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흥김씨청년회’ 1967년 10월22일 발족
회지 ‘瑞興’도 1968년 3월25일 첫 발간
1967년 10월22일. 이날은 청년서흥인들이 꼭 기억해두어야 할 날이다.
청년서흥인들의 모임 「瑞興金氏靑年會」가 처음으로 창립된 날이기 때문이다.
당시 격동 변모하는 생활환경과 불안과 부조화의 사회구조 속에 젊은이들은 어떻게 사회에 적종(適從)해야 할지 막막하기 조차했다.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외래사조에 젊은이들이 물들기 시작하고 물질문명에 도취되어 우리 조상, 문화, 역사가 뒷전으로 밀리는 것을 크게 염려하던 젊은 서흥인들 몇몇이 모였다.
비록 적은 인원이기는 하지만 가문의 전통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투철한 윤리의식을 갖고 서흥인의 힘을 모아 국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했던 이들은 1967년 3월1일 첫 모임을 가진 후 근 다섯달만인 10월22일 서흥김씨청년회를 조직한다.
이듬해 청년회지 『瑞興』을 발간하면서 서흥김씨의 위상을 세상에 알리고 선현의 유덕에 보답하여 자손의 도리를 다해보자는 뜻을 도모한다.
「瑞興金氏靑年會」가 조직된 것은 10월15일 서흥김씨친목회가 1967년 10월15일 태능에서 열린이후 꼭 일주일인 10월22일이다. 대학생이 주도하는 이 청년모임의 참석자는 함휘, 성용, 영식, 윤호, 태미, 강숙, 승남, 사민, 명자, 현우 등 10명이다. 이날 청년회의 집행부가 무기명투표로 선출되었다. 회장 태우(兌雨), 부회장 사민(士珉), 부회장 강숙(康淑). 총무부장 성용(聖容), 섭외부장 함휘(咸輝), 차장 태미(兌美), 재무부장 현우(鉉祐), 감사 윤호(潤浩), 감사 영식(英埴),
이들 청년회원들에 자문을 주신 분은 서흥김씨친목회가 1956년 10월27일 창경원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기까지 주비(籌備)업무를 주도하셨던 대한안경광학협회 초대회장을 맡고계신 현선(鉉善) 어르신이다.
청년회 발족에 큰 힘이 되어주신 현선씨는 종로2가 명시당(明視堂)안경점을 직접 경영하고 계셨다. 기록을 보니 현선씨는 이날 청년들에게 대구에 있는 사당의 개축 필요성을 설명하고 선현을 기리는 제례의식의 중요성을 청년회원들에 일깨우셨다.
1968년 8월 김인득(金仁得) 벽산그룹회장이 서흥김씨친목회 회장을 맡으면서 우리문중사업도 강화되기 시작되었다. 김인득 회장은 종중의 단합을 위해 대종회를 결성하고 국역경현록 발간사업 등 숭조경모(崇祖敬慕) 사업을 본격 추진해 나갔다. 인득회장은 홍식(弘埴), 석렬(錫烈), 현선(鉉善) 씨 등 세분과 공동으로 경현록 편집발간사업을 펼쳐 2년여에 걸쳐 완수하기에 이른다. 이 당시가 바로 서흥김씨청년회의 태동시기였다.
서흥김씨청년회는 1968년 3월 대망의 서흥김씨청년회 회지 ‘瑞興’을 발간하게된다. 회지의 제목을 心魂으로 하자는 의견이 과반수이었으나 창간호의 제호를 보니 ‘瑞興’으로 표기되어있다. 1호부터 4호까지 회지를 발간했는데 창간호 제1집의 발간일자가 1968년 3월25일이고 제4집의 발간일자가 1972년 5월20일인 점에 미루어 그 기간 동안 간행사업이 순조롭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68년 3월25일자 창간호는 30쪽 분량으로 철필(일명 가리방)로 긁어서 실끈으로 제본한 것이다. 발행인 金兌雨, 편집위원 김성용(金聖容) 김현우(金鉉祐) 김윤호(金潤浩) 김함휘(金咸輝). 발행처는 성용씨의 하월곡동 집주소로 기록되어있다. 첫장에 ‘서흥김씨청년회 발족 취지문’이 전문 실렸고 이어 서흥지 창간사 그리고 윤호, 성용, 현우, 강숙, 함휘, 태철, 명자, 용식, 영희씨의 자작 詩 14편이 수록되었다. 함휘씨가 ‘못골’기행문을 3쪽분량으로 썼고 윤호씨의 수필 ‘기대’, 함휘씨의 콩트 ‘봄을 맞으며’ 등 대부분 문예창작물들이다.
제2집(1968•겨울)의 형식은 창간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명가의 후예’라는 제목에 ‘이조 5현의 한사람 - 한훤당 김굉필’이라는 부제를 부친 한국일보(1968년9월3일자)기사가 전재되었다. 제3집은 1969년 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나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
1972년 5월20일 발간된 서흥4집은 초창기 재경서흥회 회원들의 이름들이 눈에 띄었다. 병의 종손의 축사에 이어 32쪽 분량의 특집 김은영의 ‘한훤당선생’이 수록되었다. 회원논단으로 김태관씨의 ‘장래의 식품’과 김기후씨의 ‘격동하는 세계정세’ 두편이 소개되었다.
당시KBS 보도국기자이던 필자는 본인의 글이 실린 『서흥 제4집』을 소중히 간직해 두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잊혀졌고 퇴직 후 방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박스에 쌓여있던 회지를 만나게되었다. 기쁨이 밀쳐오는 순간이었다.
『서흥 제4집』의 편집인은 김현우, 김윤호, 김동현, 김숙녀, 김복희씨 등 다섯분이다. 필자는 서흥지1집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 체류중인 당시 회지의 편집인 현우씨에 e-mail을 보냈다. 마침내 회지가 효영씨의 종로5가 효성한의원에 맡겨져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창간호를 포함한 당시의 자료집들은 성용씨가 보관하고 있다가 2007년 2월 당시 대종보편집인 효영씨에 건네져 소중히 보관되고 있었다. 효영원장으로부터 자료를 받아 읽어나갔다.
재무부장을 맡았던 윤호(潤浩)씨는 1967년3월 당시 청년친목회의 발기모임부터 정기총회에서 회지가 발간되기까지의 1년여의 진행사항을 일기형식으로 기록을 남겨두었다. 참으로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당시의 청년들이 이제 70대를 바라보고 있다. 훌쩍 훌쩍 지나는 세월을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기록을 남기는 것이 가장 확실한 일이 아닐까? 한훤당선현의 멸실된 유문들을 생각한다면 서흥인들은 이점에서 특히 분발해야 할 것이다. 서흥인들의 역사와 발자취가 담긴 자료와 기록들이 이제 대종회로 모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
편집자 주 :
서흥김씨청년회 회지 창간호에 수록된 글들을 워드작업을 마치는 대로
대종보 카페 ‘남기고싶은이야기’에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