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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Chapter 4~5_167-170p_2021년 8월 28일(토)
Chapter 5_2_167p History as Progress
These are perhaps the two most popular views of history today. But I shall unhesitatingly reject both of them. This leaves us with that odd, but suggestive, phrase 'a constructive outlook over the past'. Having no way of knowing what was in Professor Powicke's mind when he used the phrase, I shall attempt to read my own interpretation into it. Like the ancient civilizations of Asia, the classical civilization of Greece and Rome was basically unhistorical. As we have already seen, Herodotus as the father of history had few children; and the writers of classical antiquity were on the whole as little concerned with the future as with the past. 이것들은 아마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역사에 관한 견해들이다. 그러나 나는 주저 없이 그들 모두 거부한다. 그러면 우리는 약간 이상하지만 약간 암시적인 ‘건설적인 전망’이라는 것이 남는다. 과거에 대한 건설적인 전망. 알 길이 없기에. 포익 교수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이 표현을 사용했을 때, 나는 내 나름대로 해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과거 아시아 문명들과 같이 그리스, 로마의 고전적인 문명은 비역사적이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헤르도투스는 역사의 아버지이지만 거의 그의 후예들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고전 시대의 저술가들은 대체로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Thucydides believed that nothing significant had happened in time before the events which he described, and that nothing significant was likely to happen thereafter. Lucretius deduced man's indifference to the future from his indifference to the past: Consider how that past ages of eternal time before our birth were no concern of ours. This is a mirror which nature holds up to us of future time after our death.' 투키디데스는 믿었다.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그가 사건을 기술할 그 당시 전에는. 그리고 아무 것도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 했다. 그 이후에라도. 루크레디스는 유추했다.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무관심을 과거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고려해 보라. 우리의 출생 전의 영원한 과거의 시대들은 우리들에게 관심이 없다. 그리고 거울이다. 자연이 우리의 죽음 후 미래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Chapter 5_3_168p History as Progress
Poetic visions of a brighter future took the form of visions of a return to a golden age of the past - a cyclical view which assimilated the processes of history to the processes of nature. History was not going anywhere: because there was no sense of the past, there was equally no sense of the future. Only Virgil, who in his fourth eclogue had given the classical picture of a return to the golden age, was inspired in the Aeneid momentarily to break through the cyclical conception: 'Imperium sine fine dedi' was a most unclassical thought, which later earned Virgil recognition as a quasi-Christian prophet. 더 밝은 미래에 대한 시적인 버젼 형태를 띤다. 과거의 황금시대로의 회귀를. 이것은 순환론적인 견해다. 역사의 과정을 자연의 과정과 유사하다고 보는. 역사는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왜냐하면 과거에 대한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의식도 없었다. 오직 베르길리우스만이 그의 목가 제 4편에서 고전상을 보여줬다. 황금시대의 복귀라는. 그리고 그는 아에네이드에서 잠시나마 고전적인 개념을 탈출하려는 것에 조금 고무되었다. ‘나 끝없는 영토를 남겨 주었노라’는 라는 말은 가장 비고전적이다. 후에 베르길리우스는 반기독교 예언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It was the Jews, and after them the Christians, who introduced an entirely new element by postulating a goal towards which the historical process is moving - the teleological view of history. History thus acquired a meaning and purpose, but at the expense of losing its secular character. The attainment of the goal of history would automatically mean the end of history: history itself became a theocracy. This was the medieval view of history. The Renaissance restored the classical view of an anthropocentric world and of the primacy of reason, but for the pessimistic classical view of the future substituted an optimistic view derived from the Jewish-Christian tradition. Time, which had once been hostile and corroding, now became friendly and creative: contrast Horace's 'Damnosa quid non imminuit dies? with Bacon's 'Veritas temporis filia'. 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기독도인들이 있다. 완전히 새로운 요소를 도입했던 사람들은. 목표를 설정했다. 역사적 과정이 나아가고 있는 목표를 설정했다. 즉 역사의 목적론적인 견해이다. 역사는 그러므로 의미와 목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희생으로 세속적 성격을 잃게 되었다. 역사적 목표의 달성은 자동적으로 역사의 끝을 의미한다. 역사는 그 자체로 theocracy이 되었다. 이것은 중세 사관이었다. 르네상스는 고전적인 견해를 복구했다.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그리고 이성의 우위를. 그러나 비관적인 고전 미래관은 대체했다. 낙관주의 시간은 한 때 적대적이고 침식적이었다. 그러나 이젠 친근하고 창조적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망하지 아니할 것이 무엇이냐?’ 라는 호라티우스의 말과 ‘진리는 시간의 딸이다’라는 베이컨의 말을 비교해 보라.
Chapter 5_4_169p History as Progress
The rationalists of the Enlightenment, who were the founders of modern historiography, retained the Jewish-Christian teleological view, but secularized the goal; they were thus enabled to restore the rational character of the historical process itself. 계몽시대의 합리주의자들은 근대 역사학의 창시자들이다. 유대적-기독교적인 목적론 견해를 유지했다. 그리고 목표를 세속화시켰다. 그들은 그러므로 복구할 수 있었다. 합리적 성격. 역사적 과정 그 자체의 합리적인 성격을 복구할 수 있었다.
History became progress towards the goal of the perfection of man’s estate on earth. Gibbon, the greatest of the Enlightenment historians, was not deterred by the nature of his subject from recording what he called 'the pleasing conclusion that every age of the world has increased, and still increases, the real wealth, the happiness, the knowledge, and perhaps the virtue, of the human race'. 역사는 진보가 되었다. 완벽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가 되었다. 지상에서 인간 지위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가 되었다. 기번, 계몽시대 역사가 들 중에서 가장 위대했다. 기번은 방해받지 않았다. 그의 주제의 성격에 의해 방해받지 않았다. 다음과 같이 기록하는 것에 대해, 소위 기분 좋은 결론. 세계의 모든 시대는 증가시켜왔다. 그리고 여전히 증가시키고 있다. 진정한 부, 행복, 지식, 그리고 아마 미덕, 인류의 진정한 부, 행복, 지식, 그리고 아마 미덕을 증가시켜 왔고, 지금도 증가시키고 있다.
The cult of progress reached its climax at the moment when British prosperity, power, and self-confidence were at their height; and British writers and British historians were among the most ardent votaries of the cult. The phenomenon is too familiar to need illustration; and I need only quote one or two passages to show how recently faith in progress remained a postulate of all our thinking. Acton, in the report of 1896 on the project of the Cambridge Modern History which I quoted in my first lecture, referred to history as 'a progressive science'; and in the introduction to the first volume of the history wrote that 'we are bound to assume, as the scientific hypothesis on which history is to be written, a progress in human affairs'. 진보에 대한 신앙은 가장 정점에 이르렀다. 영국의 번영, 힘, 그리고 자신감이 최고조에 있었을 때, 그리고 영국의 역사가들과 저자들은 가장 열렬한 그 신앙에 대한 지지자들이었다. 그 현상은 너무나 익숙해서 따로 상술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나는 단지 하나 또는 두 개의 문장들을 인용하고자 한다. 보이기 위해서 최근에 진보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우리 사고의 전제가 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액튼은 1896년의 리포트에서, 그 리포트는 내가 이미 1장에서 인용한 바 있다. CMS 1판에 나오는 내용이다. ‘역사는 진보적인 과학이다’ 그리고 1권에서 썼다. 우리는 가정해야 한다. 과학적인 가정을, 그 가정위에 역사는 씌어진다. 인간의 일에 관한 진보로.
Chapter 5_5_170p History as Progress
In the last volume of the history, published in 1914 Dampier, who was a tutor of my college when I was an undergraduate, felt no doubt that 'future ages will see no limit to the growth of man's power over the resources of nature and of his intelligent use of them for the welfare of his race'." In view of what I am about to say, it is fair for me to admit that this was the atmosphere in which I was educated, and that I could subscribe without reservation to the words of my senior by half a generation, Bertrand Russell: 'I grew up in the full hood of Victorian optimism, and ... something remains with me of the hopefulness that then was easy.' 마지막 권에서, 1914년에 발간되었다. 담피어는-나의 학부 대학시절 튜터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느꼈다. 미래 시대는 한계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인간 힘의 성장에 있어서, 자연 자원에 대한 인간 힘의 성장과 그들의 지혜로운 사용, 인류를 복지를 위해서. 내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다음과 같이 인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이 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내가 교육받을 당시, 그리고 나는 주저 없이 동의한다. 나의 선배 버트란드 러셀의 말에 대해. 그는 말하기는 ‘나는 빅토리아 시대의 낙관주의 분위기에서 자랐다. 어떤 것이 남아 있다. 희망이 나에게 남아 있다. 뭔가 쉬운 것 같은.
In 1920, when Bury wrote his book The Idea of Progress, a bleaker climate already prevailed, the blame for which he laid, in obedience to the current fashion, on 'the doctrinaires who have established the present reign of terror in Russia', though he still described progress as 'the animating and controlling idea of western civilization'." Thereafter this note was silent. Nicholas I of Russia is said to have issued an order banning the word 'progress': nowadays the philosophers and historians of western Europe, and even the United States, have come belatedly to agree with him. The hypothesis of progress has been refuted. 1920년에 베리가 그의 책을 썼다. ‘The dea of Progress’. 이 당시 이미 황량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분위기에 대한 책임을 그 당시 유행처럼 교조주의자들에게 돌렸다. 러시아의 공포 정치를 수립한 교조주의자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진보를 서구 문명을 활발하게 하고 조종하는 개념이라고 하였다. 그 이후부터 이러한 기조는 조용해졌다. 러시아의 니콜라스 1세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진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오늘날 서구의 철학자들과 역사가들, 그리고 미국에서 조차도 이미 뒤늦게 동의한다. 그에게. 진보의 가정은 쭉 부정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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