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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릴: 모르겠어, 숨을 제대로 못쉬겠고……. 그래, 너 때문이야, 틀림없어 너 를 만나서 긴장이 되는거야
제스: 긴장이 돼? 나 때문에, 난 고등학교 동창이야!
뮤릴: 그래도 넌 이제 옛날 고등학교 친구가 아니라, 헐리우드의 프로듀서 아냐!
제스: 헐리우드의 프로듀서? (소파에 앉으며) 그래도 난 하나도 변한게 없어. 영화 몇편을 만들었을 뿐 아무것도 달라진건 없어
뮤릴: (소파로 오며) 영화 몇편이라구? 네가 만든 "부활절"이란 영화가 지금도 상영중이잖아? 난 그거 보려고 아이들 셋다 데리고 몇시간이나 비 맞으면서 줄을 섰다구
제스: 왜 그런 바보짓을 했어? 뉴욕에 있는 내 사무실로 전화를 했으면 표를 보내줬을텐데, 앞으로 내가 만든 영화 보고 싶으면…….
뮤릴: 난 그러기 싫어
제스: 왜?
뮤릴: 너를 안다는걸 그런데 이용하긴 싫거든
제스: 이용하다니?
뮤릴: 그건 이용하는거야
제스: 좀 이용하면 어때?
뮤릴: 사무실 전화번호가 몇번이야?
제스: 그래, 가기전에 알려줄꼐 (일어난다.) 우선 앉아서 한잔할까?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게 많아
뮤릴: 아니, 술은 안마실 꺼야
제스: 왜? 조금 만 마셔
뮤릴: 안돼 너나 마셔, 난 5시에 미장원에 가야돼
제스: 술을 전혀 못마셔?
뮤릴: 아니,아주 가끔 아주 조금 마셔,……. 난 집에 가야되는데, 여기 있으면 안돼, 애들이 학교에서 곧 돌아올테고, 래리 저녁 준비도 해야되는데, 아직 쇼핑도 못했으니……. 그냥 인사차 잠깐 들린거야
제스: 뭐 마실래?
뮤릴: 보드카!
제스: 곧 갖다줄께 (술병들 있는데로 간다.)
뮤릴: 한잔만 마시고 갈꺼야 (소파에 앉아서) 휴,이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지네, 기분이 좀 나아졌어
제스: (숨을 쉐이커에 붓는다.) 왜 그리 긴장을 해? 그러지 말고 긴장을 풀어, 뮤릴, 응?
뮤릴: (불만스러운듯) 배우을이 긴장하고 있으면 그런식으로 얘기하니? 브룩 쉴즈에게도 그렇게 말해?
제스: 난 배우한테 직접 얘기하지 않아. 감독들을 시키지……. 아니, 도대체 왜 그렇게 긴장하는거야?
뮤릴: 드디어 신경질을 부리는군……. 솔직하게 얘기할까?
제스: 그래
뮤릴: 호텔방에서 대낮에 술을 마시고 있다는게 이상해. 난 결혼한 유부녀 거든
제스: (칵테일을 가져온다.) 그게 이상하면 우리 아랫층 술집으로 내려갈까?
뮤릴: 아냐, 그냥 여기 있어
제스: (술잔을 주며) 좋아, 그럼 뒤로 기대서 편히 앉아 (소파에 그녀 가까이 앉는다.)
바구니를 가리키며) 이것도 갖고 가요.
종두 눈동자. 그것은 어둡고 둥근 하나의 우주 모양을 닮았다. 그 위에 차갑고 푸른 하늘이 어려 있다. 그 위에 한 꺼풀 물기가 맺히더니 눈물이 되어 떨어진다. 초현실적이며 환 상적인 이미지.)
59. 옥상 위 (외부, 낮)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리는 공주의 얼굴. B.S.)
(L.S. 우리는 이제 이곳이 아파트 옥상 위임을 알 수 있다. 낡고 지저분 하며 몹시 황량한 옥상 한 가운데 휠체어를 탄 공주와 종두가 있다.)
60. 종일의 집 앞 (외부, 낮)
(한쪽에 배관공사를 하고 있는 골목길을 종두가 걸어가고 있다. 왠지 기분 더럽게 좋아 보인다. 그리고 뭔가 자랑하고 싶어 근질근질해 하는 그런 표정이다. 문득 걸음을 멈춘다.)
종두: 엄마!
(집 앞에서 엄마와 종일의 처, 그리고 목사가 나오고 있다. 목사는 40대 의 매우 진지해 보이는 사람이다.)
엄마: 오늘은 어째 이리 일찍 들어오냐? 인사 드려. 우리 교회 목사님이시다.
종두: 안녕하세요?
목사: 예, 안녕하세요?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고생 많았지요?
엄마: 우리 집에 심방 오셨다가 지금 가시는 길이다.
종두: (제법 의젓하게) 수고 많으십니다.
엄마: (목사에게) 얘 어릴 때 성가대 참 열심히 했어요.
목사: (종두를 유심히 보며. 마치 그의 영혼에 관심이 많다는 듯이) 예.
(종두, 인사하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몇 걸음 가다말고 멈춰 서 서 뒤를 돌아본다.)
종두: 저기요! (목사에게 다가간다.) 저, 부탁이 있는데요…… 목사님 지금 절 위해서 기도 좀 해주시면 안되요?
(사람들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이다. 장난인 줄 알고 엄마가 주먹으로 종두를 때린다.)
종일 처: 삼촌, 왜 그래요?
(그러나 종두의 표정은 매우 진지하다.)
목사: 지금요?
종두: 예.
목사: (약간 감동 받은 눈치다.) 그럽시다. 지금 같이 기도하십시다.
(목사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먼저 주차해 있는 차들 뒤쪽으로 걸어간다. 모두가 그 뒤를 따라가 어느 차 뒤쪽의 좁은 공간에 모여 선다. 기도를 시작한다.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골목 한쪽에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 는 그들의 모습은 조금 기묘해 보인다.)
(W.S. 정도. 기도하고 있는 목사. 네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둘 러서있다.)
목사: 아버지 하나님, 여기 당신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가련한 영혼이 있 사오니, 거두어 주십시오. 그의 죄를 씻어주시고 그의 영혼이 더 이상 더럽혀지지 않고 방황하지 않도록 은혜 베풀어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 다. 이제 이 젊은 영혼이 아버지의 사랑으로 거듭나길 원하고 있사오 니……
(간간이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엄마와 형수. 기도를 듣는 도중에 종두는 몰래 눈을 쳐들어 하늘을 본다. 그는 정말 뭔가를 간절히 기원하는 것 같은 얼굴이다.)
61. 카 센타 안 (내부, 낮)
(작업장에서 차를 손보고 있는 종일.
종두가 들어와 일하고 있는 종일에게 다가온다.)
종두: 형님!
(종일 힐끗 쳐다보고 계속 일한다.)
종두: 형님, 나 일 좀 가르쳐 줘요.
(종일, 그제서야 종두를 쳐다본다.)
종일: 니가 일을 배우겠다고?
종두: 예.
종일: 여기서? 나한테?
종두: 예. 자동차 정비 일 좀 배워보죠, 뭐. (계속 몸을 끄덕거린다.) 할 수 있어요. 열심히 할게요.
종일: 너 무슨 일 있냐? 왜 그래?
(다른 차로 걸어간다. 종두, 그 뒤를 따라간다.)
62. 카 센타 안 (외부, 저녁)
(카 센타의 작업장. 들어올려진 차 밑바닥에서 종두가 김군에게 일을 배우고 있다. 김군은 얼핏 보기에도 스무 살 정도밖에 안돼 보이는 애 송이다.)
김군: 그건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했지. 그런다고 돌아가나.
종두: (나름대로 열심히 돌려보지만 말을 안 듣자) 아이 씨발 어렵네. 이거. 야, 어떻게 하냐?
김군: 야아? 야, 라니?
종두: 선배님.
김군: 그렇지.
종두: 선배님 이거 어떻게 해요?
(김군이 능숙하게 시범을 보여준다.)
63. 공주의 집 욕실(내부, 낮)
(공주의 집 좁은 욕실 앞 벽에 공주가 기대어 앉아 있다. 욕실 안에서 는 종두가 공주를 위해 빨래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리를 걷어 붙이고, 이불 홋청, 커튼 등 온갖 밀린 빨래들을 빨고 있다.)
공주: 무스은 새글…… 조아해요?
종두: 무슨 색 좋아하냐고? (이런 질문 처음 받아보았다.) 에또……
공주: 나아는 흰 색이 제일 좋아요.
종두: 나도 흰색이 좋아. 깨끗하잖아.
공주: 계절은 어느 계절이 제일 좋아요?
종두: 어…… 여름.
공주: 나는 겨울이 좋아요. 여름은 싫어요. 땀 나고…… 모기, 파리 땜 에…… 모기, 파리 너무 싫어요.
64. 공주의 집 베란다(내부, 저녁)
(종두가 거실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고 있다. 공주는 베란다와 거실 사 이의 문턱에 앉아 있다.)
공주: 음식은요?
종두: (이건 자신 있다.) 짜장면! 짜장면보다 더 맛있는 음식은 세상에 없지. 군대 갔을 때, 진짜 짜장면 먹고 싶더라. 마마는 뭘 좋아해?
공주: 난 다 잘 먹어요. 없어서 못 먹지. 콩만 빼고.
종두: 콩?
공주: 난 콩을 제일 싫어해요.
종두: 콩을 왜 싫어해?
공주: 콩 먹으면 구역질 나. 콩 진짜 이상해.
(자기 말이 우습다는 듯이 소리내어 웃는다. 거실 쪽에서 문소리가 들 린다. 놀라는 두 사람. 옆집여자의 소리가 들려온다.)
옆집여(O.S.): 공주야!
(종두, 당황하다가 베란다 구석으로 숨는다. 공주에게 뭐라고 손짓한다.)
65. 공주의 집 거실(내부, 저녁)
(옆집 여자가 외출하는 차림으로 현관 문간에 서 있다.)
옆집여: 누가 왔어?
공주: (당황해서) 아, 아…… 아니에에요……
옆집여: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던데?
공주: 나……나디오……
옆집여: 라디오? 천날 만날 라디오만 듣고 있냐? 라디오 지겹지도 않아?
(공주, 웃는다.)
옆집여: 나 지금 바빠서 너 저녁 못 채려주고 가거든. 낮에 준 거 그대로 남았던데 그거 먹고 있어, 응?
공주: 개, 갠차나요. 배 안고파요. (말을 하면서 웃는다.)
옆집여: 왜 웃어? 뭐 좋은 일 있어?
(공주, 대답없이 웃기만 한다. 옆집 여자, 별 일이란 듯이 보다가,)
그럼 간다!
(문을 열고 나간다. 문이 소리내어 닫힌다.)
66. 공주의 방(내부, 밤)
(불이 꺼진 공주의 방. 두 사람이 벽에 나란히 기대어 앉아 있다. 그들 의 머리 위에 ‘오아시스’ 벽걸이가 보인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으로 벽걸이 카펫 위를 덮고 있는 나무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다.
두 사람은 함께 노래하고 있다. 공주가 어눌하게 부르는 노래를 종두가 따라 부른다. 공주는 발음이 알아듣기 힘들고 종두는 노래가사를 잘 모 른다.)
공주: …… 내가 만일 시인이라면
그대 위해 노래하겠어.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힘들게 노래부르지만, 잘 되지 않자 결국 웃으며 포기한다. 사이. 이번 에는 종두가 노래를 시작한다. 어린아이 같은 어조로.)
종두: 어린 송아지가 부뚜막에 올라 울고 있어요.
엄마아, 아빠아, 엉덩이가 뜨거워.
(공주가 웃는다. 사이. 그녀는 머리 위의 벽을 본다.)
공주: 무……서워요.
종두: 뭐가?
공주: 저거…… (손으로 가리킨다.) 그으임자…….
(종두, 일어나서 카펫의 그림을 자세히 본다.)
종두: 오아시스네. (고개를 돌려 창문 쪽을 보며) 뭐가 무서워, 이게? 그냥 나 무 그림잔데.
(벽걸이 카펫 앞에 서 있는 그의 얼굴 위로 검은 나무 그림자가 덮여져 일렁인다.)
공주: 그래도…… 너무 무서워.
종두: 걱정 마, 내가 이것들 다 없애줄게.
공주: 어떻게요?
종두: 어떻게 없애냐고? 마술. 이제부터 내가 마술로 이것들 다 없앤다. 봐.
(눈을 감고 우스꽝스럽게 마술사의 흉내를 낸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 수리 사바하…… 없어진다……
(쳐다보고 있는 공주의 얼굴. 눈을 감는다. 종두의 주문이 계속된다.)
종두(O.S.): 없어진다…… 없어진다…… 없어졌다!
(눈을 뜨는 공주. 소리내어 웃는다.)
종두: 짜잔!
(눈을 뜬다. 그러나 그의 얼굴 위에는 여전히 나무 그림자가 가득 일렁 이고 있다. 웃는 종두.)
67. 공주의 아파트 문 앞(내부, 밤)
(문이 열리고 종두가 공주의 집을 나온다. 혹시 이웃사람의 눈에 띌까 조심스러워 한다. 계단을 내려간다. 사이. 급히 다시 올라온다. 발소리를 죽여 베란다 쪽으로 몸을 숨긴다. 이윽고 계단 아래에서 사람들이 올라 온다. 상식과 그의 처다. 공주의 집 벨을 누른다.)
상식 처: 아가씨! 우리 왔어요!
(열쇠로 문을 연다.)
(베란다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종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상식내외. 종두, 베란다에서 나와 조심스럽게 아 래로 내려간다.)
68. 카 센타 안(내부, 밤)
(불이 꺼진 어두운 카 센타 사무실. 켜져 있는 TV 화면만 밝게 빛나 보 인다. 종두가 소파에 누워서 전화를 하고 있다.)
종두: 목소리? 내 목소리 듣기 좋다고? (의기양양해서) 그럼 목소리 좋지. 죽 이지. 뭐라고? 목소리는…… (상대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반복한다.) 내가, 목소리는 좋은데, 얼굴은 깬다고? (킬킬거리며 웃는다.) 마마, 공 주마마,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내 얼굴이 어때서? 응? 그림자…… 나 무 그림자 무서우니까 또 마술 걸어달라고? 알았어. 정신 집중하고……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없어진다…… 없어진다……
69. 공주의 방(내부, 밤)
(역시 불이 꺼져 있는 공주의 방. 공주가 수화기를 들고 종두의 마술 주문을 들으며 ‘오아시스’ 벽걸이를 보고 있다.)
(나무 그림자로 덮인 ‘오아시스’ 벽걸이. 아주 천천히, 그 그림자가 하나씩 지워져 간다. 꿈결 같은 판타지가 진행되고 있다. 이윽고 나무 그 림자는 거의 없어졌다. 그림자 없는 오아시스가 지극히 평화로워 보인 다.)
(환하게 미소짓는 공주의 얼굴.)
70. 카 센타 사무실 (내부, 낮)
(카 센타 사무실.
종두가 책상 앞으로 다가온다. 책상 위 선반에서 뭔가 꺼내는 척 하면 서 조심스레 뒤를 돌아본다. 카메라, 그의 시선을 따라 약간 PAN 하면, 전기난로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종일의 처를 볼 수 있다. TV를 보고 있 는 것 같지만, 실은 졸고 있다. 종두는 그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뭔가를 들어올린다. 형수의 핸드백이다. 소리내지 않으려 애쓰며 핸드백의 쟈크를 연다. 아주 조금씩. TV 소리가 도움을 주고 있다. 이윽고 쟈크를 다 연 뒤 몇 만원의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핸드백을 원위치하고 조심 스럽게 자리를 뜬다. 사무실을 나가는 종두.)
71. 카 센타 밖 (외부, 낮)
(사무실에서 나오는 종두. 차를 수리하고 있는 김군에게 다가간다. 기름 때를 묻힌 채 차에 매달려 있는 김군 앞에서 엉덩이를 실룩이며 춤추는 시늉을 한다.)
종두: (노래하듯) 나아는 데이트 하러 가는데, 너어는 놀지도 못하고
오늘은 토요일인데, 데이트도 못하고 집에도 못가고……
(춤추며 약을 올리지만, 김군은 별 반응이 없이 작업을 계속한다.)
72. 아파트 계단(내부, 낮)
(공주의 아파트 계단. 종두가 공주를 등에 업고 내려오고 있다. 외출을 하는 것 같다. 이웃사람들의 눈에 띌까 조심하는 것 같다. 종두는 공주를 등에 업은 데다 손에는 휠체어까지 들고 있어서 몹시 불편하고 힘들어 보인다. 그런데도 무거운 것보다 이웃사람들의 눈에 띌까 더 조심하 고 있다.)
공주: 무겁죠?
종두: 안 무거워.
공주: (웃으며) 나 엄청 무거운데.
(이윽고 계단을 다 내려왔다. 공주를 휠체어에 태우고 건물을 나간다. 마치 몰래 도망가는 사람들처럼 휠체어를 밀며 뛰기 시작하는 종두. 공주 재미있다는 듯이 소리내어 웃는다.)
종두: 쉿! 떠들지 마.
(하면서도 자기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다.)
73. 전철역 구내(외부, 낮)
(의정부 전철역 홈. 지상에 있는 역이다.
휠체어에 탄 공주와 종두가 전철을 기다리고 있다. 낮이라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전철이 도착하고 있다.)
(도착하는 전철을 바라보는 공주의 얼굴. 전동차가 일으키는 바람에 머 리칼이 날린다.)
74. 전철 안(내부, 낮)
(달리는 전철 안. 공주는 자리에 앉아 있고, 종두는 그 앞에 서 있다. 낮 이라 군데군데 빈자리가 많아 보이는데도 그는 마치 공주를 보호하기 라도 하는 것처럼 손잡이를 잡고 서 있다.)
(공주는 불안정한 자세로 앉아 고개를 기울인 채 전철에 타고 있는 사 람들을 본다.)
(공주의 눈에 비친 전철 안 사람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다양한 표 정을 하고 있다. 구경거리를 보듯 공주를 힐끔힐끔 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공주의 맞은 편 자리에 젊은 남녀가 붙어 앉아 킬킬거리며 이야기하고 있다. 여자는 손에 빈 플라스틱 생수병을 쥐고 있다. 여자는 약간 흥분 한 어조로, 몹시 우스운 이야기하듯, 그러나 자기들끼리만 들을 수 있는 크기로 계속 뭐라고 떠들고 있고, 그 동안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킬킬 대며 계속 웃고 있다. 그는 덩치가 크고 약간 불량기가 있어 보이지만, 의외로 여자에게 고분고분하다. 여자는 이야기를 하며 빈 생수병으로 남자의 머리를 계속 가격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공주의 얼굴. 그녀의 비틀린 눈길에는 별로 잘나 지도 못한 그 젊은 남녀의 평범한 애정 표현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부 러움이 배어있다. 그녀는 목을 뒤로 꺾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종두의 모습을 본다. 종두는 무심히 차창 밖을 보며 서 있는 중이다.)
(공주의 짧은 판타지.
손잡이를 붙들고 서 있는 종두. 한 여자가 그의 앞자리에서 일어나 그 의 곁에 선다. 정상인의 모습을 한 공주다. 그녀의 손에는 생수병이 들려져 있다. 그녀가 그를 힐끗 장난스럽게 쳐다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무심히 앞만 보고 있다. 갑자기 그녀가 생수병으로 그의 머리통을 가격 한다.)
(현실의 공주. 자신의 상상에 크크 웃음을 터뜨린다. 한번 우스운 상상 을 시작하자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 종두가 이상하다는 듯 내려다본다.)
종두: 왜 그래? 뭐가 우스워?
(웃음을 참지 못하는 공주, 고개를 꺾은 채 힘들게 창문 밖을 내다본다. 약간 낮은 angle이 전철 창문 바깥으로 흘러가는 도시 외곽의 풍경을 강조한다.)
75. 전철 밖(외부, 낮)
(달리는 전동차의 창문 밖에서 본 시점. 고개를 꺾고 약간 비틀린 시선 으로 창문을 내다보는 공주의 얼굴 위로 유리창에 반사된 도시의 풍경 이 환상처럼 흘러간다.)
76.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내부, 낮)
(충무로 지하철역의 긴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오고 있는 종두와 공주.
종두는 공주를 등에 업고 있다.)
종두: 무슨 음식 먹고 싶어?
공주: 음식…… 잘 몰라요.
종두: 한식, 중식, 일식…… 이태리식, 피자, 아구찜, 장어구이, 낙지전골, 꽃게 탕, 불고기, 오무라이스……
77. 식당 안(내부, 낮)
(어느 식당 안. 종두가 문을 밀고 들어선다. 주인의 목소리가 그들을 맞 는다.)
주인(O.S.): 어서 오세요!
(40대 여주인, 그들을 맞으러 나왔다가, 휠체어에 탄 공주의 모습을 본다.)
주인: (상냥하게 웃으며) 장사 안 해요.
(그러나 그녀의 뒤쪽으로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종두: 왜 장사 안 해요? 저 사람들은 뭐요?
주인: 여하튼 안 해요. 딴 데 가세요.
(화가 난 종두, 주인을 노려본다.)
공주: (종두를 쳐다보며) 그, 그양 가…… 가요.
(종두, 식당 안을 둘러본다. 손님들은 식사를 하면서 모두 TV를 보고 있다. 무슨 스포츠 중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종두, TV 쪽으로 걸어 가서 화면 앞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종두: NBA네. 마이클 조단!
(화면을 가릴 만큼 바짝 붙어서 보다가 채널을 돌리기 시작한다. 이리 저리 제 마음대로 돌린다. 사람들이 어이없어 한다.)
손님1: 거 한참 보고 있는데 왜 그래요?
종두: (돌아보며) 뭐? (손님을 쏘아보며 소리친다.) 뭐가?
(손님이 찔끔해서 아무 말도 못한다. 종두, 계속 이리저리 채널을 돌린다. 드라마도 있고, 광고도 있고, 바둑도 있다. 잠깐 채널을 멈추고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재미없다는 듯이 툭, TV를 꺼버린다. 돌아서서 손님 들에게)
식사들 해요!
(공주에게로 가 휠체어를 밀며 식당을 나간다.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보고 있다.)
78. 어느 번화가(외부, 낮)
(어느 백화점 앞 광장. 공주가 휠체어에 탄 채 앉아 있고 종두가 뒤에 서 있다. 사람들이 번잡하게 그들 주위를 바쁘게 오가는 주변의 풍경과 그들의 모습이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들은 갈 곳을 잃은 사람 처럼 멍하니 서 있다.)
79. 카 센타 안 (내부, 낮)
(어두운 카 센타 안. 셔터가 올라간다. 밖에서 종두가 셔터를 열고 있다. 반쯤 열려진 셔터 문 안으로 들어오는 종두와 공주.
공주, 정비센타 안을 둘러본다. 영업을 하지 않는 정비센타는 휑뎅그레 하게 느껴진다.)
종두: 테레비 볼래? (TV를 켜고 전화기를 든다.) 뭐 시킬까?
공주: 아무 거나…… 자, 자장면 먹을래요.
종두: 여기 우정 카센탄데요, 짜장면 두 개 하고요, 군만두 하나 하고요, 유산 슬, 고량주 한 병. 빨리 갖다 줘요.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공주에게) 테레비 봐. 여보세요.
(통화를 계속하는 종두. 공주가 지겨워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썰렁한 농담을 하며 쓸데없이 전화는 오래 계속된다.
휠체어에 고개를 꼬고 앉은 채 공주는 종두가 전화를 끊기를 기다린다. 자신이 심심해하는 걸 그가 빨리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녀는 차츰 자기 만의 판타지에 빠져든다.)
80. 카 센타 안 (내부, 낮, 판타지)
(공주가 탄 휠체어가 전화를 걸고 있는 종두에게 굴러간다. 공주, 종두에게 휠체어를 툭 부딪친다. 종두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통화하고 있 다. 공주, 다시 휠체어를 굴려 종두에게 부딪친다. 종두가 그녀를 피해 무선전화기를 든 채 한쪽으로 걸어간다.)
(공주, 휠체어에서 일어나 종두에게 다가간다. 남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정상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남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여자는 지금 몹 시 심심해 하고 남자에게 자기가 심심해 한다는 걸 알리고 싶은 모양이 다. 그녀는 남자에게 장난스럽게 다가가 전화하고 있는 그의 말을 따라 한다.)
종두: (낄낄거리며) 그런 소리 하면 안되지.
공주: 그런 소리 하면 안되지.
종두: 듣는 사람 섭하지.
공주: 듣는 사람 섭하지.
(남자가 약간 귀찮다는 듯이 그녀를 피해 한쪽으로 걸어간다. 그러나 그녀는 우스꽝스런 스텝으로 그를 계속 따라간다. 그런데도 무신경한 남자는 여전히 전화만 하고 있다.
그녀가 혼자 춤추기 시작한다. 그래도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는 남자 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홰를 치듯 두 팔로 날개짓하며 “꼬꼬댁 꼬 꼬! 꼬꼬댁 꼬꼬!” 닭 울음을 흉내낸다. 이번에는 어설프게 권투하는 포 즈를 취한다. 슬로우 모션으로. 남자에게 주먹을 뻗는 시늉을 하다가 반 응이 없자, 자기 주먹으로 자기 턱에 어퍼컷을 넣고 KO 당해 소파 위 로 나가떨어진다.)
81. 카 센타 안 (내부, 낮)
(현실로 돌아온 공주가 여전히 휠체어에 앉은 채 미소를 짓고 있다.
반쯤 열려진 셔터 문으로 중국집 오토바이가 도착하는 것이 보인다.
배달원이 철가방을 내려놓는다.
그제야 종두가 전화를 끊고 그쪽으로 간다.)
배달원: 짜장면 두 개, 군만두 하나, 유산슬 하나지요?
(음식을 하나씩 내놓는다.)
82. 카 센타 안 (내부, 낮)
(시간 경과 후의 같은 장소.
종두와 공주, 마주 앉아서 짜장면을 먹고 있다. TV가 켜져 있고, 종두의 시선은 가끔 TV로 간다. 그런 대로 그들에게는 초라하지만 행복한 외식이다. 힘들게 짜장면을 먹느라 공주의 입가에 검게 자장이 묻어 있 다.)
종두: 어제 밤 꿈 이야기 해주까? 꿈에…… 내가 공주 방에 있는데…… 춤을 추고 있었걸랑? 마마하고……. 야, 진짜 괜찮았어. 근데 우리하고 같이 어떤 인도여자도 춤추고 꼬마도 같이 춤추고, 코끼리도 춤추더라고. (약 간 열적은 듯이 킬킬대며 웃는다.) 그 ‘오아시스’ 그림에 있는 게 나온 거지. 졸라 웃기지? 진짜 너무 생생해. 꿈인데…….
(듣고 있는 공주의 얼굴. 마치 그 꿈을 상상하는 듯한 표정이다.)
83. 카 센타 앞 (외부, 낮)
(공장 앞에는 두어 대의 차가 세워져 있다. 수리를 위해 맡겨진 차들이다. 종두가 몇 개의 키를 손에 들고 차문을 열어보고 있다. 공주는 휠체 어에 탄 채 셔터 문 앞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마침내 어느 차에 맞는 키를 발견한 모양으로 차문이 열린다.
종두, 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건 뒤, 공주의 휠체어를 밀고 와서 차에 태 운다.)
84. 청계 고가도로(외부, 저녁)
(해질녘의 청계 고가도로 위. 차에 타고 있는 종두와 공주. ‘배철수의 음악캠프’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차들이 정체되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마도 어디선가 사고가 난 모양 이다. 종두가 차에서 내린다.)
(끝없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는 자동차 후미의 붉은 미등, 그리고 고가 도로 위로 머리를 내민 건물들을 바라보는 종두. 그의 속에서 뭔가 근 질근질한 것이,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어떤 알 수 없는 감정이 꿈틀 거린다. 그가 소리친다.)
종두: 아이, 씨바 좋다!
(차 문을 열고 공주를 끌어내리려 하자, 공주가 놀란다.)
종두: 마마, 내리시옵소서. 내려보시옵소서. 괜찮사옵니다.
(종두는 공주를 안아들려 하고, 당황한 그녀의 손이 힘들게 차문을 꼭 붙들고 있다. 그러나 종두의 힘을 당할 수 없다. 그는 공주를 안고 차 앞으로 걸어나온다.)
종두: 신나지? 응, 신나지?
(황혼에 물든 고층 건물들, 앞쪽으로 끝없이 늘어선 차량 불빛의 붉은 띠가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겨울 공기는 차갑고 신선하게 느껴진다.)
종두: 마마, 여기가 청계 고가도로 위랍니다. 우리가 언제 이 위에 서 있어 보겠사옵니까? 안 그렇습니까? (공주를 안은 채 한 바퀴 돈다. 그리고 다시 냅다 소리친다.) 와아아아아아!
(공주가 소리내어 웃는다.)
종두: 마마도 소리 질러! 소리 질러 봐.
(종두가 계속 재촉한다. 공주의 입이 움직인다. 정말 소리라도 지르려는 듯이. 그녀의 속에서도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 같다. 그러나 결국 공주의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못한다.)
(갑자기 종두는 몸을 굽혀 차안의 카세트를 튼다. 볼륨을 최대로 올린 다. 음악 소리가 고가도로 위 밀려 있는 차들과 그 너머 황혼에 물든 건물들 사이로 울려퍼진다.)
(종두는 공주를 안은 채 춤을 추기 시작한다. 천천히 음악 소리에 맞춰 밀려 있는 차들 사이를 돌며 춤을 춘다. 차안의 사람들이 그들의 이 기 묘한 춤을 보고 있다. 누군가는 장난스럽게 클락숀을 울리기도 한다. 그 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춤을 계속한다.)
(여전히 비틀린 얼굴로, 그러나 공주는 분명히 음악을 느끼며 함께 춤 추고 있다. 비록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으나 마음속의 내적 움직임에 따라 춤추고 있는 것이다.)
85. 공주의 아파트(내부, 밤)
(춤추고 있는 공주의 얼굴. 카메라가 상승하여 종두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는 공주를 안은 채 빙글빙글 돈다. 우리는 그들이 공주의 아파트로 돌아와서도 계속 춤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두가 공주를 안은 채 장난스럽게, 멋을 부리며 한 바퀴 돈다. 그녀의 시점으로 아파트의 구질구질한 내부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그녀가 신이 나서 컥컥 거위처럼 소리내어 웃는다.)
(종두의 팔에 안겨 춤추고 있는 공주의 시선은 허공 어딘가에 붙들려 있다. 무언가 판타지를 보고 있는 듯. 어디선가 아련하게 새로운 음악소 리가 들려온다. 낯설고 흥겨운, 환상적인 인도음악이다.
문득 꽃잎 하나가 날아와 그녀의 얼굴에 붙는다. 다시 한두 개의 꽃잎 이 더 날아온다. 날리는 꽃잎과 함께 아기코끼리 한 마리가 방에서 튀 어나온다. 뒤이어 몸이 새까만 인도아이가 꽃바구니를 들고 꽃잎을 뿌 리며 나오고 있다. 그리고 사리를 덮어쓴 인도여인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나타난다. 마치 종두의 지난 밤 꿈처럼 오아시스 그림 속의 인 물들이 현실 속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음악은 점점 흥겨워지고 그들은 종두와 공주의 주변을 돌며 춤을 춘다. 배꼽을 드러내고 허리를 흔들어 대는 인도여인의 춤. 공주가 소리내어 웃는다. 종두도 더욱 신나서 춤을 춘다. 아기 코끼리 역시 코를 쳐들며 춤을 추는 것 같다.
어느 순간인가, 마치 마술에서 풀려나듯 공주의 몸이 마비에서 풀려나 정상을 찾아간다. 이제 그녀는 종두의 팔에서 놓여나 함께 춤을 추고 있다. 너무나 신나고 흥겨운 춤.)
(아기 코끼리가 집안을 들쑤셔 놓는다. 물건들을 함부로 자빠뜨리고 코 로 냉장고 문을 열어 안에 들어있는 음식들을 쏟아지게 한다. 공주가 코끼리를 잡으러 뒤를 쫓는다. 그러나 녀석은 장난치듯 도망친다. 좁고 누추한 아파트 안에서 벌어지는 유쾌한 소동이 계속된다.)
(종두와 공주가 키스한다. 그들이 마주 서서 입맞추고 있는 동안 음악 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인도여인과 아이도 ‘오아시스’ 속으로 되돌아간 다. 마지막으로 아기코끼리가 엉덩이를 실룩이며 물러난다. 판타지가 끝 난다.)
86. 차 안(내부, 밤)
(지저분한 골목을 지나 카 센타 앞으로 다가가는 차안의 시점. 종두가 차를 몰고 돌아가는 중이다. 전조등 불빛에 카 센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종일의 모습이 보인다. 그의 곁에는 차 주인이 함께 서 있다. 종일은 한눈에도 몹시 화가 나 있는 것 같다.)
87. 카 센타 앞 (외부, 밤)
(카 센타 앞에 차를 세우는 종두. 종일이 문을 연다.)
종일: 야! 나와! 빨리 나와, 임마!
(차에서 내리는 종두.)
종일: 너 말도 없이 손님 차를 몰고 나가면 어떡해? (차 주인에게) 정말 죄송 합니다. 차는 이상없이 다 고쳐놨습니다.
차주인: 이래도 되는 거예요?
종두: 차 이상 없습니다. 시험운전 해보고 오는 길인데 잘나가네요.
차주인: (어이가 없어) 내가 몇 시간 기다린 줄 알아요? (종일에게) 무슨 장사를 이렇게 해요?
종일: 죄송합니다.
(차에 올라타는 손님에게 계속 굽신거린다. 차주인 차 몰고 출발한다.)
종일: 안녕히 가세요! 죄송합니다!
(돌아서서 종두를 노려본다.)
종두: (농담하듯 웃으며) 누가 노는 날 차 찾으러 올 줄 알았나?
종일: 들어와.
(먼저 카 센타 안으로 들어간다.)
88. 카 센타 안 (내부, 밤)
(작업장 안에서 종일이 종두를 세워놓고 야단을 치고 있다. 그의 손에 는 몽둥이로 쓸 만한 연장 하나가 쥐어져 있다.)
종일: 너 면허 있어?
종두: ……
종일: 말해봐. 운전면허 있어 없어?
종두: 지난 번 사고로 취소 됐잖아요.
종일: 면허도 없는 놈이 운전을 해? 남에 차를 니 맘대로 왜 운전을 해? 내가 이야기했지? 이제 철 좀 들라고. 니가 하는 행동에 책임을 줘야 한다고 몇 번 이야기했어? 응? 왜 넌 니 행동에 책임을 못져? (그는 점점 성질 을 참지 못해 소리지른다.) 왜? 왜?
종두: …….
종일: 엎드려. (몸둥이로 앞을 가리킨다.) 엎드려.
(종두, 형 앞에 엎드려뻗쳐 자세로 엎드린다.)
종일: 세어.
(종일, 빳다를 치기 시작한다. 종두는 한 대씩 맞을 때마다 숫자를 세고 있다.)
종두: 하나……, 둘……, 셋……
(종일은 있는 힘을 다해 빳다를 내리치고 있다. 고통을 참으며 계속 숫 자를 세는 종두. 그러나 맞는 동생보다 때리는 형이 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힘들어 보인다.)
89. 카 센타 사무실 (내부, 밤)
(불 꺼진 사무실. 바깥에서 들어온 빛이 사무실 안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다. 소파에 불편한 자세로 웅크리고 누워 있는 종두. 담요 한 장이 몸 에 감겨져 있다. 그는 누운 채 통화를 하고 있다.)
종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인지 한참 킬킬거리며 웃고 있다.) ……정말이야. 응? 뭐라고? (다시 웃는다. 사이.) 내일 뭐해? 마마, 내일은 뭐하냐고? 불쌍하다, 불쌍해. 왜 사니, 왜 살아. (웃음. 사이.) 내일 나하고 어디 가. ……좋은 데. ……내일은 진짜 좋은 데 데려갈게. …… 내일은 짜장면 안 먹여, 정말이야.
90. 공주의 아파트 욕실(내부, 낮)
(공주의 집 좁은 욕실.
종두가 공주의 머리를 감겨 주고 있다. 공주는 불편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고, 종두가 샤워기로 그녀의 머리에 물을 뿌린다. 종두의 손 길이 제법 정성스럽다. 공주는 큭큭큭 소리내어 웃고 있다.)
91. 공주의 아파트 거실(내부, 낮)
(거실에 앉아 있는 두 사람. 종두가 드라이기로 공주의 머리를 말리고 있다.)
공주: 왜…… 대답을 안 해요?
종두: 가보면 알아. 하여튼, 좋은 데 가니까 예쁘게 하고 가야돼.
공주: 지금도 예뻐요. (웃는다.)
92. 식당 안(내부, 저녁)
(어느 연회 전문 식당. 별나게 호화로운 곳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깔끔 하게 꾸며진 곳이다. 종두가 공주를 태운 휠체어를 밀며 들어서고 있다. 공주의 모습은 이 우아하고 깔끔한 식당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식당 가운데 넓은 홀이 있다. 종업원이 다가오고, 종두가 뭐라고 이야기라 면 종업원이 룸으로 안내한다.
휠체어를 밀며 칸막이된 가까운 룸으로 들어가는 종두. 룸 안에는 긴 테이블에 종두의 가족과 가까운 친척들 열 두어 명이 모여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오늘은 종두어머니의 생일이라 종일의 처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있다. 오랜 만에 만난 친척들이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하고 있 다가 휠체어를 밀며 들어서는 종두를 본다.)
종두: 아이고, 내가 제일 늦었나 보네.
(난데없이 뇌성마비 여자를 휠체어에 태우고 등장한 종두에게 식구들은 모두 놀라다 못해 어이가 없는 표정이다. 외삼촌만 겨우 한마디한다.)
외삼촌 종두, 오랜만이다. 니가 제일 지각이야.
(분위기는 몹시 어색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종두: 본인은 아무렇지 도 않은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테이블 한쪽 자리에 공주를 안아 앉힌다.)
종두: 엄마! 축하해!
엄마: 난 니 엄마: 아니다.
(식구들은 공주를 힐끔힐끔 본다. 누구보다도 당황한 사람은 공주다. 그 녀는 이런 자리일 거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녀 는 이곳에서 자신이 당연히 환영받지 못하리라는 걸, 그리고 자신이 가 족들의 분위기를 망쳐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 게 생각할수록 그녀의 몸은 경직되고 시선과 안면근육은 안스럽도록 비 틀린다.)
종일: (화가 나서 굳은 얼굴로) 누구야? 같이 온 사람.
종두: 어…… (주위를 둘러보며 약간 장난기를 섞어) 소개하겠음다. 이름은 한공주, 내 친굽니다.
종일: 어떤 친구야?
(종두, 형의 서슬에 약간 당황해서 쳐다본다. 그러나 여전히 미소가 있 다.)
어떤 친군데 여기 데려왔냐고?
종두: 그냥 친구요. 엄마: 생일이니까…… 같이 오면 좋을 것 같아서……
종일 처: (분위기를 수습하려 한다.) 예, 잘 오셨어요. 이왕 오셨으니까 즐겁게 식 사하고 가세요.
종일: 우리 가족끼리만 있는 자린데 니 맘대로 말도 없이 아무나 데리고 오 냐?
종두: 뭐 어때요? 좋잖아요…… 사실은 모르는 사람도 아니예요.
엄마: 누군데?
종두: 왜 그 교통사고로 죽은 의정부 환경미화원 있잖아요?
외삼촌 교통사고?
종두: 외삼촌, 내가 이번에 교도소 들어간 게 교통사고 때문이었걸랑요.
종일: 그런데?
종두: 그 사람 딸이라고.
(모두들 할 말이 없다. 종일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종일: 너 나와봐.
종두: 왜요?
종일: 나하고 얘기 좀 해.
종두: 나중에 밥 먹고 얘기해요.
종일: 나와봐, 임마!
(종두,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종일을 따라 룸 밖으로 나간다. 종세도 일어나서 따라 나간다.)
(이 모든 소동을 공주는 어쩔 수 없이 지켜보고 있다.)
93. 식당 홀의 창가 (내부, 저녁)
(식당 안 홀의 한쪽 창가에 종두를 데려가는 종일. 창문으로 보이는 바 깥의 야경이 제법 그럴싸하다. 이야기하고 있는 그들에게 종세가 다가 온다.)
종일: 내가 너 때문에 돌겠다. 돌아. 어떻게 만났어, 쟤?
종두: 내가 찾아갔지, 그 집에.
종일: (할 말을 잃은 표정이다. 하지만 침착하려고 애쓴다.) 그 집에 뭐 하러 갔어?
종두: 그냥, 갔어요. 미안해서.
종일: (점점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다.) 왜 미안해? 응? 니가 왜 미안해? 미안 하면 내가 미안하지 니가 왜 미안해?
종세: (종일을 제지하며 앞으로 나선다.) 내가 이야기 하께요. (종두에게) 형. 종두형. 날 봐. 내 얼굴 똑바로 봐.
(종두, 고개를 쳐들어 종세를 본다. 식 웃는다.)
종일: 너 나한테 감정 있는 거지? 응? 그렇지? 너 날 원망하는 거지?
종두: 내가 형을 왜 원망해요?
종일: (점점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다.) 안 그러면 왜 그 집에 찾아가서 저런 애를 여기 데리고 와? 응?
종세: 제가 이야기할게요. 형님은 가 계세요. (종두에게) 형, 내 말 잘 들어. 형이 교도소 들어간 거 아무도 강요한 사람 없어. 형이 원해서 한 거야. 그지? (그가 종두에게 말하는 태도는 동생이 형에게 하는 것이라기보다 는 마치 어른이 아이를 달래는 것 같다.) 큰형이 사고 내고 집에 들어왔 을 때, 형이 먼저 그랬잖아. 형님은, 응? 회사 다녀야 되고, 할 일도 많 은 사람이니까 자기가 대신 들어가겠다고. 자기는 어차피 전과도 있고, 응? 뭐 할 일도 없고, 교도소 가는 길도 잘 알고…… (종두가 킬킬 웃 는다.) 그런 말 했어? 안했어?
종두: (계속 웃으며) 새끼, 너 기억력 되게 좋다.
종세: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러면 안되지.
종두: 내가 뭘?
종세: 형, 솔직히 말해봐. 형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어? 응?
종두: 뭘 임마?
종일: 쟤 여기 왜 데려왔냐고 임마.
종세: 형, 내 말 잘 들어. 지금 빨리 쟤 집에 데려다주고 와.
종두: (비로소 표정이 굳어진다.) 왜?
종세: 몰라서 물어? 형이 이러면 안돼.
종두: 나 아직 밥도 안 먹었어.
종세: 지금 밥이 문제야?
종두: 공주도 밥 먹어야지. 그래도 손님인데 밥은 먹여서 보내야지.
종세: 씨바, 그러니까 왜 이런 짓을 해? 응? 생각 좀 하고 살아.
종두: 난 니가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
(먼저 안으로 들어간다.)
종세: 형! 일루 와봐! 얘기 안 끝났어!
종일: 야!
94. 식당 안 룸 (내부, 저녁)
(식구들 어색하지만 그런대로 식사를 하고 있다. 공주는 억지로 앞에 놓인 음식을 억지로라도 먹으려 하지만, 긴장한 탓에 잘 되지 않는다. 식구들은 그런 그녀가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종두만 혼자 떠들고 있 다.)
종두: 옛날에 우리 집 뒷산에 방울새가 많이 살았잖아. 나는 참새로 알았는데 아부지가 방울새래. 그런데 아부지 말이 방울새가 왜 방울새냐 하면 목 에 방울이 달렸대요. 그래서 나는 노상 나무 밑에 서서 방울새 목에 방 울이 있는가 찾아봤다니까.
(이야기하면서 그는 계속 킬킬 웃는다. 그 이야기 속에는 떠올리기만 해도 그의 웃음을 자극하는 무엇인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진짜로 방울새 목에 방울이 달린 줄 알았어.
종일: 너 지금 그 이야길 왜 해?
(종두가 형을 쳐다본다.)
말해 봐. 그 이야길 왜 하냐고?
종두: 그냥……(형의 서슬에 놀랐으나 주위를 돌아보고 웃으며)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네.
종일: 그 이야기가 갑자기 왜 생각이 나냐고?
종두: (계속 웃는다) 그냥, 생각이 나니까 나는 거죠.
종일: 나는 니 머리 속이 진짜 궁금해. 말해봐, 그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