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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국 시인선 10
순수시의 아버지 박 목 월
민요적 리듬과 보편적 향수의 미감을 시적구조 속에서 시공을 초월한 자연의 완성미로 구현해낸 한국의 대표시인이다. 민요풍의 시에서 현대시로서의 획기적 발전을 이끈 한국시의 선구자이기도 하지만, 일제 강점기와 6.25동란 등 민족적 혼란기에서도 본인의 영달을 추구하여 변절하지 않고 오직 맑고 청정한 시인으로 살다 간 보기 드문 영혼이었다.
1. 출생과 성장
1915년 경북 경주시 서면 모량리 571번지에서 아버지 박준필과 어머니 박인재 사이의 2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본명은 영종泳踵이나, 시를 쓸 무렵 본인의 필명을 목월木月로 지었다. 아버지가 수리조합장을 하는 등 비교적 여유로운 환경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은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보통학교 졸업 후 대구 계성중학교에 입학한다. 18세인 1933년, 개벽사에서 발행하는 잡지 《어린이》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뽑혔고, 《신가정》6월호에 에 그의 시 「제비맞이」가 당선되어 일찍부터 아동문학으로 인정받는 시적 천재성을 보였다. 1940년 《문장》9월호에 「가을 어스림」, 「연륜」으로 2회 추천 완료하여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는 박목월이 날만하다.
소월이 툭툭 불거지는 삭주 귀성조는 지금 읽어도 좋더니 목월이 못지않아
아기자기 섬세한 맛이 좋아. 민요풍에서 시에 발전하기까지 목월의 고심이
더 크다
소월이 천재적이요, 독창적이었던 것이 신경묘사에까지 미치기에는 너무
“민요”에 치중하고 말았더니 목월이 요적謠的 대상 연습에서 시詩까지의
콤퍼지션에는 요謠가 머뭇거리고 있다.
요적 수사修辭를 충분히 정리하고 나면 목월의 시가 곧 한국시이다.
-정지용,〈문장〉(1940.9)
2, 생애와 업적
1936년 가세가 기울어 고향의 동부금융조합이라는 회사에 취직하였고 10여년 만에 부이사까지 승진하였으나, 해방 후 그만두고 교단으로 들어와 1945년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후 이듬해인 1946년 목월은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을 내고 동시집인 『박영종 동시집』도 출간했다. 1948년 그는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과 사무국장을 역임하였으며 한때 출판사와 1950년 여학생사의 주간으로 잡지에 손을 대나 실패한다. 1950년 서울 이화여고로 학교를 옮겼다. 조지훈, 박두진, 이한직과 함께 〈시문학〉에 참여하지만 6.25동란으로 창간호가 종간호가 되고 만다. 6월에 한국동란이 터지자 그는 한국문학가협회 별동대를 조직, 1953년까지 공군종군위문단의 일원이 되어 문관으로 복무하게 된다. 1953년 종전 후 목월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과 연세대학 그리고 서라벌예술대학 등에 출강하였다. 1956년에는 홍익대학교 전임강사가 되었다가 이후 조교수로 승진하였으며 그리고 중앙대학교 등에 강의하였고 1954년 한양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되어 1976년 동 대학 문리과대학 학장을 역임하기까지 23년이라는 세월동안 후학을 양성하였다. 1954년 시집「산도화」를 간행한다.
강나루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나그네」 전문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 「윤사월」 전문
1962년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63년에는 영부인 육영수여사의 개인교습을 맡기도 했다. 초기의 시 세계를 대표하는 「산도화」를 낸 후 〈현대시〉와 연가시집「시와 시론」을 발행한다. 1959년에는 시세계의 일대 전환을 가져와 시집「난蘭,기타其他」를 내놓는데 많은 평자들에게 섬세함과 고유한 정서로 리리시즘을 구현해냈다는 찬사를 듣는다. 이 시집은 최초로 사소한 일상과 편린片鱗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1964년 과거의 정형률에서 벗어나 서술체를 사용, 자연을 현대감각으로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은 시집「청담晴曇」을 내고 그 시집으로 대한민국 문예상 본상을 수상한다. 1965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68년 한국 시인협회장으로 당선되었다.
1968년 출간한 시집 『경상도 가랑잎』은 의문과 자아확신을 동시에 내포한 ‘뭐락카노’라는 시구를 비롯하여 시 전체에 경상도 토속방언을 사용하여 고향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삶의 본질을 향하는 과정이었다. 1973년 펴낸 『사력질砂礫質』은 그의 후기 대표시집인데 ‘사물의 본질에 대한 냉정한 통찰을 보여준다. 이 시집은 그 통찰을 통해 유한한 삶에 내재된 한계성과 비극성을 간결하게 드러내 보여준 박목월의 후기 진경시집이다.
3. 영원한 이별과 목월 시의 문학사적 의의
1973년 9월 박남수, 김종길, 이형기, 김광림, 김종해, 이건청등과 함께 월간 시전문지 〈심상心象〉을 발행하고 1976년에는 시집「무순(無順)」을 발행하는 등, 1978년 삶을 마칠 때 까지 출판인으로, 교육자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청록파‘라는 이름을 지상에 남긴 한 시인으로서, 성실한 삶을 살았다. 또한 서두에 언급했듯이 동 시대 대부분의 기타 시인들처럼 친일행위나 부역행위가 없이 언제나 글과 행동이 일치되었던 청정하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다. 시집 이외에도 수필집「구름의 서정」, 「토요일의 밤하늘」, 「행복의 얼굴」, 「보랏빛 소묘」 동시집「산새 알 물새알」, 「초록별」, 「사랑집」등이 있다. 1954년 제 3회 아세아 자유문학상, 1968년 대한민국 문예상, 1969년 서울시 문화상, 1972년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상하였다.
1976년 한양대 문리대 학장에 취임했으며 1978년 3월24일 아침산책에서 돌아와 지병인 고혈압으로 인해 조용히 영면, 용인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안타까운
마음은
은은히 흔들리는
강나룻배
누구를 사모하는
까닭도 없이
문뜩 흔들리는
강 나룻배
- 「임에게」 전문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문을 여는 파수병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 「나무」 전문
4. 남겨진 이야기
가.
목월木月이라는 필명은 평소 존경하던 수주 변영로 시인의 수樹자에서 따 온 목木과 좋아하던 김소월의 월月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나.
시인과 작가로 만난 박목월 시인과 황순원 작가는 너무나 친해서 자식이름을 같은 이름으로 짓기로 다짐했다 한다. 그래서 목월시인의 아들은 박동규 평론가가 되었고 황순원 작가의 아들은 황동규 시인이 되었으며 두 분 다 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다.
1952년 전쟁이 끝나 갈 무렵 박목월시인이 중년이었을 때 그는 제자인 H양 과 사랑에 빠져 가정과 명예와 서울대 국문과 교수자리 등 모든 것을 버리고 홀연히 종적을 감추어버린 적이 있었다. 2 년여의 시간이 지나 그가 제주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목월의 아내가 알게 되어 남편에게 찾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마주하게 되자 화를 내지 않고 남루한 두 사람에게 ‘힘들고 어렵지 않으냐’며 돈 봉투와 두 사람이 입을 따스한 겨울옷을 내밀고 조용히 떠났다고 한다. 그 모습에 감동한 목월과 H양은 가슴 아픈 사랑을 끝내고 헤어지기로 했고,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목월은 이 시를 지어 사랑하는 연인 H양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서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아~아~ 나도 가고 너도 가야지
한 낮이 기울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
아~아~아~아~ 나도 가고 너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아~아~ 나도 가고 너도 가야지
- 「이별의 노래」 전문
이 시는 몇 단계를 거쳐서 작곡가 김성태 선생의 작곡으로 가곡이 되어 발표 되었다.
라.
2024년 3월12일 박목월 유고작품 발간위원회는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시인의 장남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국문학)가 자택에 소장하고 있는 노트 62권과 경북 경주 동리목월문학관에 보관 중인 18권의 노트에 담긴 박 시인의 미발표 육필 시들을 공개했는데 기존에 발표된 시들을 제외하고 총 290편의 시를 공개했다. 시인이 작고하신지 46년만의 일이다.
시인의 아내이자 박교수의 모친인 故 유익순여사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 남아 있을 때도 천장과 지붕에 남편인 박목월의 창작 노트들을 숨겨 보관했다고 한다. 유고작품 발간위원회는 이날 미발표원고 가운데 문학적 완성도가 높고 주제가 다양하며 창작의 변환과정이 잘 드러난 작품 166편을 우선 공개했다.
마.
2015년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새래로 158-33 에버랜드 부근 용인공원 안에 추모 정원이 만들어졌다. 250여평 부지에 시비 5개, 안내 비 3개, 진입 벽, 휴게시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비에는 「나그네」, 「먼 사람에게」, 「어머니의 언더라인」, 「임에게」, 「청노루」 등이 새겨져 있으며, 안내 비에는 시인의 육필을 재현한 「가정」이 새겨져 있다.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 「청노루」 전문
팔을 저으며
당신은 거리를 걸어가리라, 먼 사람아.
팔을 저으며
나는 거리를 걸어간다.
그 적막. 그 안도. 먼 사람아.
먼 사람아.
내 팔에 어려 오는 그 서운한 반원半圓
내 팔에 어려 오는 슬픈 운명의
그 보랏빛 무지개처럼........
무지개처럼
나는 팔이 소실한다.
손을 들어
당신을 부르리라. 먼 사람아.
당신을 부르는 내 손 끝에
일월日月의 순조로운 순환
아아
연軟한 채찍처럼 채찍이 운다. 먼 사람아.
- 「먼 사람에게」 전문
유품으로는 그것뿐이다
붉은 언더라인이 그어진
우리 어머니의 성경책
가난과 인내와 기도로 일생을 보내신 어머니는
금잔디를 덮고 양지바른 곳에 잠드셨다
오늘은 가배절嘉俳節
흐르는 달빛에 산천이 젖었는데
이 세상에 남기신 어머니의 유품은
그것뿐이다
가죽으로 장정된
모서리마다 헐어버린 말씀의 책
어머니가 그어놓으신 붉은 언더라인은
당신의 신앙을 위한 것이지만
오늘은 이순의 아들을 깨우치고
당신을 통하여
지고지순한 분을 뵙게 한다
어두운 밤에 읽는 어머니의 붉은 언더라인
당신의 신앙이
지팡이가 되어 더듬거리며 따라가는 길에
내 안에 울리는
어머니의 기도소리.
- 「어머니의 언더라인」 전문
【참고문헌】
1. 『나는 문학이다』. 장석주, (2009)
2. 『한국민족문학대백과』
3. 『두산백과』
4. 『국어국문학 자료사전』
5. 『한국현대시대백과』
6. 『연합뉴스』(2024/03/12)
-글쓴이; 이희국 (월간문예사조편집위원회장, 이어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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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희국 회장님
귀한 시간 내시어 집필하신 박목월 선생님의 발자취를 감사히 읽었습니다.
회장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