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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안드레 / 렘 31:31-34, 요 12:20-33
요즘은 선거철이 다가오기 때문인지 통계 및 여론조사 발표가 언론을 통해 많이 발표되고 있다. 해외선교사 파송은 세계 7위이다. 교통사고는 세계 3위, 전북이 1위, 승용차 크기는 유럽의 중위권인데, 요즘도 계속해서 대형화 고급화가 되어가는 추세이기 때문에 2-3년 후엔 세계 1위가 되지않을까 한다. 입시지옥으로 인해 자살하는 청소년들의 숫자도 세계 1위일 것이다. 또한 아시아에서 부패 순위가 5위로 나왔다. 세금 횡령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부패 순이니까 이후에 조사를 했다면 이것도 아마 1위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최근의 여론조사에서도 공무원들의 신임 정도를 물으니 10% 정도만이 믿을 수 있다고 답변을 했다. 특히 서울시민은 98%가 불신한다. 옳은 일과 개인의 이익이 있을 때 사람들은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행동한다. 옳은 것을 좋아하는 것하고 나 자신이 옳다는 것하고는 전혀 다름을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옳아야 하고 나는 그 옳은 것에 살짝 떠나 이익을 봐야 한다는 것이 우리들 대부분의 마음이다. 사람들은 이익 앞에서는 모두 쌍심지를 켜는 것이 보통이다. 옳은 것이 이 땅에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세가지 과정이 필요하다. 1) 옳은 것에 대한 학신, 2) 옳은 것에 대한 증거, 자기 속으로 숨기면 안된다. 옳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설득되어야 한다. 3) 옳은 것을 이루기 위해 희생과 대가 지불. 이 세가지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옳은 것을 영원히 머리로만 생각해야 한다.
이 시간에 옳은 것을 붙잡고, 옳은 것을 증거할 줄 알고, 옳은 것 때문에 어떠한 대가라도 치룰 줄 알았던 한 사람을 소개하겠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안드레이다. 안드레라는 말은 남자답다는 뜻이 있다. 안드레의 고향은 벳새다이다. 그가 자라서 활동한 지역은 가버나움이다. 형 베드로는 활화산처럼 울끈불끈하고 격정적인 성격인데 비해 동생 안드레는 신중하고 조용하며 예민하게 자기를 태우는 사람이었다. 그는 휘발유에 불을 붙인 것 같은 사람이 아니라 갈탄처럼 계속 자기를 연소시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습이 성서에 처음 나오는 곳은 요 1장이다. 그는 광야에 나가 외치는 세례 요한의 소리를 듣고 있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세례 요한이 말한다. ‘참 빛이 왔다. 그러나 그 빛을 사람들이 받지 않았다. 그 빛은 세상에 왔으되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 그 빛은 영광을 받아야 할 약속된 메시야이다.’ ‘그러면 당신은 뭐냐?’ ‘나는 그 빛을 증거하고 그 메시야를 증거하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다.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 안드레는 어부였지만 그날그날 웃고 떠드는 사람에 만족하지 않았다. 진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례 요한을 좇아다니는 제자였다. 그러다가 어느날 요한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외치는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께로 간다. 그는 묻는다. ‘어디 계십니까?’ 그는 예수 앞에 나간다. 여기서 그의 첫 번째 생애가 시작된다. 역사상 최초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었다. 그의 생애를 자세히 살펴보면 세가지 특징을 볼 수 있다.
1. 결단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진리의 소리를 듣고 예수가 메시야인줄 알았다. 그를 따르고 순종해야 될 분으로 알았다. 그때까지 이 세례 요한의 외침을 듣고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안드레는 최초로 예수를 만난다. 그리고 믿었다. 그리고 그가 ‘와서 보라’는 소리에 함께 거한다. 아직 아무도 예수 앞에 가지 않을 때였다. 누구든지 처음 갈을 가는 사람은 외로운 법이다. 결단력이 필요하다. 그는 떠들지 않았지만 예수가 메시야이고 진리인줄 알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분을 좇아가는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으로는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의식 속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좋은 제도도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네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민족의 자긍심으로 꽉차 있었다. 아무도 따르지 않는 예수를 진리인줄 알고 따른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마치 개척자들이 첫길을 가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그가 최초로 예수를 따른 것도 험난한 길이었다. 그 옆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 한 사람이 같이 갔다고 성서는 말한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대부분 사도 요한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 안드레는 자기가 확신한 바를 마음으로 결단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여러분은 진리를 향한 갈증도 있고,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도 있고, 때론 진리로 감동도 했을 것이다. 혹시 그 진리를 내 삶 속에 받아들이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지는 않는가? 계속 회개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진리 앞에서 결단없이 인생을 질질 끌려다니고 있지는 않는가? 진리 앞에서 결단할 줄 아는 안드레의 모습을 우리는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겠지만 옛날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 성서를 신문지에 싸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치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처럼 할 때가 있었다. 식사할 때도 사람들이 기도할 때 기도를 하는지, 눈을 한번 감는지, 눈을 손으로 한번 만지는지 모르게 은근슬쩍 해치우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것이 많이 없어졌다. 지금도 그렇게 기도하는 분이 있는가? 자기가 믿는 것을 왜 나타내지 못하는가? 그 정도 확신이 없는 것이라면 왜 믿는가?
2. 다른 이에게 증거하는 증인이었다.
이 안드레는 자기의 믿음을 혼자 가슴에 품고 있지 않고 바로 증거했다. 자기 형인 시몬 베드로에게 가서 ‘오늘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 형 베드로를 예수 앞으로 데리고 갔다. 증인의 삶은 책임을 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가 전도할 때 전도가 가장 잘 안되는 사람은 가족이다. 정말로 감동을 하지 않는다. 멀리 있는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여도 기족들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물론 많은 이유가 있고 오해도 있을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 삶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감동하는 것도 안다. 기뻐하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우리 삶이 근본적으로 그들과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시대에 멸시를 받고, 이 시대에 증거가 약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 그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안드레는 달랐다. 증거가 확실했다. 그가 진리 위에 서서 사는 모습이 분명했다. 그 형의 우락부락했던 마음도 흔들렸다. 그리고 주님 앞으로 인도했다. 안드레의 삶은 자기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많은 사람 앞에 증거하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만나는 한사람 한사람을 향해 복음을 성실하게 증거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기 형을 주님 앞으로 인도했다.
그 다음 모습은 벳새다 광야에서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예수님께러 둘러 앉았다. 예수께서 시장한 무리들을 보고 민망히 여기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사람들을 얼마나 가지면 먹일 수 있겠는가?’ 그러자 셈을 잘하는 빌립이 말했다. ‘어림짐작을 해서 요기만 한다해도 2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겠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시험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안될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드레가 잘 알고 있던 꼬마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덩이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안드레는 주님께로 이 소년을 인도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으시니, 이 아이이 적은 것을 드리면 주님께서 쓰시겠지’ 아마 이런 확신이 안드레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우락부락하던 자기 형 베드로가 주님 앞에 붙잡혀 쓰임을 받자 과거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앞선 제자의 모습으로 사는 것을 보았다. 안드레는 한사람의 가능성을 보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어린 소년이 가진 조그마한 가능성을 주님 앞에 갖다 바친다. 주님께서는 오천명을 먹이시고 12광주리를 남기는 기적을 행하셨다.
그 다음 모습이 오늘 본문이다. 헬라 사람들이 천하 각국에서 모였을 때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러 오셨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만나자고 한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 세상에 유대인 외의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이방 사람은 개나 돼지와 똑같다’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자고 한 것을 빌립이 듣고 안드레에게 말하자, 안드레가 두말하지 않고 이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하나님의 사람 안드레는 예수님께 사람을 소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 교회에도 안드레와 같은 사람이 있다. 주일학교 교사들이다. 옛날 우리교회 주일학교 일지를 보니까 200명 이상이 나왔다. 그런데 지금은 10명 정도이다. 비록 적은 수 일지라도 한 영혼을 향해 관심을 갖는 사람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신다. 우리 하나님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사람보다 1명의 죄인이 주님께로 나오는 것을 더욱 기뻐하신다.
스코틀랜드에 셀콕이라는 마을에서 큰 부흥회를 일주일간 했다. 전도 부흥회였다. 그런데 아무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집회는 별볼일 없는 집회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을 마지막 순간이었다. 한 소년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생애를 드리겠다고 했다.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한 아이가 그랬겠거니 하였다. 그러나 그 한 아이가 일어선 것이 세계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 소년의 이름은 바로 리빙스턴이었다. 그는 하나였다. 그 하나가 저 어두운 대륙 아프리카에 복음을 증거하는 선봉자가 되었다. 주님 앞으로 인도하여 놀라운 사역자로 만든 것이다. 바로 하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옳은 일을 끝까지 붙잡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옳은 것을 알고 감동은 하지만, 그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 옳은 것을 이루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과 자기 희생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병인지도 모르겠다.
안드레는 어떤 사람인가? 역사상 최초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이다. 제자 중에서도 가장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기록은 성서에 12번 나온다. 12번 나오는 것도 시몬 베드로의 형제로 나온다. 얼마나 기뿐이 나빴겠는가? 이 안드레의 경우는 자기가 모든 것을 먼저 했다. 그런데도 자기 형인 베드로를 통해 그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참으로 억울하고, 전라도 사투리로 하면 약이 올랐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의 순서를 나타낼 때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 다음이다. 사람들에게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다. 가장 앞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이름은 예수님이 세사람을 데리고 다닐 때도 빠졌고, 데려가 주지도 않았다. 그런데 안드레의 삶에서 그것을 불쾌하다는 기록이 하나도 없다. 그는 누가 높아지는가에 간심이 없다. 그는 자기가 배운 진리를 자기 삶 속에 적용하는데에 충실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 스승에게 진리를 배울 때에 진리의 같모습을 배운 것이 아니라 내용을 충성스럽게 배웠다는 것이다. 그의 첫 스승이었던 세례 요한이 예수를 보며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다. 그는 자기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알았다. 예수만 높아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 형이 높아지든지 친구들인 요한과 야고보가 자기보다 높아지든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예수만 높아지면 된다. 그만 영광받으면 된다. 그의 거룩한 이름만 높아지면 그에게는 다른 기쁨이 없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충성스럽게 붙잡고 살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참으로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느냐? 진실로 큰 자는 낮아지는 자이고 진실로 큰 자는 섬기는 자이다.’ 그는 이런 주님의 진리를 붙잡은 사람이었다.
3. 옳은 일을 위해 희생한 사람이었다.
옳은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희생을 치러야 한다. 대가를 치러야 되는 법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높아지고 주의 나라가 흥왕하기 위해서는 어떤 낮아짐도 불사해야 한다. 이 교회가 참으로 평화스럽고 참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내 욕심과 내 주장을 어떻게든 꺽어야 한다. 옳은 것을 향해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은 말장난이다. 우리가 통일을 말하고, 또 하루빨리 통일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다면 우리의 소비를 2/3로 줄여야 한다. 1/3이 손해날 각오를 해야 한다. 이것이 된 사람만 통일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통일 이야기를 말할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말한다면 사기꾼이다. 옳은 것이 옳은 것 되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하다. 악은 대가없이 달콤하게 다가온다. 이 하나님의 사람 안드레는 옳은 것이 옳은 것 되기 위해 어떤 대가도 치렀다. 자기가 낮아지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진리를 붙잡았다. 예수는 흥하여야 되겠고 예수를 다르는 자는 쇠하여야 되겠다는 말씀을 붙잡았다.
후에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명령을 받아 러시아로 가셔 복음을 전한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그분을 자기 나라의 수호 성인으로 생각한다. 그분이 스코틀랜드에 가서도 북음을 증거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도 우리의 사도는 안드레라고 한다. 범위가 세계에서 제일 넓다. 그리고 그리이스가 또 안드레를 우리의 성인이라고 말한다. 그는 나중에 파트라에 돌아와 영주의 부인에게 복음을 전했다. 자기 부인이 예수 믿는 것을 보고 화가 난 영주가 이 안드레를 처형했다. 십자가에 달려있던 안드레가 큰소리로 말했다. ‘죽는 모습이라도 우리 주님과 같은 모습이어서는 안됩니다. 자세를 조금 바꾸어 주십시오.’ 죽는 사람이 마지막 소원이었기에 영주는 그것을 들어 주었다. 지금도 죽는 사람의 마지막 소원은 들어주는 것이 세계적인 관습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비스듬히 X자로 세웠다. 바로 서있는 십자가도 지기 어려운데 몸이 한쪽으로 쏠리는 십자가는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런데 그는 ‘아멘, 주 예수여. 영광을 홀로 받으시옵소서.’ 하며 파트라에서 영광의 최후의 삶을 마쳤다. 그는 진리를 주장하고 자기 겸손을 죽음의 현장까지 끌고간 자였다. 진리를 참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진리는 확신되어야 한다. 그리고 진리를 붙잡은 사람들은 결단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고 증거되어야 한다. 진리가 진리로 드러나기 위해 우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코른펠트라는 유대인이 있었다. 그는 머리가 좋아서 모스크바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열렬한 공산당원으로 스탈린을 섬겼다. 그러다 정치범으로 몰려서 시베리아 수용소에 유배를 당했다. 어느 날 유배지에서 환자를 돌보는데 한 환자가 치료하려는 자기를 향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듣게 되었다. 만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그런데 그 코른펠트가 모진 고문에 죽어가는 그 사람의 임종을 보게 되었다. 임종 때 그가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합니다. 나를 받아주옵소서. 그리고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기도를 듣는다.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람을 미워하고 견제하고 한을 품는 것이 공산주의의 힘의 근거였다. 그런데 미워하지 않고 용서한다. 그에게 그것은 큰 충격이었다. 자기들이 멸시하고 이단이라고 생각했던 예수, 그는 그 죽은 청년이 버리고 간 성서를 읽기 시작하고,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다. 포로수용소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은 특권층이었다. 거기서 특별히 뽑힘을 받아 음식을 나른다든지, 하는 일이 다른 것에 비해 쉬어서 성분이 좋다는 사람들만 뽑아다 놓았다. 그런데 보니까 환자들에게 급식하면서 이 간호부로 임명받은 사람들이 음식을 훔쳐먹어 환자들은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그래서 코른펠트는 이들을 고발했다. 이들이 계속 파면을 당했다. 나중에는 후에 죽이겠다는 협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이다. 그는 장암 환자를 수술했다. 마취제도 없고 진통제도 없이 수술을 했다. 수술해 놓고 의사로서 얼굴이 긴 젊은 청년을 향해 옆에 앉아 자기가 만났던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아픈 중에 이 청년은 누워서 의사의 증언을 들었다. 새벽녘이 되었다. 이 청년은 고통 중에 잠간 잠이 든 것을 보고 빙긋이 웃으면서 그 자리를 떠나 자기 막사로 가다가 누구인지 모르는 자에 의해 망치로 머리가 완전히 부서져 얼굴을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 죽었다. 그가 다음날 발견되어 장례식을 가졌다. 코른펠트, 진리대로 살았던 삶이 영원히 죽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날 밤 수술해서 복음을 들은 사람은 바로 솔제니친이었다. 그가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이 무시무시한 수용소의 악을 세상에 드러냈다. 한 사람이었다. 자기가 예수를 믿고나서 한 사람밖에 예수를 전하지 못했다. 그분이 위대한 솔제니친이다.
이런 안드레가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하다. 진리는 늘 마음 속으로 결단해야 한다. 머뭇거리지 마라. 인생은 빨리 가고 있다. 그대로 살다가 끝나려는가? 그 진리는 자신있게 다른 사람에게 증거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진리가 진리되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 이런 안드레 같은 사람이 오늘도 필요하다. 이 안드레처럼 참 진리를 사모하고, 진리를 진리되게 만드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5-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