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5일 토요일. 오전11시 무작정 나서다.
하얗게 눈이 쌓인 광교산 길을 걷고 싶었다.
매봉과 버들치고개를 거쳐 형제봉에 오르다, 작은 형제봉을 거쳐 도마치고개로 내려오다.
근 네시간 동안 눈길을 걸으며 한 해를 돌아보는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처음에는 머리가 꽉찼는데 가벼워지는 것을 보니 맑은 공기가 몸속으로 스며들었나 보다.
내가 종친분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때가 40년 전이다.
1972년 5월20일 당시 서흥김씨청년회 회지 ‘瑞興 제4집’에 ‘격동하는 세계정세’라는 다소
딱딱한 제목의 글을 싣고부터다. 그 후 나혼자만의 격동의 세월을 한 10여년 보냈는가 보다.
1987년 10월16일 서흥김씨서울화수회 모임 때 찍은 사진속에 내 모습도 보인다.
당시 임원명단도 있다.
서흥김씨친목회가 1956년 10월27일 창립총회를 개최한 이래 서울화수회가 결성되어 거의 해마다 정기총회가 열렸다. 지금의 재경서흥회가 발족한 것은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무렵이었나 보다. 1989년 7월19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제17차 서흥회가 14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재경서흥회 총회 준비 및 지원은 화수회 임원으로 구성된 서흥회가 집행하는 형식을 취했다. 당시의 임원 명단을 보니 화수회 회장은 판영 종원, 서흥회 회장은 두식 종원에 이어 주식 종원이 맡았고 두 모임의 총무를 철식 종원이 맡았다.
서흥김씨친목회 창립총회가 열린지 38년만에 전국의 지방종친회를 아우르는 대종회가 창립되었다. 창립총회는 94년 5월5일 올림픽공원 88호수변에서 350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인득 벽산그룹회장이 대종회 초대회장을 맡았고 대종회 집행부가 다음과 같이 새로 구성되었다. 상임부회장 희구, 사무처장 성주, 총무부장 철식, 재정부장 창운, 사업부장 효영, 종무부장 윤식, 조직부장 관식, 홍보부장 기후, 청소년부장 태호, 감사 은식, 서울지역 임원으로 희덕,
병대, 세영, 두식, 주식, 태원, 동수, 철동, 창식, 태정, 정희, 원배, 종철, 영식, 희옥, 금영, 창동, 희술, 병엽 종원 19분이 이사직을 맡았다.
두시간을 오르니 광교산 형제봉이다. 형제봉 오르는 길목에 세워진 박재삼 시인의 시비(詩碑)앞에 서다. 눈위에서 읽는 감회가 새롭다. 이런 귀절이 있다
진실로 산이 겪는 사철 속에 아른히 어린 우리 한평생 그가 다스리는 시냇물도 여름엔 시원하고 가을엔 시려오느니 사랑을 기쁘다고만 할 것이냐, 아니면 아프다고만 할 것이냐......
자신의 의지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 기후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부모님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우리 서흥문중은 오랜 전통과 문화유산을 조상님들로부터 물려받았다.
조상님의 묘를 돌보고 해마다 시제를 올리며 한 피를 나눈 자손들임을 재확인는 것은 음수사원(飮水思源), 보본반시(報本反始)의 정신을 찾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또 지난 한 해 동안 병국, 윤호, 성용 종원과 한훤당 선현의 유적지들을 두루 답사하며 선조님의 발자취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던 시간을 가진 것은 어쩌면 종사(宗事)에 가장 큰 보람이지 않을까...
이제 2014년이면 대종회가 창립20주년을 맞이한다. 지금 대종회는 20년전 30년 전 분들이 종사의 중심이 되고 있다. 마음들이 모아지면 좋겠는데 희망사항일 뿐이다. 명심보감 성심(省心)에 ‘대면공화 심격천산’이라는 경귀가 있다.
對面共話 心隔千山
얼굴을 마주하고 함게 이야기를 나누지만, 마음은 천개의 산처럼 떨어져 있다.
종사에 정답이 있을까... 하지만 20-30년 종사에 참여한 원로분들이 맡아야 할 책무가 있다. 청장년 종원들에게 종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종사에 대한 이해를 돕고 숭조돈목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나 스스로 20년 넘게 홍보분야 일을 맡고 있다.
종보를 만드는 일, 카페를 운영하는 일은 이제 50대 60대 종원들의 몫이어야 한다.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자 어느새 도마치고개를 다 내려왔다. 하얀 눈길을 삽살개가 꼬리를 치며 덩실덩실 뛰어온다. 한결 기분이 가벼워진다.
2013년 1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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