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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근장군사(近仗軍士)
정의
조선전기 국왕의 의장 가까이에 배치된 근위 군사 또는 조선후기 궁궐의 각문 파수, 야간 숙직, 국왕의 전좌(殿座)나 거둥의 시위 등을 담당하던 근위 군사.
개설
조선전기에 근장군사는 국왕의 행차나 행사 때 임시로 오위 병력 중에서 차출되다가 조선후기에 들어와 임시로 고용군 10명을 쓰게 되었고, 영조대 이후에는 다시 정규군에서 선발되었다. 이들은 각문(各門)마다 1명씩 나누어 파수를 섰으며 주로 시끄럽게 하는 자를 금지하였다. 또한 밤이 되면 10명씩 돌아가며 번을 섰고, 국왕이 정사를 보거나 조회를 받기 위해 정전의 자리로 나오는 전좌(殿座)나 거둥할 때에는 7쌍이 장막 앞에 대령하며 그 나머지는 나누어 담당을 결정하여 위내(衛內)를 시찰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대 중국에서는 황제의 거가(車駕)에 수반되는 무기와 기치, 즉 의장(儀仗) 기물을 노부(鹵簿)라고 하였다. 노부 의장은 거가의 규모에 따라 달라졌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예컨대 세종대 근정전 전정(殿庭)에서의 의장은 동지와 정월 초하루 및 탄일의 대조회의 경우에는 가장 큰 규모의 의장인 대장(大仗)이 사용되었고, 매달 음력 초하룻날에 행하는 삭일 조회 및 조참에서는 중간규모의 의장인 반장(半仗)이 사용되었다. 이처럼 제왕의 거가(車駕) 또는 궁중 행사에서 그 규모에 따라 의장을 달리함으로써 거가와 행사의 품격을 드러내는 한편 제왕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한편 거가 또는 궁중 행사 때 배치되는 의장 주변으로는 군사들이 배치되었는데, 이들 군사 중에서 의장에 가까이 배치된 군사들이 근장군사(近仗軍士)가 되었다. 즉 근장군사의 1차적인 의미는 ‘의장에 가까이 배치된 군사’로서 특정한 병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중종실록』12년 7월 10일] 다만 근장군사는 일반 군사가 아니라 거가 또는 궁중 행사의 의장을 호위하는 친위군의 역할을 하였기에 조선전기에는 중앙군인 오위(五衛) 병력 중에서 근장군사가 차출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상황이 조선후기에 변하게 되었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근장군사는 본시 고용군 10명을 임시로 임명하곤 했는데, 1755년(영조 31)부터 정규군에서 선발된 특정 병력을 지칭하게 되었다. 즉 조선전기 근장군사는 국왕의 행차나 행사 때 임시로 오위 병력 중에서 차출되다가 조선후기 들어 임시로 고용군 10명을 쓰게 되었고, 영조대 이후에는 다시 정규군에서 임명한 특정 병력이 되었던 것이다.
조직 및 역할
조선후기에 일종의 급료를 받는 직업군인인 급료병 10명으로 시작된 군장군사는 1755년(영조 31) 정규직이 되었으며, 1777년(정조 1년) 이후 인원이 증가되어 27명까지 늘었다. 그러다가 1789년(정조 13년)에 20명이 정원으로 확정되었다. 이들 군장군사는 각문(各門)마다 1명씩 나누어 파수를 섰으며 주로 시끄럽게 하는 자를 금지하였다. 또한 밤이 되면 10명씩 돌아가며 번을 섰고, 국왕이 전좌(殿座)하거나 거둥할 때에는 7쌍이 장막 앞에 대령하며 그 나머지는 나누어 담당을 결정하여 경계 구역을 시찰하였다. 요컨대 근장군사의 임무는 궐문 수비와 야간 숙위 그리고 국왕의 행차와 행사 호위였다.
이들 근장군사에게는 처음에 월급으로 포(布)만 지급되었다. 그러다가 1788년(정조 12)부터는 포와 함께 매달 20명의 근장군사에게 백미 8석이 지급되었다.
한편 군장군사의 궐문 수비와 야간 숙위는 주로 궁궐 출입자 확인이 핵심이었다. 조선시대 궁궐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신분증이 있어야 했고, 특히 야간 숙직자는 숙직자 명부인 생기(省記)에 명단이 들어가야 했다. 따라서 근장군사는 궁궐 출입자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불법으로 출입하는 자는 색출하여 처벌하였다.[『영조실록』즉위년 10월 18일]
변천
조선시대의 근장군사는 근본적으로 전통시대 동양의 제왕 거가에 수반되는 노부 의장에 관련된 군사였다. 따라서 거가와 노부 의장의 관념이 바뀌면 거가와 노부 의장 자체는 물론 근장군사 역시 바뀔 수밖에 없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근장군사라는 용어는 1886년(고종 23)까지 등장한다.그 이후 근장군사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근장군사가 새로운 병력으로 대체되었을 가능성이 큰데, 특히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조선시대의 전통군제가 신군제로 크게 바뀌는 과정에서새로운 병력으로 대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문헌
『日省錄』
『承政院日記』
『經國大典』
『大典會通』
『萬機要覽』
심헌용, 『한말 군 근대화 연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후기편』, 육군본부, 1977.
이근호 외, 『조선후기의 수도방위체제』, 서울학연구소, 1998.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http://www.history.go.kr)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시소러스 검색.
기양제(祈禳祭)
정의
자연재해나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였을 때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 지내는 제사.
개설
기양제란 일상적인 질서를 위협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나 예견될 때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 거행하는 의식을 가리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양제(祈禳祭)보다 ‘기양’이란 용어가 더 자주 보인다. 양재(禳災), 해괴제(解怪祭)도 기양제와 유사한 의미를 지녀 통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기양제의 성격은 재난으로 간주하는 대상과 이를 발생시키거나 물리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힘의 원천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고려시대나 조선초기에는 기양제를 지낼 때 주로 불교, 도교, 무속 등에 의존하였다. 기양법석(祈禳法席)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태조실록』 6년 8월 20일]. 기양의 대상 역시 천변(天變), 성변(星變), 야수의 출현, 지진 등 다양하였다. 그러나 천문학과 천견적(天譴的) 수양론이 발달하면서 재난을 물리치기 위한 제의(祭儀)는 점차 축소되었다.
조선시대에 기양제의 대상이 되었던 재난은 가뭄, 홍수, 지진, 전염병, 황충해(蝗蟲害) 등이었다. 이러한 재난을 물리치기 위한 기양제는 유교적 형식을 취하였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가뭄이 들면 빌어야 할 기고(祈告)의 대상으로 사직(社稷), 종묘, 풍운뇌우(風雲雷雨), 악해독(嶽海瀆),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신을 제시하였다. 황충해를 물리치기 위한 포제(酺祭), 홍수를 물리치기 위한 영제(禜祭)의 의식도 있었다. 『국조오례의』에 보이지 않는 기양제로는 기설제와 해괴제가 있다. 해괴제는 지진이 발생하였을 때에 해당 지역 사직(社稷)에게 빌었다. 그리고 여역(癘疫), 즉 전염성이 발생하였을 때 기양법으로 자주 거행하던 불교 수륙재(水陸齋)는 여제(厲祭)로 대체하였다.
변천
조선후기에 편찬된 『춘관지(春官志)』에서는 제사의 구분에 ‘기고보사(祈告報祀)’의 범주를 두고, 그 아래에 ‘기고류(祈告類)’와 ‘보사류(報祀類)’의 세부 범주를 만들었다. 그리고 기고류에 기우(祈雨), 기청(祈晴), 기설(祈雪), 기양충재(祈禳蟲災), 기양여역(祈禳癘疫) 등의 제사를 포함시켰다. 여기서 기양제는 기고제에 포함되면서도 사특하거나 부정한 기운을 물리치는 제의를 가리킨다. 충재나 여역은 부정적인 기운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여겼고, 이를 물리치는 의식이 기양제였다. 충재의 기양은 포제로 하였던 반면, 여역의 기양은 여제로 행하였다.
여역이 발생할 때 거행하였던 여제는 당시 사특한 기운을 이해하는 방식을 잘 보여 준다. 여제는 전염병을 일으키는 부정한 기운을 악신(惡神)으로 간주하지 않고 원혼으로 여겨 그들을 위로하는 제례이기 때문이다. 현종과 숙종 연간에 전염병이 전국적으로 심하였을 때 각 지역의 여단 외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몰처(戰歿處)가 여제의 장소로 등장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원혼의 힘은 간혹 가뭄의 재난도 가져온다고 하여 기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기양제는 재난을 물리치기 위한 다양한 방식 중에서도 부정적인 기운이나 힘을 달래거나 소멸시키기 위한 제의이다.
참고문헌
이욱,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창비, 2009.
기은제(祈恩祭)
정의
왕실에서 영험한 산천에 무당을 보내어 복을 빌던 의례.
개설
기은제는 영험한 곳으로 이름난 산천에 가서 거행하는 제사를 가리킨다. ‘제(祭)’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기은의 형식과 내용은 무속에 가깝다. 기은은 왕실과 민간 모두 행하던 풍속이었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기은은 대부분 왕실에서 거행한 내행기은(內行祈恩)이다. 이것은 왕실에서 영험한 곳으로 이름난 산천에 무당을 보내어 왕실의 안녕을 비는 기도이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 국가 제사는 왕의 명을 받은 관리가 담당하며 봉상시(奉常寺)와 전생서(典牲署)에서 제물과 희생을 준비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에 반해 내행기은은 내전(內殿)에서 무당이나 내시를 통해 의식을 주관하게 하고 경비도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내수사(內需司)에서 조달하였다. 의례의 대상인 산천신은 사전(祀典)에 오른 것도 있지만 이와 무관하게 고려시대부터 영험한 곳으로 알려진 곳들이 전승되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기은처로는 덕적(德積)·백악(白岳)·송악(松岳)·목멱(木覓)·감악(紺岳)·개성(開城) 대정(大井)·삼성(三聖)·주작(朱雀) 등이 있다.
변천
기은이란 용어는 『고려사(高麗史)』에도 자주 나온다. 별기은(別祈恩), 별기은소(別祈恩所), 기은색(祈恩色), 기은도량(祈恩道場), 기은별감(祈恩別監), 기은사(祈恩使) 등의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기은은 불교와 친화력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 차원에서 거행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기은은 무속과 연관되어 주로 언급되었고, 국가의 공적인 제향에서 배제된 왕실의 행사로 간주되었다. 기은의 대상은 산천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기은은 대부분 유명 산천의 신들에게 복을 비는 무속 의례를 가리킨다. ‘기은’이란 용어에 ‘제(祭)’를 붙여 사용하게 된 것은 유교의 영향이지만 유교식 제사라기보다 무속의 굿에 가깝다.
중종대에 이르러기은제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1512년(중종 7)에 함흥본궁에 기은을 거행하기 위해 가던 무당들이 사복시(司僕寺)의 말을 사용한 후 돌려주지 않고 사적으로 사용한 것이 빌미가 되어 유신(儒臣)들이 기은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기은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중종실록』 7년 4월 12일]. 이후 본궁의 제향은 무당을 배제하고 내수사 종사자들에 의해 거행하였지만, 여타의 기은 행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조선후기 기은제의 모습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잘 보이지 않으나 발기[件記]를 통해 알 수 있다. 왕실에서 기은제를 행한 후 무속인에게 지급한 옷감 등의 경비가 발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최종성, 『조선조 무속 구행의례 연구』, 일지사, 2002.
기청제(祈晴祭)
정의
절기상으로 입추가 지났는데 장마가 계속될 때나 국가적 주요 행사를 앞두고 나라에서 날이 쾌청해기를 기원하던 제사.
개설
기청제는 신라 때부터 국가적인 제사로 규정되어 시행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문(門) 이외에 개천을 비롯해 매우 다양하게 기청제가 시행되었다. 조선 전기까지는 문(門)이나 개천 등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대상에게 제사를 행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점차 문을 중심으로 하는 기청제로 획일화되었다. 문에서 거행한 것은 문이 소통의 장소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원 및 변천
기청제는 유사 이래 전세계적으로 시행되던 것으로, 출발은 홍수로부터의 재앙을 막기 위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홍수를 막기 위한 기청제를 흔히 영제(禜祭)라 명명했는데, 영(禜)은 홍수 외에도 가뭄, 역병 등 여러 재앙을 막는다는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가뭄이나 홍수 모두 영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영제는 홍수 때 제사로 특정되어 갔고, 가뭄 때 지내는 제사는 우제(虞祭)로 불렸다. 한편 홍수를 막기 위한 기청제는 주로 문(門)이나 사(社)에서 거행되었는데, 특히 문제(門祭)를 영제로 명명하였다.
한국의 경우 문헌상으로 삼국시대부터 기청제가 시행되었음이 확인된다. 『삼국사기』잡지(雜志)에 따르면 신라의 경우 대정문(大井門)·토산양문(吐山良門)·습비문(習比門)·왕후제문(王后梯門)에서 지내는 사성문제(四城門祭)와 견수(犬首)·문열림(文熱林)·청연(靑淵)·박수(樸樹) 등 네 곳의 개천에서 지내는 사천상제(四川上祭)가 행해졌는데, 이것이 기청제였다고 추정된다. 다만 사천상제의 경우는 가뭄에 대비한 제사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었다.
고려 시대에는 개천을 비롯해 사직이나 종묘·능묘·영전(影殿)·산천뿐 아니라 사찰 등지에서 기청제와 기우제가 거행되었다. 특히 의종 때에는 서울인 개경의 여러 문에서 영제를 지내는 의례가 정비되었다. 의종때 영제에 의하면,각각의 문마다 3일간 매일 제사를 지내고 한번 영제를 지내도 그치지 않으면 산천이나 악(岳)·진(鎭)·해(海)·독(瀆)에 3일간 빌며, 그래도 그치지 않으면 사직과 종묘에 제사를 지냈다. 지방의 경우에도 성문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규정하였다.
조선 시대 기청제는 『세종실록오례의』나 『국조오례의』에서는 “구우영제국문의(久雨禜祭國門儀)”와 “구우주현영제성문의(久雨州縣禜祭城門儀)”로 규정되며 국가적 제사 중 소사(小祀)의 하나로 유지되었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홍수 때뿐 아니라 국가적 주요 행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날이 쾌청하기를 바라는 때에도 기청제가 시행되었다. 1411년(태종 11) 태종이 강무를 앞두고 기청제를 시행한 예라든지, 1457년(세조 3) 의경세자의 발인을 앞두고 사직에 기청제를 지낸 사례 등이 있다.
한편 조선 시대의 기청제는 고려 시대까지와 달리 개천에서 지내는 기청제가 점차 배제되어 갔다. 조선 전기까지는 태종대 기청법회(祈請法會)를 비롯해 세종대 기청불사(祈請佛事), 또는 기청태일초례(祈晴太一醮禮) 등과 같이 다양한 방법이나 다양한 대상으로 기청제가 행해졌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경과하면서는 사문영제(四門禜祭) 중심으로 획일화되었다.
절차 및 내용
조선 시대 기청제는 1392년부터 1840년까지 연평균 0.4회가 시행되었고, 시기적으로는 7월~9월까지 가장 많이 시행되었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기청제인 사문영제는 서울의 사대문인 숭례문·흥인(지)문·돈의문·숙정문에서 행해지며, 정3품 당하관의 관원을 파견하여 3일 동안 시행하였다. 3일간의 제사에도 비가 그치지 않으면 3차례에 걸쳐 사문영제를 지속하였다. 제사 때 신위(神位)는 도성 안쪽으로 향하게 하고, 제사는 문 위에서 거행하였다. 제사를 거행할 때 도성문의 개폐는 승정원의 보고와 국왕의 결재 과정을 통해서 결정되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사문영제 때의 축판과 관련해서는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에서 축판을 “모방산천지신(某方山川之神)”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영제의 대상이 각 문의 문신(門神)이기보다는 각 문의 방향에 해당되는 산천신(山川神)임을 의미한다. 이는 문이 단순히 통행이나 외부의 침략을 막아주는 방어의 역할만을 한 것이 아니라 드나드는 소통의 장소로서, 재앙으로 막혀 있던 인간사가 문처럼 원활하게 뚫리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주목된 것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권32, 雜志1 祭祀
『國朝五禮儀序例』권1 吉禮, 祝板
소신섭·김용현,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조선시대의 강수, 기우제와 기청제, 우박, 서리 및 안개」, 『한국기상학회 학술대회논문집』, 한국기상학회, 1997.
최명림, 「문을 둘러싼 의례와 전망」, 『남도민속연구』16, 남도민속학회, 2008.
최종성, 「한국 기청제 연구」, 『역사민속학』20, 한국역사민속학회, 2005.
남순행(南巡幸)
정의
1909년(융희 3) 1월 7일부터 13일까지 6박 7일간 순종이 통감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대구, 부산, 마산 등 대한제국의 남쪽 지역을 순행한 일.
개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천황의 순행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1,000년 가까이 지속된 막부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인들 사이에서 잊혀져간 천황의 존재를 적극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이에 비해 1909년 1월 순종의 남순행은 전혀 반대의 의미를 가졌다. 한국사의 경우 고대국가가 성립된 이후 왕은 최고 권력자이며 최고 명령권자였다. 그러므로 순종의 존재를 새삼스레 국민들에게 부각시켜야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통감이토 히로부미가 순종의 남순행을 추진한 이유는 통감부와 순종이 얼마나 평화롭게 공존하는지를 대내외에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통감부의 지도 감독 하에 문명개화되어가는 순종황제의 모습을 선보임으로써 구래의 전통을 고집하며 일본의 정책에 저항하는 조선인들을 변화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는 순종과 함께 순행하면서 순종은 가만히 있게 하고 대신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통감부의 정책을 선전하고 선동하였다.
연원 및 변천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의 『이왕궁비사(李王宮秘史』에 의하면 1909년 순종의 남순행은 1909년 신년 하례식 자리에서 통감이토 히로부미가 넌지시 제안을 하면서 시작되어 별실에서 즉시 이완용총리와 합의해 그 자리에서 순종의 재가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순행의 목적은 국내 소요의 안정과 민심 파악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부와 순종이 얼마나 평화롭게 공존하는지를 대내외에 선전하기 위해 남순행을 제안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을 제외하면 국왕이 직접 한반도 변경 지역에 순행한 경우는 없었다. 하물며 순종이 순행을 거행한 1월은 겨울로서 일반인이 여행하기에도 벅찬 계절이었다. 따라서 황실의 전례도 없으며 계절적 상황이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순종의 순행이 거행된 것은 통감이토 히로부미의 속셈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절차 및 내용
남순행은 1909년 1월 4일 순종의 조칙(詔勅)으로 공포되었다. 이 조칙에서 순종은 고종에게 양위받은 후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구활을 위해 노력했는데, 최근 국내 정세의 불안함과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한 것이 염려되어 제왕의 안위를 지키기보다는 이런 혹한기를 무릅쓰고 직접 지방을 시찰하여 백성의 고통을 알아보려는 것이 순행의 목적이라고 천명하였다. 특히 순종은 영친왕의 태사(太師)이며 통감부의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순행에 배종하여 자신을 돕고 난국을 수습하려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순종의 남순행은 1909년 1월 7일부터 13일까지 6박 7일로 계획되었다. 일정은 경성의 남대문역을 기차로 출발하여 대구-부산-마산 등지를 거쳐 경성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순행 일정에 맞추어 수행원은 황실과 정부 요원의 두 부류로 정해졌다. 수행원은 궁내부 41명, 내각 42명, 통감부 13명으로 총 96명이고 이 중 한국인은 68명, 일본인은 28명이었다.
남순행 준비를 위한 인원과 물자의 동원은 전적으로 통감부에서 담당하고 지시하였다. 순행 기간 중에 이용된 궁정열차, 마차, 인력거, 숙소의 배정에 있어서도 일본인에게 우선권이 주어졌으며, 행사의 각종 의식 형태도 일본식이 많이 사용되었다. 아울러 순행지마다 개최된 환영회에서 통감이토 히로부미는 한일 우호와 일본 제국주의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연설을 진행하였다.
순종이 방문하는 순행지마다 수많은 한국인이 모여 환영하였다. 황제가 기차를 타고 지방을 방문하는 것부터 전대미문의 일이었으며 일제가 의도적으로 거리를 정비하고 환영 분위기를 고무한 것도 크게 작용하였다. 이처럼 순종의 남순행은 일제의 통감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일환으로 거행되었는데, 그 목적은 궁극적으로 한국 사회를 자발적으로 일본의 통치 체제에 흡수, 동화하도록 유도하려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순종의 행차를 맞이하기 위해 각 지역 학교와 단체에서 태극기를 비롯한 각종 기념비적인 상징물을 설치하였던 것이 토대가 되어 이후로 민간에서 국가 행사를 준비하고 대응하는 방편이 되었다.
참고문헌
김세은, 「고종초기(1863~1876) 국왕권의 회복과 왕실행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서영희,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이민원, 「대한제국의 성립과정과 열강과의 관계」, 『한국사연구』 64, 1989.
이왕무, 「대한제국기 純宗의 南巡幸 연구」, 『정신문화연구』 30-2, 2007.
이장희, 「남순행일기」, 『국학자료』 9, 문화재관리국, 1973.
노부(鹵簿)
정의
국왕이 주재하는 행사나 행행에 앞서 마련하던 의장의 통칭이면서, 의장을 갖춘 국왕의 행렬을 의미.
개설
동양 고대에는 군주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병기와 기물의 통칭이었으나, 후대로 올수록 제왕이 주재하는 행사와 행행에 동원되어 위의(威儀)를 상징하던 의장물을 지칭하였다. 조선왕조의 노부(鹵簿)는 당(唐)나라와 명(明)나라의 전장(典章)을 모범으로 삼았으나 고려왕조의 전례도 답습하였다. 다만 고려의 노부는 황제국 의장을 사용한 경우가 있었으므로, 조선에서는 명나라와의 책봉관계를 고려하여 제후국의 지위에 맞추어 노부를 정하였다.
연원 및 변천
노부는 원래 군주를 시위하던 병사들의 동원 상태를 정리한 문서의 명칭이었다. 노부(鹵簿)의 노(鹵)는 큰 방패를 의미하였으며, 방패를 든 시위군이 외부에서 군주를 보호한다는 말로 그들의 배열 상황을 기재한 문서가 노부였다. 역사적으로 노부는 중국 고대 진나라에서 기원하였고, 한나라부터 노부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한나라부터 노부는 천자 거가(車駕) 행렬을 의미하였으며, 동원 인원과 의장에 따라 대가노부(大駕鹵簿), 법가노부(法駕鹵簿), 소가노부(小駕鹵簿) 등으로 구분되었다. 이후 당나라와 송나라를 거치면서 의례화되고 국가제도로 정착되었다. 또한 당나라 때는 황제만이 아니라 황제의 아들이나 형제 등의 친왕(親王)과 군신(群臣)이 모두 노부가 있었다. 고려 시대에도 왕태자의 행차에 노부를 두었는데, 조선에서는 세조 즉위 초부터 왕세자 행차에 노부를 설치하였다〔『세조실록』 1년 윤6월 26일〕.
조선 초기에 태조가 즉위교서에서 의장법제(儀章法制)는 고려의 고사(古事)에 의거한다고 하였으므로 노부도 고려의 것을 답습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조선시대 노부는 국왕, 왕비, 세자, 세자빈 등 지위와 서열에 따라 노부의 종류와 배열이 정해졌다. 또한 조선이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제후국의 의장을 사용하였으므로 노부의 구성도 그에 준해 황제국에서만 사용하던 황기린기(黃麒麟旗), 백상기(白象旗) 등은 제외되었고, 군왕만세기(君王萬歲旗)는 군왕천세기로 변경되었다. 이후 오례(五禮)의 체제로 정비된 노부 구성 의장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유지되었다. 예컨대, 대가노부 앞면의 수정장(水精杖)과 금월부(金鉞斧), 뒷면의 산선(繖扇), 전후좌우의 사신기 깃발 등은 그 위치가 그대로 이어졌다.
그런데 군사제도의 변화에 따라 노부의 운영이 변경되기도 하였다. 문종대인 1451년(문종 1) 김종서(金宗瑞) 등이 만든 『신진법』과 세조가 만든 『진법』의 체제에 맞추어 노부의 배열과 운영이 변화되었다. 이들 군제는 형명(形名)과 분수(分數)를 정비한다는 취지하에 오위진법 체제로 운영되었다. 이때 크고 작은 깃발과각(角), 금고(金鼓) 등을 이용하여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노부 대열도 이를 준용하여 움직였다.
이와 함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도입된 개인 화기인 조총과 명나라척계광(戚繼光)의 절강병법(浙江兵法)에 따라 노부 운영은 다시 변화 과정을 거친다. 진법이 기마병(騎馬兵) 위주였던 것과 창검(槍劍), 궁시(弓矢)가 주였던 것에 반해 절강병법은 보병(步兵) 위주의 삼수병(三手兵)을 근간으로 하였다. 따라서 노부의 배열도 조총(鳥銃)을 중심으로 한 삼수병 체제로 바뀌는데, 앞을 호위하는 선상(先廂)과 뒤를 맡은 후상(後廂)의 장병이 사대(射隊)에서 조총병(鳥銃兵)으로 변경되었다. 더욱이 조선 후기로 갈수록 오군영(五軍營)으로 군사체제가 이전됨에 따라 노부를 운용하는 것도 군영별로 다소 차이를 보였다. 예컨대, 오군영별로 소속 군기와 표식이 서로 달라 노부를 호위하고 운용하는 병졸들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밖에 임진왜란 때 도입된 명나라 삼지창의 영향으로 대장기인 둑기〔纛旗〕의 상부도 일지창(一枝槍)에서 삼지창(三枝槍)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대한제국기에는 황제국의 위상에 맞게 명나라 황제 노부 의장을 준용하여 시행하였다. 예컨대 노부 중에 황색을 사용하고 황룡기(黃龍旗)가 등장하였으며, 청나라 의장기의 삼각형태가 아닌 명나라 의장기의 네모형태를 사용했다.
절차 및 내용
조선의 노부 행렬이 중국과 가장 큰 차이점은 동원 인원의 대부분이 도보로 이동한다는 점일 것이다. 오례의 출궁(出宮) 기사와 현전하는 반차도(班次圖)를 살피면 고위관료와 궁인(宮人), 장교를 제외하면 도보로 행차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국왕의 이동수단이 가마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중국의 노부가 황제의 수레를 중심으로 한 것에 비해 조선은 인력으로 이동하는 가마를 사용하였으므로 노부의 구성과 이동도 도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세종대 장영실(蔣英實)이 국왕의 마차를 만들었으나 실패하였고, 정조대 말을 이용한 가마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고종대 인력거와 마차를 이용하기 이전까지 노부의 이동 수단은 인력을 동원한 가마와 도보가 일반적이었다.
노부는 국왕의 가마를 중심으로 사방에 노부 의장인 기치(旗幟)와 병장기(兵仗器)가 고유의 성격에 맞추어 대열을 이루었다. 조선 전기에는 국왕의 행행(行幸)시 병조(兵曹)의 승여사(乘輿司)에서 노부를 담당했다. 태종대는 국왕의 대가를 비롯하여 노부 의장을 승여사 낭관(郎官)의 감독 하에 공조(工曹)에서 만들었다[『태종실록』17년 7월 6일]. 승여사에서 의장을 직접 만들기도 하였다. 세종대에는 태조와 신의왕후(神懿王后)의 혼전(魂殿)인 문소전(文昭殿) 행행에 동원되는 상로(象輅)·염적(厭翟)·요여(腰輿)와 향로와 향합 등을 싣고 가는 작은 가마인 향정자(香亭子) 등을 승여사에서 담당했다[『세종실록』15년 5월 2일].
양란(兩亂)을 겪은 이후에도 노부의 설치는 공식적으로 병조에서 주관하였다[『영조실록』 3년 7월 25일]. 다만 노부의 진설을 신설된 군영과 임시 도감에서 보조하는 경우가 있었다. 예컨대, 길의장(吉儀仗)을 주관하던 예장도감(禮葬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 부묘도감(祔廟都監) 등과 각 군영(軍營)에서는 노부의 준비와 운반을 임시로 담당하기도 했다. 정조대에는 노부사(鹵簿使)를 두어 노부 의장의 배열을 사전에 준비한 그림에 맞추어 정돈하게 하였다. 노부사는 궁궐 내외를 막론하고 노부의 진열을 담당하여, 정조대 행행에 늘 대동하였다. 노부사는 병조판서가 담당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노부의 의장에서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의 사신기(四神旗)는 무속신앙에 영향을 주어 민간에서 재앙과 악귀를 쫓는 벽사(辟邪)를 위한 도구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大明集禮』
『承政院日記』
『御營廳擧動謄錄』
『訓局謄錄』
신명호, 「朝鮮初期 국왕의 車駕變化와 象輅·輦」, 『동북아문화연구』30, 2012.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陵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08.
최진열, 『북위황제 순행과 호한사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