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식당에서 우리가 오랫동안 가장 즐겨 먹었던 음식이 짜장면이나 우동, 짬뽕이었지.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삼대 대표 중국음식 중 우동이 선두권에서 처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거의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지는 듯한 분위기야. 아마도 중국식 우동이 일본식 우동에 밀려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러나 짜장면과 짬뽕은 여전히 한국식 중국집 메뉴판에서 치열하게 선두다툼을 하고 있어. 나는 예전에 우동파였으나 우동의 세력이 쇠하면서 지금은 짬뽕파로 변절했어. 그리고 나는 뚜렷하지 않은 어떤 이유로 지금까지 짜장면을 시켜 먹은 적이 없어. 다른 사람이 시킨 걸 한 젓가락 얻어 맛본 적이 몇 번 있을 뿐이야. 내가 그처럼 짜장면을 기피하게 된 원인은 자발성 알레르기 반응 때문인 것 같아. 나의 배탈을 봐주시는 내과 원장님께서 내가 지나치게 예민해서 “짜장면을 먹으면 배탈 날 거야”라고 지레 생각하기 때문에 나의 몸이 그런 반응을 일으킨다고 진단했지. 이른바 정신신체적(psychosomatic) 증상이라는 거야. 어쨌든 중식당에 가면 늘 짬뽕만 시켜 먹는 나의 성격은 참 웃기는 짬뽕이야.
그런데 짬뽕이 대체 어떻기에 웃긴다는 거지? 큼직한 사발에 넉넉하게 담긴 빨간 맛 국물 위에 불그스레 기름띠 떠 있고, 그 수면 아래 구불구불한 한 움큼의 면발이 보일 듯 말 듯 잠수해 있으며, 그 위로 수북이 쌓아 올린 건더기들, 살펴보면, 숨죽은 배추잎사귀 조각들 사이사이 끼어있고, 데쳐져서도 푸르기만 한 청경채 잎 서넛 걸쳐져 있고, 붉게 물든 양파 조각들 곳곳에 숨어 있고, 검게 미끈거리는 목이버섯 조각들 군데군데 얹혀 있고, 반질반질 검은 홍합 두어 개 입 벌리고 있고, 격자무늬로 촘촘하게 칼집 낸 오징어 조각들 오그라져 있고, 큰새우 두어 마리 등 구부리고 있고, 채 썬 돼지고기 조각들 국물 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하고, 화사한 붉은색으로 익은 꽃게 반 마리 자태 뽐내는 정말 군침 넘어가게 하는 비주얼인데. 오 거기에는 당연히 MSG도 듬뿍 들어갔지. 그에 비해 짬뽕의 맞수인 짜장면은 거무튀튀한 색깔부터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 미끈 질척거리는 질감도 마음에 들지 않고. 짜장면 색깔과 질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공연히 까탈스러운 짬뽕파인 나에게 해줄 말 있어. “짬뽕만 맛있는 게 아니라, 짜장면도 맛있어. 짜장파도 다 할 말이 있어.”
나이가 지긋해지면서 성격이 점점 더 까다로워지는 것 같아. 나나 내 친구들을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아마 뭔가에 의해 초조해지기 때문인가? 그러면 그 뭔가가 뭐지? 아마도 미래가 짧아지는 게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고, 몸의 기능들이 퇴화하는 게 너무도 확실하게 느껴지며, 그 결과 마음의 기능도 줄어드는 게 너무도 절실하게 체감되기 때문인가 봐. 사회적 활동 영역이 야박하게 좁아지는 것도 거기에 일조하고. 아무튼 여유가 없어진다는 건 초조하게 하는 거니까. 마음의 여유가 가뭄에 저수지 물 줄어들 듯 날마다 줄어드니 작은 일에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기 쉽고 상처를 받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쉽고. 그래서 자칫하면 삐치고 화내고. 인생의 성취가 일단락 된 후에는 남과 비교하는 경향이 커지면서 다른 사람의 성공이 상대적 박탈감으로 이어지고 그에 대한 자기 방어로 자기 확신이 굳어지고.
바로 그 자기 확신 때문에 자신의 의견만 주장하게 되며,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줄창 자기 말만 하려들어. 누가 자기 의견에 반대하면 그를 싫어하게 되고 그를 배척하려 해. 그러다가 결국 자신이 배척당하게 되고 말지. 왜 그런 난치병에 걸리는 걸까? 낫살이나 자시게 되면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얻게 된 협량한 지식을 ‘지혜’라는 불빛으로 착각하고, 그 가짜 혜안으로 세상과 인생을 훤히 꿰뚫어보게 되었다고 착각하게 되기 때문 아닐까? 한술 더 떠서 자신의 그 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주입시키려는 사명을 스스로 떠맡기기도 하고. 그것도 생각의 순발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에서 말이야. 젊은 나이에 그런 마캥이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그건 조로 현상이고.
그러한 착각과 그 밑에 깔린 초조함이 오히려 자기정의와 자기 확신이라는 경직 상태를 초래하나 봐. 사후 경직은 몇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린다지만, 사전 경직은 죽어야 풀리려나.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나나, 다 같은 방식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동시에 마찬가지로 서로에게 바라보이는 건데. 그런데도 모두들 ‘나’만 언제나 옳아. 그래서 언제나 ‘나’가 문제야. 내 생각이 100% 옳고 다른 사람 생각이 100% 그르다는, 전자가 절대 선이고 후자가 절대 악이라는 철석같은 믿음이 생기면, 나의 믿음에서 50% 후려치고 또 상대방의 믿음에서도 50% 깎아서 아귀를 맞춰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만 너를 참아주는 게 아니라 너도 나를 참아주는데, 나만 남들을 견뎌주는 게 아니라 남들도 다 나를 견뎌주는데 너무 그러지 마, 웃기는 짬뽕아. 남들을 견뎌주는 것, 그게 민주적인 태도잖아.
첫댓글 웃기는 짬뽕이 된게 니50 나 50이 안되서, 뻘건 국물 불어터진 면위에 둥둥 떠다니는 건더기 신세여서 였군요.
사전 강직이 그 웃기는 짬뽕 국물에 풀렸음 좋겠습니다.
"웃기는 짬뽕아. 남들을 견뎌주는 것, 그게 민주적인 태도잖아." 너무 동감이 되는 말입니다. 성숙한 민주시민과는 너무나 큰 괴리가 있는 인터넷 댓글의 너무나 무서운 표현이 저를 너무 아프게 하는 요즘입니다.
그리고 " 예전에 우동파였으나 우동의 세력이 쇠하면서 지금은 짬뽕파로 변절했어. " 너무 웃겨요.
저는 유학시절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 가운데 하나가 짬뽕이었답니다 ^^ 요즘은 별로 안먹지만요.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사실 위와 같은 글 써서 남들에게 보이는 게 아닌데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막심했습니다. 위와 같은 말이 '옳은 개소리'의 전형이니까요. 주장이 들어 있는 글,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려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지는 글은 만인에게 거부감이나 반감만 불러일으키니까요. 근데 어쩌다 보니 제 글이 그런 경향이 짙어요. 참 큰일났습니다. 그렇다고 입 꾹 닫고 아무 말 안 하고 살자니 그것도 어렵고.
채만식의 풍자소설 <태평천하>를 읽는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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