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사상과 유교 전통의 접목
<뉴욕 타임스> 기자가 “중국인과 공산주의자 중 어느 것이 먼저냐?”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야 물론 중국인이지요.”
닉슨은 저우의 이 말에 특별히 매료되었다.
1910년 가을, 저우는 그곳 펑톈에 새로 세워진 동관(東關)모범학교 정(丁)반에 편입했다.
당시 그 학교 이름은 제6양등소학당(第六兩等小學堂)이었다.
청나라 말엽, “과거를 없애고 학교를 일으키자(廢科擧興學校)”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 학교도 그렇게 세워진 신식학교였다.
어떤 기록엔 그 학교가 서양 선교사가 꾸리는 학교였고,
저우언라이가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새로운 지식’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였다고 적고 있다.
닉슨의 <지도자론> 저우언라이 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조금 앞서, 저우가 어릴 적에 양 어머니 천 씨가 선교사를 집으로 불러와 초보적이긴 하나
영어도 가르치게 했다는 증언이 나왔었다.
저우언라이와 서양 문화의 접촉은 일찌감치 시작되었던 것 같다.
젊은 시절, 그는 일본, 프랑스, 영국, 독일, 소련을 다녀봤다.
마오쩌둥이 일생 동안 단 두 번 소련을 다녀온 것 말고는 외국 물을 마셔보지 않았던 것과 대조적이다.
그 무렵 중국 여러 곳에 서양 선교사가 꾸리는 학교가 더러 있었다.
마오쩌둥의 첫 아내 양카이후이(楊開慧)가 고향 창사(長沙)에서 다녔던 여자중학교도 미션스쿨이었다.
이미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어있던 양은 1주일에 한 번 있는 채플에 들어가기 싫어
생리를 핑계대어 빠지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저우는 동관모범학교에서 중국 고래의 경서(經書)도 배우고 서방의 신학문도 익혔다.
개설된 과목은 모두 열 개. 수신(修身), 도문(圖文), 산술(算術), 역사, 지리,
격치(格致), 영문(英文), 도화(圖畵), 창가(唱歌), 체조.
수신은 요즘의 도덕 과목이고 ‘격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약어이다.
청나라 말기의 계몽사상가 옌푸(嚴復)는 서양의 ‘Science(과학)'를 ‘격물치지치’로 번역했다.
‘격물치지’는 중국 사서(四書)의 하나인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이다.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사물의 이치와 법칙을 깨닫게 된다는 뜻의 ‘격물치지’가
서양의 Science와 일치한다고 옌푸는 보았다.
오늘날 한국, 중국, 일본은 ‘Sceince’를 다같이 ‘과학(科學)’으로 번역해 쓰고 있다.
옌푸는 캉유웨이(康有爲)가 “중국에서 서학(西學)에 가장 정통한 사람”으로 치부했을 만큼
당대 최고의 번역가였고, 서양 문화를 중국사상에 접목시키는 데에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한때 쑨원의 혁명론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고,
잠시 위엔스카이(袁世凱)를 지지하고 ‘54운동’도 비판하여 세간의 지탄도 받았지만,
“중국역사에 영향을 끼친 100인”엔 늘 들어갈 정도로 명망이 높다.
베이징(北京)대학 복도와 로비엔 중국 안팎 유명 인사의 흉상들이 즐비해있다.
이색적인 인물로는 인도 시인 타골의 얼굴도 보인다.
초대 교장이었던 옌푸의 흉상도 물론 있다.
중국 사람들의 공(功)과 과오(過誤)에 대한 균형 잡힌 평가가 눈에 선뜻 들어온다.
그 시절 저우언라이는 공부도 잘 했지만 신체적으로도 많이 단련되고 강인해졌다.
물론 모범학생이었다. 공부에 열심이고 규율을 잘 지켰다.
외모는 늘 단정했고, 특히 국문(國文), 작문 성적이 뛰어났다.
국문 선생은 그의 작문을 보고는 “내가 근 10년 애들에게 글을 가르쳤지만
이렇게 훌륭한 학생은 처음 본다!”고 감탄했다.
어린 시절 저우는 세 분 어머니로부터 고르게 좋은 가르침과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 점을 늘 고맙게 생각하며 세 분 어머니에 대하여 애틋한 정을 드러냈다.
1918년 1월 2일은 양모 천 씨의 10주기(週忌)가 되는 날이었다.
마침 그는 일본에 유학 중이었다. 이 날 먼 이국의 외로운 기숙사에서 청년 저우는
양 어머니가 생전에 쓴 시들을 읽었다. 조용히 향을 피우며 눈물을 흘렸다.
유모에 대해서도 극진했다.
난카이(南開)중학 시절, 유모 장장 씨가 그를 보러 톈진(天津)으로 와 닷새를 묵었다.
돌아갈 때 저우는 큰 아버지에게 청을 해서 유모에게 차표와 여비를 드렸다.
밥 먹을 때 쓰라며 사발과 수건을 직접 챙겨드렸다. 총리가 되어서도
그는 이따금 고향에서 온 지방 관리들을 만나면 유모 장장 씨의 안부를 꼭 물었다.
세 분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못지않게 그에겐 어린 시절 자랐던 고향 화이안에 대한 추억도 많았다.
고향을 그리워하고, 어쩌다 고향 사람을 만나면 무척 반가워했다.
고향 말씨만 들어도 용케 알아냈다.
1965년 7월, 저우언라이는 신장(新疆)을 지나다가
신장 생산건설부대의 스허즈(石河子)농장에 들렸다. 외교부장 천이와 함께 외국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는 내지에서 먼 변방인 이곳 신장까지 와서 일하는 청년들을 찾았던 것이다.
이때 농장 숙소에서 일하는 한 젊은 여성 종업원이 눈에 띄었다.
흰 블라우스에 남색 바지를 입은 단발머리 아가씨였다.
저우언라이는 그에게 고향을 물었다.
“화이안입니다.”
“이름은?”
저우는 매우 반가운 표정이었다.
“리정란(李正蘭)입니다.”
“말투를 듣고 고향 사람이란 걸 알았지. 집은 성 안인가, 교외인가?”
“친쿵(欽工)입니다. 북쪽 교외에 있는.....”
“신장엔 언제 왔지?”
“1959년 변경 지원을 해 왔습니다.”
“고향이 그립겠지.......6년이나 됐는데"
“이따금씩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그렇겠지.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 치고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
나도 고향 떠난 지 50년이 되었어.”
저우는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이면서 지난 50년을 헤아렸다.
“그래, 신장과 장쑤는 모두 좋은 곳이지. 이 스허즈의 하늘도 화이안의 하늘처럼 푸르지 않은가?”
저우는 변경지역 소수민족들의 단결을 위해 더욱 노력해달라고 당부하면서
화이안이 있는 장쑤와 신장의 푸른 하늘을 빗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냈다.
1952년, 새 중국이 건국되고 처음으로 베이징에서 연극공연이 열렸다.
상하이 인민극단이 베이징 화이런탕(懷仁堂)에서 <베이징 아가씨를 보내며>와
<보리를 심으며>를 공연했다.
공연이 끝나자 총리 저우언라이는 무대로 올라가 배우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었다.
주연 샤오원옌(篠文艶)의 말씨가 귀에 익었다.
저우가 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샤오원옌과 얘기를 나누었다.
“고향이 어디요?”
“장쑤성 화이안입니다.”
“오, 동향 친구로군. 집이 성 안이요, 교외요?”
“동쪽 교외의 처챠오(車橋)입니다.”
“오, 좋은 데지요. 어렸을 적에 배를 타고 룬허(潤河)에 가본 적이 있지요. 고향엔 언제 가보았소?”
“다섯 살에 고향 떠나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저우언라이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 집은 성 안에 있었지요. 나 역시 수십 년 동안 고향엘 가보지 못했소.
고향에 가게 되거든 내 대신 고향 사람들에게 안부 인사나 전해주구려.”
고향 사랑은 나라 사랑과 통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는 저우언라이의 일생을 지배한 또 하나의 중요한 정서였다.
이러한 저우의 ‘고향 사랑’도 서방 사람들의 눈에는 특이하게 보였다.
공산주의자답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소중한 정서라는 것이다.
오늘의 중국 공산당 간부와 당원들의 생활 태도나 관습은 적어도 30년 전 공산주의들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당시 중국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한 사람의 생활환경은 척박했고,
이념과 투쟁 일변도의 삶을 살았다. 전쟁과 투쟁으로 일관된 삶이었다.
반 봉건, 반 제국주의는 일체의 낡은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했다.
전통적 미풍양속도 버려야 할 것과 그러지 않은 것의 구별이 쉽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이런 고정관념이나 속박의 틀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했다.
저우의 이러한 행태들은 자연히 서방 지식인들의 주목과 주의를 끌었다.
저우언라이는 관료 가정 출신으로 그의 공산당 동지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그의 집안은 중국의 오랜 전통적 예절을 기본으로 삼는 집안이었다.
그들은 몇 세기에 걸쳐 자녀들에게 중국의 고전을 가르쳤으며
그러한 교육을 통해 관료사회에 나아가게 했다.
저우언라이는 젊은 시절, 중국의 전통적인 철학 기초를 포기했지만
몸에 밴 옛 문화의 전통이나 인습은 버리지 않았고 또 버리려 하지 않았다.
그는 보존가치가 있는 과거의 문화나 미풍양속들에 대해서는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저우가 대부분의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그가 가족이나 선조들의 풍습을 늘 강조했다는 점이다.
닉슨의 <저우언라이>에 나오는 말이다.
저우는 일본군 점령지역 안에 있는 어머님 산소를 가지 못해 안타까워했다.
1942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부고를 신문에 실었다.
신문에 부고를 싣는 것은 전통이었지만 이런 전통은 공산당에게는 버려야 할 낡은 인습이었다.
광고를 낸 신문은 공산당 기관지 <신화일보>였으나
그 무렵 다른 공산주의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상식 밖’의 일이었다.
닉슨의 관찰은 예리했고 특이했다. 닉슨은 나름의 시각으로 저우를 보았고,
그를 공산주의 세계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존재로 부각시켰다.
저우의 탁월한 협상 능력조차도 저우언라이 특유의 성격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았다.
유교의 전통적 철학과 레닌적인 비정한 혁명가의 본능을 겸비한 저우언라이는
중국의 총리로서는 가장 적격이었다.
그것은 마치 합금(合金)한 금속이 원래의 각각의 금속들보다 더 단단하고
양질의 금속이 되는 것과 흡사한 이치이다.
공산주의는 권모술수의 명인(名人)들을 많이 배출했지만
타협의 달인은 많이 길러내지 못했다. 그런데 저우언라이는
권모와 조정자로서의 어떤 역할도 거뜬하게 해내는 정치적 천재성을 갖고 있었다.
특히 닉슨은 “나는 공산주의자이기 전에 중국인이다.”라고 한 저우언라이의 말에
매료되었다. 저우언라이는 충칭 시절, 미국 <뉴욕 타임스>의 기자로부터 날카로운 질문을 받았다.
“중국인과 공산주의자라는 신분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중요합니까?”
저우는 서슴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야 물론 중국인지지요.”
사실 이 말은 저우언라이의 속마음을 드러낸 진실한 고백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지향적인 고백은 자칫 외국 기자에게 보낸 하나의 위장된,
혹은 과장된 메타포어로 자칫 왜곡될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닉슨은 저우의 이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였고, 저우의 정체성과 특성으로 해석했다.
닉슨이 본 당대의 공산주의자들은 저우와는 많이 달랐다.
닉슨이 본 저우의 공산당 동지들은 중국인이기에 앞서 공산주의자였다.
물론 저우도 자기의 사상과 이념에 대해서만은 아주 확고했다.
하지만 그것을 극도로 밀어붙인 적은 없다고 닉슨은 보았다.
저우언라이의 고향 사랑마저 닉슨은 예사롭게 보지 않고 찬탄을 보냈다.
<이중/연변과기대 명예총장/전 숭실대 총장/시인/마산 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