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겪은 유월의 공포/소현숙
지난 주 일요일, 연수교육에서 만난 지인의 어머니의 안부를 묻다가 나눈 대화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올해 98세이신데, 혼자 사시면서 식사도 손수 만들어서 드시고, 가끔 공원으로 꽃구경도 하러 가실 정도로 건강상태가 좋으세요. 걸음도 잘 걸으시고 예쁜 꽃을 보면 아직도 소녀처럼 좋아하세요.
그런데 며칠 전에 갑자기 섬망증세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를 뵈러갔어요. 군산에서 전주까지 자동차로 한숨에 달려간 듯 싶어요. 위층에서 내려오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하고, 계단을 뛰어올라
어머니가 사시는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현관에 쌀포대와 현금이 든 하얀 봉투가 놓여있었어요.
"엄마, 이게 뭐예요? " 하고 여쭤보니 공포에 질려 사색이 가득한 눈으로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인민군이 쳐들어와서 총검을 들고 마을을 수색하고 있는데, 인민군이 우리집에 오면 우리 가족을 해치지 못하게 사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준비한 쌀과 돈이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어머니는 무려 73년전에 겪은 6.25 전쟁상황의 섬망상태에서 서너 시간을 보내다가 벗어나, 정신이 돌아온 듯 했어요.
"내가 현관에 쌀 포대를 왜 꺼내 놓았지?" 라고 말씀하시면서 고개를 갸웃거리셨어요.
이상으로 저는 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머니가 98세의 생애 중에 겪은 제일 극심한 트라우마(전쟁 중에 총칼앞에서 가족의 목숨을 구해야 하는 공포)를, 섬망중에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게 되는구나 하고 삶의 비의(秘意)를 느꼈어요.
전쟁의 참혹함을, 어머니의 섬망을 통해 새삼 느끼며, 이 땅에 다시는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영원한 평화가 깃들기를 간곡한 마음으로 기원했습니다.
아울러 내년이면 백수(白壽)를 맞이하시는 지인의 어머니가 더욱 건강하시기를 기원드리며, 앞으로는 어머니에게 섬망증세가 일어나더라도, 행복하고 좋았던 추억속에 거하시기를 바랐습니다.
<2023. 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