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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7 주일설교
귀신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마태복음 8:28~34
오늘은 평소에 자주 언급하지 않던 귀신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가 귀신 이야기와 똥 이야기라고 하는데 여러분 가운데는 어린이가 없네요.
사람들은 귀신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거나 귀신 역사라고 생각하고 벌벌 떱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요사이에 귀신이 어디에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귀신은 옛날에는 있다가 요즘에는 사라진 존재가 아닙니다. 귀신은 하는 짓이 다르고, 나타나는 양상이 다를 뿐 분명히 존재합니다.
귀신들은 사람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사람을 괴롭힙니다. 그렇다고 귀신은 뭐든지 할 수 있는 놈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귀신의 정체를 알아서 귀신에게 속지도 말고 귀신이 두려워서 벌벌 떨지도 말기를 바랍니다.
옛날 사람들은 온갖 것을 다 귀신의 장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균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는 세균 감염으로 생기는 병조차 귀신의 장난으로 오해했습니다. 심지어 전염병이 돌 때 귀신을 속이려고 어린 아기를 담장 넘어 옆집에 숨겼습니다. 그건 감염에 더 위험한 행동이죠. 귀신이 설마 아기 숨긴 것도 모를까 싶지만, 아기를 보호하려는 노력은 가상하지요.
또 집안에 우환이 생기는 것도 귀신 장난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아프거나 우환이 생기면 굿을 했는데 효과는 못 보고 무당만 돈을 잘 벌었습니다.
그런데 세균의 존재를 알게 된 후에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까지 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병이 귀신의 장난이 아니라는 것만 알면 되는데 귀신이란 없다고 오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단 집단에서는 지금도 질병과 우환이 귀신 역사라고 믿고 있습니다. 감기에 걸리면 “감기 귀신아 물러가라.” 이러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미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신자는 귀신의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귀신이 무서워 벌벌 떨어도 안 됩니다. 신자는 귀신의 실체를 제대로 알아서 이겨야 합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이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는 사건이 나오는데 이 본문을 통해 귀신의 정체를 파악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가버나움에서 출발해 ‘가다라’ 지방에 도착했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바다 북쪽이고 가다라는 남동쪽인데 그 지역은 당시에 이방인들이 살았습니다. 거기에는 귀신들린 사람 둘이 있었는데 그들은 무덤에서 살았습니다.
헬라어를 보면 ‘무덤 사이’가 아니라 ‘무덤에서’ 나왔는데 사람이 무덤에서 나온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아서 ‘무덤 사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무덤은 흙으로 만든 봉분입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사람이 봉분들 사이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번역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무덤은 석회암 바위에 판 굴입니다. 자연적으로 생긴 굴을 동굴(洞窟)이라고 하는데 무덤은 동굴은 아니고 사람이 만든 인공 굴입니다. 무덤의 입구는 좁고 안은 넓어서 무덤에 시신을 두고 입구를 큰 돌로 막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은 바로 그런 죽은 사람의 공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나웠고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쇠사슬로 여러 번 묶어도 매번 쇠고랑을 끊어버려서 제어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자기 몸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깜짝 놀랐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그들을 심판하실 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심판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벌써 와서 괴롭히느냐고 했습니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을 헬라어로 보면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원문은 “우리와 당신은 무엇이냐?”(Τί ἡμῖν καὶ σοί)입니다. 아직 심판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방해하느냐, 좀 내버려 둘 수 없느냐 이런 뜻입니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데려왔을 때 모두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가다라 지방에도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전 세계의 귀신들린 자를 고치려고 오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다라에 오신 이유는 예수님이 이방인도 귀신에게서 풀어주시는 분임을 보여주러 오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두 사람에게 들어간 귀신은 두 놈이 아니라 군대 귀신입니다. 귀신은 한 사람 속에 여러 놈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힘이 세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귀신들에게 나가라고 하자 귀신이 저 멀리 보이는 돼지 떼에 들어가게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허락했더니 순식간에 군대 귀신이 돼지들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돼지들이 산비탈을 달려 갈릴리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돼지들은 이렇게 죽었는데 귀신들렸던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33절을 보면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시내에 가서 돼지가 몰사한 이야기와 귀신 들렸던 사람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마가복음에 보면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아 있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귀신들린 사람도 가족이 있을 텐데 본인과 가족은 물론이고 온 시내 사람에게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28절을 보면 귀신들린 두 사람 때문에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열어야합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제발 떠나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마태복음 9:1을 보면 예수님은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이 떠나라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음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떠나셨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귀신들렸던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가족들에게 가서 주님이 하신 일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은 그 지방을 떠나셨는데 돼지가 죽은 후에 귀신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귀신들은 돼지에게로 가게 해 달라고 간구해서 허락해 주었더니 돼지를 죽게 했습니다. 귀신들은 왜 돼지가 몰사하게 했을까요? 그럴 거면 귀신들은 왜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을까요? 그리고 돼지가 죽은 후에 “귀신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귀신들이 돼지에게 들어가려 한 것은 귀신에게 꼭 몸이 필요해서는 아닙니다. 몸이 필요했다면 돼지가 죽지 않게 보호했겠죠. 귀신이 원한 것은 돼지 떼가 몰사해서 사람들이 큰 피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겠죠. 귀신의 계획대로 가다라 지방 사람들은 예수님을 싫어하게 되었고 예수님에게 떠나 달라고 했습니다.
귀신 들린 두 사람과 그 가족이 그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이제 다시 옛날처럼 행복을 찾아서 얼마나 다행인지는 그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내 행복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귀신들렸던 사람이 온전해진 것보다는 지금 돼지 떼가 몰사하여 큰 재산이 사라진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그 동네에 머물면 또 무슨 난리가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게 귀신의 계획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귀신의 작전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작전이 잘 먹혀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떠나 달라고 간구했고 예수님은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다라 지방을 떠나셨지만 귀신들은 그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귀신들은 돌아다니며 또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다녔습니다. 예수님이 떠난 후에 귀신은 예수님에게 그 지방을 떠나 달라고 말한 그 대표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혹은 그 사람의 아들들에게 몽땅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귀신의 장난질과 피해로부터 보호해 줄 유일한 능력자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떠나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31절에서 귀신들이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했다’는 말과 34절에서 그 지방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떠나 달라고 ‘간구했다’는 말은 같은 단어입니다. 한편, 5절에서 백부장이 자기 하인을 고쳐 달라고 ‘간구했다’는 말도 같은 단어입니다.
사람이 예수님께 간구할 것이 없어서 자기 마을을 찾아오신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간구한단 말일까요? 예수님이 그 마을을 떠나시면 다시 귀신이 주인 노릇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죄를 지은 후에 성령이 자기를 떠날까봐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눈물로 간구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찾아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노래해야 할 것입니다. 설교 후에 이 찬송을 부릅시다.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모셔 들이지 않고 거부할까요? 귀신에게 속는 사람이 특별히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속지 않는 우리가 특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셔 들이고 귀신에게 속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특별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비둘기 같이 온유한 은혜의 성령 오셔서.
거친 맘 어루 만지사 위로와 평화주소서.
여러분은 귀신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귀신은 확실히 있습니다. 그렇다고 귀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됩니다. 세상에는 세균도 있고 바이러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균이 무서워서 무균실에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면역력을 길러어 세균을 이기고 바이러스를 물리쳐서 마스크 없이도 건강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영적으로 건강하면 우리 믿음으로 귀신을 내쫓고 이길 수 있습니다.
귀신의 장난질은 영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은 사람들을 속이고 국가와 교회와 가정을 파괴합니다. 때로는 가족끼리 싸우게 만들고 서로 속이고 죽이게 합니다. 또 귀신이 교회를 망치려고 장난하면 교인들이 모이기 싫게하고 서로 보기도 싫은 마음을 가져다줍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니 헌신하는 것은 돈 낭비, 시간 낭비로 여겨집니다. 귀신에게 속으면 교회는 망합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는 거대한 집입니다. 가정이 평안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듯이 국가가 평안해야 우리가 개인적으로 행복하고 신앙생활도 평안하게 할 수 있다. 만일 국가가 못살고 국력이 약해서 외국에 짓밟히면 모두 불행해집니다. 또 못된 정치인들이 악한 제도를 만들면 교회는 무너지고 결국 사라집니다. 지금 북한에는 나쁜 정치인들 때문에 교회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북한처럼 되지 않도록 기도하고 헌신적으로 싸워 나라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가족, 내 자녀들이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에는 무임승차하고 싶은 사람이 많습니다.
Noblesse oblige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부자와 귀족에게는 국가를 위해 봉사할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요구하지만 본인이 Noblesse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아마 여러분도 잘 모르겠지만 여러분은 바로 Noblesse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나라를 거룩하게 보호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제 설교를 정리해봅니다. 귀신은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요즘 귀신이 어디 있어” 이렇게 말해도 안 되고 “모두가 귀신 장난이다” 이렇게 말해도 안 됩니다. 귀신은 사람을 해코지할 수 있습니다. 귀신은 호시탐탐 우리를 노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면 귀신은 결코 우리를 해코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신자에게 땅에서와 하늘에서 상을 주실 것입니다.
첫댓글 https://youtu.be/Qp34ZLceCcI?si=zxb-tHo3_w8No1l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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