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가들 사이에 명당에 1번지로 꼽히며, 방송에도 여러번 나왔던 전북 순창에 회문산.
다섯분에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뒀다는 오선위기 전설이 있으며 풍수지리 입문가의 필답코스이자
빨치산 본거지였던 내양골,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정사를 논했다는 좌선대,만일사등이 있음.
음양에 조화를 천근(남성 심벌) 월굴(여성 심벌)로 표시했다는 설.
두리봉(395m). 사실재(430m). 해맨산(546m).범바위봉(529m).매지봉(752m).장군봉
향토사학자 양상화씨와 산악인 최윤곤 씨의 고증에 의하면, 여분산 북쪽의 금상골은 풍수지리상 천기를 누설하면 안 될 군왕이 태어날 명당(君王之地)으로 임금을 지칭하는 금상(今上)인데, 금이 나온다는 금상(金箱)으로 표기됐다고 합니다. 따라서 장군봉(일명 투구봉 또는 신선봉)은 투구를 쓰고 장검으로 무장한 임금을 호위하는 호위대장 역할을 하고, 세자(世子) 봉은 임금(금상굴) 앞에서 스승 격인 북쪽의 국사봉(國師峰 지형도에는 깃대봉으로 표기)의 가르침을 받는 형국이라 합니다.
금창리가 금상마을이 된 연유입니다. 택시기사님 말에 의하면 지금은 사실재 터널이 생겨 순창과 연결되지만 옛날에는 도로가 막혀 막창리라 하였답니다.
회문산(回文山830m)은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산내면 강진면 3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회문산(回文山830m)은 본디 한자 표기가 '돌아 나오는 문', '회문(回門)'이었다고 한다. 산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노령문은 이 산의 회문 노릇을 하고 있다.
회문산(回文山830m)의 진정한 관문은 회문산자연휴양림 매표소에서 350m 떨어진 곳에 있는 노령문이다.
노령문에는 출렁다리가 연결되어 있으며 그 아래로 빨치산 총사령부가 있었다 하여 '총사골'로 불리는 계곡과 구룡폭포 그리고 문턱바위가 있다.
구한말 면암 최익현 선생과 임병찬, 양윤숙 의병대장이 회문산을 기점으로 일제와 맞서 치열한 항일 투쟁을 벌인 장소이기도 하다.
6.25 동란 당시에는 남부군 사령부가 있었던 산이다.
700여 명의 빨치산이 주둔하였던 곳으로 사령부 막사가 설치되었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빨치산 사령부가 있었던 계곡 주변 일대는 군사주둔지로서 매우 적합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빨치산훈련장에 체력단련장이 들어서고 그들의 은신처에 통나무 집들이 그들이 밥 짓던 터에는 물놀이터가 들어섰다.
전체적인 산세는 두루뭉술하게 생겼으며 남쪽 빨치산 사령부가 있었던 계곡 일대는 회문산 자연 휴양림으로 조성되어 있다.
6.25 동란의 쓰라린 유서 깊은 역사현장의 산이며 누구나 한 번쯤 다녀오면 좋은 산행지이다.
회문산에는 유독 무덤이 많다. 우리나라 5대 명당 중의 하나로 예부터 영산으로 이름난 회문산은 홍문대사(홍성문)가 이 산에서 도통하여, 회문산가 24혈의 명당 책자를 만들었다고 해서 유래되었다.
이 책에는 회문산 정상에 24명당과 오선위기가 있는데, 이곳에 묘를 쓰면, 당대부터 발복 하여 59대까지 갈 것이라 했다. 이 설을 입증하듯 회문산 정상과 주변에는 많은 묘들이 자리 잡고 있다.
회문산은 북으로는 섬진강이 남으로는 구림천이 싸고돌며, 멀리 지리산까지 시야가 트여 예로부터 천혜의 요새로 알려진 산이다.
순창군은 역사의 교훈을 후세에 올바르게 전하기 위하여 교육의 장과 비목공원을 만들었으며 짙은 숲 속에선 종일토록 꾀꼬리 산비둘기 뜸북새가 울고 까투리와 장끼가 사랑노래를 나누는 자연휴양림이 회문산의 어두운 과거를 딛고 새로운 자연공원으로 등장했다. 조선개국을 위하여 이성계의 스승 무학대사가 만일을 기도하였다는 만일사가 회문산 줄기 아래에 있다.
회문산은 풍수지리상 5대 명당 중 하나라고 한다.
전주에서 약 1시간 정도 떨어져 있어 전주나 광주지역의 이용자들에게는 높은 접근성을 제공한다.
회문산 주봉으로 가장 오르기 쉬운 안정리로부터 3시간이 걸리는 5.5Km의 험한 바위길과 울창한 숲 속을 도로를 개설하여 정상에 오르기가 쉽다.
그리고 울창한 숲이 우거져 6.25 때 빨치산 간부 정치훈련장이었던 노령학원이 있었던 중턱은 삼림욕장으로 조성되어 지난날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휴양림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성벽처럼 쌓아 올린 노령문 옆에 폭포가 있고 그 위에는 길이 30여 m의 구름다리가 가로지르고 그 위에 6각 전망대가 있어 이곳에 올라 바라보는 경관은 가히 장관이다. 그리고 회문봉(837m) 정상에 서면 멀리 지리산과 내장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회문산(回文山 837m) 산행은 매표소에서 휴양림 쪽으로 시멘트 길을 걷노라면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왕위 등극을 위해 기도드렸다는 만일사가 남쪽에 보인다. 5분쯤이면 회문산 표지석과 석축으로 성벽을 쌓아 올린 천혜의 요새지 노령문이 반긴다. 우측 구룡폭포 위로 문턱바위를 연결하는 구름다리를 건너면 전망대에서 수려한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그 옆으로 제2코스 등산로가 있다.
휴양림 방향으로 걷다 보면 갈림길 오른쪽 산기슭에는 무학대사가 이태조의 등극을 기원한 곳이자 수려한 산세에 취했다는 무학바위를 지난다. 직진하면 휴양림 임도를 따라 주차장 가는 길이고, 왼편 등산로는 남릉을 거쳐 정상으로 가는 제1코스인데, 두 길이 능선 위 주차장에서 만난다. 숲 속에 잔디광장과 야영장, 벤치, 쉼터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삼림욕 하기에도 좋다.
30분쯤 걸어 안부를 거쳐서 남릉에 닿으면 묘소들이 즐비하고, 서쪽 장군봉과 북쪽 정상이 다가온다.
헬기장과 주차장을 만나면 휴양림에서 임도를 따라 오르는 길과 합류하게 된다.
여기서 북쪽으로 오르면 경관이 좋은 곳마다 무덤이 많으며, 20분쯤이면 두 번째 헬기장을 거쳐 고스락에 닿는다.
이 주변에는 돌무더기가 많은데, 이는 과거 빨치산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키 작은 조릿대로 잔디를 가꾸어 놓은 묘소가 눈길을 끈다.
서쪽의 장군봉은 장군이 투구를 쓴 모습이라서 일명 투구봉이고, 동쪽의 천마봉은 장군이 말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형상이다. 아홉 가지로 멋지게 뻗은 반송을 지나 전망대 바위에 서면 동남쪽으로 돌곳봉과 천연요새지인 돌문(石文)이 있는 시루봉이 뵌다.
이곳은 빨치산들의 전북유격사령부가 맨 처음 있었던 은둔지이고, 서쪽 장군봉 아래 대순 마을에는 빨치산 비트가 가장 많았다.
곧이어 나체로 누워 있는 형상의 여근목(女根木)이 발길을 잡는다.
'작은 지붕'으로 불리는 헬기장에 오르면 조망이 훌륭하고, 북쪽으로 정상이 손에 잡힐 듯하다.
등산로 좌측의 있는 음기가 가장 강하다는 음문(陰門)으로 진행한다.
석굴 옆 암벽에는 천근월궁(天根月宮)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인체의 24마디와 12 경락, 남녀의 생식기, 삼라만상을 표현한다고 한다.
정상인 회문봉(큰 지붕)에는 산불감시초소와 전북산사랑회가 설치한 이정표가 있다.
그런데 지형도마다 산높이를 830m로 나와 있는데, 휴양림에서는 GPS로 측정한 837m로 표기했다.
남으로 강천산, 추월산, 무등산, 서로는 영취산과 장군봉, 북으로 백련산과 모악산, 동쪽 천마봉과 깃대봉, 지리산 줄기가 아스라하다.
정상에서 하산은 동릉을 따라 휴양림(2km)으로 가는 코스와 깃대봉을 거쳐 덕치로 가는 코스가 있고, 서쪽의 장군봉(775m)은 왕복 1시간이 소요된다.
동릉을 15분쯤 가면 휴양림과 깃대봉의 분기점이고, 곧이어 사거리다. 남쪽은 휴양림과 구룡폭포 하산코스고, 북쪽은 희어터로 가는 길이다.
초목이 우거진 산길의 쉼터를 지나면 키를 넘는 산죽이 발길을 잡는 힘겨운 오름길에서 30여 분 수고해야 깃대봉과 나란히 솟아있는 천마봉에 닿는다.
천마봉에서 깃대봉까지는 15분쯤 소요되며, 억새밭이 잠시 펼쳐지다가 산죽 숲이 계속된다. 이곳은 헬기장과 넓은 평지가 있어 휴식하기에 좋고 전망이 훌륭하다.
동쪽으로 내려가면 갈림길인데, 우측은 일중리 코스다. 내리막길을 가다 보면 삼거리고, 북쪽 안부와 급경사길을 지나면 삼림욕을 즐기던 예전의 송림은 간 곳 없고 벌목된 벌거숭이산이라 등산로 찾는 데 신경을 쓰게 만든다.
농장이 들어선 밤나무단지와 시멘트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 큰 느티나무를 거쳐 마을 안 길을 걸어 덕치치안센터에 다다른다. 산행시간은 정상에서 3시간 20분, 깃대봉에서 1시간 10분쯤 소요된다.
■자연과 환경이 조화를 이루는 청정고을 순창군 쌍치와 구림에 위치한 세자봉~여분산~회문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주변의 지명들이 예사롭지 않다. 향토사학자 양상화씨와 산악인 최윤곤 씨의 고증에 의하면, 여분산 북쪽의 금상골은 풍수지리상 천기를 누설하면 안 될 군왕이 태어날 명당(君王之地)으로 임금을 지칭하는 금상(今上)인데, 금이 나온다는 금상(金箱)으로 표기됐다고 한다.
따라서 장군봉(일명 투구봉 또는 신선봉)은 투구를 쓰고 장검으로 무장한 임금을 호위하는 호위대장 역할을 하고, 세자(世子) 봉은 임금(금상굴) 앞에서 스승 격인 북쪽의 국사봉(國師峰 지형도에는 깃대봉으로 표기)의 가르침을 받는 형국이다.
또한 회문산 주변의 산들은 증산교 교주 강증산이 말하는 다섯 신선이 바둑을 두는 오선위기(五仙圍基) 형상으로, 회문산 정상(회문봉)은 주인이며, 서쪽 신선봉(장군봉)과 남쪽 무직산은 바둑을 두고, 동쪽 성미산과 서쪽 여분산은 훈수를 하는 형상이다. 한편 풍수의 대가 홍성문이 쓴 회문산가에는 한국의 5대 명당으로 그곳에 묘를 쓰면 59대까지 집안이 번창한다고 나와 있다.
○ 만일사 만일사비
전라남도 순창은 고추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순창 고추장의 역사적 유래는 고려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화유산은 순창군 구림면 만일사 만일사비다.
이 시비에는 만일사 중건을 기념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자 만일 동안 기도를 하였다는 만일사비에는 고추장 진상 유래도 들어 있다고 구전된다.
이에 따르면 이성계가 스승인 무학대사를 만나러 만일사에 오는 도중 어느 농가에서 고추장에 점심을 맛있게 먹고 그 맛을 잊지 못하다가 조선을 창건하여 왕이 된 후 진상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다.
비문은 비바람에 심하게 마모되었으나 '태조대왕'과 '무학'이란 글자는 알아볼 수 있다. 전란 때 3등분으로 파손된 것을 1978년 복원한 것으로 1658년 효종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 1993년 개장한 회문산자연휴양림(063-653-4779) 터는 조선조에는 의적들이, 한말에는 의병들이, 일제 말기에는 무장항일투사들이 그리고 광복 후부터 6.25까지는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역사의 흔적인 빨치산사령부 재현장이 남아 있다.
또한 문턱바위, 노령문, 구룡폭포, 무학바위, 비목공원, 사방댐 등 볼거리가 매우 다양하여 회문산 산행을 겸한 역사체험 현장으로 제격이다.
하루 이용료는 44,000~70,000원 선. 예약은 필수며 인터넷 예약만 가능하고 매주 화요일은 쉬는 날이다. 휴양림을 이용할 때는 먹거리는 준비해야 한다.
<만일사>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회문산 자락에 있는 만일사는 백제 무왕(673년) 때 처음 세워진 사찰로 조선 초기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 무학대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그 후 6.25 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된 것을 1954년에 다시 세웠고 1998년에 일주문, 대웅전, 요사채 각 1동씩을 건립하였다. 만일사라는 명칭은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자 만일 동안 이곳에서 기도하였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이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높이 175cm, 폭 65cm, 두께 16cm) 있으며 절 아래로 산안마을과 무직산, 성미산 등 수려한 연봉이 바라보인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를 건국할 뜻을 품고 무학대사와 함께
전국의 명산 명찰을 찾아다녔다.
이러한 조선 건국의 발자취는 전라북도에 임실 성수산 상이암과
진안 마이산 은수사 그리고 순창 회문산 만일사에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장수 뜬봉샘, 남원 황산대첩비, 전주 오목대와 이목대에서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있다.
만일사는 백제시대 384년(침류왕 1년)에 창건 하였다는 설과
삼국통일 후 673년(문무왕 13년)이라는 설이 있으며,
조선 초기 무학대사에 의해 중건 되어
이성계의 조선 창업을 돕기 위해 만일동안 기도를 한데서
만일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만일(萬日)이면 거의 30년이 다 되는데...
너무 과장된 이야기 같다...
전통사찰 제65호로 지정된 만일사(萬日寺)는
한국전쟁 당시 회문산에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부가 자리하여
토벌작전으로 모든것이 소실되었으나...
훼손된 만일사 중수비를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만일사 안내석을 지나 소박한 경내에 들어서면
만일사비(萬日寺碑)가 오른쪽에 있다.
비문은 오랜 세월에 마모되어 잘 알아볼 수 없으나
순창 고추장의 진상 유래와 만일사 중건을 기념하는 내용이 새겨진 듯 하다 한다.
3등분 되어 파손된 것을 1978년 봉합 복원 하였다.
순창 고추장 역사의 상징적인 문화 유산인 비각 앞에는
순창고추장 시원지 전시관이 서있다.
이성계는 왜구를 토벌하고 무학대사를 만나는 동안 맛본 고추장 맛을 잊지못해
조선 건국후 진상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