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창수록(譯註 嶺海唱酬錄) 해제(解題) - 隴隱 朴興學 -
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이란 시문집(詩文集)은 1540년(중종 35년) 11월에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했던 조사수(趙士秀, 1502-1558)※1선생과 1541년(중종 36년) 9월, 영월군수(嶺越郡守)로 부임했던 박충원(朴忠元, 1507-1581)※2선생이 한시(漢詩)로써 수창(酬唱)한 시문(詩文)을 엮어 만든 책이다.
판본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고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선생의 후손들 집안에도 가보(家寶)로 소장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서울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에 소장기호(所藏記號) 고(古)3441-2호로 소장되어 있는 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에 관한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공개한 서지(書誌)정보(情報)이다. 원서명(原書名)은 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으로, 편저자(編著者)는 박성석(朴星錫), 감각(監刻) 이세성(李世成), 교정(矯正) 고복성(高福星)이다. 판본사항(板本事項)은 목판본(木版本)이고, 책권수(冊卷數)는 1책(冊) 63장(張)이다. 간행연도(刊行年度)는 숙종27년(肅宗27年, 서기1701년)에 찬(撰)한 남구만(南九萬)의 서(序)가 붙었으며, 간기(刊記)에 숭정기원후임오(崇禎紀元後壬午, 1702년 숙종 28년) 정월(正月) 일(日) 제주영개간(濟州營開刊)이라 되어있어 후쇄(後刷, 나중에 인쇄함)하였음이 보이고고, 발행자(刊行者)는 제주영(濟州營)의 통정대부 행제주목사 겸병마수군절제사(通政大夫行濟州牧使兼兵馬水軍節制使) 박성석(朴星錫) 이다. 책(冊)의 규격은 외곽이 가로22cm에 세로34cm이며, 광곽(匡郭, 책 내부에 인쇄로 사방에 둘러진 검은 선을 말함)은 사주단변(四周單邊, 四周에 한 개의 검은 선이 둘러진 것을 말함)이며, 반엽광곽(半葉匡郭, 인쇄본을 반으로 접어 제책(製冊)된 반면, 즉 한 페이지)의 규격은 가로17cm에 세로22.2cm 유계(有界)로 10행(行) 18자(字)로 구성되어 있으나, 남구만선생의 서문(序文)이 들어 있는 전반부 6면(面, 페이지) 부분은 7행(行)에 12~14자(字)로 일정하지 않다. 이는 남구만 선생의 원문을 살려 그대로 판각한 것으로 보인다. 판심(版心, 고서(古書)의 책지 중앙부분, 즉 2면을 1매에 인쇄하여 중간이 접힌 것을 일컫는 용어)은 상하내향화문어미(上下內向花紋魚尾) 형식을 취했다. 서,발,권수,권말(序,跋,卷首,卷末)의 서(序)는 세재신사(歲在辛巳, 1701년) 7월 남구만(南九萬)의 서문(序文)이 붙었고 부(附)로 관백창수록(濯白唱酬錄)이 들어있다. 참고적으로 주세붕(周世鵬)의 구 제(舊 題)와 박승건(朴承建)의 구 발문(舊 跋文) 형태로 된 글이 권말(卷末)에 첨가되어 있다. 이상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발표한 서지정보를 인용하여 편집자(編輯者)가 누락된 부분과 주석(註釋) 일부를 추록(追錄)하여 놓았다.
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의 탄생과정.
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의 공동저자인 송강(松岡) 조사수(趙士秀)선생이 1540년(중종 35년) 11월에 제주목사로 나가 있을 당시,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선생은 아관(亞官) 임백령(林百齡)의 탄핵으로 이미 파직당하여 서울의 낙산(駱山) 아래에 가택(家宅)에 머물러 있었으나, 송강(松岡) 조사수(趙士秀)선생은 1541년(중종 36년) 3월에 예조참의로 귀경하기까지 당시 조선 최악의 유배지로 유명했던 제주도에 출척(黜陟)되어 있었다. 그러나 9월 들어 이번에는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선생이 영월군수(嶺越郡守)로 출척(黜陟)되어 나가니 1541년(중종 36년) 9월부터 1545년(인종 즉위년) 11월에 이임하기까지 4년 2개월이다. 그런데, 당시 영월에는 군수가 연이어 3명이나 관사(官舍)에서 죽어나가는 괴이한 일이 있어 죽음의 땅이라 하여 제수(除授)받은 군수(郡守)가 부임하지 않는 사태까지 벌어지며 사지(死地)로 알려진 폐읍(廢邑)이나 다름없는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면 두 분 모두 유배지나 사지(死地)를 택하여 출척(黜陟)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최근에 발견되는 사록(史錄)에 의하면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선생이 영월군수(嶺越郡守)로 나간 것은 자신이 자원하여 나갔다는 설(說)도 있다.
이 시집(詩集) 전편에는 두 분 작가의 소회(所懷)가 잘 나타나 있는데, 당시에는 붕당 정치가 태동하던 시기로 관료들이 대립하는 정치 상황에서 밀려난 자신들의 처지를 중국의 유명한 문인들이 지방관으로 출척되거나 유배사리 중에 느꼈던 감회를 전고(典故)로 인용하며 시어로 표현해 인간적인 고뇌와 감정을 잘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또한, 16세기 중엽의 조선시대 섬(제주)과 산골(영월) 지역의 생활상이라든지 풍속 등이 나타나 있어서 조선 전기의 세태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의 구성(構成)과 성책(成冊) 및 전승(傳承)의 전말(顚末)
이 시집은 송강(松岡)선생의 각운(脚韻)에 따라 낙촌(駱村) 선생이 차운(次韻)하는 형식으로 일관되게 꾸며져 있다. 이는 송강(松岡)선생의 시문(詩文)을 낙촌(駱村)선생이 차운(次韻)하여 한권의 시집으로 완성하였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더욱이 시집 말미에 낙촌(駱村)선생의 “서유해록(書游海錄)”※3이란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살펴보면 당시 송강(松岡)선생의 제주(濟州) 체류기행문(滯留紀行文)이 유해록(游海錄)이라는 제목으로 현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낙촌(駱村)선생이 이 문집(文集)에 서(書)를 써서 보내며, "인쇄 부치기에 앞서 먼저 보내니 펼쳐보시라", 라 하였고 "자손들도 볼 수 있게 보전함은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라는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시를 달게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송강(松岡)선생의 가문에는 이 유고(遺稿)가 전해지지를 못했고 낙촌(駱村)선생의 후손들에 의해서만 낙촌(駱村)선생의 유고(遺稿)가 몇 차례의 중간(重刊)을 거듭하여 전해지며 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도 같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는 1544년 경 낙촌(駱村)선생이 영월군수로 나가있을 때 당시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재직 중이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선생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쓴 "제영해창수록(題嶺海唱酬錄)"을 붙여 놓은 것으로 보아 영해창수록(題嶺海唱酬錄)은 낙촌(駱村)선생에 의해 처음 간행된 것으로 보고있다. 왜냐하면 각운(脚韻)은 바닷가에서 지은 시구인데, 차운(次韻)은 산 속 일을 노래한 시문이므로 제목을 해령창수(海嶺唱酬)라 함이 편집하는 사리에 맞는 것으로 보이는데 간행 주관자의 의도에 따라 영해창수록(題嶺海唱酬錄)이라 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4선생의 "제영해창수록(題嶺海唱酬錄)"에서 낙촌(駱村)선생이 생전에 교유(交遊)하던 인물들이 어떤 사류(士類)였던가를 나타내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주세붕 선생은 1541년(중종 36)에 풍기군수로 나아가 1543년에 우리나라의 최초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였고, 이어 1548년에는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이 백운동서원에 사액(賜額)을 내려 줄 것을 탄원하여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 서원이 탄생하는 역사적 사실이 들어 있기도 하다.
그러면,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선생의 "제영해창수록(題嶺海唱酬錄)"을 소개한다. 【讀原文】 ○ 題嶺海唱酬錄 周愼齋(世鵬) <제영해창수록 주신제(세붕)> 天挺雙仙嶺海間 一遷於海一遷山 <천정쌍선령해간 일천어해일천산> 嘲來盡物天應悔 萬象從今不自閑 <조래진물천응회 만상종금부자한> 嘉靖甲辰※5黃鐘月※6武陵人 書于古順州※7白雲洞之書院※8 <가정갑진 황종월 무릉인 서우고순주 백운동지서원> 【역문】 ○ 『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에 제(題)하다.- 주신재(周愼齋) 세붕(世鵬) 하늘이 산과 바다에 신선을 내어 놓아, 한 신선은 바다로 옮겨 놓고, 한 신선은 산으로 옮겨 놓았네. 만물의 모든 면목을 읊어내어 조롱하니 하늘이 응당 후회하리라, 삼라만상도 이제부턴 한가하지 못하리라. 1544년<중종 39년, 가정(嘉靖) 갑진년(甲辰年)> 11월에, 무릉(武陵)인 주세붕(周世鵬)이 옛 순주(順州) 땅, 백운동(白雲洞)의 서원(書院)에서 쓰다.
위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선생의 시(詩)로 보아 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이란 시문집에 제(題)하며 이 책의 서문(序文)을 대신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시집이 처음 세상에 나온 38년 후 임진왜란의 전화(戰禍)로 국토는 침탈(侵奪)되고 수많은 문화유산이 소실(燒失)되고 만다. 여기에는 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글이 1632년(인조10년)에 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을 필사(筆寫)하여 전승(傳承)하는데 기여한 낙촌(駱村)선생의 증손(曾孫)인 박승건(朴承健, 1609~1667)의 필사본(筆寫本) 서문(序文)이다.
그의 서문(序文)을 살펴본다. 『1632년(인조10년) 낙촌공(駱村公) 증손(曾孫) 박승건(朴承健)의 필사본(筆寫本) 서문(序文)』 【讀原文】 ○此編見失於龍蛇兵燹※9之際求之而不得者四十年有餘矣辛未春※10因友人李進士以存始得於 차편견실어용사병선 지제구지이부득자사십년유여의신미춘 인우인이진사이존시득어 嚴生聖 耈家玆豈非後昆之幸歟卽寫數件以傳布焉 엄생성구가자기비후곤지행여즉사수건이전포언 崇禎壬申※11中秋密山朴承健※12謹書 숭정임신 중추밀산박승건 근서 【역문】 ○ 이 책은 임진왜란에 분실되어 구하려고 해도 얻을 수 없이 40여년이 흘렀다. 1631년(辛未) 봄에 친구인 진사(進士) 이이존(李以存)으로부터 엄성구(嚴聖耈)의 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처음으로 그것을 얻었다. 어찌 후손으로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즉시 몇 권을 필사하여 배포하여 전하노라. 1632년(崇禎壬申年) 8월(仲秋)에, 밀산(密山)인 박승건(朴承健)이 삼가 적음.
이 서문(序文)에서 성은(星隱) 박승건(朴承健)이 밝히고 있듯이 전화(戰禍)의 참상(慘狀)은 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에까지 미쳐 영원히 잊혀버리고 기록으로만 남아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위기였으나 이를 찾아내어 필사하여 전해졌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로부터 70년 후 성은(星隱) 박승건(朴承健)의 손자인 박성석(朴星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