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그는 나에게 반했다
한 순간
메건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10대 시절 풋사랑 정도의 설렘은 있었지만, 한 순간의 눈빛 교환만으로 그 사람과의 영혼의 교감마저 느낀 것이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내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해버려도 후회않을 그런 사람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는 가정이 있었고, 부양해야 할 자식들도 있었다. 그 사람이 내게 거리를 두는 것은 그런 현실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난 이해한다. 어른이라는 것은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나도 나와의 교감으로 인해 그가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가 먼저 결단을 한다면 난 내 모든 것을 걸고 그의 결정에 따를 것이고, 같이 책임도 질 것이다.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지만 그런 현실적인 문제로 날 멀리하려는 것까지 이해한다. 병원 앞에서 서성일 때 간호사를 시켜 날 쫓아낸 것도, 그의 집 앞에서 서성이다 그의 아내에게 들켜 쫓겨날 때도 그가 아내의 편에 선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은 나와 같음을 믿는다.
나의 주체할 수 없었던 행동들로 인해 그와 그의 가족이 모두 두바이로 떠났다. 하지만 그 같은 결정을 한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두바이까지 가서 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지금은 그의 결정을 지지하면서 조용히 내 마음 속에서만 그를 품고 그 순간 이후로 간직해 온 영혼의 교감만 계속 해 나갈 것이다. 그의 흔적이 담긴 성물함을 보며 마음의 위안을 삼으려 한다.
남편에게 미안함이 있다. 그가 원했다면 난 결혼 생활을 포기할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영혼의 교감을 하고 있는 나를 이해하고 받아주었다. 고맙다. 다만 지나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물함은 남편 몰래 조용히 나만 보고 있다. 이런 행동까지 이해해달라고 하기엔 남편에게 미안함이 크다.
데이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무리 돌이켜서 그녀와의 만남을 되새겨보았지만 여느 환자와 다를 바 없었다. 아픔을 느끼는 환자에 대한 연민과 손님이라면 응당 받아야 할 친절한 미소 외에는 그 어떤 행동도 한 적이 없다. 아무리 곱씹어 봐도 그녀와 만난 한 순간은 그저 평범한 일상 중 하나였을 뿐이다. 당연히 마음이 움직이는 일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병원 앞에서 날 기다리는 모습을 봤을 때는 경악했었고, 간호사에게 부탁해 그녀를 쫓아내달라고 했다. 마치 10대 소녀가 아이돌에게 열광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내게 보인 호감은 그냥 호감 정도가 아니었다. 거의 스토커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경찰에 신고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나름 이 사회에서 지명도를 높여가고 있는데 그런 일이 이력에 쓰여진다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 않나? 그런 구설에는 최대한 휘말리지 않게 처리하는 게 좋다. 또한 치과의사라고 해도 의사 아닌가! 스토커가 정신병의 일종이라는 사실은 들었던 적이 있다. 지역 의사에게 의뢰해 정신감정을 받도록 처리한 것은 잘 한 일이다. 내게도, 그녀에게도.
그리고 두바이로 이전을 서두른 것은 잘한 선택이다. 정말 난 그녀에게 눈곱만큼의 감정도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전을 준비해 온 마당에 조금 더 일찍 이전한다고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아내도 안심하는 눈치다. 설마 그녀가 두바이까지 오지는 않겠지? 행여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전처럼 점잖게 끝낼 수는 없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잘 도와줄 것으로 믿고 싶다.
앤지
청천벽력이었다. 갑자기 데이먼에게 스토커가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데이먼을 의심했다. 치과의사로서 명망도 갖춰가고 있었고, 재력도 늘어가고 있으니 남자라면 그런 스캔들이 발생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물론 배신감마저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배신감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우리 집 앞에서 서성일 때 데이먼이 뛰쳐나가 소리치며 쫓아냈기에 망정이지 행여 애들이라도 보면 어쩌나 싶었다. 한 순간이었지만 그때 데이먼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데이먼이 빠른 결정을 내려 두바이로 가족 전체가 이전하게 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런 결정들을 지켜보면서 데이브에 대해 의심했던 순간이 있었던 것마저 미안했다. 데이먼이 그녀를 환자라고 설명하며 경찰에 신고하는 것마저 포기하는 것을 보고는 의사로서의 신뢰도 쌓이게 되었다.
애들과 우리 가족이 모두 평안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필립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메건이 왜? 그간 특별히 유난을 떨거나 한 적 없이 조용히 우리 둘이 잘 살아왔다. 사랑이 넘치도록 서로를 탐닉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부부와 차이 없이 서로 신뢰하고 자기 생활을 책임지며 살아왔다. 나 또한 메건을 배신할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이혼을 하는 순간이 다가오는 것인가? 싶었을 때는 삶 자체에 대해 회의가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난 메건을 포기하지 않았다. 누구든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이상을 꿈꾸지 않는가! 그것이 가수 혹은 배우일 수도 있고, 유명한 누군가를 열렬히 쫓아다니곤 하지 않은가! 이 일로 메건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또한 메건을 여전히 사랑한다. 그 사람이 이곳 생활을 정리하고 외국으로 나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다행이다 싶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 같았다. 하지만 메건은 여전히 마음 속으로 그 사람을 잊지 못한 듯하다. 도대체 그 사람의 무엇이 메건을 이토록 사로 잡았던 것일까? 내가 채워주지 못한 어떤 것이 있었을까? 이 사건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메건이 침대에 무언가를 숨겨두고 가끔 열어보는 것 같다. 아마도 그 사람과 관계된 무엇인가보다. 우연한 계기로 한 순간 그런 모습을 보게 되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나만 속으로 정리하면 될 일이다. 굳이 그런 사실을 들춰내 메건과 그 사람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다.
첫댓글 등장인물 별로 자기 목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하도록 하신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