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강. 네 번째 증명(2) 상속자들(갈4:1-7)
1. 어릴 때는 종노릇(4:1-3)
“내가 또 말합니다. 유업을 이을 사람은 모든 것의 주인이지만, 어릴 때에는 종과 다름이 없고, 아버지가 정해 놓은 그 때까지는 보호자와 관리인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릴 때에는, 세상의 유치한 교훈 아래에서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1절과 2절은 일종의 비교의 예를 든 것입니다. 아무리 “유업을 이을 사람”, 즉 “상속자”라고 하더라도, 아직 그 자격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상속을 받지 못하는 “종”과 다름이 없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이가 찰 때까지는 누군가의 관리와 감독을 받아야합니다. 바울이 이런 예를 들며 시작한 이유는 그 다음절 3절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우리가[그리스도인이] 상속자라고 하더라도, 때가 될 때까지 “세상의 유치한 교훈” 아래에서 종노릇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둘을 비교해보면, 서로 매우 유사합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이 대목에 각주가 달려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의 유치한 교훈”이란 “세상의 원소들, 세상의 세력들, 세상의 자연력, 우주의 원소들의 힘, 기초적 원리들, 자연숭배, 원시종교” 등등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고 기록해 두었습니다. 원문을 보면, “세상의 기초적인 원리아래”(under the basic principle of the World, ὑπὸ τὰ στοιχεῖα τοῦ κόσμου, 휘포 타 스토이케이아 투 코스무)라고 되어 있습니다.
“스토이케이아”라는 말은 단지 “기초적 원리”일 수는 있지만, “유치하다”는 뜻은 문자적으로 없습니다.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초등학문”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각주를 달아서 “고대의 우주관과 운명론 등”이라고 해설을 붙여 놓았습니다. 대부분의 해설 성경들이 이와 비슷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철학 사상이 근현대 철학의 근간이며, 그리스도교 사상도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초등학문”이나 “유치한”이라는 말을 그리스 철학 전체에 붙일 수 없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세상의 지식” 전체를 폄하하고, 성서와 기독교의 교리를 무조건 우선시하는 방식의 해석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바울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 그 이유를 먼저 살펴보고, 그 후에 우리가 읽고 있는 이 말씀의 현대적 의미를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바울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세상의 기초적인 원리라는 것은 미성년들에게나 유효한 것이라는 말 속에는 머리가 다 자란 성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치한 교훈 또는 초등학문이라는 번역은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스도교적인 사상이 그리스 철학 사상과 비교하여 어떤 점에서 우월한지 바울은 논증을 해야만 합니다.
바울의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는데, 그것은 기초적 원리라는 말 가운데는 우선적으로 유대교의 율법이 포함되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바울이 지적하는 유치함은 율법을 겨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초적 원리라는 것은 율법을 포함하는 “헬라 문화 속의 저급한 사상들”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미성년의 시기에는 저급한 사상의 지배 아래에서 살았지만,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당연히 속박을 깨고 나와서 성숙한 사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다음절에 나옵니다.
2.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4:4-7)
“그러나 기한이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또한 율법 아래에 놓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 사람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앞서 어린아이였을 때는 세상의 기초적인 원리의 종노릇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다 자라서 성인이 되었을 때 상속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된다는 것인데, 4절에서 바울은 그 때가 어떤 때인지 설명합니다. 그저 나이를 먹어서 자연스럽게 오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 때는 시간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그때인데,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놀랍게도 인간 여자의 몸에서 출생합니다. 4절에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또한 율법아래에 놓이게 하셨다.”고 번역했는데, 두 문장 동사가 같은 기노마이(γίνομαι)라는 단어입니다. “출생하다”고 번역하지만, 원뜻은 “발생하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여자로부터 율법아래에서 나왔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신학이 바울에 의해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 세상에 오게 된 경위인데, 다른 보통의 유대인들의 출생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5절은 이처럼 “보통의 출생”을 하나님의 아들이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속량해서 아들의 자격[명분]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격을 얻는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양자됨”(adoption)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스스로 율법의 종의 상태로 이 땅에 오게 하여, 종노릇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켜서,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ΙΧΘΥΣ, 익투스, 물고기)라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 상징이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6절과 7절은 정확하게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입니다. 그런데 6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를 거쳐서 아들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자녀]에게 두 번째 선물을 주시는데, “그의 아들의 영”(Πνεῦμα τοῦ Υἱοῦ αὐτοῦ)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시점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예수와 직접 만날 수 없던 때였습니다. 바울 자신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체험”을 한 것이지, 살아있는 예수와 직접 대화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의 자격시비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들의 영을 선물로 준다는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로서 그를 믿는 사람들을 율법의 노예로부터 속량하여 같은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을 갖추게 하려면, 당연히 아들의 영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습니다. 7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이제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아들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입니다. 개역에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원문에 더 가깝습니다. 원문에서는 “하나님을 통하여”(διὰ θεοῦ)라고 되어있는데, 영어번역 모두 through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통한 상속자”(an heir of God through) 이라고 번역하면, 어감 상 우리가 하나님과 좀 더 친밀한 관계인 것이 느껴집니다.
3. 결론: 표층종교에서 심층종교로
바울이 당시의 <스토이케이아>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던 간에, 유치한 교훈 또는 초등학문으로 번역한 우리말 성경은 이런 사상들이 그리스도교 사상만 못한 것이라는 바울의 마음을 분명하게 반영한 번역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바울이 편지 글들을 통하여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종노릇에서 해방시켜주는 구원자라는 것을 밝히 설명하였습니다. 저급한 헬라문화 속의 미신이나, 유대교의 율법주의의 속박에서부터 해방시키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희생 제사나, 점성술, 마법 등등으로 표현되는 그 당시의 이교적 신앙들은 본질상 신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을 숭배하는 원시종교들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분명한 역할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가르침이 세상에 등장한지 2000년이 더 지났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존속해왔습니다. 가톨릭교회, 정교회, 여러 개신교 종파들의 그리스도인 숫자를 더하면, 그리스도 교인이 세상에 가장 많습니다. 그런데 같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분쟁과 지배와 속박의 역사도 2000년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런 질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라고 말입니다.
바울이 세상의 기초적 원리를 넘어서서 더 성숙한 종교사상을 제시하였다면, 오늘의 그리스도교 역시 이 세상의 저급한 행태들을 초월할 만한 신앙양상을 드러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용하기 시작한 구분법이 바로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라는 대비법입니다. 어떤 종교든지 그 신앙의 심연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껍데기에만 머무르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종교갈등 역시 마찬가지로 표층종교와 표층종교의 갈등과 충돌입니다. 한 편이라도 심층까지 내려간다면 불행한 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스토이케이아>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심연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 동안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아들 됨을 인정받는 사람답게 사는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2024년 7월 28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