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가 입학하다 / 곽주현
아침에 일어나 습관처럼 아파트 창문을 열었다. 아침 공기가 제법 훈훈하다. 광주천이 옆에 있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천변에 자라는 수양버들 가지에 잎이 돋아나고 있다. 지난겨울 쭉 늘어진 가지들이 거센 바람에 하도 흔들리기에 창밖을 보며 어쩌나, 어쩌나 했다. 그런데 벌써 연둣빛이다. 나무의 새순은 대부분 비슷한 색이지만 수양버들은 두드러지게 연한 빛을 띤다. 마치 나무 한 그루가 커다란 꽃송이 같다. 날마다 조금씩 짙어지는 그 나뭇잎에서 봄소식을 듣는다.
봄은 사계절 중 비교적 위치 선정이 뚜렷해 보인다. 누구나 3월 첫날이 되면 봄이 왔다고 말한다. 다른 계절은 오는 듯 마는 듯해서 그 정체를 가름하기 어려운데 봄은 겨울과 확연한 선을 그으며 다가오는 것 같다. 그래서 이 계절을 맞을 때마다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새해의 첫날을 바꾸었으면 참 좋겠다는 것, 그러니까 그 춥고 음습한 겨울에 설날을 맞을 게 아니라 지금의 3월이 1월이었으면 사람들이 더욱더 활기차게 새해를 시작할 것 같아서다. 저녁 식사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우스갯소리로 했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딸이 “일 년 내내 덥거나 추운 나라는 이러나저러나 똑같지 않나요?”라고 되묻는다. 듣고 보니 그러네. 위도에 따라 계절이 다른 나라들이 있음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말이 궁해서 그냥 밥만 먹고 있는데 손녀가 선생님이 예쁘고 짝꿍도 맘에 든다며 끼어든다.
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등교한다며 한껏 차려입은 모습이 제법 의젓하다. 아래는 자주색 짧은 치마에 까만 긴 양말, 윗옷은 엷은 베이지색 잠바를 입었다. 벌서 초등학교에 가다니 감회가 새롭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아이 같았는데 갑자기 쑥 자라 버린 것 같다. 1학년 1반 1번이란다. 앉은자리도 맨 앞줄이고 담임 선생님 책상 바로 옆에 있다며 좋아한다. 1번이라기에 키가 그렇게 왜소할까 걱정을 했는데 이름의 가나다순으로 번호를 매겨서 그렇단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들어간 애의 키를 벌써 걱정하다니 이 할아비의 노파심이 우습다.
새로 시작하는 학교생활이 마냥 새롭고 즐거운가 보다. 유치원 다닐 때는 늘 깨워야 일어났는데 아침 일곱 시 전에 벌써 방문을 열고 나온다. 세수하고 머리를 곱게 빗고는 스스로 묶고 핀을 꽂는다. 긴 머리카락이 귀찮기도 하련만 아이가 좋다고 하니 어쩔 수 없다. 요즈음 아이들은 대여섯 살만 되어도 자기주장이 강해서 장난감은 물론 머리 모양, 옷과 신발 등 그들이 맘에 들어야 입거나 신는다. 개성이 강하게 키우는 건 좋지만 너무 오냐오냐하며 감싸고 돌아서 그런지 가끔은 버릇이 없고 말을 듣지 않아 애를 먹을 때가 있다. 손녀가 아침을 먹기 전에 옷을 골라 입고 가방도 챙겨 놓는다. 처음 겪은 학교생활이라 기쁘기도 하지만 그만큼 긴장도 되나 보다. 어른이나 아이나 새로운 시작은 늘 그런 마음일 것이다.
등교 시간이 아직 멀었는데 손녀가 벌써 가방을 메고 현관 앞에 서 있다. 더 있다 가자고 해도 막무가내다. 선생님이 빨리 온 사람부터 재미있는 동화책을 골라 읽을 수 있다고 했단다. 할 수 없이 손을 잡고 학교로 향했다. 아이의 발걸음이 통통 튄다. 교문 앞에 다다를 때까지 새로 사귄 친구들 이야기로 입이 바쁘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학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며 인사를 한다. 범죄예방 차원에서 외부인은 통행증 받아야 출입할 수 있다고 들었다. 충분히 이해는 가나 초등학교마저도 그래야 한다니 세상이 너무 각박해져 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저만큼 가던 손녀가 되돌아보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곧 건물에 가려진다. 오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는 거 같아 짠한 생각이 든다. 몇 시간만 지나면 다시 볼 텐데 먼 곳으로 유학이라도 보낸 것처럼 잠시 기분이 어째 싸해진다.
입학식에 두 돌보미 모두 참석하지 못했다. 꼭 함께하고 싶었는데 자기네 엄마, 아빠가 알아서 하겠다며 광주에서 내려오지 말라 했다. 며칠 전에 간식을 먹으면서 입학식에 누가 가면 좋겠냐고 손녀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내 꽃미남”이라고 외친다. 녀석은 자기 아빠를 꼭 그렇게 부른다. 나도 가고 싶다고 하자 별로 내키지 않은 눈치다. ‘그래 네가 가장 사랑하는 아빠랑 함께 하는 게 당연하지.’ 하다가도 서운해서 입을 삐죽거렸다. 광주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 내내 입학식 광경이 그려져 집중할 수 없었다. 정오가 무렵이 되어서야 입학식 사진이 뜬다. 일하다가 핸드폰을 열어보고 또 열어보곤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학교에 잘 다녀왔냐며 문자를 보냈다. ‘네’하고 한 글자로 답하고 끝이다. 아 참,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손전화가 필수품이란다. 이제 막 입학했는데 무슨 핸드폰이 필요하냐고 말렸다. 선배(?) 학부모들이 하교 시간에 꼭 맞추어 데리러 가려면 그게 없으면 곤란을 겪는다고 귀띔해서 사 주었다. 인터넷을 할 수 없고 통화만 가능한 전화다. 엄마의 핸드폰으로 아이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어 편리하단다. 그래서 오히려 고학년 보다 이제 갓 입학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게 행여나 손녀를 행동을 옥죄는 무서운 감시자가 될까 봐 걱정된다. 걷기 운동을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 학교에 갓다(갔다) 와써(왔어)'하고 문자가 온다. 아직 한글을 겨우 읽을 줄만 알고 쓰는 게 서툴다. 걷기 운동하다가 서둘러 달려왔다.
손녀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한다. 날마다 날마다 그러리라.
첫댓글 키우던 손녀가 1학년 학생이 됐으니 얼마나 대견하시겠어요? 담임 선생님을 좋아한다니 즐거운 학교생활이 그려집니다. 적응 끝이네요.
예쁜 손녀 얘기에 선생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 사랑이 손녀에게 잘 전달되었을 겁니다.
손녀의 입학을 축하하고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갔던 게 떠오르녜요. 저도 응원할게요. 잘 읽었습니다.
처음 하는 학교생활을 설레고 신기하고 즐겁고, 얼른 가고 싶어하는 모습이 생생해서 재미있습니다. 선생님은 예쁘고 짝꿍도 마음에 들고 손녀가 정말 행복하겠어요.
선생님 글을 읽으면 손녀와의 일상이 머리에 환히 그려집니다.
손녀를 향한 선생님의 사랑이 물씬 느껴지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은 정말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손녀를 향한 애잔한 할아버지 마음과
마냥 희망찬 손녀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뭉클해지기도 하고, 웃음도 나고 그랬어요.
겨울과 봄이 만나는 계절에 봄처럼 예쁜 수필 한 편 읽고 갑니다.
손주가 그렇게 이쁜 거군요. 입학식에 참석 못 해서 서운하고, 입학식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이요. 첫 손주를 얻어 무척이나 애정을 쏟으셨던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손녀사랑이 넘치는 글 감동입니다. 선생님 글은 늘 따뜻합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