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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스테이 프로그램과 심신치유의 관계성
4)발우공양의 치유적 의미
식생활 문제 해결 없이는 생존이 어렵듯이 공(空)에 대한 이해와 실천 없이는 불교의 궁극적인 깨달음은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템플스테이의 중요한 프로그램 중의 하나는 발우공양이다. 발우공양의 핵심적인 내용을 공양 의식문을 잘 담아내고 있는 『석문의범』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발우공양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 깃들어있는 게송이 공양을 위해 자리하며 원을 세우는 「개공발원」과 공양의미를 다섯 가지 관점에서 살핀 게송인 「오관게」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음식을 먹는 것은 중생을 제도하고 법을 구하고자 함이고, 이 공양을 들고 부끄럽지 않은 출가사문이 되겠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공양에 임할 때는 모두 함께 발원하세 若飯食時 當願衆生
선열로 음식삼아 환희로움 충만키를, 禪悅爲食 法喜充滿
결가부좌를 맺을 때 모두 함께 발원하세 結跏趺坐 當願衆生
선의 뿌리 견고하여 부동지위 얻어지길, 善根堅固 得不動地
빈발우를 볼 때에는 모두 함께 발원하세 若見空鉢 當願衆生
그 마음 청정하여 번뇌업장 없어짐을. 其心淸淨 空無煩惱
-「개공발원」
공양을 하기 전에 받는 공양의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지 않길 바라는 발원을 담고 있다. 음식을 단순히 배고픔을 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정신을 맑고 넉넉하게 하는 선열로 삼을 것을 발원하고, 아울러 음식이 포만감을 주듯이 일체 중생이 공양을 받아 법희로 충만되길 기원하는 것이다. 아울러 공양시의 결가부좌한 모습이 선의 뿌리가 견고하여 흔들림 없는 부동심의 경지로 되길 서원한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비운 발우를 보면 마음이 맑고 깨끗하고 비워져 치성한 번뇌가 사라지길 바란다. 여기에는 음식을 받는 수행자만이 아니라 일체 중생이 맑고 깨끗한 자성(自性)의 모습으로 되길 바라는 소망이 담지되어 있다. 따라서「개공발원」에는 모든 중생이 이 음식의 색(色) 향(香) 미(味)를 평등하게 받아 지녀 배가 부르게 되고, 또한 이 음식을 제공하는 자와 더불어 무량한 깨달음을 얻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공양의 의미를 다섯 가지 관점에서 생각하는 「오관게(五觀偈)」를 대중의 동음(同音)으로 염송한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計功多少 量彼來處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忖己德行 全缺應供
탐심을 여의어서 허물을 막고 放心離過 貪等爲宗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正思良藥 爲療形枯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받네 爲成道業 應受此食
-「오관게」
공양에 임해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를 깊이 생각한다. 즉 여기에 이르기까지 음식의 재료를 생산하고 만든 과정에 동참한 많은 사람들의 수고스러움과 자연의 은덕을 깊이 성찰해 본다. 즉 자연의 모든 존재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과 상호침투라는 생태학적 관계망 속에 살아간다는 연기법을 되새기는 순간이다. 따라서 이 음식을 먹는 진정한 의미는 맛으로 공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탐·진·치 3독을 여의고, 허물을 막으며 오직 육신을 지탱하기 위한 약으로 알고 먹어 깨달음을 이루겠다는데 있다. 『금강경』의 첫 장인 「법회인유분」도 세존의 걸식과 발우공양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수행자에게 '밥 먹는 행위'는 단순히 식욕을 채워주는 일이 아닌, 수행을 위한 준비하는 과정이자, 수행 그 자체임을 강조하고 있다.
선사들의 수행에 있어 음식이란 기본적으로 '굶주림을 면할 정도'의 분량이면 충분했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1158-1210)도 『계초심학인문』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단지 육신이 쇠약해지는 것을 막아 도업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단정함으로써 수행자의 식탐을 경계하고 있다. 이처럼 수행자들의 삶에서 음식은 식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허기를 채우는 것이며 몸을 지탱하는 약에 비유될 뿐이었다. 음식을 검소하고 소박한 삶의 양식으로 여기는 불교의 진정한 공양정신과 법도가 이 짧은 게송에 응축되어 있다. 즉 내면적으로는 깨달음을 얻고 밖으로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는 수행자의 고귀한 정신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관게」는 부처님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그 위대한 사상과 공덕을 찬탄하고, 공양이 오기까지 공양물에 깃든 모든 이들의 노고와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의 수행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공양을 받은 인연으로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음을 끊어 마침내 불도를 이루어 보답하리라는 각오를 새롭게 다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식탐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래서 발우공양은 음식을 나누고 비워서 오히려 청빈으로 마음을 채우는 진정한 수행의 하나이며, 이는 곧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에게도 청빈과 비움의 사유를 갖게 하는 소중한 방편이 된다할 것이다.
아울러 발우공양의 근본정신은 평등, 청결, 절약, 공동(체), 복덕 공양을 말한다. 평등공양은 모든 대중이 차별 없이 똑같이 나누어 먹는 정신이요, 청결공양은 철저히 위생적인 원칙을 말한다. 절약공양은 음식찌꺼기 하나 버리지 않는 것이요, 공동공양은 화합과 단결을 높이는 대중공양을 말하며, 복덕공양은 한없이 큰 공덕을 성취하리라는 정신을 의미한다. 작은 음식물 찌꺼기도 소홀히 하지 않는 청결과 절약의 마음, 모든 이가 똑같이 나누는 평등의 마음, 음식이 내 앞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의 공덕을 생각하며 수행을 위한 몸의 유지를 위해 먹는다. 이 전통은 평등공동체를 지향하는 승가공동체의 핵심이다.
또한 발우공양에는 자비심이 담겨 있다. 아귀는 배는 남산만한데 목구멍은 바늘크기만 해서 항상 허기로 고통을 받는다. 그 아귀가 유일하게 달게 먹는 것이 천숫물이다. 따라서 작은 티끌이라도 남아있으면 아귀는 불에 타는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 천숫물에 티끌 하나 남기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이런 아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여기에 미물이라도 배려하는 자비심이 내재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불교에서는 살아있는 무수한 생명을 비롯해서 생명 없는 모든 무정물까지도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이처럼 삼라만상을 유기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생명과 그에 대한 사랑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성되는 생사의 연속과 반복이 계속되는 것을 깨닫게 한다. 따라서 이승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인연의 씨줄과 날줄로 엮어진 우주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교의 자아와 우주의 생명적 교감이 생명의식으로 고양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우주적 생명교감 의식의 고양은 귀신에게까지 공양을 베푸는 「생반게(生飯偈)」에서 잘 드러난다.
너희 귀신의 무리들아 汝等鬼神衆
내 이제 그대들에 공양하니 我今施汝供
일곱 낱알 시방에 가득하여 七粒遍十方
삼악도의 기갈 면하고 三途飢渴..
모든 번뇌 없애도록 悉除熱惱
모두 함께 공양하소. 普同供養.
-「생반게」
공양을 들기 전 약간의 음식을 떼어 귀신들에게 헌식을 한다. 3악도를 헤어나지 못하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귀중생의 기갈을 면하게 하고, 번뇌를 끊도록 헌식을 하는 것이다. 적은 양이라도 남을 위해 한 숟가락을 나누어 타인은 물론 귀신도 함께 먹는다는 의미다. 남아서 하는 적선과는 달리 부족하지만 쪼개고 나누며 진심으로 생명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일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을 서로 공경하고 살고자 하는 생명의 본성을 존중과 자비정신이 있다. 자비는 모든 생명의 시원에서 생명을 빚어내고 이것을 확산하여 우주로 확대해 나감으로써 생명을 영속적으로 가능케 하는 생명의 원동력인 것이다. 이 점에서 생명은 바로 자비이고, 자비란 바로 생명의 본성을 키우고 완성해 나가는 우주 에너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비 생명사상이 위의 인용된 게송에서 아름다운 무늬결을 이루고 있다.
불교의 살생금지 윤리는 불자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실천윤리가 되는 5계와 사미승이 지켜야 할 사미10계의 첫 번째 덕목이다. 초기경전인 『현우경(賢愚經)』의 '생명의 저울'이라는 비유는 중생의 모습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상관없이 생명이란 관점에서 모두 동일한 생명의 무게를 지녔음을 강조한다. 이는 '생명의 저울'은 생물의 몸집이나 크기, 효용가치의 여부라는 도구적 가치를 다는 저울이 아니라 생명의 본질적 가치를 다는 저울이기 때문이다. 이는 생명평등주의 사상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사상적 근거이기도 하다.
미혹한 중생의 눈으로 보면 한 방울의 물이나 좁은 공간, 또는 허공에는 아무런 생명이 살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천안(天眼)으로 보면 무수히 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아무리 작고 하찮은 미세한 생명일지라도 존중되어야 함을 일깨워 준다. 이러한 생명존중 사상을「정식게(淨食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심안으로 보면 吾觀一滴水
팔만사천의 뭇 생명이 그 속에 있어 八萬四千蟲
보살행을 실천해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한 몸에 받는 구도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나무 밑에 앉아 수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비둘기 한 마리가 갑자기 품 안으로 날아들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곧이어 매 한 마리가 나타났다. 매는 그 구도자에게 그 비둘기를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그가 말했다. "내 본래의 서원은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을 구원하는 일이다. 나는 이 비둘기를 결코 네게 줄 수가 없다." 그러자 매가 말했다. "당신은 지금 모든 존재들을 구원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만일 그 비둘기를 내어놓지 않으면 대신 내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물었다. "만일 네게 다른 고기를 대신 주면 너는 그걸 먹겠느냐?" 매가 말했다. "갓 죽인 더운 고기라야 먹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구도자는 날카로운 칼을 가져다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매에게 주었다. 그러나 매는 그 살점을 저울에 달았을 때 비둘기의 무게와 똑같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매의 주장에 동의했다. 저울의 한쪽에 비둘기를 올려놓고 다른 한쪽엔 자신의 살점을 올려놓았다. 그러나 저울은 비둘기 쪽으로 기울었다. 비둘기가 더 무거웠던 것이다. 자신의 살이 적었다고 생각한 구도자는 다시 두 팔의 살을 베어내 저울에 올렸다. 그러나 저울은 미동도 없었다. 다시 옆구리 살도 베어내 저울에 올렸다. 그러나 저울은 여전히 비둘기 쪽으로 기운 채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구도자는 일어나서 온몸으로 저울 위로 올라섰다. 저울은 그제야 평형을 이루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꽃들이 날리기 시작했다.(『현우경』중 '생명의 무게')
수행에 따라 도를 이루어 가는 순서를 보인 다섯 가지 안력이 5안(五眼)이다. 1)가시적인 물질인 색(色)만을 보는 육안(肉眼), 2)인연과 인과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 현상적인 차별만을 볼뿐 실체를 보지 못하는 천안(天眼), 3)공(空)으로 원리는 보지만 중생을 이롭게 하는 도리는 보지 못하는 혜안(慧眼), 4)다른 이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지만 가행도(加行道)를 알지 못하는 법안(法眼), 5)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다 아는 불안(佛眼)을 이른다.
만약에 이 주문을 외우지 않으면 若不念此呪
중생의 고기를 먹는 것과 같구나 如食衆生肉
"옴 살바나 유타 발다나야 반다반다 사바하"
-「정식게」
중생육(衆生肉)이 들어있지 않은 청정한 공양임을 찬탄한 게송이다. 심안으로 보면 한 방울의 물속에 수많은 중생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수행자는 그들을 해치지 않도록 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지극한 외경심이 드러나 있다. '한 방울의 물'에도 팔만사천마리의 벌레, 즉 무수히 많은 생명체가 있음을 통찰하는 의식은 물속이라는 작은 우주 공간 속에서 근원적 존재로서 삼라만상의 근원이 되는 생명의 존재질서를 간파하는 힘이다. 한마디로 생명에 대한 응시이며 생명에 대한 우주적 연민의 감정을 표상한 것이다. 아울러 무수히 많은 벌레들은 소중한 영혼을 담지한 존재이기에 그들이 살고 있는 물을 마신다는 것은 그들의 고귀한 생명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범망경』 『능엄경』 『능가경』 등 많은 경전에서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은 곧 자비의 종자를 끊는 것(殺生斷汝慈悲種)임을 설한 것도 궁극적으로 생명존중에 대한 강조라 할 수 있다.
이어 수저를 세 번 들며, 그때마다 염하는 원을 노래하는 게송 「삼시게(三匙偈)」를 염송한다. "이 음식을 먹고 모든 악을 끊고, 선을 닦으며, 일체 중생과 함께 성불을 하겠다"는 발원을 염송한다. 즉 나쁜 업은 끊고 선업을 쌓아 그 공덕을 남김없이 뭇 중생에게 모두 회향되어 다함께 성불로 이어지길 염원한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자신이 받은 이 공양이 법계의 모든 삼보께 올리는 공양이 되고, 이 시식을 받은 중생이 기갈을 면하며, 또한 수고한 모든 이들이 선정 삼매로 밥을 삼아 법의 즐거움이 가득하여 무상도를 이루기를 서원을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삼시게」는 「칠불통게(七佛通偈)」의 "모든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으며,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실천하고, 그 뜻을 맑게 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라는 것과 동일선상에 있다 할 것이다.
대중공양을 마치고 발우를 깨끗이 씻고 나면 처음 돌렸던 천수물을 걷는다. 천수물이라고 하는 이유는 천장에 붙여놓은 천수다라니가 이 물에 비치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상태여야 한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사찰에서는 뜨거운 물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혹여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물에 데어 죽지 않을까 염려해서이다. 여기에는 벌레건 파리건 하나같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태계에서는 그 크기와 관계없이 모두가 소중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적은 음식도 남기지 않아 남은 음식을 먹는 아귀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한 것은 지구상의 모든 개체와 종을 동등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생명이 서로 내밀하게 연결망을 형성하고 있는 한 통속으로 인식하는 우주만유의 친연성을 깨달은 것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발우를 씻은 물을 아귀 중생에게 주며 아귀가 기갈의 고통을 면하기를 염원하는 「절수게(絶水偈)」를 대중이 다 함께 동음으로 염송한다.
지금 이물 공양 후에 발우를 씻은 물로 我此洗鉢水
주린 고통 아귀에겐 천상세계 감로수라 如天甘露味
이렇듯 귀한 것을 아귀 중생에게 베푸나니 施與餓鬼衆
모두 함께 마셔 주린 고통 달랠 지어다 皆令得飽滿
"옴 마휴라세 사바하"
-「절수게」
천수물의 절묘한 묘용(妙用)을 찬탄하고 있는 이 게송에는 발우공양의 특징인 청결공양의 의미가 잘 드러나 있다. 발우 씻은 물은 주린 고통 아귀에겐 천상세계 감로수와 같다. 아귀들이 발우 씻은 물을 받아 마시고 주린 고통을 달래기를 기원한다. 절간에서 발우를 씻은 물을 퇴수구에 버리는 것은 아귀에게 공양하는 의미가 들어있으며, 이는 모든 존재는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존재망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인식은 생명의 숭고함과 삶의 연대의식을 일깨우는 화엄적 생명사상을 함축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절수게」에서 보여준 중생제도의 발원은 몸속의 중생을 제일 먼저 제도하겠다는 발원으로 확장된다.
나의 몸 가운데 8만 터럭이 있고 我身中有八萬毫
털 하나하나에 9억의 생명이 있어 一一各有九億蟲
저들을 제도하고자 이 음식 받았으니 濟彼身命受信施
반드시 성불하여 저들 먼저 제도하리라 我必成道先度汝
-「선도게(先度偈)」
몸속 존재들의 소중함까지 읽어내고 그들을 제도하리라는 발원에는 모든 생명의 존재는 인간과 동일한 존엄한 가치를 가진다는 인식이 내재되어 있다. 『화엄경』에도 "하나의 털구멍 속에 수없이 많은 국토와 바다 거 있고 그 각각 모두에는 여래가 보살들과 함께 앉아 계신다"고 설하고 있다. 아울러 그토록 많은 국토에는 불보살뿐만 아니라 수많은 중생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미세한 먼지처럼 많은 중생'이라는 의미에서 '미진수중생'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의 존재 원리를 화엄경의 안목으로 보면 아무리 작은 먼지라 하더라도 그 먼지 속에는 크고 큰 시방세계가 다 들어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내 몸 속의 팔만 모공 하나하나에 들어있는 구억의 생명들, 즉 한량없는 생명들을 제도하기 위해 이 공양을 받았으니 기필코 성불하여 그들을 제도하리라는 발원을 하고 있다. 오관으로 파악할 수 없는 생명조차도 소중히 여기고 연민의 정으로 배려하고 보살피는 것은 만유의 존재가 하나로 합일하는 화엄적 생명의 자각이다.
발우공양의 의식의 완료를 목전에 두고, 끝으로 공간상에서 아직 거명되지 않은 동방의 교화주인 해탈주의 명호를 들어 예찬과 귀의를 표명하며 「해탈주(解脫主)」를 염송한다. 이어 법계의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을 세우는 「회향게(回向偈)」를 함께 염송함으로써 모든 식당작법이 끝난다.
원컨대 내가 받은 아름다운 이 음식들 願我所受 香味觸
내 몸 안에 있지 말고 모공따라 빠져나가 不住我身出毛孔
법계에 두루한 중생 몸에 스며지어 遍入法界 衆生身
모든 번뇌 없애주는 신묘한 약 되오소서 同等法藥 除煩惱
-「회향게」
다함없는 법계의 중생제도에 대한 보다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보살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내가 받은 청정한 공양의 에너지가 내 몸에 머물지 말고 모공을 따라 빠져나가 들끓는 번뇌의 병을 없애주는 신묘한 약이 되어 중생의 성불에 촉진제가 되길 발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청정한 공양을 받아 소화시킨 에너지를 법계에 두루한 중생에게 회향하여, 『능엄경』에서 '자미득도선도타(自未得度先度他)'라 말하고 있듯이 실제로 그들이 성불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보살정신이 잘 묘출되어 있다. 이것은 공양을 헛되이 받지 않고 오로지 중생제도에 진력하리라는 사홍서원의 첫 구 즉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道)'를 상기시켜 줌과 동시에 우주의 모든 존재는 상호 관련되어 있다는 생명화엄의 세계를 은밀하게 담아내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템플스테이에서 체험할 수 있는 발우공양은 동참한 대중 모두가 불법을 호지하고 도업(道業)을 이룸은 말할 것도 없고, 굶주림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는 아귀중생에 이르기까지 공양을 베품으로써 생명의 존귀함을 일깨워 주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식 진행절차에 수반되는 게송들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실천덕목과 이념적 지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생명본연의 내적질서를 동체적 관계로 파악하는 게송들은 자비실천을 바탕으로 중생을 제도하려는 생명존중사상을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진단된다. 따라서 간결하고도 함축적으로 표현된 발우공양의 게송들은 자연에 대한 정복, 생태계 파괴, 환경오염 등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반성과 극복원리를 제시한 점에서 그리고 범 생명의 연대,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생명공동체를 위한 생명존중의 정신적 모색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에게 생명존중과 상생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하는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할 것이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심신치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 서용석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불교문학전공 박사학위논문>