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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제락천정」 변계량
[ 題樂天亭 卞季良 ]
樂天亭上又淸秋(낙천정상우청추) 낙천정 위로 또 맑은 가을이 왔는데
地戴明君佳氣浮(지대명군가기부) 이 땅에 명군 모시니 서기(瑞氣)가 떠오르네
疎雨白鷗麻浦曲(소우백구마포곡) 부슬비 속 백구는 마포 어귀 날고
落霞孤鶩漢山頭(낙하고목한산두) 지는 노을 외로운 오리는 한산 위로 날아가네
仁風浩蕩草從偃(인풍호탕초종언) 인풍이 호탕하니 풀이 좇아 절로 쓰러지고
聖澤瀰漫水共流(성택미만수공류) 성스런 은택이 가득하니 강물도 함께 흐르도다
宵旰餘閒觀物象(소간여한관물상) 정사(政事)에 바쁘신 여가에 풍광을 감상하니
人間仙境更何求(인간선경갱하고) 인간의 선경(仙境)을 어디서 또 구하리오
〈감상〉
이 시는 태종의 이궁(離宮)이자 한강의 명승지인 낙천정에 쓴 시로, 관각시인(觀閣詩人)답게 임금의 덕을 찬미(讚美)하고 있다.
낙천정에 다시 가을이 왔는데, 밝으신 임금님을 모시고 낙천정에 오르니 상서로운 기운이 피어오른다.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마포 어귀에는 흰 갈매기가 날고, 저녁이 되어 노을이 지자 한 마리 오리는 북한산 위로 날아가는 한가롭고 태평스러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임금님의 인(仁)한 풍모가 호탕하니 풀인 백성들이 감화되어 쓰러지고, 성스러운 은택이 저 한강에 흐르는 강물만큼이나 가득하다. 임금께서 정치에 바쁘신 여가에 잠시 이곳 낙천정에 올라 풍광을 감상하고 있으니, 인간 세상에 이곳을 빼면 어디가 선경(仙境)이란 말인가?
권별(權鼈)의 『해동잡록』에 변계량의 문재(文才)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거경(巨卿)이며, 호는 춘정(春亭)이다. 중량(仲良)의 아우이며 문장이 뛰어나게 묘하며 법칙에 알맞아 아담하다. 특히 시(詩)에 능숙한데 맑으면서 난삽하지 아니하고 담담하면서 천박하지 아니하였다. 신우조(辛禑朝)에 나이 17세로 급제하였다.
태종(太宗)은 친구로서 이를 대했고 오랫동안 대제학을 맡아서 20여 년이나 되었으며 큰 나라를 섬기고 이웃 나라와 외교하는 문사(文詞)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관직은 대제학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密陽人(밀양인) 字巨卿(자거경) 號春亭(호춘정) 仲良之弟(중량지제) 文辭高妙典雅(문사고묘전아) 尤長於詩(우장어시) 淸而不苦(청이불고) 淡而不淺(담이불천) 辛禑朝(신우조) 年十七登第(년십칠등제) 我太宗待以故舊(아태종대이고구) 久典文衡(구전문형) 二十餘年(이십여년) 事大交隣詞命(사대교린사명) 皆出其手(개출기수) 官至大提學(관지대제학) 謚文肅(익문숙)).”
〈주석〉
〖樂天亭(낙천정)〗 태종의 이궁(離宮). 〖鶩〗 집오리 목, 〖偃〗 쓰러지다 언, 〖草從偃(초종언)〗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군자지덕풍(君子之德風) 소인지덕초(小人之德草) 초상지풍(草上之風) 필언(必偃)”라는 말이 나옴. 〖瀰〗 물이 넓다 미, 〖漫〗 넘쳐흐르다 만, 〖宵旰(소간)〗 소의간식(宵衣旰食,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밤늦게 저녁을 먹음)의 준말로, 왕이 정무에 부지런함.
〖物象(물상)〗 외계(外界) 사물(事物).
각주
1 변계량(卞季良, 1369, 공민왕 18~1430, 세종 12): 본관은 밀양.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4세 때 고시(古詩)의 대구(對句)를 암기하고 6세 때 글을 지었으며,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典校主簿)가 되었고, 1392년 조선 건국 때 천우위중령중랑장(千牛衛中領中郞將) 겸 전의감승(典醫監丞)이 되었다. 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을과(乙科)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이 되고 예조우참의가 되었다. 태종말까지 예문관대제학·예조판서·의정부참찬 등을 지내다가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집현전대제학이 되었다. 당대의 문인을 대표할 만한 위치에 이르렀으나 전대의 이색(李穡)과 권근(權近)에 비해 격이 낮고 내용도 허약해졌다는 평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 문학은 조선 왕조를 찬양하고 수식하는 일이었다. 「태행태상왕시책문(太行太上王諡冊文)」에서는 태조를 칭송하면서 조선 건국을 찬양했고, 경기체가인 「화산별곡(華山別曲)」에서는 한양도읍을 찬양했다. 정도전에게 바친 「봉정정삼봉(奉呈鄭三峰)」에서도 정도전이 완벽한 인재라고 칭송했다.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의 뒤를 이어 조선 초기 관각문학(館閣文學)을 좌우했던 인물이다. 20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맡고 성균관을 장악하면서 외교문서를 쓰거나 문학의 규범을 마련했다.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를 고치는 작업에 참여했으며, 저서에 『춘정집(春亭集)』 3권 5책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증석도심」 김정
[ 贈釋道心 金淨 ]
落日毗盧頂(낙일비로정) 비로봉 봉우리에 해 지니
東溟杳遠天(동명묘원천) 동해는 먼 하늘에 아득하네
碧巖敲火宿(벽암고화숙) 푸른 바위틈에 불을 지펴 자고
連袂下蒼煙(연몌하창연) 소매 이어 푸른 안개 속으로 내려오네
〈감상〉
이 시는 김정(金淨)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며, 도심이라는 스님에게 준 시로, 1516년 가을 금강산에 들어갔을 때 지은 것이다.
저녁이 되어 비로봉에도 해가 지니, 동해가 어둠속에 아득히 펼쳐져 있다. 도심 스님과 바위틈에서 불을 피워 자다가 아침이 되어 나란히 푸른 안개를 뚫고 산에서 내려오고 있다.
윤휴(尹鑴)의 『풍악록(楓岳錄)』에 의하면, “이 시야말로 고금의 시인들 작품 중에 빼어나다. 이 시는 우리나라에 전무후무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이상 가는 작품인데, 애석하게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알아보는 자가 없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못했던 것이다.”라는 평을 남기고 있다. 위의 시에서 보듯이, 김정(金淨)은 조선 초기 대부분 송시(宋詩)를 따랐지만 당시풍(唐詩風)의 작품을 남기고 있어 문학사적으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허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김정(金淨)을 포함한 조선의 시사(詩史)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조선의 시(詩)는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크게 성취되었다. 이행(李荇)이 시작을 열어 눌재(訥齋) 박상(朴祥)·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충암(冲庵) 김정(金淨)·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일세(一世)에 나란히 나와 휘황하게 빛을 내고 금옥(金玉)을 울리니 천고(千古)에 칭할 만하게 되었다. 조선의 시는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서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노수신(盧守愼)은 두보(杜甫)의 법을 깨쳤는데 황정욱(黃廷彧)이 뒤를 이어 일어났고,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은 당(唐)을 본받았는데 이달(李達)이 그 흐름을 밝혔다. 우리 망형(亡兄)의 가행(歌行)은 이태백(李太白)과 같고 누님의 시는 성당(盛唐)의 경지에 접근하였다.
그 후에 권필(權韠)이 뒤늦게 나와 힘껏 전현(前賢)을 좇아 이행(李荇)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아! 장하다(我朝詩(아조시) 至中廟朝大成(지중묘조대성) 以容齋相倡始(이용재상창시) 而朴訥齋祥(이박눌재상), 申企齋光漢金冲庵淨鄭湖陰士龍(신기재광한김충암정정호음사룡) 竝生一世(병생일세) 炳烺鏗鏘(병랑갱장) 足稱千古也(족칭천고야) 我朝詩(아조시) 至宣廟朝大備(지선묘조대비) 盧蘇齋得杜法(노소재득두법) 而黃芝川代興(이황지천대흥) 崔白法唐而李益之闡其流(최백법당이이익지천기류) 吾亡兄歌行似太白(오망형가행사태백) 姊氏詩恰入盛唐(자씨시흡입성당) 其後權汝章晩出(기후권여장만출) 力追前賢(역추전현) 可與容齋相肩隨之(가여용재상견수지) 猗歟盛哉(의여성재)).”
〈주석〉
〖溟〗 바다 명, 〖杳〗 아득하다 묘, 〖敲〗 두드리다 고, 〖袂〗 소매 몌
각주
1 김정(金淨, 1486, 성종 17~1520, 중종 15):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충(元沖), 호는 충암(沖菴)·고봉(孤峯).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사림파를 대표했으며, 기묘사화 때 제주도에 귀양 갔다가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을 써서 기행문학의 성격을 바꿔 놓기도 했다.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성리학(性理學)을 배우기 시작했고, 20세 이후에는 구수복(具壽福) 등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507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관료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14년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때 중종이 왕후 신씨를 폐출한 것이 명분에 어긋난다 하여 신씨 복위를 주장하며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얼마 뒤 다시 등용되어 응교·전한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 뒤 기묘사화로 인해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 옮겨졌으며, 다시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사림세력을 중앙정계에 추천했으며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도왔다. 사림파의 세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주장했고,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미신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偉勳削除) 등과 같은 개혁을 시도했다. 시문에 능해 유배생활 중 외롭고 괴로운 심정을 시로 읊었다. 특히 경치를 보고 기개를 기르자고 읊을 뿐 지방마다의 생활풍속은 무시했던 이전의 기행문학과는 달리 제주도의 독특한 풍물을 자세히 기록하여 「제주풍토록」을 남겼다. 저서에 『충암집(沖菴集)』이 있다.
「영후정자」 오수 박은
[ 營後亭子 五首 朴誾 ]
其四(기사)
地如拍拍將飛翼(지여박박장비익) 땅은 새가 날개를 치며 날아오르려는 것 같고
樓似搖搖不繫篷(누사요요불계봉) 누각은 흔들흔들 매인 데 없는 배 같아라
北望雲山欲何極(북망운산욕하극) 북쪽으로 바라보니 구름 낀 산은 어디쯤이 끝인가?
南來襟帶此爲雄(나래금대차위웅) 남쪽으로 와 띠처럼 두른 산세 이곳에서 웅장하네
海氛作霧因成雨(해분작무인성우) 바다 기운은 안개가 되었다 이내 비를 뿌리고
浪勢飜天自起風(낭세번천자기풍) 물결 기세는 하늘에 닿듯 절로 바람을 일으킨다
暝裏如聞鳥相叫(명리여문조상규) 어둑한 중에서 마치 새 우는 소리 들리는 듯
坐間渾覺境俱空(좌간혼각경구공) 앉았노라니 온 경지가 텅 비는 걸 깨닫겠네
〈감상〉
이 시는 병영 뒤에 있는 정자를 노래한 것으로, 경(景)과 정(情)이 잘 융화된 시이다. 일부에서는 제목이 「영보정(永保亭)」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병영 뒤에 있는 정자는 영보정으로 충남 보령에 있는 것인 듯하다.
바다로 돌출되어 있는 영보정은 새가 날개를 치며 날아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고, 매일 데 없이 흔들거리는 배와 같다. 북쪽을 바라보니 구름 낀 산에 가린 채 끝이 없고 남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산세가 웅장하여 띠처럼 두르고 있다. 저 멀리 바다를 보니 안개가 꼈다가 이내 비가 내리고, 물결의 기세는 하늘에 닿을 듯 거세더니 절로 바람이 인다. 어둑한 날씨 속에서도 기러기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조용히 앉아 있으니 온 경지가 텅 빈 듯하다(선승(禪僧)이 선(禪)에 든 것 같다는 의미).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이 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읍취헌 박은과 용재 이행은 모두 문장으로 친하게 지냈다. 읍취헌은 연산조 때에 화를 당해 죽었는데, 용재가 그의 시문을 수집해서 간행해 세상에 내놓았다. 그 시는 매우 천재적이어서 인공적인 면을 범하지 않았다. 그래서 허공에서 망상(전설상의 물귀신)을 사로잡는 듯하다. 「영보정」 시는 이렇다. ······용재가 말하기를, ‘읍취헌 시는 사람의 의표를 벗어나 자연스럽게 문장을 이었을 뿐 조탁하지 않았다. 아마 천고의 드문 글이라 하겠다.’(挹翠軒朴誾容齋李荇(읍취헌박은용재이행) 俱以文章相善(구이문장상선) 挹翠於燕山朝被禍死(읍취어연산조피화사) 容齋裒集詩文(용재부집시문) 印行于世(인행우세) 其詩天才甚高(기시천재심고) 不犯人工(불범인공) 如憑虛捕罔象(여빙허포망상) 其永保亭詩曰(기영보정시왈) ······容齋曰(용재왈) 其詩出人意表(기시출인의표) 自然成章(자연성장) 不假雕飾(불가조식) 殆千古希音(태천고희음)).”
홍만종은 또 수련(首聯)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시는 위로 고려시대부터 아래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볼만한 경련이 적지 않다. ······읍취헌 박은의 「영보정」에 ······라 하였는데, 신령하고 기이하고 황홀하여 마치 이무기가 안개를 토해 내어서 층층이 신기루를 만들어 놓은 것과 같다(我東之詩(아동지시) 上自麗朝(상자려조) 下至近代(하지근대) 警聯之可觀者(경련지가관자) 不爲不多(불위부다) ······朴挹翠永保亭詩(박읍취영보정시) ······神奇恍惚(신기황홀) 如彩蜃吹霧(여채신취무) 架出樓閣(가출누각)).”라 하였다.
〈주석〉
〖營〗 병영 영, 〖拍〗 치다 박, 〖篷〗 작은 배 봉, 〖襟〗 옷깃 금, 〖氛〗 기운 분, 〖飜〗 날다 번, 〖暝〗 어둡다 명, 〖叫〗 울다 규, 〖渾〗 전부 혼
각주
1 박은(朴誾, 1479, 성종 10~1504, 연산군 10):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의 성취와 문장이 남달리 뛰어나 4살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8세에 대의(大義)를 알았으며, 15세가 되어서는 널리 명성을 얻어 당시 대제학이던 신용개(申用漑)의 사위가 되었다. 17세(1495년)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인 1496년 식년 문과에 병과 급제하였다. 성품이 곧아 옳은 소리를 잘했다. 1501년에 홍문관 수찬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 이후 연산군(燕山君)의 비호를 받던 유자광(柳子光)과 성준(成俊)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사사불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이후 실의에 빠져 시와 술만을 즐기며 지냈다. 25세(1503년)에 동갑이던 아내를 잃었다. 이듬해 봄에 지제교로 복직되었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음력 6월에 효수되었는데, 성격이 참으로 강직하여 죽음을 앞두고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 이유는 예전에 연산군이 밤늦게 사냥한 일을 여러 신하와 연명 상소한 일의 주동자였다는 것이었고, 죄명은 ‘사충자안 신진모장관(詐忠自安 新進侮長官, 거짓 충성으로 제 안일을 구하고 신진이 상관을 업신여김)’이었다. 연산군은 박은을 너무 미워하여 그가 죽은 지 4일 후에 의금부로 하여금 박은의 친구들을 색출하여 곤장을 치게 하고 그들을 유배 보냈으며, 음력 8월에는 전교를 내려 박은의 시체를 들판에 내버려 두게 한 다음, 봉분 없이 묻게 했다. 1505년에는 음사해인(陰邪害人)이라는 죄목을 추가하였다. 3년 뒤에 신원되고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사월이십육일 서동궁이어소직사벽」 이행
[ 四月二十六日 書東宮移御所直舍壁 李荇 ]
衰年奔走病如期(쇠년분주병여기) 분주한 노년에 기약한 듯 병이 찾아드는데
春興無多不到詩(춘흥무다부도시) 봄 흥이 많지 않아 시를 짓지 않노라
睡起忽驚花事了(수기홀경화사료) 잠 깨자 봄이 다 저무는 것에 갑자기 놀라노니
一番微雨落薔薇(일번미우락장미) 한 차례 가랑비에 장미꽃이 져 버렸네
〈감상〉
이 시는 1523년 의정부 우찬성으로 있을 때인 4월 26일 동궁 이어소의 숙직하는 방 벽에 쓴 시이다.
노년에 이런저런 일들로 바쁜데 병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자신을 찾아오고 있다. 그래서 봄이 와도 흥이 많이 나지 않아 시를 짓지 못하고 있다. 이어소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니 놀랍게도 어느새 봄빛이 저물어 한 차례 보슬비에 장미꽃이 져 버렸다.
화려하고 낙관적이며 진취적이기보다는 사화(士禍)를 겪은 탓인지 우울하고 비관적이며 인생의 슬픔이 드러나 있다. 앞서 보았던 성현(成俔)의 시와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행(李荇)은 김만중(金萬重)의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본조의 시체는 네다섯 번 변했을 뿐만 아니다. 국초에는 고려의 남은 기풍을 이어 오로지 소동파(蘇東坡)를 배워 성종, 중종 조에 이르렀으니, 오직 이행(李荇)이 대성하였다. 중간에 황산곡(黃山谷)의 시를 참작하여 시를 지었으니, 박은(朴誾)의 재능은 실로 삼백 년 시사(詩史)에서 최고이다. 또 변하여 황산곡과 진사도(陳師道)를 오로지 배웠는데, 정사룡(鄭士龍)·노수신(盧守愼)·황정욱(黃廷彧)이 솥발처럼 우뚝 일어났다. 또 변하여 당풍(唐風)의 바름으로 돌아갔으니,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이달(李達)이 순정한 이들이다.
대저 소동파(蘇東坡)를 배워 잘못되면 왕왕 군더더기가 있는데다 진부하여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운 데서 잘못되면 더욱 비틀고 천착하게 되어 염증을 낼 만하다(本朝詩體(본조시체) 不啻四五變(불시사오변) 國初承勝國之緖(국초승승국지서) 純學東坡(순학동파) 以迄於宣靖(이흘어선정) 惟容齋稱大成焉(유용재칭대성언) 中間參以豫章(중간삼이예장) 則翠軒之才(칙취헌지재) 實三百年之一人(실삼백년지일인) 又變而專攻黃陳(우변이전공황진) 則湖蘇芝(칙호소지) 鼎足雄峙(정족웅치) 又變而反正於唐(우변이반정어당) 則崔白李(칙최백이) 其粹然者也(기수연자야) 夫學眉山而失之(부학미산이실지) 往往冗陳(왕왕용진) 不滿人意(불만인의) 江西之弊(강서지폐) 尤拗拙可厭(우요졸가염)).”라고 언급한 것처럼, 송풍(宋風)의 영향을 받아 소동파(蘇東坡)에 뛰어났던 시인이다.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용재 이행은 화평하고 순숙한 시를 지어서 넉넉하게 신경(神境)에 들어갔다. 허균은 용재를 조선조 제일 대가라고 했다(李容齋荇爲詩和平純熟(이용재행위시화평순숙) 優入神境(우입신경) 許筠稱爲國士第一(허균칭위국사제일)).”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용재집(容齋集)』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문장이 있다. 그러나 체격(體格)이나 운치(韻致)는 용재가 택당보다 낫다(容齋集(용재집) 予所最好(여소최호) 繼此而有澤堂文章(계차이유택당문장) 然體格韻致(연체격운치) 容勝於澤(용승어탁)).”라 하였다.
〈주석〉
〖東宮(동궁)〗 태자(太子)가 거처하는 궁. 〖移御所(이어소)〗 임금이 자리를 옮겨서 거처하는 곳. 〖直〗 번들다 직, 〖睡〗 잠 수, 〖番〗 차례 번
각주
1 이행(李荇, 1478, 성종 9~1534, 중종 29): 박은(朴誾)과 함께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라고 불렸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叟)·청학도인(靑鶴道人). 김종직의 제자인 이의무(李宜茂)의 아들이다. 1495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권지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전적을 역임했고, 『성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1504년 응교로 있을 때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었고,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목숨을 잃을 뻔하다가 다행히 살아나 거제도로 가서 염소를 치는 노비가 되어 위리안치 된 생활을 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교리에 등용, 대사간·대사성을 거쳐 대사헌·대제학·공조판서·이조판서·우의정 등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펴내는 데 참여했고, 1531년 김안로(金安老)를 논박하여 좌천된 뒤 이듬해 함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시는 허균(許筠) 등에 의해 매우 높게 평가되었다. 당시(唐詩)의 전통에서 벗어나 기발한 착상과 참신한 표현을 강조하는 기교적인 시를 써서 새로운 시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표현의 격조가 높아진 반면 폭넓은 경험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움은 없었다. 저서로는 『용재집(容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고, 뒤에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능성루수중」 조광조
[ 綾城累囚中 趙光祖 ]
誰憐身似傷弓鳥(수련신사상궁조) 화살 맞아 다친 새와 같은 신세 누가 불쌍히 여기랴
自笑心同失馬翁(자소심동실마옹) 말 잃은 늙은이 같은 마음 스스로 우습다
猿鶴正嗔吾不返(원학정진오불반) 원숭이와 학은 내가 돌아보지 않는다고 꾸짖겠지만
豈知難出覆盆中(기지난출복분중) 엎어진 동이 속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줄 어찌 알겠나?
〈감상〉
이 시는 능주에 귀양 와 죄인의 신세가 된 것에 대해 노래한 것이다.
화살에 맞아 다친 새와 같은 자신의 신세를 누가 불쌍히 여기겠는가? 말 잃은 새옹(塞翁)처럼 재앙이 복으로 바뀌는 것을 바라는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다. 원숭이와 학과 같은 은군자(隱君子)는 내게 은거(隱居)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꾸짖겠지만, 엎어진 동이 속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줄 어찌 알겠나?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조광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는 불세출의 현인으로 일찍이 임금의 인정을 받아서 그 도를 행할 수 있었다.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을 때에는 남녀가 길을 달리할 정도로 한 시대가 영향을 받았다. 다만 권력을 잡은 지 얼마 안 되어 불행히 화를 입었기 때문에 그의 사업을 논할 때면 오히려 미진했다는 탄식이 있게 된다(靜菴以不世出之賢(정암이불세출지현) 早被知遇(조피지우) 得行其道(득행기도) 爲都憲也(위도헌야) 男女異路(남녀이로) 一世風動(일세풍동) 而但柄用未久(이단병용미구) 不幸罹禍(불행리화) 故論其事業(고론기사업) 猶有未盡之歎(유유미진지탄)).”
“우리나라의 유자(儒者) 중에 조정암(趙靜庵)과 이율곡(李栗谷)은 타고난 자질이 고명하고 뛰어나 이학(理學)과 경륜에 있어 원래부터 대현(大賢)인데다 왕을 보좌하는 재능까지 겸하였다(東方儒者(동방유자) 靜菴栗谷(정암율곡) 天姿高明豪逸(천자고명호일) 理學經綸(이학경륜) 自是大賢(자시대현) 兼王佐之才(겸왕좌지재)).”
홍만종은 이 시에 대해 『소화시평』에서, “정암 조광조 선생이 기묘 당적(기묘사화에 연루된 사인(士人))에 연좌되어 능성에 매를 맞고 유배되었는데, 「누수중」 절구 한 수를 지었다. ······말이 극히 처절하다(靜庵先生坐己卯黨禍(정암선생좌기묘당화) 杖配綾城(장배능성) 累囚中有詩一絶曰(누수중유시일절왈) ······詞極凄切(사극처절)).”라 평하고 있다.
〈주석〉
〖傷弓鳥(상궁조)〗 화살에 맞은 새로, 재앙이나 근심을 겪고서 마음에 두려움이 남아 있는 상태를 비유함(『전국책(戰國策)』 「초책사(楚策四)」). 〖失馬翁(실마옹)〗 =실마새옹(失馬塞翁), 화(禍)로 말미암아 복(福)을 얻음.
〖猿鶴(원학)〗 원숭이와 학으로, 은둔한 선비.〖嗔〗 성내다 진, 〖覆盆(복분)〗 엎어진 동이로, 진(晉)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 「변문(辨問)」에 “시책삼광부조복분지내야(是責三光不照覆盆之內也)”라고 한 데서, 밝은 빛도 엎어진 동이 아래를 비출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뒤에는 어두운 사회나 하소연 할 곳이 없는 억울함의 비유로 쓰임.
각주
1 조광조(趙光祖, 1482, 성종 13~1519, 중종 14):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때부터 시문은 물론 성리학의 연구에 힘을 쏟았고, 20세 때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가장 촉망받는 청년학자로서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김굉필이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에 찬성했다 하여 처형되면서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당하게 되자, 조광조도 유배당하는 몸이 되었다. 정계의 현실을 몸소 겪은 그는 유배지에서 학업에만 전념했다.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주창하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했으나, 훈구(勳舊)세력의 반발을 사서 결국 죽임을 당했다.
「유물음」 이수 서경덕
[ 有物吟 二首 徐敬德 ]
其一(기일)
有物來來不盡來(유물래래부진래) 물은 오고 와도 끝없이 오니
來纔盡處又從來(내재진처우종래)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또 따라오네
來來本自來無始(내래본자래무시) 오고 와도 본래 처음이 없었으니
爲問君初何所來(위문군초하소래) 그대에게 묻노니 처음에 어디서부터 왔는가?
〈감상〉
이 시는 사물의 생성과 변화를 노래한 것으로, 첫 번째 시는 사물의 생성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무형(有無形)의 사물들은 계속적으로 생성되어 끝이 없으니, 때로는 거의 다 끝난 것 같은데도 또 이어서 생성되고 있다. 본래부터 시작이 없이 계속 돌고 도니, 어디에서부터 처음이 시작되었는가?
〈주석〉
〖有物(유물)〗 존재하는 유무형(有無形)의 모든 사물. 〖纔〗 겨우 재
其二(기이)
有物歸歸不盡歸(유물귀귀부진귀) 물이 돌아가고 돌아가도 끝없이 돌아가니
歸纔盡處未曾歸(귀재진처미증귀) 거의 다 돌아간 것 같은데 일찍이 돌아가지 않았네
歸歸到底歸無了(귀귀도저귀무료) 돌아가고 돌아가도 마침내 끝이 없으니
爲問君從何所歸(위문군종하소귀) 그대에게 묻노니 어느 곳으로부터 돌아가는가?
〈감상〉
이 시는 두 번째 시로 소멸(消滅)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무형의 사물들은 지속적으로 소멸되니, 거의 다 소멸된 것 같으나 아직 일찍이 소멸된 적이 없다. 소멸되고 소멸되어도 끝이 없으니, 어디에서 소멸되는 것인가?
〈주석〉
〖到底(도저)〗 시종(始終), 마침내.
각주
1 서경덕(徐敬德, 1489, 성종 20~1546, 명종 1):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부재(復齋)·화담(花潭). 그의 집안은 양반에 속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무반 계통의 하급관리를 지냈을 뿐, 남의 땅을 부쳐 먹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18세에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장에 이르러 “학문을 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여, 독서보다 격물이 우선임을 깨달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그 이치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이 때문에 건강을 해쳐 1509년(중종 4) 요양을 위해 경기·영남·호남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1519년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에 으뜸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화담에 서재를 지어 연구를 계속했다. 1522년 다시 속리산·지리산 등 명승지를 구경하고, 기행시 몇 편을 남겼다. 그는 당시 많은 선비들이 사화로 참화를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1531년 어머니의 명으로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1540년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고, 1544년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면서 성리학 연구에 전력했다. 이 해에 병이 깊어지자, “성현들의 말에 대하여 이미 선배들의 주석이 있는 것을 다시 거듭 말할 필요가 없고 아직 해명되지 못한 것은 글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이제 병이 이처럼 중해졌으니 나의 말을 남기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고 하면서 「원리기(原理氣)」·「이기설(理氣說)」 등을 저술했다. 그의 문하에서 박순(朴淳)·허엽(許曄)·이지함(李之菡) 등 많은 학자·관인들이 배출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한국 유학사상 본격적인 철학문제를 제기하고, 독자적인 기철학(氣哲學)의 체계를 완성했으며, 당시 유명한 기생 황진이와의 일화가 전하며, 박연폭포·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숙강촌」 송익필
[ 宿江村 宋翼弼 ]
過飮村醪臥月明(과음촌료와월명) 막걸리 과하게 마시고 밝은 달 아래 누우니
宿雲飛盡曉江淸(숙운비진효강청) 자던 구름 다 걷히자 새벽 강이 맑네
同行催我早歸去(동행최아조귀거) 동행이 나를 재촉해 일찍 돌아가니
恐被主人知姓名(공피주인지성명) 주인이 성명을 알게 될까 걱정해서라네
〈감상〉
이 시는 강촌에 하룻밤 유숙(留宿)하면서 지은 시로, 잠시 자신의 처지를 잊고 싶은 심정을 그려내고 있다.
강촌에 하룻밤 묵으면서 근심을 잊고자 막걸리를 실컷 마시고 밝은 달빛 아래 누우니, 밤새 묵었던 구름이 다 걷히자 새벽 강이 맑아진다. 이런 정취를 오랫동안 즐기고 싶은데, 함께 동행한 사람이 나를 재촉해 일찍 길을 나선다. 객사(客舍)의 주인이 작자 자신의 성명을 알게 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란다.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구봉 송익필은 출신이 비록 미천하지만, 타고난 품성이 대단히 높고 문학에도 뛰어났다(龜峰宋翼弼雖出卑微(구봉송익필수출비미) 天品甚高(천품심고) 亦能文章(역능문장)).”라 하여, 미천한 신분이지만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다고 평하고 있다.
〈주석〉
〖醪〗 막걸리 료, 〖曉〗 새벽 효
각주
1 송익필(宋翼弼, 1534, 중종 29~1599, 선조 32):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할머니가 안돈후(安敦厚)와 비첩(婢妾)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庶女)였으므로 그의 신분도 서얼(庶孼)이었다. 아버지 안사련이 안돈후의 손자 안처겸(安處謙)을 역모자로 고변(告變)하여 안씨 일가를 멸문시켰다. 이 공으로 안사련은 당상관에 오르고 부유해졌다. 그러나 죄상이 밝혀져 1566년(명종 21)에 안씨 일가에 직첩이 환급되었다. 따라서 송익필은 서얼인데다 아버지 사련의 죄로 인해 과거를 볼 수 없었고, 이후 출세의 길이 막히고 말았다. 과거를 단념하고 경기도 고양(高陽) 구봉산 밑에서 학문을 닦으며 후진을 가르쳤다. 이이(李珥)·성혼(成渾)과 교유했으며, 무이시단(武夷詩壇)을 주도하여 당대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문명을 날렸다. 탁월한 지략과 학문으로 세인들이 ‘서인(西人)의 모주(謀主)’라 일컬었다. 1584년(선조 17) 이이가 죽자 동인(東人)의 질시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동서(東西)의 공방이 심해지는 가운데 동인(東人)의 사주를 받은 안씨 일가에서 그의 신분을 들어 환천(還賤)시켜 줄 것을 제소했다. 1586년(선조 19) 마침내 그의 형제를 비롯해 일족 70여 인이 환천되었다. 이후 그는 김장생·정철·이산해의 집을 전전하며 숨어 지냈다. 이름을 바꾼 그는 황해도에서 복술가(卜術家)로 변신하고 부유한 토호들을 꾀어 호남에 있는 정여립을 찾게 만들었다. 그런 뒤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다고 고변을 하여 1589년(선조 22)의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일으키는 배후조종자 역할을 했다. 은인인 이산해가 궁중과 결탁해 세력을 굳히려 하자 시로써 풍자한 것 때문에 이산해의 미움을 사서 극지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1592년(선조 25) 유배 중 임진왜란을 당해 명문산(明文山)으로 피했다가 면천(沔川)에서 김진려의 집에 기식하다 1599년(선조 32) 66세로 객사했다. 학문적으로는 사변적인 이론보다 실천 윤리인 예(禮)를 통해 이(理)에 접근할 것을 중시했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은 그의 제자이다. 문학적으로는 시·문에 다 능해 시는 성당시(盛唐詩)를 바탕으로 청절(淸絶)했으며, 문은 고문(古文)을 주장하여 논리가 정연한 실용적인 문체를 사용했다. 「제율곡문(祭栗谷文)」은 조선시대 23대 문장의 하나로 평가받을 정도이며, 「은아전(銀娥傳)」은 당대로서는 보기 드문 전기체(傳記體)의 글이다.
「무제」 조식
[ 無題 曺植 ]
魯野麟空老(노야린공노) 노나라 들엔 기린이 헛되이 늙어 가고
岐山鳳不來(기산봉불래) 기산엔 봉황새가 오지를 않네
文章今已矣(문장금이의) 빛나던 문물도 이제 끝났으니
吾道竟誰依(오도경수의) 우리의 도는 끝내 누구에 의지하리오?
〈감상〉
이 시는 현실에 대한 남명(南冥)의 총체적 인식이 녹아 있는 시이다. 그런데 현실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 언급되어 있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산문을 통해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1555년 단성현감에 임명된 직후에 올린 상소문에, “또 전하의 나랏일이 이미 그릇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은 이미 떠나 버렸고, 민심도 이미 이반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백 년 동안 벌레가 그 속을 갉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 버린 큰 나무가 있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랩니다.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에서 시시덕거리면서 주색만을 즐기고, 높은 벼슬아치는 위에서 어름어름하면서 오로지 재물만을 늘리며, 강물고기의 배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데도 그 허물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전께서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은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아드님이실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나 되는 하늘의 재앙과 억만 갈래의 민심만을 어떻게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抑殿下之國事已非(억전하지국사이비) 邦本已亡(방본이망) 天意已去(천의이거) 民心已離(민심이리) 比如大木(비여대목) 百年心(백년충심) 膏液已枯(고액이고) 茫然不知飄風暴雨何時而至者(망연부지표풍폭우하시이지자) 久矣(구의) ······小官嬉嬉於下(소관희희어하) 姑酒色是樂(고주색시락) 大官泛泛於上(대관범범어상) 唯貨賂是殖(유화뢰시식) 河魚腹痛(하어복통) 莫肯尸之(막긍시지) ······慈殿塞淵(자전새연) 不過深宮之一寡婦(불과심궁지일과부) 殿下幼冲(전하유충) 只是先王之一孤嗣(지시선왕지일고사) 天災之百千(천재지백천) 人心之億萬(인심지억만) 何以當之(하이당지) 何以收之耶(하이수지야))?”라고 하여, 당시 현실에 대한 불만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각주
1 조식(曺植, 1501, 연산군 7~1572, 선조 5):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함. 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다. 4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후 계속 고향 토동에 머물며 계복당(鷄伏堂)과 뇌용정(雷龍亭)을 지어 거처하며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1555년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했다. 사직 시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정구(鄭逑) 등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61세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1566년 명종의 부름에 응해 왕을 독대(獨對)하여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선조(宣祖)가 즉위한 뒤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戊辰對事)」를 올렸다. 여기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재박다도 차운기인수백옥중장근보청보산거」 신숙주
[ 在博多島 次韵寄仁叟伯玉仲章謹甫淸甫山居 申叔舟 ]
半歲天涯已倦遊(반세천애이권유) 하늘 끝에 노닌 지 반년 이미 노닐기 지쳤는데
歸心日夕故山秋(귀심일석고산추) 밤낮 돌아갈 마음 고국산천에 있다오
山中舊友靑燈夜(산중구우청등야) 산속에서 등불 아래 글 읽던 옛 벗들이여
閒話應憐海外舟(한화응련해외주) 한담하다 해외의 숙주(叔舟)를 애처로워하겠지
一任東西自在遊(일임동서자재유) 동서를 책임져서 어느 곳이나 다녔더니
滄溟萬里海天秋(창명만리해천추) 푸른 바다 만 리 밖 하늘가에서 가을을 보내네
翻思有命應先定(번사유명응선정) 아무리 생각하여도 팔자에 정해졌나니
字是泛翁名叔舟(자시범옹명숙주) 자는 범옹이요, 이름 또한 숙주일세
〈감상〉
이 시는 일본의 박다도에 있으면서 차운하여 산중에 있는 박팽년·이석형·하위지·성삼문·이개에게 보낸 시이다.
하늘 끝 일본에 온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나 지쳐 가는데, 언제쯤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까? 예전에 산속에서 불을 밝혀 놓고 함께 글을 읽던 옛 벗들,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멀리 일본에 와 있는 내 처지를 애처로워할 것이다. 이전에도 나라의 일을 맡아 천하를 주유(周遊)하였는데, 지금은 푸른 바다를 만 리나 건너 일본에서 가을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된 자신의 처지는 바다나 물을 떠다니는 노인이라는 ‘범옹(泛翁)’이라는 자(字)와 배가 들어간 ‘숙주(叔舟)’라는 이름 때문으로, 이미 정해진 운명인 것이다.
김안로(金安老)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 “신숙주가 집현전에 들어가 장서각(藏書閣)에서 평소에 보지 못한 책들을 가져다 보며 밤을 새웠다. 하루저녁에는 삼경(三更)이 되었을 때 세종이 환관 하나를 보내어 보고 오라고 하였다. 공(公)은 여전히 촛불을 켜고 독서하였는데, 3, 4차례 가서 보아도 여전히 그치지 않고 독서하다가, 닭이 운 뒤에야 잠을 잤다. 주상께서 담비 가죽옷을 벗어 푹 잠든 틈을 타서 덮어 주도록 하였다. 신숙주가 아침에 일어나 비로소 알았다.
사림에서 이 말을 듣고 힘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申叔舟入集賢殿(신숙주입집현전) 取藏書閣平昔所未見之書(취장서각평석소미견지서) 讀之(독지) 通宵不寐(통소불매) 一夕漏下三鼓(일석루하삼고) 我英廟遣小宦往覘之(아영묘견소환왕첨지) 公猶燃燭讀書(공유연촉독서) 往覘數四(왕첨수사) 讀猶不輟(독유불철) 雞鳴後始寢(계명후시침) 上解貂裘(상해초구) 令乘睡熟覆其上(영승수숙복기상) 叔舟朝起方覺之(숙주조기방각지) 士林聞之(사림문지) 莫不勸勵(막불권려)).”라 하여, 학문에 정진한 신숙주의 일화(逸話)가 실려 있다.
이러한 결과 신숙주는 일본과 중국에도 명성을 날렸는데, 그의 「비문(碑文)」에, “서장관으로 일본에 사신 갔었을 때 왜인(倭人)이 다투어 그의 시를 요구하자 붓을 쥐고 곧 지으니 모두들 탄복하였다. 떠나서 돌아오기까지 무릇 9개월 걸렸다. 이전의 통신사행은 이만큼 완전하고 또 빠른 적이 없었다. 매번 사신들이 올 때마다 왜인이 반드시 그의 안부를 물었다(以書狀聘日本(이서상빙일본) 倭人爭求其詩(왜인쟁구기시) 操筆立就(조필립취) 衆皆嘆服(중개탄복) 自發曁還凡九箇月(자발기환범구개월) 前此通信之行(전차통신지행) 未有若此之完且速者(미유약차지완차속자) 每使价來(매사개래) 倭人必問其寒暄(왜인필문기한훤))”라 하였고, 『황화집(皇華集)』에는, “경태(景泰) 초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이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을 때 태평루(太平樓)에 올라 시를 지었다.
신숙주가 그 운(韻)을 써서 화답하니, 학사(學士)가 탄복하고 돌아갈 때 시를 지어 보내기를, ‘시 솜씨는 일찍 굴원(屈原)과 그의 제자 송옥(宋玉)의 단(壇)에 올랐으니, 그 명성 전하여져 조정 끝까지 가득 찼네’ 하고, 동방의 최고라 칭찬하였다(景泰初(경태초) 翰林學士倪謙奉使東來(한림학사예겸봉사동래) 登太平樓賦詩(등태평루부시) 叔舟步其韻和之(숙주보기운화지) 學士嘆服(학사탄복) 旣還寄詩云(기환기시운) 詞賦曾乘屈宋壇(사부증승굴송단) 爲傳聲譽滿朝端(위전성예만조단) 稱爲東方巨擘(칭위동방거벽)).”라 하여, 그의 시명(詩名)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주석〉
〖仁叟伯玉仲章謹甫淸甫(인수백옥중장근보청보)〗 인수(仁叟)는 박팽년(朴彭年)의 자(字), 백옥(伯玉)은 이석형(李石亨)의 자, 중장(仲章)은 하위지(河緯地)의 자, 근보(謹甫)는 성삼문(成三問)의 자, 청보(淸甫)는 이개(李塏)의 자.
〖倦〗 피로하다 권, 〖滄〗 푸르다 창, 〖溟〗 바다 명, 〖翻〗 뒤집다 번
각주
1 신숙주(申叔舟, 1417, 태종 17~1475, 성종 6): 본관은 고령.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보한재(保閑齋). 1438년(세종 20)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전농사직장(典農寺直長)을 지냈다. 입직할 때마다 장서각에 파묻혀서 귀중한 서책들을 읽었으며, 자청하여 숙직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이러한 학문에 대한 열성이 왕에게까지 알려져 세종으로부터 어의를 받기도 했다. 1443년 통신사 변효문(卞孝文)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서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는 한편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要害地)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집현전수찬을 지내면서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창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1452년(문종 2)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면서 그와 깊은 유대를 맺었다.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을 때 중용되어 수충협책정난공신(輸忠協策靖難功臣) 1등에 오르고, 이듬해 도승지로 승진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 1등에 고령군(高靈君)으로 봉해지고 예문관대제학으로 임명되었다.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던 경험을 바탕으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지어 일본과의 교류에 도움을 주고, 오랫동안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명과의 외교관계를 맡는 등 외교정책의 입안·책임자로서도 활약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를 잘 썼다고 한다. 저서로는 문집인 『보한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