제도에 반대한 중국 역대의 사회적 변혁 운동에는 직‧간접적으로 공자사상을 비판하려는 측면이 있었다. 그 후 문화혁명(文化革命)기에 와서는 이러한 사상이 최극점(最極點)에 도달하여 ‘비공(批孔)’의 구호 아래 일체의 유가사상을 비판대상으로 삼는 풍조가 성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노신(魯迅)과 곽말약(郭沫若)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각각 『아큐정전(阿Q正傳)』과 『마르크스의 공자방문기』를 통하여 중국이 낙후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유가의 통치관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즉 중국이 유가사상을 기반으로 한 모순된 사회 구조를 수용하였기 때문에 치자(治者)와 피치자(被治者)간의 사회적‧경제적 불평등관계가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구조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중국의 농민과 노동자는 과감히 유가사상을 배격해야 하며, 아울러 유물사관을 받아들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신중국(新中國)’의 이념이었다. 노신과 곽말약 이외에 진독수(陳獨秀)‧호적(胡適)‧오우(吳虞) 및 고사변학파(古史辨學派)의 유교 비판도 그들과 상통한 일맥을 가지고 있다. 공자 비판의 형태는 첫째, 공자의 사상과 정치 행동에 대한 비판, 둘째, 이천여 년간 유교가 담당하였던 사회적 역할과 백성의 반공투쟁(反孔鬪爭)에 대한 분석, 셋째, 유가와 법가(法家)와의 투쟁의 선전, 넷째,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 진시황(秦始皇)의 재평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80년대에 와서는 이러한 공자 비판의 태도가 종래의 맹목적인 경향에서 점차 과학적인 성향을 띠고 있으며, 동시에 공자 비판에 대한 역비판 작업이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