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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어진 예수 / 출 15:1-11, 눅 24:13-35
죽음에서 승리한 예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 심령 속에 가득 넘치기를 바라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렇게 묻기를 두려워합니다. 이 질문을 파히려 듭니다. 우리 앞 시대에는 사람들이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때에는 공동체와 각 개인이 건너가야 할 이 과정이 누구에게나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 삶이 끝날 때, 그 마지막을 풍요롭고 의미있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삶과 죽음 사이의 관계가 오늘날만큼 빈약했던 시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영적 가뭄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은 그저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데 바빠서 이 신비를 못본체 지나쳐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삶의 진수를 뿜어올리는 샘물에 입을 대고 살아가는 그 맛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1월 8일에 타계한 프랑스 전 대통령 미테랑의 말이다. 1981년부터 1995년까지 14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한 한 사람이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똑바로 바라보며 남긴 이 마지막 몇마디는 부활절을 맞은 우리로 하여금 여러모로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오늘 우리는 부활절 새벽예배를 진안지역 연합으로 드렸다. 이 예배는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 위원회가 주관하여 남한은 물론 북한의 교회에서도 함께 드리기로 하여 그 의미가 있는 부활절이 되었다. 전국에서 예배 드릴 때 부활절 남북공동기도문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예수 부활의 축하 행사가 예년보다 더 적극적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예수 부활하셨다’는 이 말씀 속에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승리가 있는 것이다. 부활의 역사적 사건 위에 교회가 세워졌으며 오늘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발전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을 목격한 자들은 너무나 많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하여 열한 제자들에게, 오백여 형제들에게 그리고 바울 사도에게 나타나 보여주신 사실까지 포함하면 12번 정도 부활하신 주님 자신을 공적으로 보여주셨던 것이다.
오늘 아침 우리들이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눅 24장의 내용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약 12km떨어진 엠마오로 가던 글로바와 다른 제자에게 나타난 사건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문 18절에 글로바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다. 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글로바는 요 19:25절에 나오는 글로바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다른 제자란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일 것이라고 한다. 분명한 사실은 글로바라는 이름을 가진 한사람은 뜨렷이 밝혀져 있다. 위에서 주장한 사실에 따르면 글로바라는 사람의 부부가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길 가는 중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된 사건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곁에 오셔서 동행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 곁에 함께 걸어가시는 주님을 쉽게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이 왜 에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나? 본문 말씀에는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엇이 그들의 눈을 가리었나?
1. 너무나 큰 슬픔이 그들의 눈을 가리었기 때문이다.
17절하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죄 없으신 예수님게서 비참하게 죽어가시는 그 모습을 목격하였던 그들의 마음에는 너무나 엄청난 슬픈 사건을 보았다는 것이다. 너무나 큰 슬픔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다. 우리들이 일상생활을 할 때에 어떤 때는 주님이 게시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애쓰는데도 실패, 좌절, 실망, 비애 등의 예기하지 않은 일들이 닥칠 때에 그런 요소들이 예수님을 가리어버릴 때가 있다. 예수님의 침묵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깊은 슬픔의 수렁에 빠지면 어떤 때는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슬픔 속에 깊이 빠지면 자기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하였다. 그리고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친히 말씀하셨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지나치게 슬픔에 잠겨있으면 안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항상 기뻐해야 한다. 이것은 삶이 곧 승리자의 삶이 되는 것이다.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없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주님을 섬기는 자는 항상 기뻐해야 하며 항상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 자체가 승리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의 잘못된 그리스도관이 그들의 눈을 가리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하였던 것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켜줄 정치적인 구세주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여 로마의 통치 권력을 물리쳐 버리고 이스라엘을 독립시킬 것을 크게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털 깍는 자 앞에서 말없는 양처럼’ 죽어가신 사실을 보고 실망하고 절망하고 슬퍼하며 예루살렘에 있지 않고 그곳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개선 장군처럼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구세주를 기다리며 그렇게 믿었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 실망하고 슬퍼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두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의 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렸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순전히 정치적인 인물로 보았던 것이다. 본문 21절상을 보면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해방)할 자라고 바랐노라’라고 고백한 것을 보면 그들의 그리스도관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다. 그들의 기대가 잘못되어 있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관이 잘못되어 있으면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가 없다.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신 고난이 종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똑바로 보아야 한다. 철저하게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 중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의 죽음을 대신 죽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어떤 때는 자기 중심성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우리의 이익과 목적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이용하려는 때가 많다. 이같은 태도 속엔 부활의 주님은 자신을 보여주시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국회의원 선거를 나흘 앞두고 있다. 온통 난리법석이다. 여야없이 자기 당이 당선되어야 이 나라가 잘 된다는 식이다. 출마한 후보 중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다는 자랑이 홍수를 이룬다. 자기가 당선되면 그 지역이 곧 변할 것처럼 말들을 한다. 여기에는 틀림없고 분명한 사실이 있다. 모두의 주장이 한결같이 미사여구로 꾸며져 있다는 것과 당선을 위한 선동과 헛 약속인 공약이라는 사실이, 상대를 공격했던 창칼을 거두는 날 쏘았던 화살은 반드시 되돌아와 자신을 찌르게 될 것이다. 이런 와중에 불미스런 일들도 생겼다. 장학로 사건, 노수석 군 사망 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일도 있었다. 경기도 여주에서는 권총으로 위협을 했다, 아니다, 가스총이다 등 서로의 주장이 팽팽하다. 이런 사람들이 국회에 가면 국민을 위해서 제대로 무슨 일을 하겠나? 개인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국민의 고충은 듣지 않을 것이고, 국민의 편의를 위해 힘쓸 사람들도 아닐 것이다. 선거철만 되면 내가 이렇게 열심히 여러분들을 위해 수고했다는 자랑만을 늘어놓을 사람들이다. 또한 선거철만 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골 메뉴가 있다. 북한의 동정이 어떻다, 간첩이 어떻다, 귀순한 자의 기자 회견, 시국 강연 등 공안정국으로 이끌고 간다. 그래서 나라가 안정되려면 우리 당을 찍어야 한다는 식이다. 또 하나는 종교간의 갈등도 보인다. 그래서 불교인들의 마음을 달래려고 백방으로 수고하는 당도 있다. 이런 것들은 만의 하나라도 자기 목적을 위하여 신도, 종교도 이용하려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우리들의 삶에서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되게 해야 한다. 이런 자의 노력은 기독교인 뿐만아니라 다른 종교인들도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주님은 구주이십니다’라는 고백 속에서 이번 부활절을 보내야겠다.
3. 그들의 불신앙이 그들의 눈을 가리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22-24절을 보면,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이 시체를 보지 못하고 돌아온 보고를 받고 동료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서 빈무덤을 확인하고 왔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글로바를 중심한 이 두 제자는 적어도 한가지 일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함께 하던 다른 여인들이나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서 확인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빈 무덤의 이야기만 듣고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이같은 소극적인 태도는 우리가 배울 것이 없다. 무덤이 비어 있으면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과 함께 문제제기를 했어야 옳은 일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들의 판단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들이 그렇게 들었던, 예수님게서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재고하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를 믿는 깊은 신앙이 있었다면 예루살렘성 안에서 인내하는 자세를 가질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은 믿기 어려운 것이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이같은 이야기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식을 깨뜨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을 헤치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는 이적 중의 이적이요, 반논리나 비합리나 반이성이 아닌, 초논리 초합리 초이성의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이같은 세계는 자기를 탈출할 때에 생기는 것이다. 이런 경지를 곧 믿음을 가진 상태로 보아야 한다. 곧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의미인 것이다.
결론을 말씀드린다. 예수님께서 부할하시던 그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슬픔에 잠겨 있었으며 그릇된 그리스도관에 잡혀 있었고, 그리고 주님의 부활에 대한 불신앙 때문에 부활하신 주임과 대화하면서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신 후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마을에 같이 들어가셔서 저녁식사를 같이 할 때에 두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뵙는 영광, 이것이 축복이요 영광인 것이다. 이 제자들은 오히려 불신하고, 실의에 빠져서 엠마오로 내려가는데 그 실망, 슬픔, 불신, 그리고 아집의 길에 찾아오셔서 주님은 자신을 보여주셨다. 이 엄청난 감격,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두가지 사실에 대하여 크게 놀랐다. 그 하나는 십자가 형틀에서 사형당하신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놀랐다. 또 한가지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셨다는 이 엄청난 사랑의 은총에 대하여 크게 놀라게 되었다. 그들은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열한 사도들과 함께한 자들이 모여있는 그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체험의 사실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 뵌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사로잡혀야 한다. 그러면 슬픔도, 잘못된 그리스도관도, 미지근한 믿음도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슬픔이 있는가? 그리스도관이 분명하지 못한 점이 있나? 불신앙의 요소들이 있나? 성서를 통하여 우리들을 지금도 깨우쳐주고 계시는, 우리 곁에 계시는 부활의 주님을 분명히 알고 그를 모시고 그와 함께 신앙생활의 길을 가야 하겠다. 가리어진 예수! 그는 지금도 성서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자신을 항상 보여주시고 계신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분명히 뵙고 그를 전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까지 올라가는 현실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확신있는 신앙은 노력이 따르는 법이다. 그래야 믿음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우리에게 가리어진 것을 모두 벗겨낸 후 확신있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바란다. (1996-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