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과 기호학 / 침입과 항쟁
변의수
1. 상징과 역동성
상징은 자동사이다. 개념적 이미지가 아닌 역동적 이미지로서의 실체이다. 기표의 기호학과 기의의 해석학은 타동사로서의 인위소이지만 상징은 스스로 존재해나간다. ‘존재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존재해 나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세계이다.
나는 상징을 ‘제3의 논리’라고 한 바 있다. 에코(1932-) 역시 “상징적 활동은 이미 알려진 세계를 <명명>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찾아내도록 하는 것. 상징은 사고의 번역이 아니라 <사고하는 기관organs>” 이라 했다. 에코는 이 말을 『상징적 형식들의 철학』(카시러)에서 보았다고 했다.
카시러(1874-1945)는 “기호란 생각에 대한 단순한 우연적 표피가 아니라 그 생각의 필연적이고 본질적인 기관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진정으로 엄밀하고 정확한 모든 사고는 <상징적 기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호학>에 의해 지지된다” 고 하였다.
물리학자들은 세계는 결코 하나의 근본적 모형으로 환원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semiology가 아닌 semiotics를 기호학의 학명으로 채택한 1969년 파리 ‘국제 기호학 연구 기구(IASS)의 결정은 적어도 그들로선 옳았다.
그러나, ‘기표학’으로서, 혹은 ‘상징학’의 종속 학문으로서의 한계…영원한 반쪽, 다시 말해 상징을 증명하는 하나의 징표(token)로서의 운명을 지닌 학문이었음을 예감하지 못한 것 같다.
표상자로서의 시인이나 의미 생성자로서의 비평가는 하나의 세계로서의 자신을 자각해야 한다. 세계에서 피어나는 사과나무가 세계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이원성은 언제나 하나(모순)의 제거(투쟁)를 요청한다. 하지만 인간의 눈은 하나가 아닌 두 개이다. 그 한 쌍의 눈으로서 하나를 인식해야 한다. 비 상보성의 이원적 모순, 그것이 인간이라는 ‘근본적 실체’로써 세계에 드러낸 비극인 것이다.
상징은 움직이는 세계이다. 결코, 정지한 세계의 모형 같은 것이 아니다. 상징은 양식으로서의 보조관념(vehicle)이 아니라 움직이는 바퀴로서의 vehicle이다. 책상은 숨을 쉰다. 책상의 내부 세계는 무수한 진동으로 형태를 유지하며 책상 이후의 세계로 변화해 나간다. 책상은 결코 정지한 것이 아니다.
상징은 스스로 존재하는 세계의 징표이다.
우리가 개라는 짐승에게 사슬을 달고 목걸이를 씌우는 건 편견이다. 그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세계의 징표이다. 세계를 ‘인간’이라는 ‘근본적 실체’로 환원하려는 의식을 지니지 않은 그것은 자신 스스로 세계의 징표로서 존재해 나갈 뿐, 인간은 두 개의 눈을 가진 슬픈 의식자이다.
2. 기호학의 침입과 수사학
생물학자가 아닌 칸트(1724-1804)는 놀랍게도『순수이성 비판』에서 “각각의 부분들은 다른 부분들을 만들어내는(그리하여 각각의 부분은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내는) 기관으로 생각해야한다…[유기체]란 조직화되어지는 동시에 또한 자기 스스로를 조직화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생태학이나 시스템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부분’은 ‘부분’ 저 너머의 세계로 생성되며 자신을 우주화 해나간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고립된 부분은 생성으로서의 존재 뒤편으로 소멸한다.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학문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수학, 물리학의 상호 불소통을 상상할 수 없으며, 철학 · 언어 · 심리 · 생물 · 생명 · 인지학이 별개의 영역으로 고립된 그런 끔찍한 상황을 생각할 수 없다. 시와 언어 · 기호 · 철학은 오늘날엔 전체적 상황으로 조직되고 있다.
우리는 그간 기호학이 기생적 학문이라는 폄하를 받을 정도로까지 제반여타 학문에 침착하여 생명을 키움을 목격한다. 뿐 아니라, 기호학은 마치 외계의 생명처럼 자신의 숙주에게 놀라운 힘을 불어넣어 주기까지 한다.
라캉(1901-1981)의 무의식의 고정점(point de capiton)을 공박한 데리다(1930-)의 수사학은 노련한 기호학의 방식이었다. 그는 철학자라기보다 실험적 기호학자로 보는 게 옳을지 모르겠다. 데리다는 소쉬르의 무한 미분적 차이의 기호론과 퍼스의 진행 개념의 역동적 기호학을 연합했다.
학문에 있어서 개념의 불일치는 바벨의 저주나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학문간 유기적 호환을 원천적으로 막는다. 문학 외부의 이론, 개념들이야 그들의 것이니까,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의 덮개마저 가리는 격이다.
오늘날 제반 학 · 예의 장은 상호텍스트적으로 열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학의 진정한 주체성은 제국적 학문들의 정체성을 정확히 투시하고 제어함으로써 지켜질 수 있다.
기호학이 문학의 ‘상징’ 세계를 분석해 들어올 때 과연 그들의 경계역은 어디서 이뤄질까. 기호학의 조작적 해체와 분석 · 조립은 그 주도권을 손쉽게 넘겨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에코의 발언이다.
사실, 낭만주의 미학은 언어의 시적 사용에서 특정한 의미들을 전달하는 기호학적 전략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다만 예술작품이 생산할 수 있는 효과만을 기술할 뿐이다. 낭만주의 미학은 그렇게 함으로써 (미학적 텍스트들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특정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기호 현상의 해석이라는 개념을 미학적 즐김의 개념으로 단조롭게 해버린다.(에코,『기호학과 언어철학』)
‘기호학의 대상이 기호가 아니라 기호의 작용과 활동인 세미오시스’ 라는 현대 기호학의 지표는 의미심장하다. 첫째, 그들이 야기한 개념 혼쟁의 책임으로부터 이미 발을 빼고 있다.(아직 상징과 기호의 혼쟁에 대한 책임을 질타한 문학이론가조차 없지만) 둘째, 보편적 상징 세계로의 의미론적 탐구를 의미한다. 물론 그들은 기표망의 탐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상징의 의미역을 다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수사학은 기호학의 관점에서 정태적 기호의 계열적 분류와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수사학에 기호학이 침윤한다면 화용론적 측면에서 먼저 기생처를 삼아 화학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그것은 곧 언어철학의 문제로 다가갈 것이며 사실, 그러할 때 수사학은 더 이상 불모의 땅의 망령 취급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기호학자들의 작업이기 이전에 수사학의 작업 영역인 것이다.
수사학은 형식적 분절성과 정태성을 고색창연한 전통의 율법으로 생각하는 독선에서 깨어나 살아 움직이는 역동성과 현장성을 얻도록 스스로의 껍질에서 깨어나야 한다. 화용론적 입장에서가 아닌 수사학은 사전 속에 새겨놓은 문자의 화석에 다름 아니다.
3. 상징의 해부와 디나미스
수사학은 비유법의 상징을 협의의 상징으로, 직유, 은유, 환유 등을 광의의 상징으로 규정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수사학은 기호 · 언어 · 신화 · 심리 · 철학 등 여타 분야의 이론과 호환된다.
상징이 언제나 신, 궁극적 실체, 형이상적 세계 등을 암시하는 것도 아니지만, 비유법의 상징 양식은 수사학자들이 얘기하는 그런 형이상적 세계를 제대로 지시하지도 못한다.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수사적 상징에 대한 과욕의 투사이다.
구, 절 범위 내에서의 수사적 ‘상징’은 단편적 이미저리의 문채(文彩)적 기능에 그칠 뿐 형이상적 실체의 지시나 암시가 어렵다. 그들이 의미하는 원대한 목적의 상징은 적어도 연, 혹은 시편 전체를 통해서나 가능하다. 그것도 극단적 추상 상징의 기법으로나 가능할 것이다.
여타 비유법을 상징으로 규정할 경우 그들은 자연스레 광의의 상징으로 편재될 것이며, 그럼으로써 다른 분야와의 상징 개념과 접근이 가능해진다. 물론, 기호학의 기호는 레비 스트로스(1908-1991)나 카시러와 같이 상징의 범주에 귀속시켜야 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수사학은 풍요한 이론적 배경을 갖게 된다.
상징소의 해부학적 나열은 인간소 화학 분자식의 배열 따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 유기적 조직화는 놀랍게도 살아 움직여 초월적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래서 상징은 디나미스로서의 자동사인 것이다.
어쩌면, 상징 양식의 문제나, 표현적 이미지, 그 암시적 대상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정작 의미로운 것은 현전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관심, 그에 대한 사유의 촉발, ‘제3의 논리로의 이행’이다. 그것은 ‘상징’이란 용어의 표면이나 이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시인들의 정신과 독자들의 영혼에 내재한다.
상징은 우리의 혼을 움직인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존재에 관한 참된 통찰에 이르게 한다.
나무를 바라볼 때 나는 곧 나무가 아닌가?
나무를 생각하는 나는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지 않은가,
녹색으로 빛나고 있지 않는가,
-「꿈」부분
왜, 나는 이곳에 있으면서 저곳에 있는 걸까. 왜, 나는 혼자이면서 모두와는 떨어져 있는 걸까. 나는 걷고 있지만 나무는 저곳에 서 있다. 어디에 그토록 틈새가 있어 우리는 가벼운 톱질에도 쉽게 갈라지고 마는 것일까!
이것은 내가 세계를 사랑하지 못하는 근본적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같은 거리에서 같은 생각에 골몰하기로 한 것이다.
나무를 바라볼 때, 나는 나무가 아닌가,
왜, 나는 이곳에 있으면서 저곳에 있는 걸까.
왜, 우리는 하나이면서 서로는 나뉘어져 있는 걸까?
-「상징과 기호학/ 침입과 항쟁」부분
첫댓글 흔적 남기고 다녀 갑니다
좋은글에 ...
올려주신 글에서 상징과 기호학, 침입과 항쟁, 철학적 공부 잘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