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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혈 <고린도 방언 2>’를 반론함:
[고린도전서]는 ‘오류’ 있는 문서인가?
ㅡ송다니엘 목사님은 꼭 읽으십시오.ㅡ
사계四季( 2018-03-17 22:11)
성경에서 여러 사람에게 수난을 받고 있는 장이 고린도전서 14장입니다. 다음은 ‘보혈 님이 쓰신 <고린도 방언 2>’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번호는 제가 적었습니다.
바울은 본인이 직접 현장을 방문해 고린도교회에서 행해지는 방언 행태를 판단하고 고린도 서신을 작성하지 않았습니다.① 목회 보고를 통해 고린도 서신을 작성하였기에 고린도 방언에 대해 제한적이었습니다.② 고린도 방언을 부정하기에는 그럴 형편도 안 되고 의도 또한 없어 보입니다.③ 그렇다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방언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닙니다.④
방언 은사 중지론이라는 전제를 깔고 성경 본문을 해석하신 글인데, 무척 위험한 글입니다. ①의 “바울은 본인이 직접 현장을 방문해 고린도전후서를 작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②의 “제한”을 이야기해 ③~④라는 결론을 맺어 버리면, ‘영민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셨던 바울 사도’를 낮추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낮춤을 가지고 우리는 방언 문제뿐만이 아닌 고린도전후서 전체를 두고도 ‘바울 사도 한계’를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말씀이 바울 사도 한계가 드러나지 않는 말씀이고, 어느 말씀이 바울 사도 한계가 드러나는 말씀인가?’를 고민하며 분별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 한계가 드러나지 않는 말씀’은 ‘정경’으로, ‘바울 사도 한계가 드러나는 말씀’은 ‘위경’으로 여겨야만 합니다. 우리가 바울 사도를 뛰어넘는 권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가 지나치다 보면, 김세윤 교수 같은 사고를 낳습니다. ‘여성 목사 안수’라는 전제를 깔고 성경 본문을 해석한 나머지 ‘여성 목사 안수’에 최대 걸림돌인 고전 14장 34절~35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라는 말씀을 두고 “후대 삽입”이라는 성경 편집설을 주장함으로써 하나님 말씀으로서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린 김세윤 교수 같은 신학자들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 ‘이미 있는 해석’의 지배를 받곤 합니다. 그런데 ‘이미 있는 해석’이라는 선입관의 지배를 받지 않을, 독해력이 뛰어난 불신자에게 “고린도전서 14장을 독해하라.”고 하면, 그 불신자는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방언을 부정하지도 않았고 긍정하지도 않았다.’고 독해할까요? 아니면, ‘긍정했다.’고 독해할까요? 다음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성경] <9절에서 옮깁니다.
성경 해석을 위한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다. 그러므로 어떤 성경 구절의 참되고 완전한 의미를 두고 의문이 생긴 때에는 ㅡ참되고 완전한 의미는 여럿이 아니고 하나뿐임ㅡ 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다른 구절을 통해 연구하고 알아내야 한다.
성경 해석에는 사도 시대 역사 배경을 아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고린도전후서 해석에서도 그 당시 고린도 역사 배경을 아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함에도 “성경 해석을 위한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입니다. 라벤더 님이 링크하신 [방언에 대한 개혁주의적 관점], 존 맥아더 목사 방언 은사 중지론을 답습한 이 글에서 지은이는 “고린도 지역 특징”이라는 배경을 내세우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린도에서 약 9.6 km 떨어진 곳에 델포이(Delphi)라는 거대한 신전이 있었다. 델포이는 신탁(神託. oracle)으로 유명한 아폴로 신전이 있던 고대 도시이다. 이 델포이신전에 있는 여 사제들이 신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영매 역할을 했는데,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여 사제들은 반복적인 주문을 소리 내며,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게 된다. 그녀가 하는 말은 다른 사제가 통역을 하게 되는데 대부분 구체적이기보다는 모호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당시 고린도교회에서는 델포이 영향을 받아서, 오늘날 교회에서 신비주의처럼 뜻 모를 주문과도 같은 방언기도가 크게 유행하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방언에 대한 내용을 경고하게 된 배경에는 이렇듯 그 당시 델포이에서 비롯된 신비주의적 방언이 교회에 유행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교회 방언 자체를 두고 “경고”하셨습니까? 아니면, “성령의 나타나심”(고전 12:7)으로서 “신령한 것”(고전 12:1)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까? “성경 해석을 위한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다.”는 고백대로 성경으로 갑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 12:10)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고전 12: 28)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고전 12:30)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고전 14:2)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해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 14:5)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고전 14:13)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 하라. (고전 14:26)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고전 14:39)
이 구절들에서 여러분은 고린도교회 방언 자체를 두고 하신 바울 사도 “경고”가 느껴지십니까? 고린도교회 방언 자체를 두고 델포이신전 여 사제들 방언과 이어서 생각하신 “경고”가 느껴지십니까? 그 “경고”가 느껴지신다면, 고린도교회 방언과 바울 사도 자신의 방언을 두고 동등선상에서 다소多少를 말씀하신 다음 구절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 14:18)
델포이신전 여 사제들에게 방언만 있었겠습니까? 예언은 없었겠습니까? 예언이 있었으면, 우리는 델포이신전 예언과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교회에게 ‘방언보다도 사모하라.’고 하셨던 예언과 이어서 생각해야 합니까?
물론, 저 역시 고전 12장과 14장 전체를 읽을 때 ‘고린도교회 방언 자체를 “성령의 나타나심”인 “신령한 은사”로 인정하신 바울 사도께서 신령한 은사인 방언을 교회의 덕과 개인의 덕을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신 경고를 당연히 독해합니다.
“델포이신전 여 사제들 방언”이라는 성경 배경 지식을 알게 돼, 고린도후서 11장 14절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나니,”라는 말씀에 비춰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을 해석한 자세를 살펴봅시다. ㅡ이 자세는 “성경 해석을 위한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다.”는 고백을 따르는 귀한 자세입니다.ㅡ ‘{바른 믿음} 정이철 [‘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혀를 이용해 자기가 자신에게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한 하나님이다.”며 신성모독도 서슴지 않은 듣보잡 정이철 삯꾼 자세를 살펴봅시다.
영민하실 뿐만 아니라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셨던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후서를 쓰실 때에야 ‘델포이신전 여 사제들 방언’이 떠오르셨을까요? 고린도후서를 쓰게 하실 때에야 주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사탄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을까요? 그래서 고린도교회 방언을 두고 바울 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 형제들아, 너희들 방언이 델포이신전 방언과 똑같은 사특한 방언임을 내가 고린도전서를 쓸 때는 미처 파악하지 못한 까닭에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즉, 내 명령은 주님과 깊은 사귐을 갖지 못한 채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미혹의 영 지배를 받은 나머지 큰 오류를 저지른 명령이었다. 그런데 너희가 사특한 방언을 하는)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탄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이다.” 하셨을까요?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은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하나님 말씀이 아닌, 당연히 바울 사도 한계가 드러난 문서, 오류가 있는 문서, 사람의 말일 뿐입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존 맥아더 목사가 목욕물(무분별한 은사주의)을 버리려다가 애(성경)까지 버려 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질렀음’을 라마드 목사님과 이지끼을 님이 명백히 밝히셨음에도 두 분 글들을 읽지 않으셨는지, 지난 12일 새벽에 뜬금없이 “맥아더 목사님은 성경 원어를 전공하신 분입니다.”라는 댓글을 쓰신 송다니엘 목사님은 이제라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셔야만 합니다. 목사님 이 댓글 때문에 {페북} 자신의 담벼락에서 지난 14일 새벽에 “맥아더 목사를 성경 원어에 무지한 자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맥아더 목사는 원어전공이라 하던데···.”라며 라마드 목사님과 이지끼을 님과 저를 음해 모독하신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훼손하지 않아야 할 개혁 신앙인이라면,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내가 신뢰하는 피터 마스터스 목사가 절대 틀릴 리가 없어.’라는 사고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중생론이든 방언론이든 모든 신학의 기초는 성경 해석에서 시작합니다. 이 기초가 그릇되면, ‘① 꽃끼리(성경)→ ② 코끼리(해석)→ ③ 꽃끼리(중생론이나 방언론 같은 신학)’로 갈 가능성은 없습니다. 물론, 신학이란 ②를 건너뛰어 ①에서 ③으로 가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신뢰하는 존 맥아더 목사가 절대 틀릴 리가 없어.’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고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 신앙에 진전이 있습니다.
{페북} 제 담벼락에 올렸던 다음 글은 이미 두 번 {개혁주의 마을}에 올린 글이지만 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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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은 복음과 함께한다.
박채동 (2016. 09. 07. 18:12)
1991년 봄, 제 제2 母 교회 목포제일교회에 정00 목사님께서 담임목사님으로 부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때 서울을 돈 버는 근거지로 하며 광주대학교 영어과 야간학부 3학년이었던 저는, “정00 목사님 은사운동을 판단해 봐라.”는 친구 강력한 전화 부름(?)을 받고 수업을 빠진 채 광주에서 목포로 갔습니다. 그리고 수요 저녁 기도회에서 정 목사님 설교를 들은 저는 기도회를 마친 뒤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정 목사님 ‘치유 사역 같은 은사운동’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정 목사님 은사운동을 곧바로 정죄한 것입니다.
“타 종교나 이단에게서도 환상, 방언, 예언, 치유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께서는 바로 전해진 하나님 말씀과 역사하신다. 정 목사님 은사운동을 판단하는 표준은 바로 이것이다.”
“사도 시대 이후 방언기도 은사는 중지됐다.”며 “그러므로 방언기도는 사특한 기도, 사탄의 기도다.”는 ‘극단의 정죄’를 일삼으시는 목사님들이 그 근거로 드는 예 하나는 ‘알 수 없는 언어로서 방언 현상은 타 종교나 이단들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타 종교나 이단에게서도 환상, 방언, 예언, 치유 같은 일이 일어나는 점’을 두고 마태복음 24장 24절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하신 주님 말씀과 데살로니가후서 2장 9절~10절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해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하신 바울 사도 말씀을 기억하며 ‘유념’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언어로서 방언 현상은 오늘날 이슬람이나 힌두교 같은 타 종교에서 더욱 발달해 있는 양상으로, 자연 종교 보편 양상이다.’는 까닭으로 ‘방언은사 중지론’을 주장하며 “방언기도는 사탄의 기도다.”는 ‘극단의 정죄’를 해야만 할까요? 사도 시대 때에만 ‘방언은 기독교 전유물인 성령의 은사’였을까요? 즉, 사도 시대 때에는 자연 종교 보편 양상으로서 방언 현상, 이교에 방언 현상은 없었을까요? 사도 시대 때도 오늘날 같이 이교에 방언 현상이 있었다면, 우리는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방언 은사를 자연 종교 방언 현상과 동일선상에서 생각해야만 할까요?
성령의 은사는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 가룟 유다 같은 사람도 맛보지는 않습니까?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맛본다고 해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 맛보는 성령의 은사를 “사탄의 은사다.”고 해야 할까요? “현대 교회에는 방언기도 은사는 중지됐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는 사특한 기도, 사탄의 기도다.”는 정죄, ‘극단의 정죄’를 해야만 할까요? 그것도 [고린도전서 12장~14장 주석]에서나 {기독교 강요}에서나 {제네바 요리문답}에서나 방언기도 은사를 인정하신 칼빈 선생님, 칼빈 선생님 글들을 ‘오독’까지 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