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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김삿갓 방랑기
2020. 11. 10.
방랑시인 김삿갓 (121)
*산속에서 만난 사내 , 임처사(林處士)
오열탄 계곡은 경사가 급해서 물발조차 거셋다. 흘러내리는 물이 바위에 부딪쳐 산산 조각으로
흩어지며, 이것은 뽀얀 물안개로 변하여 눈 앞을 가릴 지경이었다.
이런 물안개는 비가 오지 않는데도 오색 열롱한 무재개를 이따금씩 떠올려 보여주었다.
물보라에 옷을 적시며 구정양장(九折羊腸)의 오솔길을 따라 계곡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니, 높다란 암벽에 커다란 글씨로 "문성대"(文星臺)라고 새겨진 글씨가 보였다.
"문성대 .... ? 옛날에 어떤 선비가 저 바위위에 올라앉아 글공부라도 했더란 말인가 ?"
그렇게 생각하며 바위 위에 올라와 보니, 눈 아래 펼쳐진 경치가 천하일품이었다.
주위에는 수목이 울창한데, 나무숲 너머로는 바다인지 호수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물까지 보였다.
숲속에는 이름모를 새들이 끊임없이 지저귀고 있는데, 해는 저물어 서양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눈앞의 풍경이 마치 선경인 것 처럼 너무도 멋있는지라, 김삿갓은 돌아갈 줄을 모르고 달이 뜨기를
기다리며 넓다란 바위에 넋을 잃은 사람처럼 주저 앉아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었다.
이윽고 동녘 하늘에서 쟁반같이 둥근 달이 밝은 빛을 내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김삿갓은 공중에 뜬, 크고 둥근달을 양 팔을 벌려 가슴에 안아 보이는 사위를 해보이며,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달 가운데 계수나무
옥도끼로 찍어내고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곱게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 만년 살고지고.
하고 노래를 불러 가며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추던 김삿갓을 향해,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시오. 당신은 누구요 ? 귀신이오 ? 사람이오 ? "
"엣 ? 이 산중에 누가 ?"
김삿갓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눈을 들어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저만치 암벽 앞에 사람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머리에는 망건을 쓰고 옷은 바지저고리 만을 입었는데, 내실(內室)에 있다가 나온 차림이었다.
"나는 귀신이 아니오. 귀공은 무슨 일로 이런 밤중에 산속에 혼자 계시오 ?"
김삿갓은 그쪽으로 두세 걸음 다가가며, 큰 소리로 물었다.
상대방도 이내 경계를 풀고, 두세 걸음 가까이 다가오며,
"그 말은 내가 노형에게 묻고 싶은 말이오. 노형은 이 밤중에 무슨 일로 혼자 춤을 추고 있단 말이오 ?"
김삿갓은 너털 웃음을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세상 구경으로 떠돌아 다니는 방랑객이오. 오늘 이곳, 문성대에서 보이는 달이 하도 좋기에
눈으로만 보기에는 너무도 아까워, 춤을 한번 추어 보았다오."
그 소리에 상대방도 소리를 크게 내어 웃었다.
"하하하. 달을 보며 춤을 추었다니 노형은 멋들어진 풍류객인가 보구려. 춤을 추려면 술이 있어야
할 게 아니오. 내가 거처하는 암굴 속에 술이 있으니, 이리 내려 오시오. 춤을 추더라도 술이나
한잔씩 나누고 봅시다."
김삿갓은 그렇지 않아도 술 생각이 간절했던 판인데, 잘 됬다 싶어 그 사람을 따라갔다.
그가 거처하는 암굴은 그가 서 있던 바위 옆에 있었다.
출입구는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게 좁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니 두세 사람이 잘 수 있는 넉넉한 크기였다.
암굴 한복판에는 호롱불이 켜 있는데, 호롱불 주위에는 술병과 북어 같은 마른 안주가 놓여 있었다.
혼자 술을 마시다가 김삿갓의 인기척을 듣고 잠깐 나온 모양이었다.
"우리가 이런 데서 만난 것도 보통 인연이 아니오. 앉으시오. 술을 한잔씩 합시다."
이렇게 말하는 암굴 주인은 한양에서 온 50대의 임채무(林採珷)라는 사람으로 망건을 쓴 얼굴은 볼 살이 두툼하게 붙어있었고, 특히 구렛나루 수염은 유난히 탐스러워 보이는 풍채가 좋은 사람이었다.
김삿갓은 술잔을 받으며 물었다.
"노형은 혹시 산중에서 도를 닦고있는 도인이 아니시오 ?"
그가 고개를 흔들며 대답한다.
"도인이오? 세상에 도인처럼 허황된 인간이 없을 것인데, 무슨 할 일이 없어 도인 노릇을 한단 말이오."
"도인이 아니라면 ... 산삼을 찾아 다니는 심마니는 아닌 것같고.... ? "
얼굴빛과 차림새를 보아하니 심마니는 아닌 것같아, 김삿갓은 말 끝을 흐렸다.
"심마니 ... ? 심마니는 산삼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니까 그런대로 꿈이 있다고는 하겠지만, 그러나 그들의 꿈은 너무나도 작은 것이지요.사람은 모름지기 꿈이 커야 하는거요."
김삿갓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깊은 산중에 홀로 있는 사람이, 도인도 아니고 심마니도 아니라면, 도데체 이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김삿갓이 적이 궁금해하는 기색을 보고, 암굴 주인은 웃으며 자기 소개를 하였다.
"나는 한양에 사는 임처사(林處士)라는 사람으로 내세(內世)의 꿈을 실현 하기 위하여 명산을 두루 편답하는 중이라오."
그러고 보니 암굴 한쪽 구석에는 지남철(指南鐵)이 보였다.
김삿갓은 그 지남철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궁금증이 풀린듯, 소리를 질렀다.
"아 ! 이제야 알겠소이다. 노형은 풍수학(風水學)을 연구하는 지관(地官)이시구려 ? "
"옳게 아셨소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풍수학을 연구해 오는 지술사(地術師)라오.
풍수학은 보통 학문하고는 달라서 현세(現世)가 아닌, 내세(內世)의 부귀와 영화를 추구하는
학문이라오. 따라서 학문 중에서는 가장 원대한 꿈의 철학 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말을 듣자, 사실주의적 생활 철학이 몸에 밴 김삿갓은 소리를 내어 크게 웃었다.
풍수학이 "원대한 꿈의 철학"이라는 말이 허무맹랑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 처사는 좌청룡(左靑龍)이 어떠니 우백호(右白虎)가 어떠니 하며, 풍수설을 장광하게
늘어 놓더니, 나중에는 이런 말도 들려 주었다.
방랑시인 김삿갓 (122)
*명당에 관한 이야기.(醉抱瘦妻明月中 :취포수처명월중 : 달밤에 취기가 오르면 파리한 마누라나 품어 주시오.)
"대지(大地)는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제공하는 "생기의 근원"이에요, 따라서 대지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운명은 땅이 공급해 주는 생기의 활력도에 따라 근본적 차이가 나는 것이라오.
풍수(風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오 ? 풍수라는 말은 "장풍득수"(藏風得水) 라는 말을 두 글자로 줄인 말이라는 것을 아세요."
따라서 풍수라는 것은 숨겨진 바람(혈:穴)을 찾고, 생명의 근원수(水)를 찾는 인간 본연의 생(生)을 향한 노력이라오."
그러나 김삿갓은 임 처사가 무슨 소리를 하거나, 풍수학을 별로 대견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유인 즉슨, 풍수설이란 고대 원시 신앙과 음양 사상이 한테 결부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짧지만 몇 마디 대화로 알게 된 유식해 보이는 김삿갓이 풍수학에 대해 시원치 않은 반응을 보이자, 임 처사는 김삿갓을 설복시키려는 듯 이런 말도 덛붙였다.
"청오경(靑烏徑) 이라는 책에는, 음양이 부합하고(陰陽符合), 천지가 교통하고(天地交通), 외기가 성형(外氣成形) 해야만 풍수가 자성(風水自成) 한다고 했지요."
김삿갓은 임 처사의 시덥지 않은 장광설(長廣舌)을 숫제 봉쇄해 버리려고 퉁바리 어린 소리를 했다.
"풍수설이란 한마디로 요약해, 자손들의 영화를 위해 조상의 뼈를 명당 자리에 묻고 싶어하는 애기가 아니겠소이까 ? 사람이 살아 생전에 하구많은 일중에서 ,하필이면 생산성도 없는 그런 허황된 일로 연구를 하며 시간을 보낸단 말이오 !"
그 말을 듣자, 임 처사는 고개를 설래설래 내젓는다.
"허어 ....노형은 모르는 말씀이오. 사람은 모름지기 현세만 볼 게 아니라, 혜안(慧眼)을 들어,
내일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명당에도 "청학포란형(靑鶴抱卵型)"이니 ,"미인대경형(美人對鏡型)"이니,
"노서하전형(老鼠下田型)"이니 하는 여러가지 형국이 있는데, 어떤 사람을 어떤 형국에 모시느냐에 따라서 그 가문의 흥망이 결정되는 거예요."
"그러면 노형은 마음에 드는 명당 자리를 찾기 위해, 한양에서 멀고 먼 이곳까지 내려와 토굴 생활을
하고 계시다는 말씀이오 ?"
"물론이지요. 나는 명당 자리를 하나만 찾으려는 것이 아니고, 꼭 두 자리를 찾으려고 합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 하였다.
"조상을 명당 자리에 모시면 자손들이 절로 영화를 누릴 수 있을 터인데 무슨 까닭으로 명당 자리가 둘씩이나 필요하다는 말씀입니까 ?"
임 처사는 약간 주저하는 빛을 보이다가 말을한다.
"이왕 말이 난 김에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하리다. 내가 풍수학에 조예가 깊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는 어떤 대관(大官)께서, 자기한테도 명당 자리를 꼭 하나 구해 달라고 신신 당부를 하시는 거예요.
그 어른께서 묻힐 명당 자리하고, 내가 조상을 모실 자리하고, 그래서 지금, 두 자리를 물색하고 있답니다."
"그런 양반한테 부탁을 받았다면 보수가 대단하시겠구려. 명당 자리를 하나 찾아 주는 데 수고비는
어느 정도나 받게 됩니까 ?"
김삿갓은 명당 자리 성공 보수가 궁금해, 눈 딱 감고 물어 보았다.
"그런 일에야 어디 일정한 기준이 있나요. 명당 자리를 부탁하는 사람의 형편에 따라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지요."
"노형의 경우는, 그 방면에 권위자인데다가 상대방은 고관을 지내는 분이라니까, 수고비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 냥쯤은 받아야 할게 아니오 ?"
김삿갓은 그 방면에는 문외한인지라, 크게 부른다는 것이 겨우 "천 냥"이었다.
임 처사는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친다.
"에이, 여보시오. 어느 미친놈이 겨우 천 냥을 받고 명당 자리를 구해 준다오 ? 그 양반은 자기에게 명당 자리를 구해 주면 백 석 타작을 하는 농터 하나를 주겠노라고 하신걸요."
"에엣 ? ..."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입이 딱 벌어졌다. 임 처사가 토굴 생활을 하며 명당을 찾아 다니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밤 두 사람은 술을 마셔가며 명당에 관한 논쟁을 늦게까지 계속하다가 자정이 지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임 처사는 자리에 누우면서 김삿갓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명당 자리를 찾아다녀야 하니까, 노형은 마음껏 주무시다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나시오. 아침은 챙겨 놓고 가기로 하겠소."
"명당 자리는 꼭 새벽에 찾아 나서야만 하나요 ?"
"물론이지요. 명당 자리라는 것은 참으로 기묘한 것이어서, 꼭 아침 해가 비칠 때 보아야만 형국을 제대로 볼 수가 있는 것이라오."
"그러고 보면 명당 자리를 찾아내는 것도 여간한 고생이 아니로군요."
다음날 아침 느즈막히 일어나 보니, 임 처사는 명당 자리를 찾아 나섰는지 보이지 않고, 머리맡에는 암죽과 대추, 날콩 같은 것이 한 접시 놓여 있었다.
산중 생활에 편리하도록 벽곡을 먹고 지내는 모양이었다.
김삿갓은 아침 대신 벽곡을 먹으면서 풍수설에 미쳐 돌아가는 임 처사에게 충고가 담긴 시 한수를 써놓고 암굴을 나왔다.
可笑漢陽林處士 가소한양임처사
가소롭소 한양 사는 임 처사
暮年何學李淳風 모년하학이순풍
어쩌다가 늙으막에 풍수학을 배워서
雙眸能貫千峰脈 쌍모능관천봉맥
두 눈으로 온갖 산맥 꿰뚫어 보며
兩足徒行萬壑空 양족도행만학공
모든 골짜기를 쓸데없이 누비고 다니오.
顯顯天文猶未達 현현천문유미달
눈에 환히 보이는 천문도 모를 일인데
漠漠地理豈能通 막막지리기능통
막막한 땅의 이치를 어찌 알 수 있단 말이오
不如歸飮重陽酒 불여귀음중양주
두말 말고 집에 돌아가 술이나 마시고
醉抱瘦妻明月中 취포수처명월중
달밤에 취기가 오르면 파리한 마누라나 품어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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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23)
*평양 기생.
황해도 땅을 벗어난 김삿갓은 여러 날을 걸어, 석양 무렵에 대동강 나루터에 도착하였다.
김삿갓은 유유히 흘러내리는 강물을 보자, 가슴이 설레와서,
"여보시오. 이 강이 바로 대동강이지요 ?"
하고 감격어린 목소리로 뱃사공에게 확인해 보았다.
그러자 뱃사공은 흥청거리는 소리로 대답한다.
"이 강은 선남선녀들에게는 사랑의 강이요, 이별의 강이요, 눈물의 대동강이라오."
뱃사공으로부터 "눈물의 대동강"이란 말을 듣자, 김삿갓은 다시 한번 도도히 흐르고 있는 대동강 물을 망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대동강 위에서 사랑하는 남녀의 이별이 얼마나 많았으면, 이름모를 뱃사공에 입에서 조차,
"눈물의 대동강"이라는 ,시 와 노래 같은 말이 나왔을까 ? ....)
뱃사공은 푸른 물결을 갈라 헤치며 노를 흥겹게 저어 나간다.
대동강에는 수많은 놀잇배가 떠 있었다.
저마다 멋들어지게 차려 입은 선남선녀들이 가득가득 타고 있는 놀잇배에서는 장구소리와 함께
유량한 노랫소리도 아득하게 들려 오고 있었다.
뱃사공 조차 노를 저으며 흥얼거리는데 , 평양 사람들은 모두가 바람둥이인지, 뱃사공의 노랫소리에도 어깨춤이 저절로 들썩거려질 지경이었다.
"여보시오, 뱃사공 양반! 당신도 노래 실력이 대단한가 보구려 ?"
김삿갓이 웃으며 농담을 건네자, 뱃사공도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
"뱃사공의 종자가 따로 있갔시오? 돈 떨어지면 뱃사공이디요. 나도 한 때에는 한가락 하던 놈이 아니갔시오."
"어쩐지 밑천이 많이 든 노래 같소. 그러면 기생 외도도 많이 했겠구려 ?"
"기럼, 평양내기치고 기생 외도 못 해본 놈이 어디 있갔시오? 뭐니뭐니 해도, 기생 - 하면 평양인 줄 아시라요. 기러니, 손님도 기왕에 평양에 왔으니끼, 눈 딱 감고 기생 외도를 꼭 한번 하고 가시라요.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 세상인데, 인생이란 본시 그런 것이 아니갔시오."
김삿갓도 말로만 들어 왔던 평양 기생 외도가 노상 생각이 없지는 않아, 뱃사공에게 다시 물었다.
"기생 외도를 하려면 돈이 얼마나 드나요 ?"
뱃사공이 웃으며 대답한다.
"기야 기생 나름이디요. 소문난 명기는 돈을 섬으로 퍼부어도 안되갔지만, 허접한 기생들이라면
2,3백 냥쯤 쓰면 문제없을 거외다."
"2,3백 냥이라! .. 그런데 그만한 돈이 없는데, 기생 외도를 공짜로 할 수는 없을까요 ?"
김삿갓이 웃으며 그렇게 물어 보자, 뱃새공은 입을 딱 벌린다.
"아따 그 양반, 배포 한번 대단하시네. 범에게서 날고기를 빼앗아 먹을 재주가 있다면 모를까 ?
기생 외도를 어떻게 공짜로 한단 말이오 ?"
"하하하하.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구려. 그나저나 도데체 평양에는 기생이 몇 명이나 있소?"
"평양 바닥에는 기생이 백사장에 모래알보다도 많디요. 거리에 나다니는 잘 차려 입은 젊은 여자들은 모두가 기생인 줄만 아시라요."
"백사장 모래알처럼 기생이 넘쳐난다면, 외도값도 응당 헐해야 할게 아니오 ?"
"아무리 기생이 차고 넘쳐도 2,3백 냥 없이는 허접한 기생조차 콧배기도 구경할 수가 없을 것이오."
"그래요 ? 그런데 따지고보면 명기나 허접한 기생이나 그 맛 만은 같지 않겠어요 ?"
"허어, 이 양반 ! 재미있는 분일세."
"아무리 그래도 사내가 허접한 기생 외도로 재산을 탕진한다는 것은 너무도 억울한 일이 될것 인데, 당신은 재산을 얼마나 없애 버리셨소 ?"
"나도 강서(江西)에서는 조업(祖業)을 물려받아 가지고 제법 부유하게 살던 몸이디요. 평양에 나와서
기생 외도에 맛을 들였다가 이제는 빈털털이가 되었지만 기래도 고향에는 돌아가고 싶지는 않디요.
지금은 할수 없이 내레 ,입에 풀칠을 하기위해 뱃사공 노릇을 하고 있디만 말이오."
"평양에는 당신처럼 기생 외도로 신세가 처량하게 된 사람이 많겠구려."
"많다 뿐이갔시요 ? 모르면 모르되 기생 때문에 나같이 처량하게 된 놈팡이가 수 백명은 될 것이오."
"후회 되지는 않소 ?"
"눈 앞에 향락이 뒷 일을 가름하게 하지 않디요. 또 내가 저지른 일 인데, 후회 한들 무엇하갔시오.
다 팔자 소관이디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과오를 합리화 하는 방법으로 "팔자"라는 말을 곧잘 써온다.
어쩌면 그런 팔자 타령 때문에 수많은 인생의 역경을 이겨 나가는 끈기가 그런 데 있는지도 모르리라 싶었다.
나룻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눈을 들어 건너편을 바라보니, 왼편으로는 높은 산이 강가의 절벽을 이루고 있었는데, 강 건너 들판에는 수양버들이 실실이 늘어져 있어서, 마치 산이 강 건너
들판을 감싸고 포옹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 산은 무슨 산이고, 강 건너 들판은 뭐라는 곳이지요 ?"
눈앞의 경관이 하도 아름다워 뱃사공에게 물어 보니, 뱃사공은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대답한다.
"절벽을 이루고 있는 산은 평양의 진산(鎭山)인 금수산(錦繡山)이고, 강 건너 수양버들이 무성한 곳은 능라도(綾羅島)라오."
"아, 저게 바로 유명한 능라도인가요 ?"
김삿갓은 감탄해 마지않으며 능라도의 푸른 버드나무를 그윽히 바라보며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시가 떠올랐다.
패강아여답춘양 浿江兒女踏春陽
대동강 아가씨들 봄놀이 즐기려니
강상수양정단장 江上垂楊正斷腸
수양버들 실실이 늘어져 마음 애닮다
무한연사고가직 無限烟絲苦可織
가느다란 버들 실로 비단을 짠다면
위군재작무의상 爲君裁作舞衣裳
고운 님을 위해 춤옷을 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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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24)
*대동강과 양산도.
대동강은 큰 강이다.
김삿갓은 넓은 강을 바라보며 뱃사공에게 물었다.
"대동강에는 웬 강물이 이렇게나 많지요 ?"
뱃사공은 넓은 강물을 둘러보며 대답한다.
"대동강은 여러 개의 강물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강을 이루고 있지요. 개천(价川)에서 흘러내리는
순천강(順川江)과 양덕(陽德), 맹산(孟山)에서 흘러내리는 비류강(沸流江)과 강동(江東), 성천(成川)
등지에서 흘러내리는 서진강(西津江)등 ...세갈래의 물길이 함께 모여 대동강을 이루고 있으니,
물이 풍부할 수 밖에 없지요. 그래서 이름조차,대동강(大同江) 이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뱃사공은 이렇게 말하면서 큰 소리로 노래를 한 곡조 뽑아 내는데,
김삿갓은 속으로 깜짝 놀라면서도, 유유자적한 뱃사공의 멋들어진 노랫가락에 저절로 어깨 춤이 들썩거려졌다.
에헤이예 ~
양덕 맹산 흐르는 물은
감돌아 든다고 부벽루하로다
삼산은 반락에 모란봉이요
이수중분이 능라도로다
에헤이예 ~
대동강 굽이쳐서 부벽루를 감돌고
능라도 저문 연기 금수산에 어렸네
일락은 서산에 해 떨어지고
월출동경에 달 솟아온다
에헤이예 ~
소슬단풍 찬바람에 짝을 잃은 기러기
야월공산 깊은 밤을 지새워 운다
아서라 말어라 네가 그리마라
사람의 괄세를 네 그리마라
에라 놓아라 아니 못놓겠네
능지를 하여도 못놓으리로다
에헤이헤 양덕맹산 흐르난 물은
감돌아든다고 부벽루하로다
삼산은 반락에 모란봉이요
이수중분이 능라로로다
에헤이헤 눈속에 푸른솔은 장부의기상이요
학두루미 울고가니 절세명승이라
삼산은 반락에 모란봉이요
이수중분이 능라도로다.
대동강의 맑고 푸른 물결은 호경(鎬京)을 품어 안고, 해맑기가 비단결 같고 거울 같기도 하였다.
김삿갓은 마치 황홀한 거울과 화려한 병풍 속에 들어 앉아 있는 듯한 착각조차 느꼈다.
주변을 살펴 보니 날이 저물어 산과 강에는 노을이 짙어 가건만, 놀잇배에서는 풍악 소리와 노랫소리가 여전히 유랑하게 들려 오고 있었다.
어느덧 놀잇배에서는 등불을 하나 둘씩, 피어 오르는 꽃처럼 켜기 시작하였는데,
이같은 황홀한 광경을 바라보며,시흥이 도도해진 김삿갓은 즉흥시 한수를 읊었다.
대동강에 떠 있는 수많은 놀잇배들
피리소리 노랫소리 바람결에 들려 오네
길손은 발 멈추고 시름겹게 듣는데
칭오산 빛깔은 구름 속에 저문다.
방랑시인 김삿갓 (125)
* 평양 기생의 숨은 마력.
나룻배가 강을 건너 언덕에 이르렀다.
김삿갓은 언덕에 올라 앉아, 저물어 가는 산과 강을 새삼스럽게 둘러보았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강과 산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정신 없이 바라보고 있던 김삿갓은 시장기가 나며 술 생각이 간절해 왔다.
(에라 ! 남들처럼 기생 외도는 못 하나마 술이나 한잔 마시자)
성안으로 들어가니, 밤거리에는 사람들이 번잡하게 오가고 있었다.
구질구질한 뒷골목을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주천"(酒泉)이라는 간판을 내건 술집이 보였다.
(주천 .... ? 이것은 이태백의 시에서 나온 말이 아니던가.그러고 보면 술집 주인은 시에 능통한 사람인게로군..)
김삿갓은 주저없이 술집에 들어가니, 주인은 남자가 아니고 60이 다 된 파파 할머니였다.
"나, 술 한잔 주시오. 오늘밤 이 집에서 자고 갈 수도 있겠지요 ?"
"좋도록 하시구려. 방은 하나뿐이지만, 선객(先客)이 있으니까 함께 주무시면 될 거요."
주인 노파가 술상을 가져 오는데, 나이는 60이 다 돼 보이지만 본바탕은 제법 예쁜 얼굴이었다.
(이 노파는 기생 퇴물쯤 되는가 보구나.)
김삿갓은 맘속으로 그렇게 짐작하며,
"주천 -이라는 말은 이태백의 시에서 나오는 말인데,그런 이름은 누가 지었나요?"
하고 주인 노파에게 물었다.
"그 이름은 돌아가신 우리 영감님이 지으셨다오."
"술집 이름을 주천이라고 지는 것을 보면, 영감님은 무척 유식했던 모양이죠 ?"
"유식한 것을 아는 손님이야 말로 더 유식하신가 보구려? 안그래요? 호호호..."
하며 주인 노파가 웃으며 말한다.
마침 그때 방안에서 사람의 기척이 들려왔다.
"방안에 누가 계신가 보구려."
"누구는 누구겠어요. 오늘밤 손님과 동숙할 선객이지요."
"나하고 동숙할 손님이오 ?"
김삿갓은 방안에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선, 술을 혼자 마실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방안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방안에 계시는 형씨! 이리 나오시오. 우리 두 사람은 오늘밤 같이 자야 할 처지이니, 이리 나오셔서 술이나 한잔 나눕시다."
방안에 있던 손님은 기다리기나 했던 것처럼 얼른 술청으로 나오며,
"실례하겠소이다."
하며 술상 앞에 마주 앉는다.
나이는 40쯤 되었을까, 무척 우둔해 보이는 시골 사람이었다.
김삿갓은 자기 소개를 하며 술잔을 내밀어 주니, 상대방은 술을 먼저 마시고 나서야,
"나는 황해도 옹진에 사는 강 서방이외다."
하고 말한다.
"옹진서 오셨다구요? 노형도 나처럼 평양 구경을 오신 모양이구려! "
강 서방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는 구경을 다닐 팔자는 못된다오."
"그럼 평양에는 무슨 일로 오셨소이까."
"나는 옹진에서 염전을 하고 있지요. 평양에는 소금값이 금값이라고 하기에, 장사차 소금 한 배를
싣고 왔다가 쫄딱 망해 지금은 알거지가 되어 버렸다오."
"저런 ! 어쩌다가 그렇게도 엄청난 실패를 하셨소?" 그러자 강서방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장사에 밑진 것은 아니라오. 돈은 주체를 못 할 만큼 엄청나게 벌은걸요."
"아니 그렇다면 그 돈은 어떡하고 왜 알거지가 되었다는 말이요 ?"
"왜는 무슨 놈의 왜겠소. 그놈에 기생 외도에 미쳐 그만, 많던 돈을 몽땅 퍼주고, 결국은 알거지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적이 놀랐다.
"에이 여보시오. 기생 외도가 아무리 좋기로 돈을 그렇게까지 퍼 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
"형씨는 아직 모르시는 모양이구료. 평양 기생들은 사람을 어찌나 잘 녹여 대는지, 돈을 있는 대로퍼주고 싶어지던걸요."
"그렇게나 많은 돈을 퍼 주었으면 정도 꽤 많이 들었을 터인데, 그래도 돈이 떨어지니까 상종을 아니 하려 합디까 ?"
"돈 떨어지자 님 떨어진다는 말이 있지 않소 ? 평양 기생들은 소금 한 배를 몽땅 삼켜 먹고도 세상에나, "짜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터란 말이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양천대소를 하였다.
"하하하, 소금을 입으로 먹은 것은 아니니까 짜다는 말을 했을 리가 없지요.
그나저나 돈을 벌러 평양에 왔다가 알거지가 되어서 몹시 후회스러우시겠소이다."
김삿갓이 위로의 말을 들려 주자, 강 서방은 도리질을 하며 말한다.
"알거지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기생 외도를 하다가 알거지가 된 것을 후회 하진 않아요."
강 서방이란 사람은 기가막히게도, 대동강에서 만났던 뱃사공과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
돈을 몽땅 빼앗기고도 후회하지 않는다니, 평양 기생들의 숨은 마력이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어째서 후회를 안 하지요 ?"
"돈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지만, 평양 기생과의 즐겁던 기억은 영원히 남을 것 이기 때문이지요."
"하하하,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겠구려. 평양 기생과의 살림이 그렇게도 즐겁습디까 ?"
"즐겁다뿐이겠어요. 끼니 때마다 진수성찬에, 잠자리 기술 또한 정신을 황홀하게 해 주니, 돈은 둘째치고, 눈앞에 황홀함이 뒷 일을 생각하게 하지 않더란 말입니다."
(* 옮긴이 여담(餘談).... 평양에는 기생 외도 못지 않게, 남자 외도 또한, 즐겁던 기억을 영원히 남게하는 전통이 있는 모양이다. 불법이 되었든 합법이 되었든, 평양을 다녀 온 남쪽에 남자와 여자는 도데체 무엇에 홀리고 왔는지? 한번 다녀오게 되면, 정신줄을 놓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이로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하하, 알거지가 되고도 후회가 되지 않을 정도라니, 알 만한 애기요. 그러면 고향에 내려가
부지런히 소금을 만들어설랑, 한 배 또 싣고 와야 하겠구려 ?"
"아닌게아니라, 돈이 되거든 다시 한번 놀러 올 생각이라오."
그 기생이 누구인지는 알길이 없으나, 강 서방은 그 기생에게 어지간히 미친 모양이었다.
"알거지가 되었다면서, 고향에 돌아갈 노자는 가지고 있소 ?"
"내가 돈이 똑 떨어진 것을 알자, 그 기생은 며, 노자만은 주던걸요. 그것만 보아도 평양 기생들은 얼마나 영리한 여자들이예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자 배를 움켜 잡고 웃었다. 우리나라 속담에 는
말이 있다.
수중에 있는 몇천 금을 모두 퍼 준 처지에, 고향에 돌아갈 노자 몇 푼 돌려 받은 것을 다시없는 은혜로 생각하게 하고 있으니, 평양 기생들의 수법은 기가 막히기도 하지만, 당한 쪽에서 오히려 고맙게 여기고 있으니, 김삿갓으로서는 그저 웃을밖에 없었다.
"대관절 그 기생은 나이를 몇 살이나 먹은 여자요 ?"
김삿갓은 그 기생이 혹시 예전에 들린, 주막 무하향 주모의 도망간 딸, 가실(可實)이 아닌가 싶어, 기생의 나이를 물어 보았다.
"내가 좋아했던 기생의 이름은 라 하고, 나이는 열아홉 살밖에 안 된 기생이라오.
나이는 어리지만, 시도 잘 짓고, 노래도 잘하고 ... 못하는 게 없어요. 게다가 잠자리 기술은 어찌나
좋던지, 마치 손오공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만 같던걸요."
방랑시인 김삿갓 (127)
*재혼 못한 죄.
김삿갓은 주인 노파의 실력을 알아보고 싶어서 물었다.
"내가 아까 이 집에 들어오다 보니, 책을 읽고 계시던데, 책은 어떤 책이었소 ?"
"혼자 심심하던 차에 이런 책을 읽고 있었다우."
주인 노파는 그렇게 대답하며,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책을 집어다 보인다.
김삿갓은 그 책을 받아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 책은 여계(女誡)라는 책으로, 여자의 부덕(婦德)과
예의범절에 대해 소상히 적은, 양가집 규수들이 읽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할머니는 60이 다 돼가지고, 아직도 이런 책을 읽고 있단 말입니까 ?"
"이 책이 어떤 책인가를 알고 계신 걸 보니, 손님은 어지간히 유식한 분인가 보네요.
나는 60이 다 되었지만, 그래도 여자는 어디까지나 여자라오."
"아직도 이런 책을 읽고 계신 것을 보니, 나이에 비해서 정신 연령은 무척 젊은가 보군요."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 :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청춘이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호호호..."
주인 노파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간드러지게 웃는데, 아직도 남자를 끄는 매력의 색기가 철철 흘러 넘치는 웃음이었다.
"영감님은 언제 돌아가셨다고 했지요 ?"
"영감님이 돌아가신 지는 20년이 다 됬다오."
"그렇다면 영감님은 할머니가 40대에 돌아가신 셈이 아니오 ?"
"내가 마흔한 살 때에 돌아가셨다오."
"그래요 ? 나이차가 상당하셨는데, 처녀 총각으로 만나신 것은 아닌가 봅니다?"
김삿갓은 눈 딱 감고 한마디로 물어 보았다.
"네, 처녀 총각으로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영감님이 시를 좋아 하는 유식한 사람이었고
나 역시도 시를 좋아 했고, 열아홉 살에 만나, 20여 년간이나 살림을 같이해 온 우리 부부는 처녀 총각으로 만난, 여닛 부부와 다름 없이 살아온 걸요."
김삿갓이 주인 노파와 이런 말을 주고 받는 동안, 옹진서 왔다는 강 서방은 "매화"라는 기생 생각이 간절했던지,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술만 마시고 있었다.
김삿갓은 주인 노파와 술잔을 나눠 가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할머니는 지금도 10년은 젊어 보이는데, 영감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새파랗게 젊어 보였을 게
아니오 ?"
"아닌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내 나이로 보지 않는다오."
"그렇다면 홀로 되셨을 때, 주변에서 재혼하라는 사람이 많았겠구려."
"여기저기서 재혼을 신청해 오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오. 어떤 중신아비는 나보다도 열 살이나 연하인 젊은 신랑감을 천거해 왔던 일도 있었던걸요."
"그런데 어째서 재혼을 아니 하셨소 ?"
"재혼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영감님이 살아 계실 때 라는 책을 하도 여러번 읽으라고 권했기 때문에, 재혼할 용기는 끝내 내지 못했어요."
"재혼을 못 한 죄는 라는 책에 있었다는 말이군요. 그렇다면 여자들에게는 그런 책을 함부로 읽힐 게 아니네요, 안그래요 ? 하하하..."
김삿갓은 너털웃음을 웃어 보이며, 그런 농담을 하였다.
주인 노파도 어딘지 수긍이 가는 점이 있는지 잠시 명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얼굴을 들며 말한다.
"손님은 무척 유식한 것 같으니, 내가 재혼 문제로 고민하던 심정을 글로 한번 써볼까요 ?"
"좋소이다. 글로 써보시오."
그러자 주인 노파는 재혼 못 한 심정을 시로써 이렇게 써 보이는 것이었다.
육십노과부 六十老寡婦
육십 먹은 늙은 과부가
단거수공규 單居守空閨
빈 방을 홀로 지키오
관송여계시 慣誦女誡詩
여계라는 책을 많이 읽어서
파지임사훈 頗知姙似訓
여자의 도리를 알고 있는 탓이었소.
방인근지가 傍人勤之嫁
이웃에선 시집가기를 권했고
선남안여근 善男顔如槿
얼굴이 꽃 같은 신랑감도 있었지요
백수작축용 白首作春容
나는 흰 머리를 젊게 꾸미자니
영불괴지분 寧不愧脂粉
분 바르기가 부끄러워 시집을 못 갔소.
시를 모두 읽은 김삿갓은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주인 노파에게 말했다.
"이 시를 읽어 보면, 할머니는 재혼을 안 한 것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 못 한 것이 아니오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용기를 내어 재혼 하는 것이 어떻겠소 ?"
김삿갓은 눈 딱 감고 재혼을 적극적으로 권고해 보았다.
60 노파에게 재혼을 권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말이었다.
그러나 주인 노파는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다 늙은 여자가 이제 와서 남부끄럽게 무슨 재혼이에요 ! "
주인 노파의 대답속에, 은연중 재혼의 뜻이 있다는 의중을 읽은 김삿갓은 내심 놀라면서, 상황을 휘감아치기 위해, 재빨리 술잔을 내밀어 주며,
"자. 한잔 드시오 ! 아무리 늙었기로 재혼을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지. 나이가 무슨 상관이오 ?"
하고 또 한번 부추겨댔다.
주인 노파는 술 한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나서 말한다.
"허기는 그래요.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지, 남이 대신 살아 주는 것은 아니지요.."
"물론이지요. 옛날에 어떤 여류 시인이 있었는데, 그 여자가 남편을 여의고 지은 시를 읽어 보면, 홀로 산다는 것은 뼈를 깎는 듯이 괴로운 일인가 봅니다."
"어마 ! 그런 시가 있나요 ? 그 시를 한번 들려 주실래요 ?"
"그럽시다그려 ! "
김삿갓은 이라는 시를 아래와 같이 적어 주었다.
평생리한성신병 平生離恨成身病
님 여읜 슬픔이 병이 되어
주불능료약불지 酒不能療藥不治
술로도 못 달래고 약으로도 못 고치오
금리읍여영불수 衾裏泣如永不水
이불 속에서 홀로 우는 차거운 눈물
일야장류인불지 日夜長流人不知
밤낮없이 흐름을 누가 알리오.
주인 노파는 시를 읽어 보고, 새삼 한숨을 지으며 감탄한다.
"이 시는 어쩌면 나의 심정을 이렇게도 절묘하게 말해 주고 있을까? ..."
"그러니까 외롭게 살지 말고, 지금이라도 재혼을 하란 말이오. 내가 중신을 들까요 ?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어요 ? ...."
주인 노파는 김삿갓의 얼굴을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그윽히 바라 보다가,
"글쎄요 ..... 손님처럼 글을 잘 하는 사람이라야 말이 잘 통하지 않겠어요 ?"
하며 은연중에 김삿갓에게 마음이 있음을 암시해 보이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아무리 계집에 게걸이 들었기로, 60 노파의 기둥서방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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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28)
*"평양 기생은 퇴물이라도 무섭다 !"
그러자 지금까지 묵묵히 술만 마시고 있던 강 서방이 주인 노파의 말을 듣고 샘이 나는지 불쑥,
"여보시오. 주인 할머니 ! 이왕 재혼을 하려거든 이 손님 대신에 내가 어떻소 ?
나는 아직도 기운이 왕성한 놈이라오."
하고 무뚝뚝한 어조로 씨부려대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강 서방의 말을 지나치긴 했지만 농담으로 알았다.
그러나 주인 노파는 강 서방의 말이 비위에 거슬렸던지,
"손님은 아까부터 아무 말도 안 하고 술만 마시더니 어느새 취하셨나 보구려.
술은 그만하고, 이젠 방에 들어가 주무시기나 하시오."
하고 은연중에 따돌리는 태도를 보인다.
강 서방은 그 소리가 비위에 거슬렸던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리며, 씹어 뱉듯이 말한다.
"잘들 해보슈. 재혼을 하려거든 행동으로 할 일이지. 무슨 놈에 말들이 그렇게도 많소."
어제까지도 애송이 기생과 좋아 지내며 가진 것을 모두 털린 강 서방이 설마 60 먹은 주인 노파에게
샘을 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김삿갓은 그의 일거일동이 어디까지나 질투로만 보였다. 질투도 질투지만, 강짜도 보통이 아닌,
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려나 강 서방이 화기롭던 분위기를 휘저어 놓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김삿갓도 주인 노파와 단둘이 술을 마시기가 몹시 멋쩍었다.
그리하여 잠시 후에 방으로 들어와 보니, 강 서방은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요란스럽게
코를 골고 있었다. 김삿갓도 자리에 눕자 이내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잠 늘어지게 자다가 웬일인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으 떠보니, 옆에서 자고 있던 강 서방이 보이질 않았다.
(응 ? 이 사람이 자다 말고 어디를 갔을까 ?)
소피라도 보러 갔으려니 하고 귀를 기울였더니, 주인방에서 해괴망측한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소리란 것이 , 남여간에 교접할 때 나는 소리가 아닌가.
알아보나 마나 강 서방이 자다 말고 안방으로 건너가, 60 노파를 덮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세상에 알 수 없는 것이 남녀 관계로구나 !)
어제까지도 애송이 기생에게 미쳐 돌아가던 강 서방이 설마 60 노파를 덮칠 줄은 몰랐다.
주인 노파는 강 서방을 분명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을 당하고 보니 별로 싫지 않았던지,
노파 자신도 제법 흥겨운 콧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잠시후 강 서방이 건너오자, 김삿갓은 어둠 속에서 강 서방을 놀려댔다.
"밤잠도 못 자고 부역을 치르느라고 수고가 많구려 ! "
강 서방은 약간 어색한 어조로,
"형씨가 마음에 없어 하길래, 내가 대신 부역을 치렀소이다."
하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애송이 기생만 데리고 놀다가, 늙은이를 상대해도 흥이 납디까 ?"
"매화 생각이 간절하지만, 매화는 만날 수가 없기에 홧김에 한 서방질이지만, 따지고 보면 젊었거나 늙었거나 그 맛은 그게 그겁디다."
강 서방은 그렇게 대답하며, 자리에 누워 만족스러운 자세로 네 활개를 쫙 편다.
"아무튼 형씨 덕택에 내일 아침은 반찬을 잘 얻어먹게 되었소."
김삿갓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놀려대었다.
다음날 아침 조반상이 들어오는데, 김삿갓이 이미 예언한 대로 반찬이 푸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김삿갓은 밥상에 마주 앉으며 강 서방을 또 한번 놀려댔다.
"형씨 덕택에 오늘 아침은 내가 생일을 쇠는 셈이오."
강 서방은 씩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가는 정이 있었으니 오는 정도 있어야 할 게 아니오. 주인 늙은이는 형씨에게 마음이 있던 모양이었지만, 형씨가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기에, 내가 대행을 했을 뿐이오."
"처녀가 애기를 낳아도 할말이 있다더니, 아무튼 나를 위해 수고해 주셨다니 고맙소이다."
주인 노파는 쑥스러운 탓인지, 두 사람이 밥을 먹는 동안에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이윽고 김삿갓이 행장을 차리고 나서며 강 서방에게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했다.
"나는 먼저 떠나겠소. 형씨는 며칠 더 묵어서 떠나시오."
마침 그때 주인 노파가 옷을 곱다랗게 차리고 나타나다가 김삿갓에게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어머나 ! 벌써 떠나시려구요 ?"
"나는 모란봉 구경을 가는 길이오."
"모란봉 구경을 가신다구요 ? 뭐니뭐니 해도 경치가 좋기로는 모란봉이 제일이라우."
주인 노파는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
"참, 모란봉 애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내 어릴 때 이름도 이랍니다."
하고 묻지도 않은 자기 이름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주인 노파가 이라고 잔뜩 치켜 올려놓고 나서,
이라고 말하는 것이 밉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얼른 이렇게 비꼬아 주었다.
"나는 평양 구경을 떠날 때, 평양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어 보았는데, 어떤 중국 사람이 모란봉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시를 지었더군요."
"그 시가 어떤 시였는지, 여기 좀 적어 주실래요 ! "
그러면서 주인 노파는 종이와 붓을 갖다 놓았다.
김삿갓은 서슴치 않고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써갈겨 주었다.
문도목단봉 聞道牧丹峯
이름이 모란봉이라 들어 왔건만
목단화사노 牧丹花巳老
모란꽃은 이미 너무도 늙었네
막한봉무화 莫恨峯無花
모란봉에 꽃이 없다 나무라지 마시오
봉명역자호 峯名亦自好
이름만으로도 그런대로 좋은 것을.
남의 시를 빌려 주인 노파의 늦바람을 비꼬아 준 것 이었다.
그러자 주인 노파는 대수롭지 않다는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시는 풍류를 모르는 사람의 시로군요. 꽃이 좋다는 것만 알았지 단풍이 더 좋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군요. 라는 말이 있지 않아요 ?"
주인 노파의 재치 있는 반격에 김삿갓은 머쓱해졌다. 늙다리 퇴물 ,평양 기생은 결코 ,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코침을 한대 맞은 김삿갓은 너털 웃음을 웃으며
객줏집을 나서려고 하였다.
그러자 주인 노파는 김삿갓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는지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오며,
"평양 구경을 하시다가 오늘 저녁에 또 오실래요 ?"
하고 묻는다.
"나는 워낙에 기러기 넋이 되어서 ... 오게 되면 오고, 못 오게 되면 못 오고 ..."
딱 잘라 거절하기가 민망해서 애매하게 대답해 주니,
"아무래도 좋아요. 돈은 별로 많지 않아 보이니 , 돈 떨어지거든 언제든지 들르세요.
술은 공짜로 대접할게요."
하고 김삿갓이 다시 왔으면 하는 말투다.
"술을 공짜로 먹여 주겠다니 고맙구려."
김삿갓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려다가, 문득 평양으로 도망간 무하향 주모의 딸이 생각나서,
"참, 평양에 본명을 가실(可實)이라고 하는 기생이 있을 터인데 그런 기생을 모르시오 ?"
하고 물어 보았다.
"본명만으로는 사람 찾기가 어렵지요.기명(妓名)을 뭐라고 하지요 ?"
"기명은 나도 모르지요. 분명이 이름이 인 것은 틀림없어요."
"평양에 기생이 몇천 명이 있는데, 기명조차 모른다면 사람을 어떻게 찾는다오 ?
나이는 몇 살이나 되지요?"
"나이도 자세히 모르지만, 아마 30은 넘었을 것이오."
"기생 환갑이 20이니까, 30이 넘었다면, 환갑을 지난 지 벌써 10년이나 되는 셈이네요.
그런데 손님은 그 기생과 특별한 관계가 있으신가요 ?"
주인 노파는 ,나이가 60이 넘은 퇴물 기생인 주제에 질투하는 어조로 대꾸한다.
김삿갓은 속으로 기가차 하면서 , 주인 노파에게 적당히 휘감을 쳐버리고 객줏집을 나오며 혀를찼다.
(에구, 평양 기생은 퇴물이라도 무섭다 ! )
방랑시인 김삿갓 (129)
*금수산 을밀대에 올라.
모란봉에 올라 보니 저 멀리 눈 아래 푸른 비단폭처럼 대동강이 넘실거리는 것이 장관이었고,
강 건너 능라도에는 실실이 늘어진 수양버들이 바람결에 흐느적 거렸다.
때마침 산에는 진달래 꽃이 만발해 있어 삼삼오오 모란봉을 찾는 상춘객이 입은 백의(白衣)가
연보랏빛 진달래 색깔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어 , 온 산이 붉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아아, 우리가 백의 민족(白衣民族) 으로 자랑 할만 하구나, 그리고 금수산은 단순한 금수강산의
한 면이 아니라 지상의 선경(仙境)임이 분명하구나 !)
김삿갓은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한동안 넋을 읽고 취해 있었다.
고려때 시인 권한공(權漢功)이 평양 구경을 왔다가 , 모란봉 위에서 대동강을 굽어보며 시를 지은 일이 있는데 그 시는 이러하였다.
모랫가의 푸른나무는 봄빛이 엷고
물에 비친 청산에는 저녁놀이 짙구나
물 속에 있는 듯 원근조차 모르겠는데
어디선가 석양에 노랫소리 들려 오네.
이윽고 금수산 꼭대기에 올라 오니, 평탄하고 훤칠한 을밀대(乙密臺)가 나온다.
거기는 사방이 탁 틔어 있어서 어디든지 마음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곳 이므로 을밀대를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하늘로 날아 올라갈 듯이 네 활개를 활짝 펴고 있는 사허정의 웅자 (雄姿) !
언젠가 이곳 사허정에 올라온 당나라 시인이 이곳의 경치에 감탄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한다.
금수산 산머리에 손바닥처럼 평평한 대가 있네
모름지기 하늘에 사는 신선이 바람을 타고 때때로 놀러 오는 곳이리.
때마침 정자 위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많은 하객들이 엉겨 돌아가는데, 한편에서는 기생들이 풍악에 맞춰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 잔치가 무슨 잔치요 ?"
김삿갓은 옆에 있는 하객을 붙잡고 물어 보았다.
"이 잔치는 평양 갑부인 임 진사 댁 회갑 잔치라오."
김삿갓은 출출하던 판인지라, 마침 잘되었다 싶었다.
회갑 잔치라면 술과 음식을 마음껏 얻어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삿갓은 사람틈을 비집고 정자 위로 올라와 보았다.
백발이 성성한 임 진사 내외는 온갖 음식이 요란스럽게 차려진 환갑상 앞에 단정히 앉아,
그의 아들과 사위들 내외에게 헌수배(獻壽盃)를 받고 있었다.
이런데다가 바로 옆에서는 4,5명의 기생들이 은은한 풍악에 맞춰 나비처럼 춤을 추며 "태평가"를
나지막하게 부르고 있는데,
이래도 태평성대
저래도 태평성대
요지일월(堯之日月)이요
순지건곤(舜之乾坤)이라
오늘도 태평성대니 만수무강하소서 ....
자식들과 친척들의 헌수배가 끝나자, 하객들의 차례였다.
김삿갓도 하객 행렬 속에 끼어 들어 축배를 올리며 덕담을 늘어놓았다.
"오늘의 수연(壽宴)을 진심으로 축아하옵니다. 바라옵건데 학수천세(鶴壽千歲) 하시옵소서."
음식을 푸짐히 얻어 먹으려고 축배를 올렸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자 임 진사는 김삿갓을 마주 보다가 적이 놀라는 얼굴을 하며,
"이렇게 축하를 해주니 고맙소이다. 그런데 귀공은 누구신지 기억이 분명치 않구려.
귀공의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이니, 이름을 모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이었다.
김삿갓은 어쩔 수 없어,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불청객이올시다. 모란봉 구경을 왔다가 수연을 베푸시기에, 우연히 축하의 말씀을 올리게 된 것이옵니다."
"모르는 사이 인데도 이렇게 축하를 해 주셔서 더욱 고맙소이다. 축하까지 받았으니, 이제는 피차간에 서로 알고 지내야 할 게 아니겠소 ?
나는 임현식 (林賢植)이라는 늙은이오. 귀공의 함자는 어떻게 되시오 ?"
임 진사가 부득부득 이름을 알고자 하므로, 김삿갓은 아무리 싫어도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 이름은 "김립(金笠)" 이라고 하옵니다."
"옛 ? 김립 선생 - 이라면 방랑 시인으로 유명한 "삿갓 선생" 이라는 말씀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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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30)
*김삿갓 환영연으로 변한 회갑 잔치.
임 진사가 누구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고 묻는 바람에, 김삿갓은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제가 "김삿갓"으로 불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유명하다"는 말씀은 당치 않은 말씀 입니다.
임 진사는 어쩔줄 모르도록 기뻐하면서, 감격에 찬 소리로 말을한다.
"선생을 이런 자리에서 만나 뵐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오늘 같이 기쁜 날, 선생께서 이런 자리에 나타나시게 된 것은, 하늘이 나에게 내려 주신 또 하나의 축복 입니다."
임 진사가 자신을 알아 보고 너무도 기뻐하므로, 김삿갓은 어리둥절할밖에 없었다.
"진사 어른께서는 제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시옵니까 ?"
"무슨 말씀을! 시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선생의 함자를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소이까.
나는 수년 전에 금강산 구경을 갔다가 그곳을 먼저 다녀가신 김삿갓 선생의 말씀을 너무도 많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선생을 한번 만나 뵙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는데, 이렇게 나의 환갑 잔치에 우연히 왕림해 주실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그러면서 가족들을 김삿갓에게 일일이 소개하고 나서, 김삿갓에게 술잔을 직접 건네주며 말한다.
"선생이 나에게 축배를 주셨으니, 나도 선생께 반배(返盃)를 올리겠소이다."
"고맙습니다. 이 잔을 영광스럽게 받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 영광스러운 사람은 오히려 나 자신올시다."
김삿갓이 어떤 위인인줄 모르는 축하객들은, 임 진사가 거지 행색을 하고 나타난 김삿갓을 귀객으로 환대하는 광경을 모두 경악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임 진사는 주위를 돌러보며,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이 어른은 우리나라의 시선(詩仙)이신 김삿갓 선생이시라오.
오늘 이 자리에 이 어른을 모시게 된 것은 나의 다시없는 영광이오."
하고 소개하며, 또 다시 술잔을 건네는 것이었다.
임 진사의 회갑 잔치는 김삿갓이 나타남으로서 졸지에 김삿갓을 위한 환영연으로 둔갑한 느낌이었다.
김삿갓은 매우 계면쩍어 자리에서 일어서며,
"시생은 술을 마실 만큼 마셨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고 꽁무니를 빼려고 하자, 임 진사는 한사코 손목을 붙잡고 늘어진다.
"선생이 오시기는 맘대로 오셨지만, 가시는 것만은 맘대로 못 가시옵니다. 선생께 부탁드릴 일이
있사오니, 꼭 들어 주십시오."
김삿갓은 "부탁"이라는 소리에 어리둥절하였다.
"저에게 무슨 부탁이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
"선생도 보셨다시피, 이 자리는 우리 집안에서는 다시없는 기쁜자리 올시다.
이 자리에 선생이 참석해 주신 것을 두고두고 기념하고 싶사오니, 선생은 이 자리에서 자작시 한 편만 친필휘호(親筆揮毫)를 해 주시옵소서.
그러면 우리 가문에서는 대대로 물려가며 가보로 삼겠습니다."
"시생의 글씨를 가보로 삼으시다뇨.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
김삿갓은 지금까지 수많은 즉흥시를 읊어 왔지만, 누구한테 부탁을 받고 지은 시가 아니라, 그때그때 흥에 겨워 아무렇게나 읊어 댔던 것이다.
그러려니 남의 부탁을 받고 휘호를 해 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임 진사는 간곡히 부탁을 하며, 사람을 시켜 지필묵(紙筆墨)까지 갖다 놓게 하는 것이 아닌가.
<동여 놓고 치는 매는 피할 수 없다>고 했던가.사태가 이쯤 되고 보니, 이제는 피할 길이 없게 되었다.
"그러면 , 제 글씨가 서툴기는 하지만, 시를 한수 써보기로 하겠습니다."
김삿갓은 그렇게 말하며 붓을 들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붓을 들었기 때문에 어떤 시를 써야 할지 지극히 막막하였다.
당연히 수연을 축하하는 시를 써야 하겠지만, 창졸간에 당하는 일이어서 시상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었다.
손에 붓을 든 김삿갓이 눈을 들어 사허정 아래를 굽어 보니, 능라도의 푸른 버드나무 숲과 하얀
모래밭이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하얀 모래는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붓을 든 김삿갓의 손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가련강포망 可憐江浦望
저 멀리 강포 풍경 아름다워라
명사십리연 明沙十里連
고운 모래가 십리나 이어져 있네
영인개개습 令人個個拾
그 모래 하나하나 모두 주워다 놓고
기수부모년 其數父母年
양친부모 그만큼 수를 누리게 하소서.
아무 생각도 없이 모래사장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에 즉흥적으로 써갈긴 시였다.
이것을 지켜 보던 어떤 하객은 너무도 놀라워,
"야아, 시 한 편을 눈 깜빡할 사이에 써갈기니 과연 시선이 틀림없구나!"
하고 감탄하는가 하면, 또 어떤 하객은,
"시도 좋지만, 글씨가 또한 명필일세그려 !"
하고 맞장구를 쳐보인다.
임 진사는 휘호를 한 폭 받고나자 춤을 출 듯이 기뻐하며 옆에 있는 자식들에게 명령한다.
"얘들아! 이런 귀한 선물을 받고 그냥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어른을 우리 집 별당으로 모시게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