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백의종군길 이음 도보 대행군 참가기(7)
13. 충견 고장 오수 거쳐 춘향의 무대로(임실 – 남원 31km)
8월 26일(토), 맑고 쾌적한 날씨다. 6시에 숙소를 나서 인근의 식당(현대옥)에서 콩나물국밥으로 아침을 들고 임실읍사무소로 향하였다. 오전 7시, 읍내를 관통하여 외곽에 이르니 35사단 등 군부대 안내판이 보인다. 군부대 옆 도로를 따라 말치고개 방향에 들어선다. 길게 이어진 철조망에 촘촘히 쳐진 거미줄이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일깬다.
한 시간여 걸으니 말치 고개 정상에 이른다. 일하는 촌로에게 물으니 고개 아래 좁은 오솔길이 충무공이 지나간 길이라 일러준다. 고증하러 온 이들이 그 길로 많이 다녀갔다며. 경사가 급하고 풀이 자란 좁은 길, 눈, 비올 때는 위험하겠다. 30여분 걸으니 동네 앞 정자, 잠시 숨을 고르며 휴식을 취하였다.
오수면에 들어선 듯, 봉천리를 지나며 길옆의 우람한 거목을 배경으로 함께 포즈를 취하였다. 거인의 발자취 더듬으며 가는 길, 장∙노년에 이르기까지 잘 버텨왔으니 남은 때 우뚝 서기를 바라는 마음이어라.
오수면 봉천리 거목 앞에서
9시 20분경, 오촌 버스정류장 옆에 세운 오수의견상(獒樹義犬像) 지나니 교차로에 ‘오수, 충효와 의결의 고장’이라 새긴 큰 돌 판이 눈에 띤다. 그 옆에 있는 인화초∙중∙고등학교에 들르니 중년여성(이은숙 행정실장)이 무슨 행차인가 묻는다. 이순신 백의종군길 대행군으로 서울에서부터 걸어오는 길이라 설명하니 이순신 장군을 존경한다며 일행에게 음료(양파즙)를 대접한다. 인화학교는 국가가 학력을 인정하는 성인대상교육기관으로 초등학교 4년, 중학교 2년, 고등학교 2년의 과정을 수료하면 해당학력을 얻게 된다고. 학생은 240명인데 토요일에도 수업중이다.
오수역을 지나 오수면사무소에 이르니 오전 10시 50분, 면사무소 청사에 ‘의로운 오수 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지금으로부터 1천여 년 전 거령현(오늘날의 지사면 영천리)에 김개인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개 한 마리를 길렀는데 매우 사랑하였다. 어느 날 외출을 하는데 개도 따라 나섰다. 김개인이 술에 취해서 길바닥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들불이 일어나 개인의 몸 가까이 까지 번지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충성스러운 개는 곧 옆에 있는 냇가에 들어가 몸을 물에 적시어 불 주변을 빙빙 돌면서 풀이 물에 젖게 이 짓을 반복하여 불길을 막고는 힘이 빠져 죽었다. 잠에서 깨어난 김개인은 개의 모양을 보고 슬프게 여겨 노래(견분곡)를 지어 이 슬픈 정을 쓰고 무덤을 만들어 장사를 지내주고 지팡이를 꽂아 주었다. 그런데 얼마 후 지팡이에 잎이 피고 큰 수목의 나무가 되었는데, 이로부터 이 지명을 개오(獒) 나무수(樹) 두 글자를 써 오수라 하였다.‘
11시 경 오수면사무소에서 휴식하는 중 남원에 사는 조용섭, 박경섭 씨가 찾아왔다. 남원까지 가는 길 안내를 위하여. 지리산권 마실 대표로 이 지역의 문화기획과 인문학답사의 전문가인 조용섭 씨는 남원시에서 최근에 부착한 충무공 백의종군길 표지판의 제작 사업을 제안한 시민활동가, 지리산권의 문화 확산과 보급에 이순신 백의종군의 아이디어가 적합하다고 여겨 이 분야의 개척에 열정을 쏟는 중이다. 오수교차로에서 남원에 이르기까지 그의 제안으로 설치한 충무공 백의종군로 표지(운봉초등학교~오수교차로 33.1km)가 자주 눈에 띤다.
임실에서 오수면에 이르기까지 여러 갈림길에서 바른 길 찾느라 애쓴 집행부가 한 시름 덜게 된 셈, 오후 행군이 훨씬 수월해졌다.
11시 50분 경, 임실군 오수면에서 남원시 덕과면으로 들어선다. 잠시 후 덕과면 소제지에 이르니 파출소 앞에 ‘독립만세 함성의 터전’이라 새긴 큰 돌 판이 보인다. 작은 면까지 번진 독립만세의 함성이 들리는 듯.
도로변에 최근 문을 연 ‘장어랑 촌닭’ 음식점에서 장어탕으로 점심을 들고 오후 걷기에 나서니 13시, 전날보다 기온이 내려간 듯 걷기가 한결 가뿐하다. 곧 이어 사매면, 소재지에서 가까운 곳에 소설가 최명희를 기린 혼불문학관 입구 표지가 있다. 30여분 더 걸어가니 춘향버선밭이라 새긴 비석이 나오고 잠시 후 '춘향이 고개'라고 쓴 비석이 나타난다. 전날 전주에서 임실에 이르는 국도 17호선에 춘향로 표기가 이어졌는데 국도 17호선 남원~전주 전 구간이 춘향로라는 조용섭 씨의 설명.
백일홍이 아름답게 핀 뒷밤재(옛 국도인데 지금은 한적하다) 넘어 내리막길로 한참을 내려오니 최근 폐교논란에 휩싸인 서남대학교 정문에 이른다. 이곳에서부터 17번 국도 타고 남원 시내로 들어선다. 오후 4시 반에 남원향교 앞에서 걷기 종료, 임실에서 남원까지 31km를 걸었다. 숙소로 이동, 여장을 푼 후 6시에 시청 앞 음식점가에서 동태탕으로 저녁을 들고 나니 피로가 몰려온다. 푹 쉬고 내일 또 잘 걷자.
백일홍 핀 뒷밤재 넘어서
* 연 3일 무더위에 지쳤는데 오늘은 약간 나은 편, 오늘로 24일 걷기의 절반인 12일이 경과하였다. 전반기 잘 마무리 하였으니 내일부터의 후반기도 평안하여라.
14. 충절의 고장 남원에서 황산대첩의 운봉으로(남원 - 운봉 21km)
8월 27일(일), 아침 기온이 18도로 뚝 떨어졌다. 후반기 접어들자 날씨가 쾌적하여졌다며 모두들 좋아한다. 6시에 숙소(홍콩 모텔)를 나서 시청 앞의 식당가로 향하였다. 24시간 영업하는 집에서 시레기탕 등으로 아침을 들고 남원향교로 향하였다. 개설 600년이 넘는 규모가 큰 향교다. 향교 아래가 만인의총 입구, 버스정류소에 만인의총비가 세워져 있다. 시간이 없어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만인의총상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것으로 가름, 전날 시내버스 정류소에서 찍은 만인의총 설명문을 일행에게 읽어주었다.
‘충절의 고장 남원 만인의총 사적 제272호
조선 선조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들을 함께 묻은 무덤이다. 왜군은 임진왜란 때 전라도 지방을 차지하지 못해서 결국 패했다고 생각하여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뒤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선조 30년 (1597년) 7월 말 왜군 11만 명이 황석산성과 남원을 공격하였다. 왜군의 침입에 대항하여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만여 명의 관리와 군사, 백성이 사망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전사한 사람들의 시신을 한곳에 합장하였고 광해군 4년(1612년) 충렬사를 세워 8충신을 제향 하였다.‘
남원 출발 전, 만인의총비 앞에서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왜 8충신만 따로 충렬사에 모셔 제향 하는가, 남원의 기상은 가공 인물 춘향보다 이름 없이 산화한 민초들을 전면에 내세워야 하지 않을까. 근처에 그 생각에 반대 되는 조선 선비의 시조 한 수가 눈에 띤다. ‘바람 불어 이제오니 어서 오게 이 사람아 남원고을 춘향이가 오랫동안 기다렸네. 남원고을 진사 옥당 김징칠’
오전 7시, 전날 안내를 맡았던 조영섭 씨가 나와 일행을 인도한다.
남원의 옛 이름은 용성, 법원 앞길을 따라 남원 시가지를 관통하는 요천 제방으로 나가서 이백, 운봉 방향으로 가는 것이 현지에서 파악한 가장 근접한 이순신 백의종군길 임을 설명하며. 곡속에 자신이 제안하여 설치한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길 팻말을 확인하는 것도 겸한다. 요천 물길의 바위가 아름답고 봄이면 벚꽃 피는 제방 길이 아름다운 남원 길임을 강조하기도.
오전 8시 반, 폐문교 지나니 이백면에 들어선다. 뚝방에서 잠시 휴식 후 이백면사무소에 이르니 오전 10시다. 면사무소 앞을 거치되 동네로 들어가지 말고 곧장 이백초등학교로 나가는 코스가 좋겠다는데 의견 일치, 초등학교 정문에서 쉬며 먹는 사과 맛이 좋다.
여기에서 운봉 가는 24번 국도를 벗어나 동네 소로를 거쳐 근년에 축성한 저수지 옆의 산길 지나 여원재에 이르는 이순신 백의종군로를 새로 개발했다는 조용섭 씨의 설명. 양가저수지 못미쳐 아가리에서 목공예사업을 하는 지역 유지 이덕경 씨를 만나 차 대접도 받았다. 저수지 옆으로 개설한 새 길은 옛 국도 6로(조선시대 통영별로)를 두 달 전에 새로 개통하였다는데 그 사이 풀이 자라고 길이 막힌 곳이 더러 있다. 초심자들이 걷기에는 위험한 코스, 대체로를 병행하여 개설하는 것이 좋겠다.
산길 3km 오르는데 한 시간 40여분, 480미터 높이의 고갯길을 임란 때 명장 유정이 두 번이나 지나갔다는 기록이 바위에 새겨져 있고 정상에는 고려 말의 것으로 보이는 여원치마애불상(女院峙磨崖佛像)이 세워져 있다. 운봉현감을 지낸 박귀진이 지어 불상 옆에 새긴 글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그가 황산대첩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한 노파에게 감사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설, 황산대첩의 승리가 이순신의 앞날을 보장하였다는 뜻에서 운봉현을 조선 시대 내내 중히 여겼다는 조용섭 씨의 설명이다.
여원재 정상에 새긴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의 설명문,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이때 왜군의 거짓정보를 접한 선조는 이순신 장군으로 하여금 부산포로 가서 왜군을 맞아 공격하라고 하나 장군은 불가한 이유를 들어 왕명을 따르지 않다가 의금부에 투옥되고 4월 1일에야 다시 풀려나게 된다. 이때 조정은 경남 초계(지금의 합천)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계급 없이 전쟁터에 임하라는 백의종군을 명하는데 이로부터 120일 후인 1597년 8월 3일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받기 전까지 움직인 동선을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라고 한다. 서울을 출발한 장군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북도의 여산, 삼례, 전주, 임실을 거쳐 남쪽으로 향하는데 4월 24일부터 25일까지 남원과 운봉에서 이틀을 머문다. 이때 권율 도원수가 순천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합천으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향하게 된다. 남원의 백의종군로는 장군이 남원에서 구례로 가는 2박 3일간의 여정을 담은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고독한 발자취를 경건한 마음으로 걸어보자. 오수교차로- 월평정류소(2.5km) - 사매교차로(2.7km) - 오리정휴게소(1.5km) - 뒷밤재(2.6km) - 축천교(5.6km) - 동림교(2.4km) - 월락삼거리(2.1km) - 이백초등학교(5.0km) - 양가저수지(2.2km) - 여원재(3.0km) - 운봉초등학교(3..5km) - 주천외평마을(13km) - 밤재(7.0km) - 구례(남원구간 53.1km)’
여원재 정상에 도착하니 오후 1시, 승합차로 1.5km 전방에 있는 지산누리휴게소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들고 오후 2시 반에 다시 여원재를 출발하여 한국경마축산고등학교 앞을 지나 운봉초등학교에 이르니 오후 3시 반이다. 걸은 거리는 21km, 운봉초등학교 정문의 새싹을 격려하는 문구가 마음에 닿는다.
‘지리산 정기 어려 운봉 큰 터 닦으니 맑은 동심의 어린이어라
높거라 푸르거라 무럭무럭 자라서 이 나라 이 겨레 밝은 등불 되어다오‘
480미터 고원의 운봉 들녁, 마을 수호신인 서천리 당산의 표정이 익살스럽다
안내에 힘쓴 조용섭 씨랑 인근 식당으로 이동하여 이곳특산인 야관망 막걸리를 한 잔씩 들며 환담을 나누었다. 근처의 민박집에 여장을 푸니 힘들게 여원재 오른 탓인지 온 몸이 나른하다. 하루하루가 힘든 여정, 남은 때 강건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